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7-21 12:48
[11]십계명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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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7,866  
새 계명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사인 줄 알리라"(요 13:34,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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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을 고찰하는 가운데, 모세를 통해 받은 구약 율법이 어떻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더욱 더 그 의미가 확대되었는가를 보아 왔다. 예수님의 교훈 가운데 있는 어떤 것도, 십계명의 가치를 경시하거나 그 표준을 낮추지 않았다. 주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이 사실임을 명백히 선언하셨다. 주님은 생활과 가르침 모두에서 율법을 완수하셨다. 즉 주님은 율법을 철저하게 성취하셨다. 다시 말하면 말과 행실에서 율법의 문자적 의미를 넘어 그 율법의 근본 목적까지 이루신 것이다.

그리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떠나시기 직전에 이 새 계명을 말씀하셨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다"(요 13:1). 이 말씀은 주님의 생활의 기초가 되는 원리를 밝힌다. 그것은 곧 사랑의 권리였다. 주님은

바로 이 사랑의 충동에 사로잡혀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이렇게 함으로써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가르치려고 하신 최고의 진리 즉 사랑으로써 생활하는 곳인 하나님 나라에서는 봉사가 그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셨다.


이렇게 하고 나서 주님은 마지막 가르침을 시작하셨는데, 가르치시는 중에 모든 율법의 근본이요 원동력이자 최종 목적이 사랑임을 밝히는 이 새 계명을 선언하셨다.


어떤 의미에서 이 계명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 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침이니라"(요일 2:7, 8).


실로 이 계명은 옛적부터 있어온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계명은 사랑이라고 선언하심으로써 이미 있어 왔던 율법을 요약하여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또한 대한 이러한 요약은 주께서 인용하신 모세의 율법에서도 이미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신 6:5레 19:18).


그렇다면 이와 같이 옛 계명을 반복하는 데 불과한 새 계명에 있어서 무엇이 새롭다는 것인가? 그 답변은 이미 앞에서 인용한 구절에서 요한이 제시하고 있다. 새로운 것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이 그 계명에 비춘 빛이라는 점이다. 요한이 새계명이 기록된 요 13:34, 35를 기록한 것도 역시 당시 주님의 제자들의 사랑의 원리에 따른 생활을 통해서 빛을 비추고 있었다. 그래서 비로소 요한은 "새 계명은 저에게와 너희에게 참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제 이 옛 계명을 그리스도를 통해 비로소 확연해진 새로운 빛에 비추어서 생각해 보자. 먼저는 옛 계명을 담고 있는 것으로서 이 새 계명을 주의해 보고, 다음에는 기독교에서 나타난 것으로서 새 계명을 살펴보자.

옛 계명을 담고 있는 새 계명

십계명을 어기는 것마다 모두 근본적인 의미에서 사랑을 위반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진실한 사랑으로써 생활을 통제하고 지도한다면 십계명을 어기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사람들간의 관계에 관해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쳤다. "피차 사랑의 빛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빛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8-10).

사람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이다. 간단하면서도 위엄 있는 이 사랑의 원칙을 이해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어떻게 사랑을 통해 십계명이 성취되는가를 주의해 보면서 열 가지 계명 전부를 상기해 보는 것도 좋은 일일 것이다.


만일 사람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라는 말이 나타내며 마음의 활달함과 아름다움을 모두 발휘하여 하나님을 진정으로 뜨겁게 사랑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다른 신을 모실 여지가 전혀 있을 수 없다. 이렇게 해서 십계명 전반부에 나오는 하나님과 관계된 계명은 완전하게 지켜진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어떠한 것도 두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강한 애정의 힘 때문에, 이미 새긴 우상이 있을지라도 이는 산산이 부서지고 사라진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신성 모독의 샘을 마르게 하고 위선자의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지 못하게 만들며,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는 일은 바로 이러한 사랑에서 생겨날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으로써 예배에 임할 수 있고 사랑으로 예배 행위들을 취할 수 있을 때는 안식일을 몹시 반기고 안식일의 모든 특권을 진심으로 기쁘게 누리게 될 것이다.


