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8-22 21:18
[1]로마서를 통해 본 바울의 율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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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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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를 통해 본 바울의 율법관


1. 로마서의 배경

1) 로마서의 성격

전통적으로 로마서는 바울의 가장 체계있는 편지로 그의 사상을 총체적으로 종합한 가장 조직적인 서신으로 취급되어 왔다. 로마서의 복음에 대한 아주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해설 때문에 일찌기 멜랑톤은 로마서를 '기독교 교리의 강요'라고 명명하였으며, 또한 다른 개혁자들도 그것을 기독교 신앙의 조직적 교리 체계로 취급하여 왔다. 뿐만 아니라 로마서에 나타나는 구원교리에 대한 충만하고도 체계적인 강해는 현대의 몇몇 학자들로 하여금 바울이 그 서신을 기록한 의도 속에는 교리문답적 목적이 있다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로마서를 어떤 특정한 역사적 동기와는 무관한 하나의 '신학적 논문'으로나 단순히 바울의 사상을 요약한 '교리 개요서' 정도로만 보는 것은 서신이 갖고 있는 역사적 상황의 특수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비록 바울이 로마서를 자신과 아무런 사도적 연관을 갖지 않았던 교회에 썼고, 서신의 내용도 지역 혹은 상황적 특성의 문제들에 의해 방해받음이 없이(혹은 거의 없이) 작성되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로마서가 쓰여지게 된 역사적 상황과 저작 목적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로마서도 특수한 상황 속에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 쓰여진 서신이기 때문이다. 

2) 저작 목적

로마서가 지니고 있는 문학적 구조의 특수성 때문에 당시의 상황과 비교해서 그것의 내용과 목적을 파악하는 것을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바울이 로마에 이 서신을 보냈고, 왜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서신을 썼는가?하는 문제는 이 서신을 쓰게 된 집필 동기와 저작 목적을 살펴봄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바울은 선교사역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복음전파를 위한 전략적 중심지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로마제국의 동반구 선교를 위해서는 안디옥 교회를 자신의 후원교회로 삼는 가운데 자신의 선교사역을 수행해 나갔다. 로마 제국의 동반구 선교를 어느 정도 완성했다고 느끼게 된(롬15:19) 바울은 이제 자신의 선교지를 로마 제국의 서반구로 옮기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롬15:23-24). 그는 오랫동안 로마교회를 방문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기도했으나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그렇게 할 수 없었다(롬1:9-13;15:22). 그런데 마침내 그는 로마로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선교지를 옮겨감에 있어 그동안 전략의 중심지로 삼았던 안디옥 교회는 너무 거리가 멀다고 느꼈다. 따라서 바울은 당시 세계적인 도시였던 로마를 서반구 선교의 중심지로 삼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자신이 세우지 않은 로마교회에 이 서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로마교회에 자신과 자신의 복음을 잘 소개하여 로마교회를 자기 서방 선교의 후원 교회로 얻으려 했다(롬15:24,28). 이것이 로마서를 기록한 직접적인 목적이다(롬1:7-15;15:14- 33).
그러나 이와 같은 한가지 목적만으로는 로마서의 모든 특징들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면 다른 목적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바울이 이방 교회들에서 모금한 구제 헌금을 가지고 이방교회의 대표단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하려는 시점에 있었다(롬15:25;행20)는 사실은 로마서의 저작 목적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방 교회들이 거둬들인 구제 헌금이 예루살렘 교회들에 의해 받아들여질 지의 여부는 단순한 경제적 지원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바울의 사도적 선교의 성취로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교회의 일치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바울의 복음에 대한 예루살렘 사도들의 인정(갈2:1-10)과 선교지역의 구분에 대한 사도적 합의가 있었지만(행15) 갈라디아, 고린도 등지에서의 복음전파 사역 기간 동안 바울은 예루살렘의 권위자들에게 호소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 말마암아 심각한 도전을 받아 왔다. 비록 사도들의 공의회에서 바울의 복음이 인정받았지만, 율법의 행위에 의한 구원교리가 아직도 여전히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여타 여러 지역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바울은 곧 이방 교회들이 모금한 구제 헌금과 그 대표단을 데리고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될 때,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그의 복음과 이 복음으로 얻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야고보의 지도 아래 있는 엄격한 예루살렘 교회에 의해 다시금 용납되어질 것인지에 대해 불안함이 있었다(롬15:30-32). 따라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닥칠지도 모르는 어려운 상황에 앞서 자신의 복음을 로마 교회에 소개함으로써 예루살렘 등지에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의 대결에서 로마 교회의 지지를 확보하는 한편, 롬9-11장에서 이스라엘의 문제를 자세히 언급하여 최우선적으로 이스라엘을 위해 계획되었던 복음이 왜 먼저 이방인에게로 갔다가 그 다음에 이스라엘에게로 돌아와야 하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유대인들의 이해를 도모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바울은 사도들의 공의회의 경우에서처럼, 다시금 교회의 연합과 복음의 진리에 대한 새로운 협의가 도출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3) 로마서의 구조

