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장-10장): 책별로 시간 순서를 따라 배경(context)을 이해하며 성경 읽기
1. 배경
호세아가 북 이스라엘에 마지막 선지자로 사역이 끝나갈 무렵, 남 유다에서는 이사야가 선지자로서 사역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 엘리사, 오바댜, 요엘, 요나, 아모스는 이미 사역을 마쳤고, 호세아와 미가가 이사야와 같은 시대의 선지자로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기는 열왕기하 15장~21장과 역대하 26~3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기원전 740년 경부터 680년까지 사역 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그의 부친 아모스는 우리가 아는 아모스 선지자와 동일 인물이 아닙니다. 이사야라는 이름은 ‘구원이 주님의 것’임을 의미합니다. 이사야는 결혼하여 적어도 두 아들의 아버지였고 (사 7:3, 8:3), 그의 아내도 선지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으며, 예루살렘에 살았습니다 (사 7:3, 37:2, 39:3). 이사야는 약 20년 동안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모두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적 말씀을 선포했고, 기원전 722 년에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한 이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남 유다에게 예언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사야가 사역하던 기원전 8세기까지 이스라엘은 약 700년 동안 약속의 땅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가나안에서 처음 250-300년 동안 이스라엘은 사사들에 의해서 통치되었고, 그 후 약 120 년 동안 사울, 다윗, 솔로몬이라는 세 왕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917년 이스라엘은 내전을 겪었고, 이사야 시대까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두 나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이사야 시대까지 북 이스라엘에는 18 명의 왕이 있었지만, 그들 모두는 여호와께 반역하는 악한 왕이었습니다. 남 유다에는 이사야 시대까지 11명의 왕이 있었는데, 악한 왕들 가운데 종종 선한 왕도 있었습니다. 이사야 시대에 이스라엘은 애굽, 앗수르, 바벨론과 같은 강대국 사이에서 자주 전쟁에 휘말리게 되는 작은 나라였습니다. 이사야의 사역이 시작될 때 즘 북 이스라엘은 초강대국인 앗수르의 정복 전쟁의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고 남 유다는 주변 강대국들의 반복적인 위협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런 국가의 위기의 상황 가운데 어떤 왕이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패턴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한 왕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셔서 전쟁에서 승리를 하지만, 악한 왕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기에 대부분 전쟁에 패하는 것이 성경에 반복되는 패턴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웃시야 (기원전 792-740년)가 선한 왕이었고 52년의 긴 통치를 했습니다. 그러나 통치 말년 그는 주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고 그로 인해 나병으로 죽었습니다. 이사야 초기에 첫 번째 적의 침략은 강력한 동맹을 맺은 블레셋 사람들과 아랍인들로부터 왔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왕이 하나님의 길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이 불순종하자 앗수르 사람들에 의해서 남 유다는 패하게 됩니다. 요담(750-740)은 19년 동안 통치 한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시대에 유다를 공격하러 온 나라들은 그에게 모두 전정에서 패배하였습니다. 암몬과 아람 그리고 북 이스라엘과의 동맹군도 요담의 통치 아래 있던 남 유다에게 전쟁에서 패하였습니다. 아하스(735~715)는 에돔, 블레셋, 앗수르의 침략이 있을 때 전쟁에 패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히스기야 (715~686)는 29년 동안 통치하면서 블레셋 군대를 물리친 선한 왕이었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에 앗수르의 185,000 명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 그들을 전멸시킵니다.
히스기야는 인생이 끝날 무렵 병이 걸렸을 때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15년의 수명을 더 허락받았지만, 당시에는 작은 국가에 불과했던 바벨론 사절단의 방문에 기뻐하면서 그의 궁전 안을 열어 보여 주고 있을 때 언젠가 바벨론 왕이 보여준 모든 것을 취해갈 것이라는 말을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듣게 됩니다.
이사야는 오랜 기간 동안 선지자로 사역하였고 히스기야 왕의 아들인 므낫세 왕까지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므낫세 (695~642)는 유다에서 최악의 왕 중 하나로 사탄 숭배에 참여했고 심지어 몰렉에게 자신의 아들을 번제로 바치기도 했습니다. 므낫세는 이사야를 너무 미워하여 그가 말하지 못하도록 했고, 이것이 이사야 서를 기록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전승에 의하면 므낫세 왕은 이사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여 그를 빈 나무 통 사이에 산 채로 넣어 톱으로 켜서 죽였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히 11:37 (톱으로 켜는 것)이 이사야의 순교에 대한 언급이라고 생각합니다.