이제는 십계명의 후반부에 나오는 인간 상호간에 관계된 계명으로 넘어가 다른 계명들에 대해 작용하는 사랑에 대해 살펴보자. 그러면, 부모님께 복종과 공경을 행할 수 있게 하는 유일무이한 충분한 능력은 사랑의 힘이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마음의 제단에서 사랑의 불꽃이 꺼지는 두려운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살인할 마음을 조금도 품지 않을 것이다. 아주 비열하게 사랑을 사칭하는 모든 종류의 성적 부정 행위는 확실히 사랑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이 부정 행위는 그것이 사칭하는 바로 그 사랑이 사라지게 하기 때문에 더욱더 추잡 해져 간다. 이웃에 대해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이웃에게 재산의 피해를 주는 도적질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 있다면 말을 조심하고,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가 될 수 있는 소문이라면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퍼뜨리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다스려서 소문을 내려는 생각조차 없앨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얻으며 마음의 갈망을 채우고 모든 탐심을 방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사랑, 오직 사랑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실로 사랑하는 것을 배울 수만 있다면 그는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십계명을 비롯한 모든 율법을 바르게 지킬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사실만으로는 새 율법의 보다 풍성한 의미를 진술하기에 부족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실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능가하는 의를 얻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이라는 말이 표현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일을 하는 것이다. 사랑이란 그 가지가 담장 너머로까지 뻗어 나가는, 열매를 많이 맺는 나무이다. 글자에 얽매이는 단순한 사람들의 좁은 생각에 비추어 볼 때 사랑은 종종 사치스러우며 방탕하고 분별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랑은 이와 같이 단순한 감각적이며 퇴폐적인 것이 아니다. 사랑에는 귀한 치료제가 있는데. 사랑은 대가를 전혀 바라지 않고 그 치료제를 아낌 없이 나누어 줄 것이다.


율법을 성취하는 근본적인 힘으로서의 사랑의 가치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사랑을 다른 충동들과 대조시켜 보아야 한다. 의무는 기계적이고 정확하며 규칙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단순한 의무를 넘어서서 오리를 가자고 하는 자에게 십리를 동행하며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속옷도 줄 것이다. 이와 같이 의무는 율법만을 지키는 반면에 사랑은 그 이상으로 행하여 율법이 지니는 참 뜻을 영광스럽게 한다. 따라서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 감히 죽는 자가 혹 있다. "(롬 5:7) 여기서 의로움과 선함의 차이는 의무와 사랑의 차이이다.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일을 체면 때문에 하려고 하는가? 사람들은 타인이 지켜 보는 일은 조그만 일까지도 다 신경을 써서 아주 규칙에 따라 행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필시 보는 사람에게서 불리한 비판을 듣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으로 행하는 사람은 외형적인 평가에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래서 만일 외로운 사람의 어려운 처지를 도울 수 있거나 절망뿐인 토굴 감옥에 희망의 소식을 전할 수만 있다면 비판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개의치 않는 그의 태도는 종종, 무심코 그 행동을 보게 되는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다.


사람들은 또한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말과 행실을 아주 엄격하게 자제한다. 사람은 자신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종종 많은 일을 감내 하려고 한다. 그런데 슬프게도 그러한 사람은 흔히 바로 이런 충동 때문에 외식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으로 행하라는 하나님의 법을 깨뜨리곤 한다. 그러나 사랑의 힘으로써 행하는 사람은 이미 자기라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명성을 유지하거나 자신의 만족감을 채우는 일에 전혀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의 선한 행동을 이루는 원동력인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온 율법을 이룬다.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새 계명

온전하게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으로 율법을 온전하게 이띠루는 것이라는 진술에 대해서는 전혀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털끝만치도 사욕이 없이 사랑할 수 있는가? 기독교가, 그리스도 한 분이 보이신 사랑의 생활을 제시하며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서 그 그리스도의 생활을 전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나사렛 예수는 성육신하신 사랑이셨다. 주님의 전 존재와 생활은 세계가 이제까지 경험했던 것 중에서 가장 완벽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의 생활은 율법의 완전한 성취였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과 마귀의 증거까지도 주님의 완전하심을 선포한다. 주님의 생애 동안에 그리스도의 완전하심에 대한 하나님의 만족하심을 알리느라고 세 번이나 하나님의 음성이 하늘의 침묵을 깨뜨렸다. 빌라도는 모든 증거를 조사한 후에 "나는 그에게서 아무것도 찾지 못하겠노라"고 바른 판결을 내렸다. 주께서 암흑의 지하 세계로부터 찬사를 받으실 필요가 전혀 없을지라도 마귀가 주님을 보고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고 암시하는 바가 많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사람과 마귀에 이르기까지 삼중적으로 중명된 이 순전함은 주님의 완전한 사랑의 결과였다.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였고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충성함으로써 그 사실을 증명해 보이셨다. 사람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친구들과 적들에 대한 태도에서도 까타났다. 즉 이따금 폭군과 압제자들에 대해 쏟으신 맹렬한 분노와 압제 받는 자들을 항시 부드럽게 대하시는 주님의 행동에서 사랑이신 주님의 면모가 나타난다.