로마서의 진정성 문제는 심각하게 의문시 되지 않았지만, 로마서의 통일성 문제는 많은 질문들을 야기시켜 왔다. 로마서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는 서신의 전체 구조에서 주요 부분만을 따로 떼어내서 연구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학자들은 1:1-15절과 15:14-16:25을 떼어낸 후, 남은 본문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고, 다른 학자들은 1-8장만 중심부분으로 보면서 9-11장은 전혀 별개의 논문이나 부록 정도로 간주하기도 한다. 또한 16장은 본래 로마서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부분으로 오히려 에베소에 보내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아직 로마서 전체의 구조 속에서 각 부분들을 별개의 것들로 취급할 만한 확실한 증거들이 제시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로마서 전체를 본래부터 통일된 하나의 서신으로 볼 때만 이 서신의 완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면 로마서의 전체 구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로마서의 중심되는 주제는 1:16-17절과 3:21-26이 뚜렷이 밝혀주고 있는 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죄인들을 은혜로 의롭게하신다는 이신칭의의 복음을 재천명하는 것이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자신이 일찌기 다메섹 사건을 통하여 깨달았고, 자신의 선교사역을 통해 열정적으로 전파했던 이신칭의의 주제를 여전히 율법의 행위를 통한 칭의를 주장하는 자기 당대의 유대교리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해명하고 있다. 바울에게 이것은 그 어떤 문제 보다도 중요한 신학적인 문제였고, 자신의 선교사역 기간 중에도 그를 반대하는 유대주의자들 때문에 계속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어져 왔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이 한번도 가보지 않은 로마 교회에 이 문제를 로마서의 핵심적인 주제로 설정하였는데, 그것은 로마교회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모여 이루어진 혼합교회로서 어느 정도의 불일치 현상과 바울의 적대자들에 의한 혼란의 징조가 보였기 때문이다.
1:1-1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의에 근거해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민족적 차별없이 대한다는 주제를 제시한다. 1:18-3:20절에서는 모든 이방인들의 불경건과 사악함과 유대인들의 위선적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먼저 선언한다. 그리하여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 다 같이 하나님 앞에서 율법이나 혹은 그들 자신의 도덕적 행위를 통해서 결단코 의로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힌다(3:9). 3:21 -2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이제는 율법과는 아무 관계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밝히 드러났음을 선포한 후, 27-28절에서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확신하노라"라고 하면서 바울 자신의 종합적인 신학적 결론을 제기한다. 
4:1-5:21에서 바울은 그 자신의 중심되는 주제에 대한 구원의 역사적 배경과 기초로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이야기와(4장)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이신 예수와 전 인류와의 대표론적이며 연대론적인 관계를 밝힌다. 여기서도 바울은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며(4:15), 범죄를 더하게 한다는(5:20)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역사 가운데서 율법이 가지는 기능을 유대인들의 율법 개념과 날카롭게 대조시킨다. 
6:1-7:6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의 필수성 함께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자유는 바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죄와 율법의 권세로부터의 자유임을 밝힌다. 7:7-25에서 바울은 그동안 본격적인 논의를 유보해 왔던 율법에 관한 토의를 비로서 본격적으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그는 죄와 율법과 인간자아 사이의 삼중적인 상관관계를 일종의 자서전적 문체를 동원하여 심도깊게 다룬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한편으로 죄와 구별되는 율법에 대한 변증을 제시하고, 다른 한편으로 율법과 죄와 자아와의 상관관계를 강조함으로써 율법을 통한 칭의와 성화를 주장하는 유대적 교리의 절대적 불가능성을 논증한다. 그런 다음 8장에 이르러 바울은 율법에 의한 유대적 성화의 불가능성 및 실패와 대조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의 가능성과 실제성을 해명한다. 
9:1-11:26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역사 속에에 차지하는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의 위치를 하나님의 신실성에 근거하여 설명한다. 여기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문제를 깊이있게 다루면서, 가장 먼저 이스라엘을 위해 계획되었던 복음이 왜 이방인에게로 갔다가 그 다음에 이스라엘에게로 돌아와야 하는지를 밝힌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인데, 이것은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였다는 사실을 밝힌다. 12:1-15:13에서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순종을 여러 가지로 밝힌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인 15:14-16:27에서는 자신의 로마 방문 계획과 문안 인사를 통해 결론을 맺고 있다.

