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9-06-21 00:12
잊지 말아야 할 예수의 큰 가르침 10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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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149  

[편집자 주] 조우 맥키버 목사는 오늘날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표방하면서도 근본적으로 자신들만을 위해 존재하며 교회 문밖의 세상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지도 않고 그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에게도 공감하지 않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고는 그 현실을 변화시킬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6:46).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13:17).

제목을 이렇게 잡은 것에 대해 먼저 사과한다. 이런 일들을 바로 잡고 있는 신실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많은 훌륭한 교회들도 있으니까. 다른 뜻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수천 개의 교회들이 근본적으로 자신들만을 위해 존재하며 교회 문밖의 세상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지도 않고 그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에게도 공감하지 않고 있는 현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 말이 당신이나 당신의 교인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면, 감사하라. 만일 적용된다면, 상황을 뒤집는 일에 적극 뛰어들어라. 결론부에서도 다시 강조할 것이다.

1. 우리는 두 번째 계명이 명령인 것을 쉽게 잊어버린다.

우리는 기독교가 "나와 주님"과의 사적인 관계이기를 원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식의 게임은 거부하신다. 그분은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22:39)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명령이다. 선택지이거나 의견이거나 희망사항이거나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받을만한 생각이거나 하나의 훌륭한 발상인 것이 아니다. 이웃을 힘써 사랑하는 것은 예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세상에 펼치기를 기대하는 증거 중에서 핵심 요소에 해당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순종하지 않는가? 우리는 그것이 불편하고 어렵고 힘들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할 때, 즉, 그들이 그것을 알게 되는 지점까지 그들을 돌보게 될 때, 그들은 우리를 필요로 하고 그것은 우리의 일정에 방해를 초래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사랑스런 사람들을 사랑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을 돌보며, 요구하는 것이 적거나 거의 없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일이 된다.

2. 우리는 마태복음25장에서 굶주린 자를 먹이며 헐벗은 자를 입히고 병든 자를 문안하라는 그분의 명령과 관련하여 두 가지 사항을 자주 잊는다.

첫째, 우리는 이것이 명령이며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가 더 중요한 일을 하는 동안에도 이 명령을 실행할 시간을 찾기를 바라는 것임을 잊어버린다. 예수께서는 솔직하게 당신의 백성들이 이 일을 하기를 기대하신다. 나는 많은 교회들이 이것을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버려진 자들, 목소리 없는 자들, 잊혀진 자들을 위한 사역에 교인들을 참여시키고 있다는 보도를 보며 기쁨을 느낀다.

둘째, 우리가 "나의 형제들 가운데 가장 작은 자에게" 이런 일들을 할 때, 그분이 그것을 당신에게 한 것으로 받으신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하게 행해야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된 사람들에게는 박하게 굴 때가 많다. 바울 사도는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6:10)라고 말했다.

*덧붙이는 말: 성경 어디에서고 교회가 이 세상의 모든 가난한 자들을 돌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교회가 그 일을 하게 되면 정부가 복지에 관여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이제 성가신 일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있는 몇 명 되지도 않는 제자들에게 전 세계로 나가서 수십억 명의 물리적 필요를 충족시키라고 말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면 웃음이 나온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것에 대해 감사하자.)

3.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감정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행동과 관련되어 있음을 잊어버린다.

주님께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누가복음6장27절에서 말씀하셨을 때 그것이 행동을 요구하는 것임을 즉시 밝히셨다. 즉, 선대하고, 축복하고, 기도하고,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13-16장의 다락방 강화를 통해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물론, 말이 중요하며 감정도 중요하다. 그러나 행동, 즉, 우리가 하는 일보다 더 큰 위력을 발생시키는 것은 없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7:24).

세상사람 누구라도 두려움, 분노, 사랑, 증오 등 자신의 감정을 의지에 따라 발동하거나 완화할 수 있을 정도까지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만일 사랑이 단순히 감정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하나님이나 이웃이나 가족이나 제자들이나 원수들을 사랑한다고 할 때 주님은 줄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분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훨씬 더 통제가능하고 실행가능한 것들이다. 우리는 줄 수 있고, 기도할 수 있고 축복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지는 않은가? 우리가 그런 일에 대해 어떻게 느끼든지간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사랑의 일을 하는 것이다.