그리스도에 관해 무슨 질문을 하든지 그 답변은 여하튼 사랑 안에서 결정된다. 주님의 인격에 관해 질문을 하면, 그 인격의 특성들 하나 하나가 다 사랑에서 나오므로 그 특성 전체는 결국 사랑으로 귀착된다. 주님의 모든 행동과 말씀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조사해 보면, 주께서 사랑의 힘에 사로잡혀서 말씀하시고 행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주께서 소년 시절부터 성인시절까지, 고향 나사렛에서의 생활에서부터 선생으로서의 공적 사역을 하시고 그 이후 줄곧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걸어 나가신 길을 조사해 보면 그것은 깊은 사랑의 길이다. 일생 동안의 주님의 행동을 주목해 보면 사랑으로 말미암는 행위 외에는 그 어떠한 행위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주께서 오가신 때를 살펴보고 지체하거나 서두르시는 일, 물러나셨다가 돌아와 활동하신 그 모든 일을 살펴보면 주님의 전 생애는 사랑 그 자체를, 그것도 율법의 성취로서의 사랑을 찬란하게 드러내 보여 주시는 삶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주님은 이러한 사랑 때문에 죽음을 통해서 사랑 없는 자들의 죄를 속하였다.

"죄는 불법이기" 때문에 죄인인 인간에게는 속죄가 필요하였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사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속 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인간 생활에 있어서 죄의 행동 원리를 보여 주는 최초의 증거들 중 하나는 잘못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려는 이기적인 시도였다. 그러나 사랑을 보여 주는 최상의 증거는, 사랑은 다른 사람의 잘못의 책임을 떠맡는다는 사실에 있다. 인류의 죄를 속량한 십자가는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하나님의 완전 하신 사랑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죄를 삼으셨다"(고후 5:21).

성육신 하신 사랑인 그리스도는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흠이 없으셨다. 그러나 사랑이 없기 때문에 율법을 어긴 모든 사람의 잘못과 죄를 떠맡으셨다. 이것이 속죄의 신비인데, 그 사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한없는 사랑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죽음의 신비는 한없으신 신적 사랑이 원동력이 되었다. 바로 이 점이 기독교만이 지닌 탁월성이다.

"나는 목숨을 버리노라 나는 목숨을 버릴지라도 다시 얻을 것이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랑 때문이었다. 주님은 부활의 능력으로 냉명을 다시 얻으신 후, 회개하고 믿는 모든 자들에게 생명을 주셨다.


그래서 그 생명을 받은 자들에게는 사도의 말대로 "너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영광의 소망"이시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사랑은 모든 행위의 원동력이 된다. 생활의 자극제인 사랑은 또다른 사랑의 행위들을 유발시킨다. 사랑이 최상의 이유이기 때문에 모든 추론도 역시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바울이 지은 사랑의 시만큼 사랑의 생활을 잘 묘사하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이 놀라운 묘사 가운데서 사랑에 의한 율법의 완성이 아주 완벽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 다음에 이 묘사에는, 자기에게 사랑이 있다고 하는 자를 철저히 시험해 볼 수 있는 시금석이 들어 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율법을 어기는 것은 모두 다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마음에 미움을 품는 것은 모두 다 마음 속에 그리스도가 없거나 주님의 사랑의 충동에 고의적으로 복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시내산을 벗어나서 지낼 수 있는 곳은 갈보리 뿐이다. 왜냐 하면 시내산의 법전에 나타난 모든 취지를 이를 수 있는 곳은 사랑의 완성이신 그리스도께서 보혈을 홀리신 갈보리 언덕밖에 없기 때문이다. 율법을 성취하는 때란 그리스도의 사랑이 마음에 거하며 마음을 지배하는 때뿐이다. 생활 속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통치하시게 하라. 그러면 생각파 말과 행동을 사랑으로 행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율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마음을 살피고 시험하는 일은 옛 계명으로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새 계명으로 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그 날에 한 모든 행동의 동기를 살펴보고 고든 말의 원인을 추적해 보며 모든 사상의 개념을 조사해 보라. 그리고 만일 그렇게 한 결과 사랑을 발견하게 되면 그 사람은 자신의 행동과 말과 생각에 대해 만족하여 안심할 수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렇게 자신을 철저히 조사하면 사람은 결국 자신의 사랑없음을 확인케 되고 깊은 절망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그어한 절망감 때문에 오히려 지금도 살아 계시는 분 곧 영원하신 사랑의 주님을 의지하는 새 생활로 나아갈 것이다.


이처럼 주님께 진정으로 의지하는 자는 자기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의 능력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새 계명의 표준이 주님이시고, 새 계명을 주신 분도 주님이 시며, 새 계명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주신 분도 주님이시고, 새 계명을 지킴을 통해 얻는 결과도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의 모든 진리는 주님에게로 귀결된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성도의 생활은 그리스도를 닮는 데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가장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 사랑이므로 성도 역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성도 본연의 아름다운 모습을 지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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