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7-21 12:47
[10]십계명 강해
인쇄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8,570  

제10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다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다"(출 20:17)

=====================================================================================

십계명 중 마지막에 있는 이 열번째 계명은 어떤 의미에서는 앞에 있는 계명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계명이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십계명의 두번째 부분의 마지막 요구이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를 가장 명백하게 언급하는 말씀이란 특징을 지닌다. 앞의 계명들은 모두가 다 공공연히 보여질 수 있는 행위들을 금하였다. 즉 그 계명들은 그 중 어느 하나라도 어기면 조만간에 그것이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마지막 계명은 마음으로 짓는 숨겨진 죄에 대하여 엄중한 경고를 하고 있다. 이 계명은 아직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으므로 아무도 모르게 범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 죄는 조만간에 어떤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것이다. 바로 그 점에 이 계명의 중성이 있으며 이와 같이 아직 행해지지 않은 위험에 대해 경고를 받은 사람들에게 지워지는 엄중한 책임이 있다. 영국법에서 구체적인 반역 행위는 실행되지 않은 반역 모의와는 구별된다. 그러나 반역 모의가 없다면 반역 행위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의 독특한 특성은,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넘어서 마음 속으로 은밀하게 행하는 일들까지 포함하여 인간 생활의 기이하고 은밀한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왕권을 세운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열째 계명은 사람 상호간의 관계를 다루고 있지만 그 관계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바른 관계 안에서 정하고 있다.


이 계명을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면 이러한 사실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처음에는 명령 자체를 살펴보고 다음에는 신약의 교훈에 비추어 그 명령을 살펴보고 마지막에는 그것을 오늘날의 여러 가지 조건에 적용해 보겠다.

열째 계명의 이해

열번째 계명 자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이 계명 가운데서 죄를 표시하기 위해 사용된 말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이 좋다. 본래 "탐내다" 라는 말에는 어떤 대상에 대해 기뻐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어떤 것이든지 그것에 대해 기쁨을 갖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소유하려는 욕망을 의미하기 때문에, "탐내다"라는 말은 욕망을 자극하는 기쁨보다는 소유하며는 욕망 자체를 나타내는 데 더 많이 쓰였다. 신명기에 그 계명을 다시 쓸 때는 출 20:17에서 두번 사용된 "탐내다"란 말이 두 가지 단어로 사용되었다(신 5:21). 영어 개역 성경에서 "탐내다"(covet)라고 번역된 첫번째 단어는 이미 출애굽기에서 언급된 것과 똑같은 단어이다. 그 다음에 영어 개역 성경에서 "바라다"(desire) 라고 번역된 두번째 단어는 단순히 원한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사도 바울은 롬 7:7에서 이 계명을 인용하면서 헬라 말을 쓰는데, 그 말은 신약에서 여러 가지 다른 형태로 나타나며 그 중에서도 "갈망하다"라는 뜻으로 가장 많이 쓰인다. 이 단어는 종종 "바라다"라고 번역되며 때로는 "탐내다"로 어떤 때는 "육욕"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러나 시 단어의 근본적인 뜻은 "탐내다"이며 문자적인 의미는 "갈망하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단어가 나타내는 죄는 다른 사람의 물건을 가지려는 욕망에 대한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말 자체가 암시하고 있는 의미를 주의해야 한다. 사람의 눈은 항상 아주 감탄할 만한 대상을 향하고 사람들을 즐겁게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갖고 싶게 만드는 것에 쏠린다. 그런 대상물을 갖고 싶어하는 그것이 바로 탐내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현실 가운데에는 미지수의 상황이 있다. 즉 그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만 그로 말미암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상대적인 빈곤 즉 자기가 바라는 것을 합법적인 수단에 의하여 얻을 수 없는 무능력한 상태에서 발생한다. 합법적으로 얻을 수 없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 대상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일어날 수가 있다. 그러한 욕망이 곧 탐내는 죄인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친구집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보고 감탄하며 그것이 갖고 싶어서 그와 같은 것을 구입했다고 하자. 이런 경우 그 욕망은 탐내는 죄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욕망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에 대해 감탄하는 자가 어떠한 이유로든지 그 대상물을 얻을 수 없는 경우 감탄하던 마음이 소유하려는 욕망으로 바뀔 때 이 열번째 계명을 깨뜨리는 것이다. 따라서 합법적인 방법으로 소유할 수 없는 것을 가지려는 욕망을 명백하게 금하고 있는 이 열째 계명은 앞의 다른 어떤 계명들보다 훨씬 더 차원 높은 도덕심을 요구한다. 즉 이 계명은 하나님의 권리를 인간의 욕망보다 위에 둔다.

