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에게 “믿음의 도”, 즉 진리를 주셨다. 그러나 신약성경 이후 기독교 역사 이래 진리를 대항하여 끊임없이 발생하는 이단(異端, heresy)들로 말미암아 교회는 정통교리를 정립해야만 했다.
그러면 이단이란 무엇인가? 먼저 “이단성”(heretical)을 말해야 하는데, 이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왜곡시키는 성격으로서, 정확하게 신앙교리를 알고 있지 못하다면 누구든 이단성을 지닐 수 있다. 그러나 이단성이 있다고 해서 모두 이단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이단성을 가진 사람들이 파당을 지었을 때 이것이 성총회에 의해서 이단이라고 정죄되어야 이단이라고 명명하게 된다. 그리고 이단에 속한 개인을 가리켜 “이단자”(heretic)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이단에 대하여 상대적인 말은 “정통”(orthodox)이다. 정통은 성육신 하신 하나님, 즉 그리스도를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으로 믿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시대 이후 “영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라는 “헬라 사상”과 “영지주의”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하나님이 육체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교회의 지도자들조차 예수님의 인성만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강조하기 위해서 “본디오 빌라도”를 등장시켰다. 즉 예수께서는 실제로 육체의 고난을 받으신 인간이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말하는 “기독론”이다. 기독론, 즉 “예수님에 관한 교리”는 구원의 진리를 바르게 알게 하며 정통신앙을 지니게 한다. 그리고 기독론은 “삼위일체론”의 바른 이해를 요구한다.
초대교회는 삼위일체론을 근거로 이단을 판단했는데, 이들의 치열한 삼위일체논쟁은 기독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기독론은 구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초대교회가 구원론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구원에 대한 확신에 거하게 됨으로, 핍박과 고문을 받으며 희생하는 상황을 견뎌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구원의 주체이신 그리스도에 관해 알기를 원했고,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고, 그 하나님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구원론은 많은 이슈를 포함하고 있는데, 즉 성령론, 예정론, 은혜론, 교회론, 종말론 등이 그것이다.
이에 더하여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리스도 자신”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를 물으셨지 어떤 교훈이나 실천을 질문하지 않으셨다. 과연 영생은 그분의 가르침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을 믿기 때문에 그분이 행하신 것과 가르침을 의지하고 나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신자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유익 때문에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고 인간관계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내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지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것으로 인한 혜택에 관심을 가진다면 이단에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이 있게 되는 것이다.
2장 영지주의
영지주의는 “특별한 지식”(신비한 영적지식)을 가진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사상이다. 그러나 정통신앙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가현설”(docetism)을 주장하며 그리스도를 단순한 인간이나 저급한 신으로 이해한다. 신약성경은 영지주의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는데 고린도전후서, 골로새서, 디모데전후서, 요한 서신 등이다.
이런 영지주의에 대해서 저스틴 마터와 이레니우스는 귀한 작품들을 남겼는데, 이레니우스는 180-189년까지「이단들에 대하여」라는 5권으로 된 걸작을 쓴다. 이 책에는 1-2세기에 있었던 이단을 상세히 다루고 있는데, 그 이단들의 사상에 “영지주의”가 내재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영지주의 자체는 이단이 아니지만 이단성을 갖도록 하며 결국은 이단자가 되도록 하는 거짓사상이다.
4세기 경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끝나고 국가의 혜택을 받으면서 신자들은 타락해갔다. 이에 신앙을 지키고자 사막으로 들어가는 “은자”(hermit)가 생겨났고 그들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들은 지침이 되는 서적으로서 영지주의자들이 만든 작품으로 신앙을 유지했지만, 아타나시우스의 권고로 파코미우스 수도회는 문서들을 파괴했다. 1945년 파코미우스 수도사들이 거했던 장소 부근에서 영지주의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이 문서를「나그함마디 문서」라 부른다.
영지주의자들에게는 금욕주의적, 카리스마적, 철학적(사색적)경향이 있다. 영지주의 사상을 시작한 사람은 시몬 마구스라 할 수 있지만, 이 사상을 잘 정리한 사람은 바실리데스와 발렌티누스이다. 이들은 천상의 나라 “플레로마”(pleroma, 충만)에 존재하는 이온들 중에 지극히 선하신 하나님을 신약성경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맨 끝에 있는 이온 소피아가 외도해서 낳은 "조물주"(demiurge)를 구약성경의 악한 하나님인데 이 조물주가 창조한 세상은 죄악이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하신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진리와 이성”에 의해 태어난 예수를 세상에 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소개한 천상의 지식, 즉 영지를 알면 플레로마로 들어갈 수 있는데 그것이 곧 구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영지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마르키온은 구약성경의 하나님과 신약성경의 하나님을 구별하여 사도바울의 서신과 누가복음만을 성경으로 인정한다. 그리고 몬타누스는 종말론자였으며추종자들은 재림의 그날까지 열심히 죄를 짓거나 금욕생활을 하게 된다. 이외에 신학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이단은 아리안(Arian)인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면서 초대교회를 어지럽혔다.
우리는 현재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살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인간 개개인이 가진 사상을 중요시 여기는데, 뉴에이지 운동과 함께 기독교 사상에 다원주의라는 영향을 끼쳤다. 이 모든 사상의 근저에는 영지주의가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영성운동 가운데서 지나친 기도운동과 지나친 은사운동, 지나친 관상운동 뒤에는 영지주의가 내재해 있다.