2. KEY 노트
이사야서는 40년에 기간에 걸친 여러 다른 예언들의 모음이므로 체계적으로 정돈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읽을 때 우리가 이해하기에 도움이 될 개괄적인 구조가 있습니다.. 1장~12장은 유다, 특히 예루살렘에 대한 책망에 관한 것입니다. 아모스가 북 이스라엘이 부유한 삶을 부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에 대해 책망한 것처럼 이사야는 유다에게도 동일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여성들이 보석과 값비싼 옷을 사는 사치에 빠져 살면서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삶에 대해서 책망합니다. 그리고 13장~23장은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의 백성을 징계하기 위해 사용하셨지만, 그들은 교만하였고, 하나님의 허용범위를 넘어서는 악의적이고 잔인함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24장~34장에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섞여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에 관한 심판의 메시지와 함께 언젠가 있게 될 다가오는 영광의 날이 두 번 묘사됩니다. 그래서 책망이 있지만 사람들은 또한 더 밝은 미래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36장~39장은 앞서 살펴본 히스기야 시대에 있었던 앗수르의 침략과 그의 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 유다 (1장~13장)
이사야의 예언은 평화와 번영의 시대 가운데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솔로몬 시대에 최고의 번영의 시기 이후로 경험하지 못했던 부유를 누렸지만, 곧 교만과 방종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우상숭배와 방탕과 불의가 만연한 사회였고, 가난한 사람들은 억압 당했습니다. 국가의 종교 생활은 형식적이고, 외식에 찬 의식에 불과했습니다. 사람들은 제사를 드리고 모든 의식을 다했지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싸늘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나라들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했습니다. 하나님은 주변 나라들이 유다의 마음을 돌이키고, 그를 신뢰해야 한다고 가르치기 위해서 이방 나라들의 침략을 허용합니다. 북 이스라엘, 블레셋, 에돔, 암몬 및 모압, 이사야 초기 사역의 초강대국인 앗수를 포함하여 훗 날에 바벨론에 이르기까지 남 유다는 항상 주변 나라들의 침략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대신 그 당시 가장 많은 보호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강대국들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모세 시대에 그의 백성들이 언약을 깨뜨리고 그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며 그의 경고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그들에게 약속하신 땅을 잃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의 사악함 (1장)
유다의 지도자와 사람들은 부모가 그들에게 해준 모든 것에 결코 감사하지 않고, 완악하게 불순종하는 아이들과 같았습니다. (1:1)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분명하고 강하게 드러내십니다. 유다는 죄악과 행악자들의 무리로 가득했으며 여호와를 진노하게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다의 도시들은 불탈 것이며, 이방의 사람들이 와서 그들의 땅을 삼켜버릴 것입니다. 아하스의 통치 기간 동안에 유다는 북 이스라엘, 시리아, 에돔, 블레셋, 앗수르 등의 나라들에게 지속적으로 공격을 받아 약탈당했습니다. (역대하 28장) 북 이스라엘 왕 아하스가 유다의 도덕적 타락을 조장하고 계속해서 여호와께 불순종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통해서 유다를 낮추셨습니다. (대하 28:19)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죄로 인해서 그들은 큰 환난을 경험하게 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보다 그 모든 환난 가운데 그들의 죄악의 삶을 반복하는 것을 더 선호했습니다. 고통의 시기가 더해질수록 아하스 왕은 점점 더 여호와께 완악하게 불순종했습니다. (대하 28:22)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아주 작은 남은 자들의 무리를 남겨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살아남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둘 다 완전히 멸망하여 흔적조차 남지 않았지만, 심판 중에도 하나님은 유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유다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중단한 적이 없습니다. 우상숭배와 불순종 가운데서도 지속적으로 희생제물을 드리고 절기를 지키며 의식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쓸모없는 희생의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고 하시며, 그들의 이중적인 행위에 혐오감을 느끼고 계시며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종교적 의식과 의식, 봉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미워하시며 우리의 행위가 오히려 가증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유다는 우리가 교회 정기적인 출석과 얼마의 헌금을 드리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다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우리들의 마음이 변하지 않고 겸손하게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없다면 하나님은 유다의 외식적인 종교 의식을 미워하신 것처럼 우리의 의식과 봉사를 미워하실 수 있습니다.
