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의 활동시기와 역사적 배경
이사야의 활동 연대는 남 유다 제10대 왕 웃시야 왕 죽던 해부터 기록하여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제14대 왕 므낫세에 이르기까지 대략 BC 740-680 사이의 60년 기간입니다. 이사야가 선지자로서 활동을 개시하기 직전 남 유다는 웃시야가,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고 있었었으며, 당시 근동 주변 지역 상황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남쪽의 강대국이었던 애굽의 경우 왕조가 바뀌면서 내치에 치중함으로써 팔레스타인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여력이 없었고, 북쪽의 앗수르 또한 내분으로 말미암아 주변 지역을 신경 쓸 상황이 못 되었습니다.
이러한 대외적 상황은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에게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적 번영을 구가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하여 남 유다의 웃시야 왕 때 블레셋 및 암몬을 비롯한 주변 국가로부터 조공까지 받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경제적 안정적 번영은 종교, 도덕적으로 북이스라엘은 물론 남 유다까지 극도로 타락하게 되었고, 웃시야 왕의 죽음 직전의 시점부터 이사야의 대언 활동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전승에 의하면 므낫세 왕 초기(BC 680)에 톱에 의해 순교 당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대외적 상황은 웃시야 왕이 죽기 직전 BC 745년 디글랏빌레셀 3세(BC745 - BC727)가 앗수르 왕으로 즉위하면서부터 돌변하기 시작합니다.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 3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정복 전쟁을 시작하는데 이를 대처하는 남 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외교정책은 서로 달랐습니다. BC 735년경 북이스라엘은 아람과 동맹을 맺고 앗수르의 서진을 막으려 하였고, 여기에 남 유다의 동참을 요구했지만 남 유다의 아하스는 친 앗수르 정책을 표방하면서 서로 갈등을 겪게 됩니다. 이에 BC 733년에 북이스라엘은 아람과 함께 남 유다를 공격하여 많은 피해를 입혔지만 정복에는 실패합니다.
이런 와중에 아람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곧이어 북이스라엘 역시 디글랏빌레셀 3세의 뒤를 이은 살만에셀 5세(BC727-722)와 사르곤 2세(BC 722-705)의 집요한 공격으로 결국 BC 722년에 멸망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BC 8세기 말엽 애굽은 국내 체제를 정비함으로써 다시금 근동 지역의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되고 반면에 앗수르는 바벨론의 부흥으로 인해 곤란을 겪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정세를 틈타 남 유다의 히스기야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주변 국가들은 친 애굽 정책으로 돌아서면서 앗수르에 반기를 들게 되고, 이에 화가 난 앗수르의 산헤립은 대군을 이끌고 반 앗수르 동맹 국가들인 베니게, 블레셋 등을 파죽지세의 공격으로 멸망시키고. 예루살렘 또한 BC 701년 두 차례에 걸쳐 침공하여 가뜩이나 종교, 도덕적 타락에 빠져있던 예루살렘을 풍전등화의 위기로 몰아넣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시대를 향하여 이사야는 평생을 남 유다를 향한 책망과 경고 및 일시적 구원, 먼 훗날 아직 국가 체제를 갖추지도 못했던 바벨론에 의한 남 유다의 멸망과 70년간의 포로 생활에 관한 예언, 이후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에 의한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70년 포로 생활에서의 귀환, 메시아의 출현과 사역 그리고 세상 끝날에 있을 여호와의 심판과 구원, 메시아에 의한 천년왕국의 성취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선민 역사의 전개 과정의 주요 사건들에 대한 예언과 각 사건들과 관련된 책망과 위로, 경고와 약속의 말씀들을 집대성한 것이 이사야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