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8-16 13:35
한국교회 목사들은 무당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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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8,914  
한국교회 목사들은 무당인가?
 

이 땅에 기독교가 보급된 지도 벌써 100년이 훨씬 넘었다. 신도의 수가 1,100만이 넘고 으리으리한 초대형 교회들이 즐비할 정도로 엄청난 성장을 하였다. 우리사회가 여러 부문에서 압축성장을 이룩한 것처럼 한국교회도 역시 빠른 속도로 성장을 이룩하였다.

1. 한국교회의 성장비결.

어느 종교나 특정한 나라에서 정착을 하려면 토착문화와의 타협이 불가피하다. 같은 종교라도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생겨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교회도 한국의 전통문화와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타협하며 빠른 성장을 구가하였다.

특히 제사나 조상에 대한 숭배라는 측면에서 교회가 전통문화와 상당한 충돌을 겪은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즉 유일신 사상에서 파생되는 기독교의 특징상 조상을 신격화하여 절하고 극진히 여기는 것을 우상숭배로 여겨 금지하는 데에서 많은 문화적 충돌이 빚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체로 토착문화를 교회가 수렴한 부분이 많았던 것으로 평가된다. 가장 중요한 문화적 타협은 바로 기복적인 요소이다. 전통적으로 한국의 토착신앙은 신이 인간의 현세에 화복을 관장하는 것으로 여겨왔다. 즉 신에게 올리는 기도는 그런 복을 받아내고자 요청하는 행위였다. 기독교의 교리상 기도는 현세에서의 복을 비는 것이 아니라 내세의 영혼구원에 초점이 있다. 서로 상충되는 측면이 있지만 신도들에 의하여 적절한 타협이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인은 가무를 즐기고 특히 신명을 추구하는 특성이 있다. 이점은 특별히 기독교도 다윗의 영가등을 보면 다르지 않은 것같다. 그러나 대체로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을 중시하던 교단들도 한국인의 신명문화와 적절한 타협을 시도하였다. 특히 부흥집회등의 형태로 그런 한국인의 신명을 끄집어 내는 장을 마련해 주면서 신도수를 늘리는데 성공하였다. 특히 성령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양적성장을 추구한 것이 주효했다.

그렇게 문화적 타협 속에 신도수를 배가한 후에는 점차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들의 비위를 맞추기 시작하였다. 신도수를 배가하는 것으로는 일정한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신도들이 조금 더 많이 헌금을 내도록 만드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설교시에 십일조를 강조하고, 헌금이 마치 영적창고에 저축하는 것처럼 비유하며, 교회의 건축을 위한 헌금을 내도록 독려하였다.

헌금을 한 사람들의 이름을 주보에 인쇄하고 은근히 목회자들이 우대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하였다. 그러는 사이 점차 부자들의 영향력은 강해지고 그들의 입맛에 맞는 쪽으로 설교의 내용들도 바뀌어 갔다. 성서에는 분명 가진자와 강한 자보다는 가난한 자와 약자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지만 성서의 문구에 얽메여서 부자들의 비위를 상하게 할 수는 없게 되었다. 그렇게 돈이 모이고 축적되자 거대한 땅을 사고 으리으리한 건물을 지어서 그것이 신에 대한 신앙심의 깊이인 것처럼 각인을 시키게 된다.

종교적 교리나 성서의 문구에 집착하는 원리주의가 반드시 옳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토착문화와 충돌하기 보다는 적절한 타협이 불가피한 점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의 본질을 왜곡하는 데까지 타협하고 있는 부분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즉 현세의 복을 구하기에 앞서 내세의 영생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과 강자와 기득권층의 구미보다는 가난한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점이다. 기독교의 본질은 바로 영생과 약자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2. 목사가 무당과 유사한 점.

수 많은 목사들이 자신들을 무당과 비교하면 모욕이라고 느낄 것이다. 토착신앙과 문화에 타협이 있었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영혼의 구원을 추구하는 목사와 현세의 기복을 추구하는 무당의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나타나는 현상들은 그리 많은 차이를 느낄 수 없다. 오히려 유사성이 높아 보인다. 편견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현실에서 일부 목사들의 행위가 유사성을 높여가고 있다. 

첫째, 현세의 기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정의 화목과 경제적 성공을 빌어주고 있다. 무당이 굿이나 부적을 판매하는 것과 목사가 신도들의 현세에서의 성공을 기원하는 것이 그리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것은 목사들이 영생을 강조하지 않고 있어서 발생하는 현상일 것이다.

둘째, 무당이 점을 치고 부적을 써주고 돈을 받는 행위와 목사가 헌금을 강요하는 행위는 매우 유사하다. 마치 돈을 많이 내야 큰 복을 받는 것처럼 설교하는 것이 무당이 복채를 많이 내라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 본질적으로 기독교는 돈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는데 일부 목사들의 금전적 욕심이 스스로를 무당과 비슷한 존재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셋째, 부흥집회에서 욕설이나 비속한 언어를 사용하여 신도들을 희롱하는 일이 적지 않다. 바로 그런 것이 무당들이 굿을 하면서 마구 내뱉는 말들과 크게 차이가 없다. 심지어 여신도들에게 이년,저년하는 목사들의 입은 무당들의 그것보다 심한 경우도 적지 않다. 참여자들의 신명을 이끌어 내기 위한 문화적 타협이 지나친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넷째, 신과 인간의 중재자를 자처하는 것이 유사하다. 무당은 가끔 빙의를 통하여 신의 대역을 맡는 경우가 있다. 신을 자신의 몸에 태워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목사들도 종종 자신을 신격화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며 실제로 그런 것을 추구하는 경우가 있다. 결코 신도들에 비하여 신 앞에서 우월한 존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귀히 여기고 신처럼 대우할 것을 은연중에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유사하게 보이는 것이다.