그들이 손을 펴서 많이 기도할지라도 하나님은 눈을 가리고 듣지 않을 것입니다. (1:15) 하나님께 제사와 모든 종교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감동적이고 훌륭한 기도가 드려지고 있었으나, 그 모든 것은 공허하고 쓸모없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보시고 너의 손에 피가 가득 차 있으며 스스로를 씻고 깨끗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선을 행하는 법을 배우고, 정의를 구하고, 억압하는 자를 꾸짖고, 부모가 없는 고아들과 연약한 과부들을 변호하고 돌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유다에게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고 일방적인 명령이 아니라 합리적인 설득을 위해서 그들을 초청합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18) 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유다가 회개하고 겸손하게 그에게 나아올 때 그들의 죄를 완전히 사하시고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사야는 어떻게 이렇게 깨끗이 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새 언약의 백성들은 교회는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짊어지고 죄의 값인 사망을 십자가에서 치러주셨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죄가 예수님 안에서 눈과 양털과 같이 깨끗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이 기꺼이 순종한다면 땅의 소산물들을 먹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거절하고 반역하면 칼에 멸망할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유다에게 선택권을 주 십니다. 그들은 징벌을 받는 가운데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고, 공허한 종교 의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며 기쁨으로 그분께 순종해야 합니다. 한때 신실한 도시였던 예루살렘은 이제 창녀와 같이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말해서 그들은 여호와와의 언약을 깨뜨려 버리고, 우상 숭배로 영적 간음을 범하고 있습니다. 공의와 정의가 예루살렘의 시대는 잊혀진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살인자, 정치적 부패로 가득한 곳이 되었고, 그들의 왕자들을 완악하고 반항적입니다. 포도주는 물과 섞어져 팔리고 있었고, 뇌물과 약자들에 대한 불평등으로 고아와 과부들 같은 사회의 약자들은 내버려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루살렘을 정결하게 하실 것이며, 언젠가 예루살렘은 의롭고 신실한 도시로 불릴 것이고, 시온은 정의로 구속될 것입니다. 유다는 상수리나무에서 우상숭배를 행했습니다. 시온이 정의로 구속될 때 그들은 이전의 우상 숭배를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상수리나무의 잎은 죽어가고, 정원에는 물이 없을 것이며, 강하다 하는 사람들이 마르게 될 것이며 결국 불에 타버릴 것입니다. 계속 진행되어 오던 유다의 종교 의식들은 영적으로 바짝 말라 마른 나뭇가지가 태워질 준비가 되어있는 것처럼 회개하지 않는 유다는 심판의 불에 불탈 준비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성산 (2장)
이사야 2:1-3의 말씀은 미가 4:1-3에서 반복됩니다. 이사야와 미가는 동시대의 선지자였기 때문에 유다를 향한 동일한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말일에 (in the latter days, 2:2)라는 구절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가 그들을 다스리는 ‘메시아의 시대’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메시아 예수께서 천년 동안의 통치 시대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시편 72, 사 11:4-9, 렘 23:5-6, 눅 19:12-27, 마 5:18) 여호와의 성전은 예루살렘 산 정상에 세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민족이 그곳으로 올 것이며, 천년 동안 이스라엘은 전 세계를 통치하는 세계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그곳은 온 땅을 이끄는 나라가 될 것이며 이스라엘의 중심은 메시아의 통치를 이룰 그의 통치의 중심 수도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국가는 예수 메시아의 정부의 수도인 예루살렘의 통치에 따를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길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우리는 그분의 길을 걸을 것입니다. 그의 통치의 때에 모든 세상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며 그에 복종할 것입니다. 이 땅에 완전한 공의와 정의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며, 완전한 의와 평화의 시대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칼과 창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또한 여기서 심판의 날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2:10-22) 높은 탑, 요새화된 성벽, 다시스의 배들은 모두 인간의 교만과 거만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에 인간들의 거만한 성취는 모두 겸손하게 낮아질 것이며, 그날에는 오직 여호와 만이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
유다의 죄 (3장)
유다에게 식량, 물, 유능한 지도자가 없을 것입니다. (사 3:1-7)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로부터 음식과 물을 제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음식과 물이 없는 것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예루살렘과 유다에게 경건하고 유능한 지도자, 선지자와 장로들을 빼앗음으로써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지혜롭고 유능한 지도자 대신에 하나님은 아이들을 그들의 왕이 되게 하여 유다를 다스릴 것입니다. 이 경건하지 않고 무능한 지도자들 때문에 사람들은 억압 당하게 되고 사회 질서는 무너질 것이며, 아이와 같은 지도자들은 노인에게는 무례하고 공의롭고 명예로운 사람들을 짓밟을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유다는 그들의 말과 행실로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고, 그들의 혀와 행위는 여호와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그분의 거룩한 분노를 자극합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방백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척했지만, 그 모든 것은 외식이었고, 가난한 사람들을 강탈하여 자신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그들의 빈곤을 이용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여자들은 고급스럽고 호화로운 보석과 액세서리에 집착했습니다. 그들은 삶의 대부분을 외모에 사용하며 사치를 일삼았습니다. (16) 이사야는 그들이 집착하여 사치를 일삼으며 사용했던 팔찌, 스카프, 머리 장식, 다리 장식, 향수, 지갑, 거울 등등 각종 품목들을 언급합니다. 그 품목들을 보면 오늘날 호화 백화점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들의 외모에 대한 집착, 사치에 대한 사랑, 그들의 난잡함으로 인해 예루살렘의 딸들이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름답게 꾸미는 대신 굴욕을 당하게 될 거시며, 그 사치스러운 옷들은 초라해질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옷을 포로와 굴욕의 표로 바꾸실 것입니다. 그들은 악취와 대머리 등 포로들의 수치와 박탈을 겪을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주님의 가지 (4장)
