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9-07-17 14:12
몸과 육의 구별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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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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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육의 구별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답변1: 몸과 육의 구별은 대단히 복잡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두 단어 모두가 대단히 폭넓은 의미 범주를 지니는 단어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몸’은 헬라어 ‘소마’와 육은 ‘사륵스’와 대체로 일치합니다. 
헬라어 ‘소마’는 육체적 몸, 사회적 몸, 인격적 구성체 등의 의미로 쓰입니다. 
‘사륵스’ 역시 사람의 육체적 부분, 육체적 연약성, 영과 대립하는 죄성 등의 의미로 쓰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두 단어의 의미가 겹치는 부분도 있습니다. 특히 인간의 신체를 가리키는 경우 두 단어는 중립적 의미에서 별 나쁜 뜻 없이 사용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소마)은 하나님과 타인과의 책임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불가피한 통로가 됩니다. 이를 부정하면 우리의 신앙은 추상적인 것이 되고, 더 나쁜 경우에는 영지주의적 이원론에 빠지게 됩니다. 
‘육체’(사륵스)라는 단어가 중립적 의미로 쓰일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매우 부정적 의미로 사용됩니다. 특히 이것이 성령과 대립하는 위치에 놓일 때 그렇습니다. 로마서 8장 6절이나 갈라디아서 3장 3절, 빌립보서 3장 3절 등이 대표적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의 독특한 문구 “육신(육체)을 따라”는 대체로 부정적 의미가 강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롬 8:13)이라는 강한 표현이 그렇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더는 육신을 따라 행동하거나 자랑하지 않습니다(고후 10:3; 11:18). 
정리하자면, 대체적으로 ‘몸’이 보다 중립적 의미에서 하나의 관계성의 구성체를, ‘육’이 보다 부정적 의미에서 성령과의 대립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체적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보다 안전한 것은 개념을 미리 고정해 놓지 말고, 관련 단어들이 나올 때마다 문맥 속에서 그 의미를 융통성 있게 결정해 가는 방법입니다. 

최승락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답변2: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다루면서 인간의 여러 측면을 살펴보게 된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형상 이외에도 인간을 묘사하고 지칭하는 주요한 말들이 나오는데, 이것들은 주로 인간의 육체성과 내면성을 그린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관점에서 인간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을 전체로 보고 있다. 성경의 이런 관점과는 무관하게 인간의 내면성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일반적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육체성도 반드시 요구된다. 
인간은 육체로 외면화된다(창 47:18; 삼상 31:10, 12; 나훔 3:3; 마 10:28; 눅 12:23; 롬 1:24; 12:1; 고후 5:6). 성경은 인간의 행동들을 신체의 부분들을 빙자하여 표현한다. 눈, 입과 입술, 혀, 목구멍, 귀 등이 대표적 표현들이요, 얼굴은 구약에서만 2,000회 이상 나타난다. 
‘영혼’(네페쉬)은 구약에서 755회 나오며, 칠십인역은 600회 가량 혼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특정 부분이 아니라, 생령인 인간(창 2:7), 또는 인간의 종속성을 말한다. ‘네페’쉬는 몸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네페쉬는 하나님께 속했다(겔 18:4). 네페쉬는 살아서 하나님 앞에서 응답하며 책임 있는 인격적 존재인 인간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네페쉬를 사망이나(시 116:4, 8), 환난에서(삼하 4:9) 건지시니, 네페쉬는 야웨께 피할 수 있다(시 57:1). 야웨는 네페쉬를 축복하신다(시 23:3). 또한 네페쉬는 야웨를 사모한다(사 26:9; 시 33:20; 42:1). 시편 84장 2절에서는 네페쉬(영혼), 레브(마음), 바샤르(육체)가 교체되면서 모두 야웨 하나님을 사모함을 보여 준다(시 63:1 참고). 영혼은 목마르며(잠 25:25), 배고파한다(시 107:9). 그러나 네페쉬가 범죄하면 죽는다(겔 18:4). 이처럼 이 영혼이 몸과 무관하다는 의미에서 순전히 정신적인 것으로 이해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신약에서 ‘프쉬케’(혼)는 ‘조에’(생명)와 비교될 때, 구체적으로 혈육과 결합해 있는 생명을 말한다. 그러므로 죽이고, 죽고, 미워하고 또 핍박할 수 있다. 또 죽음의 위협 하에 있다(고전 15:45). 프쉬케는 자체적으로 존속할 수 없으며 죽음과 부패에 종속된다. 이 점에서 육(肉)과 혈(血)의 동의어이다. 구체적 생명이지, 일반적인 생명의 현상(phenomonon of life in general)을 말하지는 않는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는 육체보다 더 존속하는 인간의 측면이 프쉬케로 표현된다. 마태복음 11장 29절의 ‘너희 심령’(렘 6:16)은 그냥 ‘너희’라는 죽음에 예속된 인간을 말한다. 즉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께 회개해야 함을 뜻한다. 그러므로 육체적 삶도 하나님의 축복이기 때문에, 혼이 육에서 해방될 때 평안을 얻는다는 헬라사상과는 다르다. 프쉬케는 하나님이 주셔서 육체적 삶으로 가시화되어 영생에로 유지된다(눅 21:19, 이 본문은 불멸의 혼이 장래에 비로소 획득된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이는 건강이나 부도 아니며, 하나님께서 지속해서 공급하시니까 죽음으로도 제한받지 않는다. 그렇다면 헬라식으로 영육을 나누고, 지상적 삶과 천상의 삶을 나누는 구분은 극복되었다. 