2. 로마서 7장에 있어서의 율법

갈라디아서는 논쟁적 상황에서 분명한 결정이 요청되는 위기 상황에 보내진 것이다. 거기서 바울은 아브라함-약속-토라-그리스도를 연속성으로 강조하려는 유대주의자들에 맞서서, 토라와 그리스도를 반대의 원리로 대립시키면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은 곧 토라와 할례를 부정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로마서에서 바울은 유대주의화되어가는 변절자들과 맞서지 않고, 하나님의 구속 경륜 속에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이 차지하는 위치와 토라의 역할을 논하기 때문에 토라에 대한 그의 입장은 갈라디아서에서 보다 균형잡힌 모습을 보인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토라를 복음에 재도입했던 그리스도인들에 반대하는 공격을 하고 있는 반면, 로마서에서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행위만이 그들을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보는데 실패한 유대인들과 논쟁한다. 이와같이 갈라디아서는 대립의 논쟁을 벌이는 전투적 서신이기에 체계적인 질서를 가져오지 않는다. 반면에 로마서는 설득의 논쟁을 벌이고 있기에 균형잡히고 잘 정리된 토론을 제공해 준다. 

1) 로마서 7:1-6의 주석적 고찰

6장에서 바울은 죄로부터의 자유를 예증하기 위하여 노예와 그 주인과의 관계를 들었다. 7:1-6까지에서 그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예증하기 위하여 아내와 그 남편의 관계를 들고 있다. 여기서 그는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롭다는 사실이 얼마나 참되며 어떻게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율법의 정죄로부터 벗어났기에, 율법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더 이상 주권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율법의 권위는 그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만 지속될 수 있다는 법리적 원리에 호소하면서 서두를 시작한다(1절). (알지 못합니까)는 바울이 6:15-23절에서 이미 언급했던 내용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에서 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로마의 시민들이 복종하였던 '단순한 법적 질서'를 의미할 수도 있고, '유대인의 율법'을 의미할 수도 있다. 바울이 계속해서( 이 사용됨) 특별한 율법 조항을 언급한다는 사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구약성서의 율법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었음을 생각해 볼 때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성이 있는 것 같다.
2-3절에서 바울은 하나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전통적으로 이 구절들에서 남편( )은 율법을 상징하고 여자( )는 그리스도와 새롭게 연합하기 위하여 율법을 제거함으로써 해방된 그리스도인을 상징하는 일종의 알레고리로 해석되어 왔는데, 바울이 4절에서 율법의 죽음을 이야기 하지 않고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견해는 부정된다. 이것은 1절을 해석하기 위해 마련된 일종의 예화이다. 한번 결혼한 여인은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남편에게 결속되지만, 남편이 죽고난 후에는 그 남편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율법은 그 사람이 살아있을 동안에만 유효한 것이고, 죽고 난 다음에는 아무런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 그런데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율법의 정죄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그들은 더 이상 율법의 속박 아래 있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 예화의 요점은 한마디로 죽음은 신자를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죽음은 죄의 통치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었는데(6:9-10,18), 여기서는 율법의 통치로부터의 해방으로 확대되고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1-3절 전체로부터 내려진 4절의 결론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므로)는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는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죄와 죽음을 이기신(롬6:7,9) 예수 그리스도 몸을 가리킨다. 로마의 교인들도 마찬가지로 '죄의 몸'(롬6:6)과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너희도 죽임을 당하였다( )는 말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말이다. 여기서 바울은 (참조,6:2)를 사용하지 않고 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십자가에서 당하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들이 죽임을 당한 목적은 율법의 정죄로부터 벗어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되어 하나님을 위해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이다. 에서 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와 동격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더욱 분명하게 언급하기 위해서 첨가된 것이다. 바울이 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임신의 관념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이러한 개념을 통해 많은 아이들(즉 새로운 그리스도 신자들)을 얻으려는 것이 바울의 의도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로 뒤에 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에게 자손을 낳아준다는 생각은 우스꽝스럽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 사용된 이라는 단어는 5절에 나오는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것( )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갈5:22-23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 등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5-6절은 4절을 해명하는 것으로 는 5-6절의 4절에 대한 관계를 지시해 준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 죄의 정욕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강화되고 그 결과로 우리는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된다. (죄의 정욕이)에서 는 어떤 정서나 열정을 가리키는데,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나쁜 열정, 즉 정욕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참조,갈5:24). 은 '자격'을 의미하는 속격으로 보다는 '목적'을 의미하는 속격(죄로 인도하는)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한데, 어떤 경우든 이 복수형의 의미는 죄의 구체적인 행동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은 율법에 의해( ) 자극되고 강화된다. 죄의 정욕이 율법으로 자극되고 강화된 결과로 우리는 사망을 위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
그러나 이제는( )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음으로써( )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여기서 얽매였던 것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는 의 선행사로서 나 가 율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의 선행사로서 제시된 나 가 중성임으로 육 또는 '옛 사람'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 만약 얽매였던 것이 율법을 가리킨다면 그것은 주절에서처럼 한정된 의미로서의 율법, 즉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 내지는 '율법의 정죄'를 뜻하게 된다. 우리는 율법의 정죄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영의 새로운 것으로( ) 섬겨야 하고 의문의 묵은 것으로( )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바울은 와 를 대비시키고(참조,6:4,6;고후3:6,14;엡4:22-24;골3:9) 를 에 대비시키고 있다(2:29;고후3:6). 바울은 그 당시의 새로움을 성령의 은사로, 낡음을 단순한 문자에 의존한 결과로 규정하고자 한다. 여기서 바울은 율법을 본질적으로 성령에 대치시키고 있지 않음이 분명한데, 14절에서 그가 율법을 '영적'이라고 확언하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문자를 단순히 '율법'의 동의어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문자'는 오히려 율법주의자가 율법에 대해 오해와 오용의 결과로서 고집하는 것을 뜻할 수 있다. 율법이 영적이라 할지라도 성령과 분리된 율법의 문자는 그 참된 특성상 율법이 아니라 본질에서 벗어난 율법이다. 바로 이러한 율법은 참된 율법의 수립을 의미하는 존재인 성령에 정반대되는 것이다(8:1이하). 결국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 안에 있는 삶은 새 시대에 속하는 새로운 삶인 반면에 율법의 '문자'에 따르는 삶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덧없이 사라지는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다. 