이 계명의 전체 뜻은 이 계명에서 뽑은 다음과 같은 말들을 통해서 보다 더 잘 알 수 있다. "네 이웃의...네 이웃의...그의...그의...그의...그의...네 이웃의..." 이와 같은 반복이 일곱번이나 계속되는 것은 다른 사람의 권익을 철저히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무릇 그 자체가 정당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그것을 바라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다만 어떠한 이유로든지 자기가 바라는 것을 소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바라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이와 같이 열째 계명 자체를 조사해 본 결과는 사람으로서는 감탄에 뒤따라 일어나는 강력 한 욕망을 저지 할 수 없다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이것은 참으로 맞는 말이다. 이 사실은 타락한 인간성의 상태를 보여 준다. 그리고 이것은 바울이 죄에 대한 율법의 관계를 밝히는 중요한 논증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써 가르치려고 했던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죄가 생활의 모든 면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은 얻을 수 없는 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바로 이 욕망을 보아 명백히 알 수 있다. 욕망의 죄는 이 열번째 계명에 의해서 비추어질 때에만 뚜렷하게 드러난다. 어두움을 밝히는 탐조등과 같은 이 하나님의 명령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서, 아무도 조사하지 못 하는 사람의 마음속을 홀로 다루실 수 있는 분에게로 이끌어 그들이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 몽학 선생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


또한 이 계명의 가치와 중요성은 그것의 광범위한 적용을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이 계명은 개인 생활에 적용된다.

탐심은 매우 고상한 생활을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저해하고 마침내는 그 생활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사도 바울이 성령의 열매를 열거하는 가운데서 이러한 여러 가지 고상한 생활들이 나타난다.

"사랑과 회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그러나 탐심은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드러내는 꽃을 꺾으며 모든 꽃의 아름다움을 손상시킬 것이다. 탐심이 있으면, 사랑 대신에 의심과 미움이 있을 것이고, 희락 대신에 슬픔과 번민이, 화평 대신에 심한 불안이, 오래 참음 대신에 성급함이, 자비 대신에 잔인함이, 양선 대신에 인색함이, 충성 대신에 불성실함이, 온유 대신에 오만함이, 그리고 절제 대신에 자만심이 있을 것이다. 바울이 쓴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란 말은 그가 어쩌다가 정반대 되는 말을 한데 묶어서 든 것이 아니다. 십계명 중 열번째 말씀이 지닌 엄위는 하나님의 인자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비록 하나님의 엄위가 불처럼 엄중할지라도 그것은 영혼을 정결케 하는 불의 역할을 넘어서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질려를 대신하여 나도록"이라는 말과 같이 낙원의 푸르름과 결실을 가져오기 위만 것이다.


☛ 두번째로 이 계명은 모든 사회 생활에 적용된다.

이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 십계명의 두번째 돌판에 기록된 모든 법을 깨뜨리는 시발점이 된다. 사람이 자기 부모를 봉양하는데 사용해야 할 재물을 보고 "고르반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탐욕 때문이다. 범죄 기록을 보면 대부분의 경우 살인할 마음을 품게 된 것은 부정한 욕망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간음을 행하기에 앞서 언제나 육욕이 가득한 얼굴 표정이 먼저 나타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이 분명한 사실이다. 모든 종류의 도적질은 합법적인 방법에 의해 얻을 수 없는 것을 갖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거짓 증거를 하게 되는 악한 마음은 어쩌면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탐욕스러운 야망에 의해 자극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영역에서의 인간 상호 관계는 이 열째 계명을 어김으로써 혼란해지고 파손된다.


☛ 세번째로, 이 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필요 조건이 되는 명령이다.

탐욕의 죄를 짓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공의로우신 하나님과 사이가 틀어져 있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불만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죄는 결국 십계명의 첫번째 돌판에 있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네 계명들을 범하는 결과가 된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탐욕스러우며 이기적인 다른 신들을 만들어 온 것은 비뚤어진 인간 생활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만족하지 못하는 욕망 때문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애타게 찾는 양심을 위로할 목적으로 결국 하나님을 대신하는 어떤 형상을 만든다. 모든 종류의 불경과 신성 모독은 이렇게 해서 세운 거짓 신들에게서도 전혀 만족을 얻지 못하는 목마름에서 생겨난다. 피처럼 모든 신성 모독은 인간의 탐욕스러운 정욕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다. 마땅히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안식일을 어기게 되는 것은 인간적인 부정한 욕망에서 생겨난 들떠 있는 마음 상태 때문이다. 이러한 여러 상황을 검토해 볼 때 도덕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을 결론 짓는 열번째 계명의 말씀이 매우 광범위하게 적용되며 대단히 엄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요구하는 첫번째 계명과 마지막 계명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계명은 두 계명 안에서 결정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진정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모시고 있다면 그는 그의 하나님이 두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탐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만일 어떤 사람이 합법적으로 얻을 수 없는 어떤 것을 탐낸다면 그것은 탐욕 그 자체에서 나온 갈망 때문이라기보다는 보다 본질적인 갈망 즉 참되신 한 분 하나님께 대한 갈망의 결여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신약의 교훈