그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광스러울 것입니다. 여호와의 싹(the branch of the Lord)은 메시아의 칭호입니다. 이 이미지는 11:1에서 다시 반복됩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지팡이가 나오고 그의 뿌리에서 가지가 자랄 것입니다. 그것은 예레미야 23:5에서 반복됩니다. 여호와께서 의의 한 가지인 다윗과 같은 메시아를 일으킬 것이며, 그의 통치 아래서 그들은 번영을 누릴 것이며, 완벽한 공의를 행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가지가 다스리는 날에 시온의 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거룩하다고 불릴 것이며, 진정으로 여호와께 분리된 마음, 생각, 몸이 이 세상의 생각과 마음으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께 온전히 속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포도원은 파괴되고 악인들에게는 화가 임할 것입니다. (5장) 이 이야기는 많은 과실을 맺고 유익을 주는 포도원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언덕 위에 가장 좋은 자리에 준비된 것입니다. 땅을 고르고 아름답게 가꾸어 포도나무를 심었고, 많은 과실을 맺을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곧 좋은 포도나무 열매를 맺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먹을 수 없는 들포도가 맺혔습니다. 들포도 열매는 왕하 4:39에 ‘야등덩굴’이라고 기록된 이 열매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만, 자연적으로 쓴맛이 나고 악취가 나며 독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실하지 못한 언약 백성의 자기 의지와 거짓 종교를 비유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결실이 없는 것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열매를 맺지는 신앙에 대해서 경고하고 말하고 있지만, 썩어서 공기를 오염시키고 해를 주는 삶은 열매 없는 삶보다도 더욱 해를 끼칩니다. 포도원의 주인인 하나님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기 의지로 하나님을 버리고 그의 아름다운 계획을 반하는 행동으로 악취 나고 독이 나는 열매를 맺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물과 거름을 주면서 가꾸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을 그제서야 은혜를 헛되이 받고 멸시하는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5:8)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탐욕스러운 부동산 구매 및 개발에 관한 것입니다. 욕심 가운데 많은 집을 구입하고 이 세상의 물질적 부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부동산 거래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며 황량하고 비어있는 집들이 될 것입니다. 아침부터 일어나 술을 마시며 온종일 파티를 하는 사람 들에게도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삶은 약물, 알코올 중독과 유희의 음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일과 그의 역사에 관해서 전혀 알지 못합니다. 오락과 파티, 스포츠와 같은 엔터테인먼트에 중독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잊습니다. 그들은 그런 삶과 상관없이 어떤 식으로든 그분을 기억한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실상 그들은 여호와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며 우리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그분의 일들에 관심이 없습니다. 진정으로 주님의 일을 생각하고 그분의 일하심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파티 오락 등의 유희를 즐기는 삶보다 훨씬 더 의미 있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에 관심을 두게 될 것입니다. 악을 선하고 선을 악이라고 부르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습니다. 영리하고 기만적인 말을 사용하며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를 흐리게 하며 죄를 변명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행하는 악을 선이라고 부르고, 다른 사람의 선을 보고 악이라고 부릅니다. 이사야는 사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도덕적 혼란의 깊은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현명하다 생각하는 자들에게도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교만으로 가득 차고 하나님의 지혜와 표준을 거부합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도 자기 자신의 방법으로 해석하고 판단합니다. 자신의 기준이 표준이라 생각합니다. 이 모든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의 지혜를 높입니다. 음주 향락에 빠져 살며 자신의 쾌락과 오락에만 관심이 있고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으며, 악인을 뇌물로 정당화하고 의인에게서 공의를 빼앗는 자들은 화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결과를 유다는 멸망하여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파티와 오락 때문에 하나님을 잊은 자들에게 가득한 웃음은 멸망과 포로의 삶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심판 가운데서도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높여질 것이며, 온유 한 자에게 기업이 주어질 것이며, 그의 양들은 푸른 초장에서 먹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확실하고 분명한 심판을 약속하셨습니다. (사 5:24-30) 불이 나무 그루터기를 삼킬 때, 화염이 곡식의 겨들을 불사르는 것과 같이 하나님은 갑작스럽고 완전한 심판을 경고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심판을 그들이 피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법을 거부하고 인간의 소견을 그분의 말씀보다 높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의 말씀을 경멸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원방의 이방 나라들에게 깃발을 들고 땅 끝에서 그들에게 휘파람을 불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이방 민족을 부르셔서 유다를 침략하는 심판의 도구로 만드실 것입니다.