특주 : 로마서 7:7-25절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로마서 7:7-25절에 대한 해석은 최근 신약 연구에 있어서 가장 열띤 이슈 중에 하나이다. 전통적으로 이 단락은 크리스챤으로 개종한 바울의 현재 상황을 포함하여 모든 중생된 크리스챤의 종말론적 긴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몇몇 학자들에 의해 이 단락은 중생된 크리스챤의 관점에서 중생되기 이전의 자신의 모습을 포함한 모든 비크리스챤의 모습을 기독교적 전망에서 묘사한 것이라는 설득력있는 주장이 제기 되어 왔다. 양자의 의견 가운데 어느 주장을 따를 것인가?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어느 견해를 따르냐에 따라 이 단락의 해석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양자의 견해들 가운데 어느 주장이 더 타당성이 있는 지 살펴보겠다. 
먼저, 전통적인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의 주장 내용과 근거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a) 문맥의 고려. 로마서 7장은 이미 구원얻은 크리스챤을 묘사하는 문맥(5-8장)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롬 7:14-25은 크리스챤의 중생 이후의 경험을 묘사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 구절을 중생 이전의 경험으로 해석할 경우에 이 단락은 중심 논의에서 빗나간 것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단락이 5-8장과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이해되려면 정상적인 신자들의 현재적 갈등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b) 시제의 변화 (롬7:7-13은 과거 시제인데 롬7:14-25은 현재 시제이다). 이들은 크리스챤이 죄로부터 해방되었으면서도 여전히 죄에 매여 있는 역설적인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하여, 바울은 7장에서 두 시대의 개념-새 시대와 옛 시대-을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바울이 7:5절에서와 같이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이라고 할 때는 그가 옛 시대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 때의 삶은 과거 시제로 사용된 7:7-13절에서 잘 묘사되고 있는데, 우리가 아직도 율법과 죄의 세력 아래 있는 삶을 살고 있을 때를 말한다. 반면에 바울이 7:6절에서와 같이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라고 선언할 때는 그가 새 시대 즉, 중생 이후의 상태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새 시대의 삶은 현재 시제로 사용된 7:14-25절에서 잘 묘사되고 있는데, 원함과 행함 사이에서 끝없이 고민하는 크리스챤의 현재적 모습을 잘 보여 준다. 따라서 롬7:7-25절은 '이미'(새 시대)와 '아직'(옛 시대) 사이에 있는 크리스챤의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c) 단락의 내용. 이 단락은 "나"( )가 죄에 대해 번민하는 모습과 "나"의 마음과 속 사람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중생 이전의 비크리스챤들이 경험할 수 없는 일이다. 바울은 중생 전 바리새적인 자신의 삶을 묘사할 때, 죄에 대한 번민의 삶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없다. 오히려 갈1:14, 빌3:4-6절에 나타나는 바울의 삶은 도덕적 갈등과 좌절을 의식한 삶이기는 커녕 도리어 율법의 완전한 성취를 통한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는 뽐내는 삶이었다. 따라서 이 단락은 죄에 대한 번민과 탄식을 모르는 비크리스챤의 모습이 아니라 죄에 대한 깊은 성찰로 고뇌하는 크리스챤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22,25절에 나타나는 '속 사람'( ), '마음'( )이라는 용어를 통해서도 입증되는데, 여기서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속 사람'과 '마음'은 모두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한다. 그런데 비크리스챤은 롬8:7-8절처럼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할 수 없기에 이 단락은 크리스챤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바울은 이 단어들을 모두 신자들에게 적용되고 있다(엡3:16,고후4:16). 그러면 새로운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의 주장 내용과 근거는 무엇인가? a) 문맥의 고려. 롬7:7-25은 전후 문맥을 고려할 때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이 단락은 바울의 사상 흐름 속에서 중심 논의를 빗나간 논의의 이탈이 아니다. 오히려 이 단락은 8장에서 다루게 될 성령에 의한 승리의 삶을 준비하면서 죄와 율법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비참한 인간의 보편적 상황을 그려주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종종 자신의 요점을 강조하기 위해 소위 '부정을 통한 논증방식'을 사용한다. 이것은 로마서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가지 예를 들어 보면, 바울은 로마서의 주제인 이신칭의의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3:21-31) 유대인이나 헬라인을 포함해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보편적 진노 아래 놓여 있음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1:18-3:2). 따라서 이 단락은 8장에서 성령의 불가피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죄와 율법에 갖혀 있음을 대조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b) 시제의 변화. 7:7-13절에서 바울은 죄와 율법 아래 고통하는 보편적 인류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는 이 내용을 보다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하여 7:14-25에서 현재 시제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두 단락 사이에는 아무런 내적 연관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앞 단락의 논의를 다르게 발전시키기 위하여 시제의 변화를 가져 온 것인데, 이것은 14절이 "우리가...알거니와"( )로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c) 단락의 내용. 롬6:14절에서 이미 바울은 크리스챤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산다고 선언했는데, 또다시 크리스챤이 율법에 대해 그렇게 지속적인 절망과 좌절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바울은 그 어디에서도 롬 7장에서 그려지는 것과 같은 죄의식을 그의 생애 동안 경험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중생한 후 바울의 모습은 항상 도덕적 성실성에 대해 자신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고전4:4). d) 8장과의 비교. 중생한 크리스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8장과 비교해 볼 때, 이 단락은 중생 이전의 비크리스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 진다. 8장에서는 '그리스도'라는 칭호와 '성령'이라는 단어가 자주 언급되는데, 7:7-25절에서는 그리스도와 성령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여기서 "나"( )는 죄의 죽이는 권세 아래 사로잡힌 죄의 종이다. 그러한 '나'의 마음과 육체의 싸움에서 승리는 항상 육체와 죄의 것이며, 자신은 아무리 행하기를 원하지만 육체의 세력을 깨뜨리는데는 전적으로 무능력함을 발견한다. 따라서 이 단락은 바울 서신의 다른 부분에서 죄(롬6:6-11,8:22이하)와 율법(롬7:4-6,8:20,갈5:18)에서 크리스챤의 해방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있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음이 분명하다. 
양자의 견해들에 대한 간략한 비교 속에서 우리는 후자의 견해가 좀 더 설득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이 단락에서 기독교인의 정상적인 삶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아담적(보편적) 인간의 절망적 상황을 기독교적 전망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단락은 크리스챤이 죄에 빠지고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부정적 가능성'으로서 현재적 크리스챤의 삶에 대해 어느정도 함축들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크리스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지만, '아직'은 현세상에서 옛사람의 실존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원역사적이며 종말론적 전망에서 볼 때, '새시대'와 '옛시대'의 긴장 가운데 살아가는 크리스챤인 "나"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2) 로마서 7:7-13의 주석적 고찰