프쉬케는 구체적 인간의 삶이다. 그러므로 전인을 지칭한다. 또 기쁨, 슬픔, 사랑, 미움의 좌소이다. 내적 삶이라 할 수도 있다. 마음과 연관되어서 신앙의 좌소이기도 하다. 육체적 삶이라 하지만 육체와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다만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이 육체적인 측면에만 한정시킬 때, 프쉬케는 상실된다(눅 12:20, 어리석은 부자). 그러면서도 프쉬케는 죽음으로만 끝나지 않는 생명이다. 즉 하나님이 지속해서 주시는 신실하심 때문이다. 
육(肉)을 뜻하는 ‘바사르’는 구약에서 270회 나오며(창 2:23, 24; 시 56:5; 65:3; 렘 32:27), 신약에서는 ‘사륵스’로 번역된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바사르이다. 즉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의 모습 그대로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육과 영으로 나눌 수 없다. 구별할 수 있다면, 하나님과 인간의 구별이다. 육체는 인간의 육체이며, 인간을 가시적으로 만드는 육체이다. 때로는 혈육을 뜻하기도 한다(창 2:23; 29:14; 삿 9:2). 바사르는 육체이지 허상이 아니다. 바사르는 ‘루아흐’(창 6:3; 민 16:22; 27:16; 사 31:3; 욥 3:1), ‘레브’(겔 44:7, 9; 시 84:3) 등과 대비된다. 때로는 바사르가 생명을 뜻하기도 한다(창 9:4; 신 12:23; 욥 14:22). 바사르는 인류(신 5:26; 시 65:3; 145:21), 동물과 인류(창 6:17; 9:16)를 뜻한다. 돌 같은 마음보다는 살 같은 마음이 낫다(겔 11:19; 36:26). 그러나 대체로 바사르는 영이신 하나님과 비교될 때, 허무하며 무력하고(창 6:3; 사 31:3; 40:6; 렘 17:5; 시 56:5; 78:39; 욥 10:4). 특히 죽을 존재(창 6:3; 단 2:11; 욥 10:4)임을 보여 준다. 인간은 스스로 아무 힘도 없는 연약한 존재이다(사 31:3; 40:6; 시 78:39). 
신약에서 ‘사륵스’는 피조된 존재인 인간을 지시한다(롬 3:20; 갈 2:16). 즉 하나님에게 의존적이라는 뜻이며, 이 경우 특히 성령에 의존적이다(갈 5:1 이하). 인간의 지상적 존재를 지시하기도 하며(빌 1:22, 24; 고후 10:3), 한시성과 제한성이 포함된다. 나아가 사륵스는 특히 하나님을 항거하는 탕자인 인간의 전체 모습을 표현한다(롬 8:6~9; 갈 5:19~21; 롬 7:14). 육도 죄와 같이 인간을 예속시키는 힘이다(롬 7:14, 18; 8:6, 12; 갈 5:16). 육은 죄의 정욕을 인간 속에 활동하게 해서 사망을 이루게 한다(롬 7:5). 로마서 7장 12~14절는 중생된 상태에서도 성령과 육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는 인간의 모습이 나온다. 죄는 하나님의 저급한 부분에 붙어 있지 않고, 인간 그가 부패했다. 지상적 삶이 죄는 아니지만 육을 따라 사는 것은 죄이다. 그러므로 육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으로서, 육과 피는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며(마 16:17),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전 15:50). 
몸을 뜻하는 ‘소마’도 육체성을 표현한다. ‘사륵스’와 비교하여 볼 때, 이 말은 대체로 긍정적으로 쓰인다. 몸은 장차 부활할 것이다(고전 15:35~44).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장래 모습은 소망 중에 현존하며, 세상적 몸에 있는 생명을 의미 있게 한다(고후 5:10; 빌 3:21). 하나님은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다(롬 8:11; 6:12; 8:23). 여기서 몸은 죄 아래 있음을 보여 준다. 몸이 심판을 받을 것이므로(고후 5:1~10), 몸을 잘 보존해야 한다(간음, 고전 6:16~18). 왜냐하면 주님으로 인하여 구속받은 몸은 성령의 전이기 때문이다(고전 6:19). 성령이 떠난 몸은 죽었다. 그러므로 몸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롬 12:1). 그러면서도 몸이라는 말은 한 부분이 아니라 전인을 지칭한다. 
육체성을 표현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종합하여 볼 때, 구원이란 육체성(성생활)에서 영성(靈性, 율법 연구나 금욕)으로 전환함이 아니다. 인간은 육체성과 영성, 양자를 다 하나님에게서 분리할 수도 있고, 하나님을 위해 바칠 수도 있다. 육체성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삶을 세울 때 나쁘다. 그러면 육이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 구속이란 육체성을 폐기하는 물리적, 형이상학적인 사건이 아니다. -이상은 크리스찬Q&A의 허락을 받아 크리스찬Q&A 자료실에서 퍼옴. 편집자 주. 

유해무 
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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