이사야의 소명 (6장)
6장에서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은 해에 이상 중에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습니다. 유다 왕 웃시야는 역대하 26장과 왕하 15:1-7 (왕하 15장에서는 웃시야를 아사랴라고 함)에 묘사된 왕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왕으로 16세에 왕위에 올라 52년 동안의 긴 시간 동안 유다를 통치했습니다. 왕하 15:3은 그의 아버지 아마샤가 행한 모든 일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여호와를 찾는 동안 하나님은 그를 번영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대하 26:16에 그가 강할 때에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여호와의 성전에서 제사장에게 주어진 분향단에 분향하는 일을 행하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 하였고, 웃시야는 문둥병으로 격리된 체 살다가 생을 마감합니다. 그래서 웃시야 왕이 죽은 해라는 것은 먼저 그 해에 위대하고 현명한 왕이 죽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비극적인 종말을 가진 위대하고 현명한 왕이 죽은 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한 왕이었던 웃시야는 결국 비참하게 죽어 작은 소망도 사라진 상황에서 영적으로 더욱 어두운 멸망의 길을 향해 달려가는 유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입니까? 이런 상황 속에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이사야는 작은 소망도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여전히 이런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왕의 보좌에 앉아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하늘의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고 책임지고 계십니다. 하늘에는 보좌가 있고, 주 하나님은 우주의 주권자로서 보좌에 앉으셔서 다스리는 것이 천국의 모습입니다. 이사야는 더 이상 선한 왕이 없는 유다의 모습을 보면서 낙심에 빠져 있을지 모릅니다.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걱정하지 마라 그들의 보좌에 누가 있든지 여전히 나는 천국의 보좌에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스랍 천사가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스랍 천사는 ‘불타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스겔 1:13에서는 스랍 천사를 마치 살아있는 생물들 사이에서 횃불처럼 타오르는 생명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겔 10:15 참조) 스랍 천사들은 거룩, 거룩, 거룩하신 만군의 주님을 외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는 반복하는 것은 더욱 강조하는 것입니다. 거룩, 거룩, 거룩하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한 한 가장 높은 수준으로 그의 거룩함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그분이 계시고 행하시는 모든 것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거룩한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거룩한 지혜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 성격의 한 측면이 아닌 그분의 전 존재적 특성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에게 속해 있는 모든 것을 거룩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위해 구별되어 하나님께 속한 자는 거룩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며 피조물에 속하지 않은 창조주라는 점에서 피조물과는 구별된 거룩한 분입니다.
천국의 보좌의 주변에는 연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영광의 구름은 종종 주님의 임재가 있다는 것을 표시해 줍니다. 이 연기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 기둥 (출 13:21-22), 시내 산의 구름 (출 19:18), 성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을 상기시켜 줍니다 (왕상 8:10-12). 내 눈은 만군의 여호와인 왕을 보았으며 그때 이사야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으나 만군의 주 여호와 가 왕의 보좌에 앉아 계신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입술이 불결한 죄인입니다’라며 그의 임재 앞에 자신이 죄인 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당신의 죄악은 제거되고 당신의 죄는 깨끗해졌습니다’ 이사야의 죄는 불태워져서 사라졌고 그의 죄는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사야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그 죄로부터 깨끗함을 입어 이제 그는 하나님을 섬길 준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는 것은 이사야가 그의 모든 사역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복종하겠다는 헌신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가겠습니다라며 그분의 부르심도 없어 자기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부르심을 받고도 응답하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부르심을 받을 때 즉시 온전히 기쁨으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듣기는 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이해하지 못하는 영적 소경과 귀머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사역은 도시가 황폐화되고 주민이 없어지게 될 멸망이 올 때까지 계속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멸망 가운데서도 적어도 10분의 1에 해당하는 남은 자들에게 회복이 있을 것이기에 소망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전해야 할 것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제7장: 아하스 왕을 향한 이사야의 예언적 메시지
북 이스라엘과 아람 나라가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합니다. 요담의 아들 아하스는 유다의 사악한 왕이었으며, 다른 신들을 숭배하고 그의 아들을 몰렉에게 제물로 바쳤습니다 (왕하 16:1-4). 아하스는 유다의 선한 왕이 될 히스기야를 아들로 둔 것 외에는 잘 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는 비겁하고 미신적이며 위선적인 통치자였으며 유다가 가진 최악의 왕 중 하나였습니다. 아람의 르신과 북 이스라엘의 베가는 동맹을 맺고 남 유다를 공격하지만 실패하고 맙니다. (왕상 16장) 아하스는 그들의 공격으로부터 이기기 위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그가 앗수르 왕과 동맹을 맺기 위해서 주님의 집에 있던 은과 금을 아수르 왕의 은혜와 보호를 받기 위해 선물로 바쳤습니다. (왕하 16:7-9) 아하스는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셋을 만나러 갔을 때 그는 이방 신들에게 제사하는 신전과 제단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그 모형과 패턴을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을 개조했습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이방 왕들과 경건하지 않은 동맹을 했던 완전히 타락한 사람의 강력하고 극단적인 예입니다. (왕하 16:10-18) 이 장의 사건은 아하스가 아수르 왕 디글랏 빌레셋을 의지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에 있었던 사건이며, 이사야 7:1에서 그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남 유다를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전쟁의 최종 결과를 들었지만 이사야는 자신의 예언을 아하스에게 설명하기 전에 최종 결과를 먼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하스 왕은 시리아와 이스라엘이 연합하여 유다와 전쟁을 벌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와 그의 백성의 마음은 숲의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듯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아하스 왕과 그의 백성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대신 두려움으로 반응합니다. 