4. 우리는 박해받을 것을 예상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자주 잊어버린다.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16:2).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역을 베푼 사람들에 의해서 사랑 받거나 감사의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다가 결국 그들의 호전적인 태도 때문에 허점이 찔리는 경우가 잦다. 우리는 "왜 그 사람들이 우리를 이런 식으로 대할까? 나는 그들을 돕고 축복한 일밖에 없는데..."라고 궁금해한다.                                                             "이럴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대답: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당신은 잘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마태복음 10장16-22절, 그리고 그와 유사한 구절에서 예수께서 우리가 "그분의 이름 때문에"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던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교회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고서 자신을 이 일에 불렀지만 제대로 봉사할 자리를 찾아주지 못한 것 같은 주님에 대해 화를 내면서 환멸감을 표시하는 사역자들을 우연히 만날 기회가 있었다. 어떤 이들은 다시는 교회에 가지 않는다. 여러분은 이 사람들이 성경을 읽기라도 하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들은 성경에서 우리가 교회 밖에서나 안에서 어려움을 당할 것을 예상하라고 경고하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행20:28 참고)?

5. 우리는 주님이 우리더러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자주 잊는다.

이 점은 앞에서 지적한 사항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사람들이 우리를 박해할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우리는 그것들을 무시해버릴 치외법권적 자격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분노를 키우거나 원한을 품거나 앙심을 풀지 않을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해야만 한다.

기독교인이라 공언하는 사람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몇 분간만 읽어보기라도 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 주님의 백성이라는 사람이 다른 종교나 세속적인 향락을 좇는 사람들이나 제멋대로 하는 정치인들에 대해 적대적인 발언을 쏟아낸 것에 대해 기가 질려버릴 것이다.

6.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더러 자격 없는 자들과 바람직하지 못한 자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라고 부탁하셨다는 사실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눅14:13-14).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분께 특별한 존재들이다. 잠언에서는 "가난한 자에게 주는 자는 여호와에게 빌려주는 자라"(잠19:17)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예수께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그런 사람들이 우리에게 더 중요해진다. (혹시 토니 캠폴로의 "천국은 잔치다"라는 글을 읽지 않았다면 구해서 탐독해 보시라. 토니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각목으로 우리의 미간을 후려칠 것이다.)

7. 우리는 "예수께서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쉽사리 잊어버린다.

우리는 그분께서 용서하신다는 것을 알고 그것에 대해 찬양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이 죄인을 구하기 위해 오셨고(마1:21, 눅2:11 참조) 그것이 우리의 일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뒤로 밀쳐버렸다.

배고픈 자들을 먹이고 헐벗은 자들을 입히는 등의 일에 헌신하는 우리들은 가끔 우리가 우리의 임무를 완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근처까지 가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빵을 주되 그들의 진정한 필요를 만족시키고 그들의 갈망을 충족시키며 그들의 가장 큰 상처를 치료해주실 수 있는 구세주에 대해 침묵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실족시키는 것이다.

8. 우리는 예수와 함께 하면 변하는 것이 기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누가복음5장36-39절은 제자들을 위한 주님의 새로운 모범을 제시한다: 강하고, 유연하며, 신실하고 성장할 것 등.

하지만, 우리는 현상 유지를 좋아한다. 물리학자는 그것을 "관성, 즉, 움직이고 있건 가만히 있건, 몸이 어느 순간 하고 있는 동작을 계속하고자 하는 경향이라 일컫는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와 이런 놀이를 하지는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를 편안함으로부터 끊임없이 불러내시고 우리가 관습적 태도를 벗어나 새롭게 보고 행동하고 성취하도록 하신다. 그래서 어느 누구든 끊임없이 변하며 적응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오랫동안 따를 수가 없다.

9. 우리는 우리의 목표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님을 자주 잊는다.