여기서 바울은 주로 과거시제를 사용하면서 그 앞선 문맥의 구절에서 제기되어진 율법과 죄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 답하면서(6:1,15) 율법에 대한 그 자신의 변증을 펼친다. 바울은 율법의 참된 기능을 설명함에 있어 자신이 이미 율법에 관해 잠깐 언급했던 내용에 비추어서(3:19;3:20하반절;4:15;5:13;5:20)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한다. 그는 율법이 비록 죄와 동일시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율법이 죄와 나란히 병행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7-11절에서 바울은 죄가 무엇인지 규명하고 죄의 정체를 밝힘으로써 율법이 죄와 동일시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런 다음 12-13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거룩한 규범으로서의 율법의 참된 기능을 설명하는데, 이것은 사실상 그가 이미 3:19-20절, 4:15절, 5:13 ,20절에서 말한 것을 그대로 정확하게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바울이 이전에 말했던 많은 구절들은(특히5:20;6:14) 율법이 실제로 악이며 어떤 면에서는 죄와 동일시 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바울은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율법이 죄냐)는 질문을 제기한다. 바울의 대답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의 기능은 무엇인가? 바울에 의하면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3:20). (나는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죄를 몰랐다)라는 문구는 '율법을 통하지 않는 죄의 경험은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고, '율법이 없을 때의 죄의 경험은 율법이 있을 때의 죄의 경험과 비교해 볼 때 죄의 경험으로 거의 중요시되지 않는다'는 의미도 아니다. 이 문구의 의미는 '인간이 실제로 율법 없이도 죄를 짓지만 율법 없이는 죄의 본질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탐심을 몰랐을 것이다). (탐내지 말라)는 출20:17;신5:21의 십계명에 대한 인용이다. 따라서 이 문구는 사실상 '사람들이 십계명을 몰랐을 때도 탐심을 경험하지마는 그들이 십계명에 비추어 볼 때에만 그 탐심의 본질을 인식하게 된다'는 의미를 갖는다. 유대교적 전통에서 탐욕( )은 율법이 가져오는 근본적인 죄로 이해 되어 왔다. 마카비 4서 2장 6절에는 "율법이 우리에게 탐욕을 품지 말라고 말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필로의 '십계명에 대하여(de decalogo)' 142. 150. 173에서는 탐욕을 모든 죄의 시초라고 기술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탐욕을 품다'( )는 동사는 '심리적 현상'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에 반하여 자신을 주장하는 정욕' 내지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간의 자기 중심성과 이기심의 표현으로서의 모든 무절제한 욕망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8절). (기회를 얻다)에서 는 '출발점', '기원', '구실', '교두보' 등의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는 단순히 율법을 의미하지 않고 특정한 계명(탐내지 말라)을 의미한다. 그리고 는 보다는 와 연결시키는 것이 더 낫다. 따라서 이 구절의 의미는 ' (탐내지 말라)는 계명 속에서 죄는 그 기회를 얻어 인간의 삶 속에 그 지반을 굳혔으며 그 교두보를 확보하는 가운데,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인간 속에 온갖 종류의 무절제한 욕망들을 산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계명이 죄를 위한 기회가 되었을까? 그 이유는 (왜냐하면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이 죄를 자극하여 일으키지 않았을 때 죄는 동면 상태에 있었으나, 율법을 의식하게 되었을 때 죄는 불쑥 일어나서 "나"를 때려 눕혔던 것이다. 율법이 없다 하더라도 사실상 죄는 존재한다. 그러나 율법이 없으면 죄는 상대적으로 무력하다. 즉, 죽은( ) 것이다. 바울은 를 통해 창 3장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는 죄가 인격화되어 있으며 악한 목적으로 활동하는 하나의 세력으로 언급되고 있다. 결국 하나님의 계명이 죄를 위한 기회가 된 것은 율법 자체 때문이 아니라 죄가 계명을 통해 살아나 적극적으로 인간을 죄 아래 가두었기 때문이다. 7-8절을 통해 바울은 율법은 죄가 아니지만 죄에 의해 남용되어 '나'( ) 속에서 여러 종류의 탐심 곧 죄의 열매들을 산출하기 때문에, 죄는 율법의 잘못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죄 그 자체의 잘못으로 산출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 바울은 창1:28 이하에 묘사된 인간의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말하는데, 그때에도( ) 인간은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은 10절의 과의 대조법에 비추어 볼 때 '그저 산다'는 약한 의미가 아니라 '살아있다'는 강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율법과 대면하지 않는 한 인간은 실제로 살아있다는 의미이다. 