이제는 신약으로 눈을 돌려 보자. 신약만큼 이 마지막 열번째 계명의 중요 원칙들을 뚜렷하고 명확하게 반복하며 강조한 곳은 없다. 주님의 말씀은 너무나 명백하여 오해할 여지가 전혀 없다. 주님의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이 주님께 자기 형에게 유산을 자기와 함께 나누도록 명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워달라고 부탁한 것에 대한 답변으로 말씀하신 내용이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리라." 주님은 이 사실을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어 강조하셨다. 비유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 모든 것을 소유하였으나 결국 이 세상에서 참 안식을 얻지 못하였다. 또한 그는 여전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함으로써 영적인 생명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 "재물"로 영혼을 즐겁게 하려고 하였다. 그리스도 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계승한 초대 교회에서도 동일한 교훈들이 선포되었다. 바울도 역시 "탐하는 자"를 "우상 숭배자"로 간주하며 "음행하는 자"와 "더러운 자"와 같이 취급하여 그런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선언하였다(엡 5:4, 5).


야고보는 부자들은 재물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만족시키려 하기 때문에 오로지 돈 벌려는 욕심만을 따라 행동해 온 사람들을 풍자하는 가운데 이 죄의 가증함과 더불어 결국은 이 죄가 어떻게 사회의 이상을 깨뜨리게 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약 5:1-6).


베드로 사도는 그의 불 같은 다음의 말씀 속에서 간음의 원인 역시 탐심에 의한 것임을 밝힌다.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벧후 2:14).


요한은 포괄적인 뜻을 지닌 문장에서 탐욕으로 얼룩진 죄악된 생활의 일시적인 성격과 이유를 밝히면서 그것을 거룩한 생활의 영속성과 그 이유에 직접 대조시킨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히브리서 기자는 서신의 결론 부분에 가서 자기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탐욕의 죄에 대해 경고한다. 즉 그는 탐욕과 만족을 대조시키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교제를 의지하는 자들에게 탐욕은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만족만이 합당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5, 6).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는 말씀에 이 원칙에 대한 뚜렷하고 설득력 있는 진술이 들어 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경고하신 후에 이 말씀을 하셨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신 후 이어서 제자들에게 먹거나 마시거나 혹은 입을 것에 대해 염려해서는 안된다고 선언하셨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오히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했다. 이 말씀 자체는 사람들이 섬기는 두 영역 즉 하나님과 재물을 대비시키는 것으로써 암시하는 바가 매우 많다. 하나님의 영역에서 봉사를 하게 하는 힘과 동기는 안식과 만족에서 나오며 재물의 영역에서든 욕망과 탐욕이라는 것이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힘과 동기를 부여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안식이라는 조용한 힘에 의해 하나님을 섬기고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재물을 갖고자 하는 욕망의 끊임없는 에너지에 의해 재물을 섬기는 것이다. 이 점에서 탐욕의 무서운 영향력을 찾아볼 수 있다. 눈이 음흉한 빛으로 번뜩이며, 뺨이 붉게 상기되고 몸이 부자연스럽게 떨리고 또한 신경이 끊임없는 욕망으로 고동치는 것은 바로 이 탐욕이라는 열병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에 가서는 사망을 삯으로 받는 악한 행위이다. 사람이, 크든 작든 합법적으로 얻을 수 없는 어떤 것을 갈망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이건 도중에 그치지 않는 한 결국 그를 파멸시키고 말 열병에 그만큼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현대적 적용

일찍이 오늘날만큼 인간의 탐욕을 규제하는 이 중대한 원칙을 다시 강조할 필요가 있던 시대는 없었다. 세상을 특히 소위 문명화되었다고 하는 나라들을 어둡게 만드는 모든 악의 근원이 바로 탐욕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얘기일까? 약소국들에 대한 압박, 한 국가의 명예를 높여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의에 대한 무관심, 국민의 미덕을 약화시키는 거대한 악들에 대한 묵인, 이 모든 것들의 근본적인 원인을 추적해 보면, 이미 소유했을지라도 또 새로운 욕망을 일으키는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의 들뜬 마음과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이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을 고귀하게 만드는 중요한 말들이 만족할 줄 모르는 신 곧 탐욕에 매여 있기 때문에 더럽혀지고 있다. 재물(Mammon)에 대해 묘사한 와츠(Watts)의 유명한 그림(그것은 무서운 고발장이다)에서 와츠는 그 괴물을 더러운 욕심을 한껏 뽐내면서 즐기는, 거대한 몸집을 가진 존재로 묘사하였다. 그 그림의 의미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만일 내가 그림을 그린다면 괴물의 모습을 그렇게 그리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나는, 엎드려서 한 팔은 많은 국가들을 끌어 안고 있으며 다른 한 팔은 앞으로 내뻗고 있는데 더 이상 움켜 쥘 것이 없어서 화를 내고 있는 깡마르고 눈이 퀭한 모습과 굶주리고 사나운 모습을 한 형상을 그릴 것이다.