목표는 주님께 대한 순종이다. 노예처럼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성실한 자녀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 둘 사이의 세미한 선을 놓치고 산다.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3:6). 이 말씀의 증거를 확인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율법을 강조하는 교회에 들러서 몇 주간만 다녀보라.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마23:23)를 드리기 위해 "더 중요한 문제들을 소홀히 하는" 태도를 목격하고는 상심하게 될 것이다.

최근에 나는 상당한 규모의 아미쉬 공동체 근처에 위치한 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그 교회 목사님이 이웃 공동체의 재미난 생활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것을 기억하고 있다. 한 남성이 자신의 아들이 차를 샀다는 이유로 의절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사람은 자동차와 운전수를 렌트해서 내쉬빌로 갔고 거기서 비행기를 타고 전 세계로 돌아다녔다. 하나님의 율법을 이웃에 대한 족쇄로 왜곡시키는 율법주의자들에게 우리 주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2:27)라고 말씀하셨다.

이 땅의 모든 교회에는 항상 이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교인이나 지도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과감히 지적하고 싶다.

10. 우리는 모든 말씀을 읽고서는 한 두 구절을 맥락에서 떼내어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자주 잊는다.

"여기서 한 구절, 저기서 한 구절." 나는 오늘 여러분들 앞에 서서 고백한다. 나도 내가 아는 다른 사람들처럼 이런 짓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구절들을 참으로 좋아하지 않는가? 자동차의 범퍼 스티커로나 트위터에 올릴 글귀로서 안성맞춤일 때가 참 많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예레미아29장11절)라는 말씀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며 좋아하는가? 하지만 그 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그 말씀이 누구에게 주어진 것인지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다른 사례가 여기 또 있다. 누가복음9장3절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라고 말씀하신다. 분명히 그렇지요? 하지만, 아니다.

얼마 전에 한 저명한 크리스천칼럼니스트가 누가복음9장3절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역자들에게 가난을 기대하신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하지만 주님은 누가복음22장35-36절에서 그 명령을 뒤집어버리신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이것은 당신이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지 않는다면 흔하게 저지를 수 있는 실수에 해당한다. 그분의 말씀은 다시 한 번 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이사야55:8)는 것을 증명한다.

우리는 기독교가 쉽고 구미에 맞으며, 편안하고 부담 없으며, 즉각적으로 보상이 주어지고, 외부인들이 빠른 시일 내에 우리처럼 변하지 않을 경우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종교이기를 기대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당신은 이 글을 읽고서 당신의 교회가 주님의 가르침을 잊어버리고는 근본적으로 자신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당신 자신이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원이라고 생각하라.

2) 그러나 당신은 동료 교인들에게 절대로 화를 내서는 안 되며 그들의 태만을 빌미로 그들을 괴롭게 해서도 안 된다.

3) 대신에 당신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즉, 사랑을 표현하는 행위)을 표시하라.

4) 그러면, 약 4개월 정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사랑을 보여주고서는 교회의 몇몇 친구들에게 당신이 염려하고 있는 문젯거리를 말해보라. 당신의 주일학교 친구나 동료 집사들에게 그런 염려들의 증거들을 제시해보라. 알겠는가? "당신의 증거"가 필요하다.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말하지 마라. (대단한 유혹이지만 꾹 참아라.) 다만, 주님께서 당신에게 하라고 한 일들과 당신이 하기로 결정한 일들에 대해서만 말하라.

5) 그런 뒤, 주님을 기다려라.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서 당신의 지도자들과 교인들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말씀에 순종하라.

6) 참을성 있게 기다리라. 교인 수의 감소는 바로 지난주에 시작된 것이 아니며 교회 안의 썩은 나무는 밤새 생긴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런 상황을 개선하는 것은 교인 한 명이 마음을 고쳐먹는다고 자동적으로 진행되는 일이 아니다.

주님은 당신이 그분을 섬기며 예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에게 축복할 때 당신에게 복을 내리고 큰 기쁨을 주신다. 나는 당신에게 이 주제와 관련하여 가장 강력하지만 간과되어 온 한 말씀을 알리고 싶다: "네 아버지(요시야 왕)가 먹거나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조우 맥키버(Joe McKe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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