계명이 이르매( ). 여기서의 계명은 제 10계명으로 표현된 율법의 수여(따라서 보다는 가 사용되었다)와 동시에 창2:16이하의 계명을 가리킨다. 죄는 살아나고( ) 나는 죽었도다( ). 여기서 (살아나다)는 '되살아나다','다시 살아나다'는 그 단어의 본래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단순히 '살아나다'를 의미한다. 죽어 있던( ) 죄가 살아난다( )는 대조적 표현은 가만히 누워서 숨어 있다가 그 기회를 포착하면서 튀어오르는 뱀의 상태를 연상시킨다. 이것은 창세기의 기사를 선명하게 연상시키는 것이다. 결국 계명이 없을 때에 인간은 실제적으로 살아 있었지만, 계명이 온 후로 죽었던 죄는 살아나고 살았던 인간은 죽고만 것이다. 
이 사실은 바울은 10-11절에서 보다 분명히 표현한다. ,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이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본래 계명의 참된 목적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었으나 그 계명의 실제적인 결과는 죽음이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여기서 바울은 10절의 이유를 설명한다. (속이고)은 매우 정확하게 창3:13을 반영하고 있다. 창 3장에서 뱀은 첫째, 계명의 부정적인 부분에만 주의를 끌고 긍정적인 부분은 무시함으로써 둘째,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께서는 불순종에 대해 죽음의 형벌로 벌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게 함으로써 셋째,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대한 의심을 넌지시 암시하고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함으로써 여자를 속였다. 율법도 이와 유사한 경우이다. 죄가 율법에 관하여 사람을 속이고 율법을 왜곡시키며 율법의 잘못된 관념을 그에게 심어주고 또 율법 자체를 수단으로(8절 참조) 사람을 속인다. 여기서 바울은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으려고 하면서 하나님의 참된 의를 가져다 주는 그리스도를 믿기 거부한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뭏든 죄는 사람을 기만하고 속임으로써 사람을 죽게 하는데 성공한다. 죄는 '살도록' 주신 율법을 수단으로 사람에게 죽음을 가져다 준 것이다( ). 9-11절을 통해 바울은 원래 생명을 가져다 주기 위한 의도를 지닌 율법(계명)이 실제적으로 죽음을 가져다 주었다 할지라도 죽음은 율법 그 자체의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죄가 율법을 통해 나를 속이고 살해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이 구절은 7절 상반절에서 제기된 질문에 대한 바울의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응답이다. 따라서 (이로 보건대)는 앞의 논증으로부터 내려지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 단어이다. 는 '율법 자체'라는 뜻이다. 율법의 존재가 실제로 인간에게 죽음을 초래했지만, 이 결과 때문에 율법이 비난받아서는 안된다. 그 비난의 화살은 죄에게로 향해져야 할 것이다. 율법( )과 계명( )은 본래 거룩하다. 예수와 마찬가지로 바울에게 있어서도 율법은 하나님의 법으로서(7:22,25;8:7;고전7:19),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그 기원이나 권위의 지울 수 없는 표지들을 지니고 있다(거룩하다, 의롭다, 선하다라는 형용사들의 반복을 통해 강조됨). 여기서 바울이 율법과 계명을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은 전체의 율법 뿐만 아니라 거기에 포함된 모든 개별적인 계명까지도 거룩한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율법이 죄라는 잘못된 추론의 가능성을 단호하게 부정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13절에서 바울은 7절 상반절의 질문을 되받아서 확대시킨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랍비들은 관례적으로 '선'을 율법의 호칭으로 취급하였는데, 여기서 은 12절의 를 연상시키는 것으로 율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율법이 나의 죽음에 대해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7절과 마찬가지로 강한 부정의 (그럴 수 없느니라)이다. 그러면 선한 것의 역할은 무엇인가? 뒤이어 나오는 두 절이 이 질문에 답하고 있는데, 두 절은 결과적 용법이 아니라 목적적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율법은 선한 것을 통하여( ) 죄가 죄로 드러나게 하려는 목적( , )과 계명에 의해 죄의 죄성이 실제로 드러나게 하려는 목적( )을 가지고 있었다. 율법의 이러한 목적들은 비록 율법을 수여한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도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들이다. 13절의 결론은 선한 것(율법)이 나의 죽음에 대해 책임있다는 것이 아니라 죄가 나를 죽음으로 이끌기 위해 선한 것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3) 로마서 7:14-25의 주석적 고찰