유다 왕과 유다 백성이 여호와를 신뢰했다면 그들은 이런 전쟁을 앞두고도 하나님의 평화를 누렸을 것입니다. 이사야를 통해 아하스에게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사 7:3-9) 이사야는 스알야숩이라는 그의 아들을 데리고 아하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스알야숩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남은 자들이 돌아올 것이다’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유다의 수도를 무찌르고 (성벽에 틈을 만들어) 아하스를 퇴치시키고 자신의 왕을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이사야는 아하스에게 그들이 도모하는 일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니 두려워하거나 마음이 약해지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님 안에서 용기를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아하스와 그의 백성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눈으로 주어진 상황을 바라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하스는 북 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 군대를 끔찍한 위협을 보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금방 꺼지고 사라질 담배의 연기처럼 보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아하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와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육신적인 자신의 생각을 따라 앗수르 왕을 신뢰했습니다. 그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예루살렘이 살아남았을 때 아하스는 자신의 결정과 전략이 성공했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결정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보호하셨던 것이고, 그가 여호와를 신뢰했다면 아하스와 유다는 더욱 축복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사야가 그의 아들 스알야숩을 함께 데려가서 아하스에게 예언의 말씀을 주신 것은 그의 이름이 ‘남은 자는 돌아올 것이다’ (A Remnant Shall Return)를 의미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하스가 앗수르 왕을 신뢰했기 때문에 결국 유다는 포로가 될 것이며, 후에 남은 자만이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아하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표징을 요청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방금 아하스에게 믿고 축복을 받으라고 도전하시며, 이제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자신을 위한 표징을 주실 것을 제안합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내가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그를 시험하지도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가 매우 영적이어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들리나 사실은 그가 사인을 구하게 되면 그는 그것을 믿어야 할 의무를 갖게 될 것이고, 그런 하나님과 관계되는 모든 과정조차 귀찮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아하스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이때 ‘보라,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메시아 예수의 탄생에 관한 가장 유명한 예언 중 하나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의 이 예언은 가까운 미래와 먼 미래에 성취될 수 있는 예언의 ‘이중 성취’의 원리를 잘 보여줍니다. 이 예언의 가까운 미래의 성취는 예루살렘의 아하스를 이스라엘과 아람이 공격할 때 이루어졌습니다. 아이가 악을 거부하고 선을 택하는 것을 알게 되기 전에 곧 몇 년 안에 북 이스라엘과 아람이 모두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징조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아하스에게 구원의 표시와도 같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한 젊은 여성이 곧 결혼하여 아들을 잉태하여 이름을 이런 예언의 사실을 모른 채 임마누엘이라고 짓게 되었고, 이 소년이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기 전에 이스라엘과 아람은 패배하게 되었다는 것을 통해서 이 예언이 우선적으로 성취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예언의 먼 미래에 궁극적인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동정녀 탄생을 말하고 있다고 마태는 증거합니다. 우리는 이 구절이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마태복음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마 1:23) 이 구절은 처녀가 잉태할 것이며 그 잉태가 다윗의 온 집에 대한 표징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압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처녀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가 ‘젊은 여자’로 번역될 수도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이사야가 단순히 처녀가 아닌 젊은 여자가 출산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젊은 여성과 처녀의 두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예언의 말씀의 가까운 성취는 출산하는 젊은 여성을 언급할 수 있지만, 먼 성취 또는 궁극적인 성취는 분명히 기적적으로 임신하고 출산하는 처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70인 역이 구약 성경을 처녀 이외의 문맥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그것을 ‘처녀’ (virgin: parthenos)로 만 번역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 분명해집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 하나님’을 의미하는 임마누엘로 알려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하스가 신뢰하는 나라인 앗수르도 유다를 파멸시키기 위해서 올 것입니다. (사 7:17-25) 이것은 어리석게도 여호와 대신 앗수르를 신뢰했던 아하스에게 나쁜 소식이었습니다. 아람과 이스라엘 군대는 앗수르에게 패할 것이지만 그들은 결국 아하스의 유다도 패배시킬 것입니다. 아하스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믿었다면 그를 두렵게 했을 것입니다. 앗수르 사람들은 정복한 나라들에게 행하는 잔인함으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자비한 고문과 굴욕을 주었습니다. 여호께서는 휘파람을 불며 앗수르의 군대를 불러올 뿐만 아니라, 애굽 군대도 불러와 유다를 침략하게 하실 것입니다.
제8장: 다가오는 앗수르의 침공과 ‘마헬살랄하스바스’의 징조
이사야는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앗수르에 의한 침략이 있을 것을 선포합니다. 이 예언은 이사야 7장에 이어서 계속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왕 아하스에게 아람 군대와 북 이스라엘의 연합군에 의해 유다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람과 북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시며 유다에 대한 그들의 공격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도모는 서지 못할 것이며,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아람과 북 이스라엘의 패배가 얼마나 빨리 올 것인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설명하는 표징을 주셨습니다.