다섯째, 부자들을 우대하고 돈없는 자들을 천대하는 것도 매우 유사하다. 돈이 많은 손님에게 무당이나 점쟁이가 정성을 다하고, 보통의 가난한 손님을 대강 대하는 것처럼 일부의 목사들도 그렇게 사람을 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돈을 목적으로 하는 사업이라는 특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유사성이 생겨나는 것이다.

여섯째, 무당들의 성적인 스캔들이 일반인에 비하여 많은 편이었다. 요즘 목사들의 스캔들이 위험수위를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여신도와 불륜의 현장을 들켜서 아파트 난간에 숨었다가 떨어져 사망한 목사의 얘기가 회자되고 있는 형편이다. 과거 무당들의 스캔들이 마을에 평지풍파를 일으킨 것이 연상된다.

일곱째, 목사들의 2세에 대한 교회상속이 마치 무당들의 신내림을 연상하게 만든다. 무당들의 신내림은 특별히 재산을 상속하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목사들의 교회상속에 비하여 도덕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교회를 신도수나 헌금액을 기준으로 권리금받고 매매해주는 전문 브로커들이 성업 중이라는 말이 있다. 

여덟째, 무당이 신에게 빙의 되어 사람들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것처럼 목사들이 자신의 설교에 무조건 아멘을 외치도록 맹종시키는 것이 비슷하다. 각자의 판단과 신앙적 기준을 잘 확립해줄 생각은 하지 않고 맹신을 강요하는 것은 목사들의 횡포일 뿐이다. 설교듣는 신도들에게 마구 욕설을 퍼붓고도 아멘을 강요한다. 그것을 그저 따르기만 하는 신도들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목사들이 그것을 유도하고 즐기고 있다는 시각에서 바라보면 아주 심각한 일이다.

3. 교회는 이제 질적 성장으로 나아갈 때이다.

한국교회가 엄청난 속도로 압축성장을 하다가 지금은 성장이 멈추고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무당들과 목회자들을 비교하는 것이 불쾌하고 당연히 반박할 근거도 많을 것이다. 모든 목회자가 그렇게 타락하고 저급하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 목회자들의 문제를 일반화한다는 항의가 빗발칠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는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첫째, 목사들의 대오각성과 회개가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원칙의 확립이 있어야 한다. 진정 자신이 성직자가 아닌 일개 직업인으로 취급받고 싶지 않다면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선 기복적인 태도로 설교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 영혼을 구원하는 신의 사역에 자신을 헌신하는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

둘째, 성서의 가르침에 자신이 먼저 충실하라. 어린이와 노약자와 장애인과 가난한 자들에게 마음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재림하는 예수가 어린이의 모습일지, 장애인의 모습일지, 노숙자의 모습일지, 가난뱅이의 모습일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사회적 약자들을 마음으로 따뜻이 맞이하라.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셋째, 신도들에게 요구하기 전에 자신이 스스로 성화되려고 노력하라. 자신의 입에서는 비속어와 성차별적 언사와 욕설이 마구 나오도록 내버려 두고 신도들에게 성화의 과정을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스스로의 생활을 거룩하게 만들어가는 노력이 절실하다.

넷째, 권위를 버려라. 되지도 않는 말을 하도고 아멘을 요구하는 권위를 버리지 못하면 신도들의 맹신을 조장하고 그들을 바보로 만드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을 지옥으로 이끌어 사탄의 역할을 담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성서의 가르침에 비추어 진리를 말하는 경우에만 자발적으로 따르도록 신도들의 사고체계를 마비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섯째, 재물에 대한 욕심과 고대광실같은 교회건물을 꿈꾸지 마라. 그것이 헌금에 욕심을 내고 부자들에게 아부하는 설교를 하게 만든다. 가난한 자들을 교회에서 쫓아내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건물을 만들기보다는 아름다운 신앙인들을 만들려는 노력을 기울여라. 그렇게 하면 부족한 것은 신께서 채우실 것이다. 교회란 건물이 아니라 믿는 자들의 모임이다.

양적으로 성장의 한계에 다다른 상황에서 이제는 질적인 성장을 추구할 때이다. 여기서 질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교회의 재산을 늘리고 훌륭한 건물을 짓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도들의 신앙의 깊이와 지향이 올바른 곳을 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신의 섭리가 작동하는 한국교회가 되도록 노력할 때이다. 

외형적 성장은 이미 포화상태이다. 신앙의 질을 높이고 좀 더 사회에 귀감이 될만한 교회를 만든다면 돈은 안되더라도 더욱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목회자들이 원하는 성장을 했다면 이제는 신께서 바라시는 성장을 해야 할 시기가 된 것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한국교회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 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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