이처럼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탐욕이 발견될 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문제의 밑바닥에도 불만족이라는 똑같은 탐욕의 벌레가 맹렬하게 움직이고 있음이 발견된다. 자본가의 탐욕, 대기업의 야만적 행위, 사람들이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온갖 잔인한 행위 이 모든 것이 소유하려는 정욕에서 생겨난다. 젊은 남녀를 유린하고 있는 개인적인 모든 악행들 즉 음주, 섹스, 도박 등도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의 갈망 즉 탐욕으로부터 생겨난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가진 것에 대해 만족할 줄 모르고 계속 탐욕을 부리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것을 얻어도 이득을 보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엘리바스의 맨 마지막 말, 그것을 욥에게 적용한 것은 비록 잘못이 지만 원칙 자체로는 틀린 것이 없는 그의 말이 보다 널리 퍼져서 사람들이 믿고 따를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21.“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22. 청컨데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23. 만일 네가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

24.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25.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

26.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27.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한 것을 네가 갚으리라

28. 네가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취리라(욥 22:21-28)

확실히, 십계명의 이 마지막 말씀은 정직하게 이 말씀을 대하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동시에 전적으로 자신의 무능력함을 깨닫게 한다. 사람들 가운데는 앞의 모든 계명을 자신의 행위와 대조해 보고서도 자신들이 크게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여전히 어느 정도의 자존심을 지닌 채 남아 있는 이들이 더러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엄중하며 강력한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보아 감히 죄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바울이 삼십년 동안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고난 후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으로 살았던 자신의 옛 생활을 평가할 때에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까지 말할 수 있었지만 그 역시 "탐내지 말라"는 이 마지막 말씀을 대하고서는 죄가 그 안에서 "각양 탐심을" 이룬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그는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이 그에게는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든지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외형적인 생활을 규제하는 앞의 아흡 가지 계명에 비추어 볼 때에라도 "흠이 없었다"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나 마지막 열번째 계명에 기록된 것에 대하여 자기는 금지된 것을 바란 적이 없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십계명의 연구를 마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기에 너무나 무능력한 자기 자신들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십계명에서 생명의 법은 발견할 수 있으나 생명은 발견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끝났다. 사람들이 살면서 인간의 눈은 피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을 향해 은밀하고 조용하게 "탐내지 말라"은 양심을 구속하는 말씀을 하실 때 또한 예수께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은 해석을 덧붙이실 때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머리를 땅에 파묻고 "우리가 범죄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십계명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도덕의 빛을 비춰 주어 스스로 지은 죄를 고백하게 만들고 따라서 구원자를 기다리게 만든다. 즉 구원의 십자가 없는 십계명은 죽음을 선고할 뿐이다.


 
 

일반형 뉴스형 사진형 Total 3,387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2603 [10]십계명 강해 웹섬김이 07-21 8571
2602 [11]십계명 강해 웹섬김이 07-21 7866
2601 분열왕국의 연대표 웹섬김이 08-16 8600
2600 [1]기독교 교리사 정리 웹섬김이 08-16 13529
2599 [2]기독교 교리사 정리 웹섬김이 08-16 10957
2598 [3]기독교 교리사 정리 웹섬김이 08-16 9497
2597 [4]기독교 교리사 정리 웹섬김이 08-16 10895
2596 [5]기독교 교리사 정리 웹섬김이 08-16 11660
2595 [6]기독교 교리사 정리 웹섬김이 08-16 11254
2594 [7]기독교 교리사 정리 웹섬김이 08-16 13078
2593 [8]기독교 교리사 정리 웹섬김이 08-16 9407
2592 [1]기독교는 어떻게 유대교로부터 분리 되었… 웹섬김이 08-16 11353
2591 [2]기독교는 어떻게 유대교로부터 분리 되었… 웹섬김이 08-16 10938
2590 담임목사가 범죄하면 웹섬김이 08-16 8117
2589 [1]종교다원주의란? 웹섬김이 08-16 8582
2588 [2]종교다원주의? 웹섬김이 08-16 7944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