(1) 로마서 7:14

7:7-13절에서 제시된 율법에 대한 바울의 변증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불러 일으킨다. "선하고 거룩한 율법이 왜, 어떻게 해서 나에게 죽음이 되었는가?" 이 질문이 이미 13절에서 제시되었으나 직접적인 답변이 거기서 주어지지 않았다. 이제 바울은 그 질문에 대해 죄와 율법과 그리고 "나"와 불가분적으로 얽혀있는 삼중적인 관계를 설명함으로써 답변을 준다. 여기서 바울은 '나'의 죽음은 율법이 아닌 죄로 말미암는 것임을 보여줌으로써(13,17,20,23,25) 율법에 대한 적극적인 변호에 나선다.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결정적인 답변은 바로 다음과 같다: "율법은 신령하다. 그러나 나는 육적이고, 죄의 권세 아래 팔렸다"( , ). 이 구절(14절)은 이 단원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구절인 것 같다. 첫째, 14절 상반절을 통하여 바울은 "율법이 신령하다"( )라고 선언함으로써 율법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거듭 확인한다. 즉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라는 사실이다(22,25절 참조). 따라서 성령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율법의 문자만을 파악하는데(6절 참조), 성령을 앗아가는 문자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후3:6절 참조). 둘째, 14절 하반절을 통하여 율법과 대조적으로 "'나'가 육적( )이며 죄의 권세 아래로 팔려졌다"라고 강조함으로써, 바울은 이미 그가 1:18-3:20절에서 취급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인이 실질적으로 어떤 자인가를 재확인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바울은 여기서 특별히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의 권세 아래 매여있는 자인 동시에 또한 죄의 권세 아래 매여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2) 로마서 7:15-20