3장 사도적 교부들
사도들로부터 직접 배웠던 속사도(사도적 교부)들은 건전하고 바르게 여겨지는 서신들을 기록했다. 이들 중 로마의 클레멘트가 96년경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은 가장 오래된 기독교 고전이다. 이 서신은 분열의 그릇된 점과 실천적인 면을 권면하면서 교회연합을 위해 사도적 계승의 권위를 강조한다. 이 권위는 교회의 회중들로부터 지도자들에게 위임 된 것인 동시에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권위이며, 이들을 감독들, 장로들, 집사들이라고 부른다.
또한 16장으로 구성 된 디다케(12사도들의 교리)의 내용은, 1. 삶과 죽음 2. 기도문(예식서) 3. 기강 지침서 등의 세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이 문서의 대부분의 내용은 성체에 관해 폭넓게 다루고 있는데, 주일 모임이란 함께 모여서 빵을 나누고 감사하며 죄의 고백을 하는 날로서 이것이 주님께 드리는 제사로 표현되고 있다.
이그나티우스(98-117)는 사도요한의 제자로서 폴리캅의 친구이며 안디옥의 감독이다. 로마로 압송되면서 일곱교회들에게 쓰여진 그의 서신은, 그리스도의 지상적 삶을 부인하며 율법주의로 향하려는 거짓된 교리들을 명확히 한다. 그의 기독론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마리아로부터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셨지만 태어나시지 않은 분이며 죽으셨지만 살아계신 분이다. 즉 그는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의 성례는 목회자의 관점에서 다루어지고 있으며 현재 우리가 고수하고 있는 몇 가지 중요한 교리들을 정확하게 성경적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야생동물의 이빨에 먹이가 되어 갈려서 그리스도의 순수한 빵이 되는 순교의 각오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지상과 이 세상 나라의 목적들은 자신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며 이 목적들을 이루기보다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는 것을 사모하고 있다.
폴리캅(약 167년 사망)은 이그나티우스와 함께 사도 요한의 제자로서 서머나의 감독이다. 그가 빌립보 교회에 보낸 서신에는 그리스도 중심 사상과 그리스도의 인성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는 86세에 순교했는데 그의 순교는 순교자들의 장렬한 죽음에 관한 대표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의 서신 5장에서 집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모든 자들의 종이신 주님의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자로 표현된다. 또한 젊은이는 순결과 욕망을 떨쳐버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며, 처녀들은 부끄러움 없는 순수한 양심으로 살 것을 권면하고 있다.
허마의 목자는 사도적 교부들의 서신 가운데 가장 문학적인 작품으로 불리는데, 게으른 기독교인들에게 조심스럽게 교훈하는 내용이다. 그는 회개한 신자들이 죄를 지은 경우에 있어서 5가지 비전과 12가지 계명 그리고 비유들을 다루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으며 그분을 두려워 할 것이다. 선을 행해야 하는 이유는 받은 모든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를 사랑하기를 권면하고 있는데, 이는 주님께서 모든 말에서 진실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저자는 자신의 생애가 거짓말로 점철되어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4장 변증가들
교회에 대한 핍박의 시기에 영지주의가 기독교의 진리들을 왜곡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서 기독교 진리를 변증했던 사람들을 가리켜 “변증가들”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예수님 시대와 평온한 시대 사이를 연결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저스틴 마터(약 165 사망)는 2세기의 가장 중요한 변증가이다. 그는 철학과 신앙을 결합시키고자 노력함으로, 모든 지식은 로고스로부터 나오며 이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 오셨다고 말했다.「트리포와의 대화」에서는 구약성경이 신약성경의 모형이라고 하며 구약의 진리들은 신약성경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이레니우스(약 125-약 202)는 영지주의에 대항하면서 “오직 성경만으로”의 사상으로 핍박의 시기에 성경중심의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했다. 이레니우스의 공헌은 기독론을 처음으로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의 가현설에 대하여 이레니우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우리와 함께 하셨던 인간이며, 동시에 참된 하나님이심을 강조했다.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삼위의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고 인간이시라는 설명을 했다. 그는 “사도들의 전통”을 이야기했는데, 이것이 진리와는 비교되지 않는 것이지만 성경을 모두 접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전통이 중요하다고 권면했다. 또한 「이단들에 대하여」중 “그리스도의 미래 심판”에서는 심판의 목적이 신자들과 불신자들을 구분하는 것에 있다고 했다.
클레멘트(약 215 사망)는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다. 그는「교사」에서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최초로 학문적으로 정리를 했다. 그는 교회의 어려움과 사회의 혼란 속에서 요구되는 것은 도덕적 삶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진리를 왜곡하기 쉽다는 것이다. 도덕성을 강조하면서 교리를 동시에 강조하지 않으면 자유주의, 즉 성경을 무시하는 그릇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오리겐(약 185-약 254)은 클레멘트의 제자로서 경건하게 하나님을 섬기려고 거세까지 감행하며 도덕적 삶을 추구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을 강조하던 그는 삼위일체의 개념을 잘못 설명했고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다가 자연스럽게 신성을 격하시켰다. 그는 성부와 성자를 종속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여 아리안 사상의 근거를 제공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영혼선재설을 강조하는 실수를 범했다.
터툴리안(약 160-약 230)은 키프리안의 스승으로서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함으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동등하신 하나님이며 한 분이심을 강하게 설명했다. 그도 오리겐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삶을 열망했는데 말년에 몬타누스를 따르게 되었다. 이는 당시 교회가 타락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데시우스 황제의 교회 박해 후 노바티안이 배교자들의 교회 복귀를 허용하지 않았을 때, 키프리안(약 200-258)은 교회론을 강조하여 그들이 세례를 받고 교회에 들어오도록 하는 좋은 전통을 남겼다. 그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감독이 없는 곳에는 교회가 없다”라는 주장을 했다. 여기서 교회란 세상적 교회당이나 교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또는 전체교회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