아이가 내 아빠와 내 엄마라고 부를 수 있게 되기 전에 앗수르는 아람과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마헬살랄하스바스의 탄생과 그 이름을 통해 아람과 북 이스라엘을 심판할 앗수르 침공의 시간을 정하셨습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사 7:10-17의 임마누엘과 같은 증표와 동일하지만 더 공개적이고 더 분명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사람들은 그들의 작은 실로아 시냇물에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르신과 르말라야의 아들들인 사악한 지도자들을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홍수의 큰 강처럼 앗수르의 군대는 둑에 갇혀 있는 것처럼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며, 그들은 이스라엘과 아람에 대한 공격이 마치 홍수가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 북부 국가를 완전히 정복할 것이며, 북부의 열 지파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앗수르 사람들은 남 유다를 정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의 공격에 의해서 멸망하지 않았지만 그들로부터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실제로 왕하 18:13은 앗수르가 유다를 침공한 정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 14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의 모든 요새 도시를 쳐들어가서 점령했습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성전에서 벗겨낸 금과 귀한 물건들을 조공으로 앗수르의 왕 산헤립에게 바쳐 그를 예루살렘으로부터 돌아서게 만들었고 예루살렘은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사야 7:14의 임마누엘의 예언을 다시 언급합니다. 앗수르 인들이 침공할 땅은 실제로 유다 아하스 왕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 하나님, 오실 메시아, 임마누엘에게 속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들의 도모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앗수르의 침략의 희생자 (아람, 이스라엘, 유다)들은 앗수르의 침략을 대비할 수는 있지만 (여러분 스스로 띠를 두르십시오), 그들의 모든 준비들이 그들을 보호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어떤 대비와 계획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앗수르를 통한 심판 가운데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의 편에 서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람, 이스라엘, 유다가 그것에 반대할 수 있는 모든 계획과 준비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이야기들이 음모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들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사야와 모든 유다 백성은 그들이 처한 위험을 깨닫고 두려움과 공포에 빠지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이 주어질 당시 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군은 유다의 많은 것을 파괴한 상태였고,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다 왕 아하스를 쫓아내고 자신들의 원하는 허수아비 왕을 세우려고 계획했습니다. (사 7:6) 이사야는 아람과 이스라엘의 군대가 유다를 정복하는 데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한 대로 그들의 정복 전쟁은 실패했지만, 유다에게 많은 피해를 입힐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8:13)
하나님을 경외하십시오. 음모와 위협을 두려워하는 대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십시오. 적군의 자비를 의지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당신의 원수를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과 당신의 관계를 걱정하십시오! 그는 성소와 같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성스러운 장소이시며 우리의 보호처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적들로부터 안전하게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를 믿는 자들에게 여호와는 성소와 같으실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는 걸림돌이 되고 공격의 반석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대신에 그분에 의해서 멸망에 빠질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걸려 넘어질 것이며, 완전히 파괴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아무 활동이 없는 수동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그분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전적으로 그분의 모든 움직임에 집중하며 그분의 모든 소망에 응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사야가 말씀을 선포하고 있을 때 유다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이스라엘과 아람 군대의 공격을 직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전쟁을 대비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앗수르 인들의 공격에 대한 위험에 대해서도 듣게 되었을 때 앗수르 군대에 모든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의 유혹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초점이 주님이 아니라 군대를 향하고 있을 때 이사야는 주 여호와께 초점을 맞추고 아람과 이스라엘 군대와 싸울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면서 다가오는 앗수르의 공격을 준비할 것을 권고합니다. 증거의 말씀들을 싸매고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하라(8:16) 는 것은 여호와를 기다리는 것은 그분의 말씀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 듣기를 기다림으로써 주님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8:18)
이사야의 자녀들의 이름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의 증표로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의 표적과 기사를 위한 것입니다. (사 7:3, 8:3) 여기에 나와 주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나의 자녀들이 여러분들을 향해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마헬살랄하스바스라는 이름은 ‘빠르게 서둘러오는 약탈자’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시리아, 이스라엘, 유다를 향한 앗수르에 다가오는 공격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스엘야숩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남은 자들이 돌아올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가져올 회복에 대한 약속을 의미합니다. 이사야라는 이름은“구원은 여호와께 있다"라는 뜻으로 이것은 유다가 가져야 하는 태도와 희망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아람과 북 이스라엘의 현재 위험과 곧 직면할 앗수르의 위험에 처한 유다는 마법사들에게 인도와 위로를 구하려는 유혹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주술사들 같은 이들을 의지하는 것에 대한 어리석음을 폭로하며 죽은 자를 구하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구하라고 권면합니다. 어려움에 처할 때 하나님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다면 여러분의 하나님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죽은 자와 같은 그들의 모든 속임수와 어리석음을 버리고, 대신 그의 율법과 언약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십시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을 의미하고 언약의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성취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말하고 행할 때 빛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메신저의 내용이 다르면 온전한 선지자가 아니며, 그들은 어둠 속으로 쫓겨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주술과 신접하는 자 같은 죽은 자를 신뢰하면 빛이 아니라 어둠을 구하는 것입니다.