14절에 이어 15-23절까지 거듭 계속되고 있는 원하는 "나"와 행위하는 "나" 사이의 비극적인 모순은 인간의 실존이 안고 있는 죄와 하나님의 법의 이중적인 충동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이다. 15-20절에서 바울은 행위의 주체가 되는 죄의 권세가 의지의 주체가 되고 있는 하나님의 법의 권세보다 현실적으로 얼마나 더 강한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비참한 인간을 도우려고 하는 율법의 무능력과 함께 또한 죄의 노예로 팔린 인간의 비극적 상황을 폭로한다. 
바울의 사상적 진전과정을 보다 분명하게 붙잡기 위해서는 그가 사용하고 있는 여러 동사들을 조사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바울은 원하는 '나'와 행위하는 '나'사이의 비극적인 모순을 보여주기 위해 의욕하는 동사들(Willing verbs)과 행위하는 동사들(Doing verbs)을 대조시키고 있다. 이 문단에서 사용된 의욕하는 동사들은 "원하다" (15,16,19,20),"시인하다" (16)인데, 하나님의 법을 행하려고 하는 "나"의 적극적인 의욕을 대변한다. 반면에 행위하는 동사들은 "행하다" (15,17,20), (15,19), (15,16,19)라는 뜻을 갖고 있는 여러 동사들인데, 죄의 권세 아래 포로되어 있는 "나"의 부정적인 양상을 대변해 준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한다)는 사람이 자기의 소원과 계획가 기대하는 것들을 행동으로 실천하려고 할 때, 거의 예외없이 그 반대의 결과가 나타남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다시 말하면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하게 된다( , ' )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나는 육신에 속하였기 때문이다(14절 참조). 일반적으로 유대교에서는 도덕적 실패와 좌절에 대한 의식이 없었다고 인식되어 왔지만, 유대교에서도 이러한 의식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여러 증거들이 있다. 랍비들은 율법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이 악한 충동에 대한 유일한 효과적 처방임을 인정하면서도 때때로 사람이 율법에 충실하면 할수록 그 사람 속에 있는 '악한 충동'이 더 강해진다는 사실과 율법에 충실하게 집착하면 할수록 특별히 악한 욕망의 공격을 받기 쉽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일생 동안 악한 욕망의 유혹들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특히 에스라 4서의 저자는 인간의 죄성과 율법을 준수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인식은 쿰란 공동체 사람들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이 구절은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아담적 인간(보편적 인류)의 내적 갈등을 생생히 증거하는 구절이다.
만약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한다( , ). 내가 원하지 않는 그것을 행한다는 것은 내 스스로 율법이 선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율법을 반대한다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율법에 동의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지에 반대하여 행해진 행위에 대하여 율법은 책임이 없는 것이고, 율법은 악에 관한 모든 혐의를 면제받아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다.
이 사실은 17절에서 더욱 분명해 진다. 지금까지의 주어는 "나"( )였지만 17절의 주어는 "죄"( )이다. 여기서 행하는 행위의 주체가 다름아닌 '죄'라는 사실은 '나'는 행위의 주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죄가 나를 지배하고 있기에 나는 육신에 속한( )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다(18절). 19절과 20절에서는 지금까지의 진술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요약해 준다. 여기서는 논술이 더 진전되지 않는다. 단지 15절에서 밝혀지지 아니한 것, 즉 그 원하는 것을 "선"( )이라 말하고, 그 원하지 않는 것을 "악"( )이라고 밝힐 뿐이다. 바울은 여기서 행위의 주체가 되는 죄의 권세가 의지의 주체가 되는 법의 권세보다 현실적으로 얼마나 더 강한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사실을 재차 강조함으로써 바울은 죄의 노예로 팔린 인간의 비극적인 상황을 확립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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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5 [3]칼빈&웨슬리 신학의 구원론 비교 웹섬김이 08-22 9255
2574 [4]칼빈&웨슬리 신학의 구원론 비교 웹섬김이 08-22 13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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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2 사탄의 용어 웹섬김이 08-25 7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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