예언된 아이가 태어나다 (9장)
암울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이사야 9장에서도 계속됩니다. 이사야는 다가오는 앗수르의 침공에 대해 유다에게 경고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땅을 바라보며 괴로움과 어둠, 고통의 우울함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둠 속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앗수르 인들의 침공은 유대 민족, 특히 약속의 땅 북부 지역의 스불론 땅, 납달리 땅에 특히 끔찍하게 임할 것입니다. (8:22) 이러한 맥락에서 이사야 9:1의 약속은 그들에게 더욱 소중합니다. 약속의 땅 북쪽 지역인 갈릴리 바다 (이방인의 갈릴리) 주변은 앗수르 인들이 북쪽에서 침략했을 때 가장 심하게 황폐화되었습니다. 이 황폐한 땅은 먼 훗날 메시아의 사역을 통한 축복의 장소가 될 것입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9:2)
어둠 속을 걸었던 사람들은 큰 빛을 볼 것입니다. 북부의 12지파는 앗수르의 침략에 처음으로 고통을 당할 것이나, 하나님의 자비로 메시아의 빛을 가장 먼저 보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4:13-16은 이사야 9:1-2장을 인용하며 이사야의 예언이 메시아 예수의 갈릴리 사역을 통해서 분명하게 성취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대부분이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바다 주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한때 멸시되던 땅에 특별한 축복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당신은 나라를 번성시키고 그 기쁨을 증가시켰습니다. 메시아의 사역은 이스라엘에 기쁨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이 결혼식 파티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9:14-15)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 9:6)
이사야가 예언했던 아이가 태어날 것인데 이사야는 그를 반복의 히브리어 문학적 도구를 사용하며 아이와 아들이라며 거듭 강조하며 말하고 있습니다. 메시아의 탄생에 대한 이 영광스러운 예언은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는 메시아가 사람이 될 것임을 상기시켜줍니다. 그의 통치는 그의 어깨 위에 있을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이 예언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과 만주의 주로서 온 세상의 땅을 다스리실 천년왕국의 시대에 성취될 것입니다. (계 20:4-6, 시편 72, 사 2:1-4, 사 11, 사 65:17-25, 스가랴 14:6-21).
메시아는 기묘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누구이며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의 영광이 우리를 경이로움으로 채워질 것이며, 여러분은 결코 그 메시아를 바라보며 경이로움과 놀라움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메시아는 우리의 조언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인도하기에 적합한 분이 시며, 상담자로서 그리스도인의 즉각적인 자원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문제를 도울 수 있는 최고의 조언자입니다. 메시아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모든 창조와 영광의 하나님이시며 하늘에서 다스리시는 여호와이시며 우리의 예배와 찬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메시아는 영원하신 아버지이십니다. 이 히브리어 단어의 개념은 예수가 모든 영원의 근원 또는 저자이며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 자신이 삼위일체 안에 계신 아버지의 인격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메시아는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는 특히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평화를 이루시는 분입니다. 메시아 통치의 영광. 그의 정부와 평화의 증가에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사 9:7) 메시아의 통치는 영원할 것입니다. 천년이라는 그의 특별한 통치의 기간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단지 1,000년 동안만 지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메시아의 통치는 끝이 없으며 그분은 영원토록 통치하실 것입니다. 메시아 예수는 사무엘 하 7장에 다윗에게 약속된 언약을 성취하시며 보좌에 앉으셔서 영원토록 다스리실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부분 (사 9:8-10:4)은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분은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로 끝이 납니다. 그들의 교만 때문에 이스라엘은 적들에게 패배할 것입니다. (9:8-12) 그들의 자부심과 오만함으로 성의 벽돌이 무너졌지만 다듬어진은 돌로 성전은 재건될 것입니다. 뽕나무들은 잘려나가고 백향목으로 대신 세워질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백성들은 자만심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실지라도 그들은 무너진 것이 무엇이든 더 나은 것으로 재건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오만하게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져올 심판에 대해서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의 대적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낼 폭풍과 같은 공격을 견딜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은 향해 연속적인 적군들의 강력한 파도와 같은 공격들을 보내실 것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모든 것을 재건하겠다는 오만한 생각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 때문에 그분의 분노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고, 그분의 심판의 손은 가만히 그들을 향해 뻗어 있습니다.
회개를 거부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사 9:13-17) 심판이 행해져도 이스라엘은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맞았을 때 더 저항하는 어리석은 동물과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머리와 꼬리를 끊으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잘 못된 길로 인도하는 자들인 장로들과 거짓 선지자들은 끊어질 것입니다. 악이 만연하여 그들은 자기 형제들을 공격할 것입니다. (사 9:18-21) 사악함이 불처럼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사악함은 멈출 수 없고,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불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불의 연료가 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심판의 불은 두 가지 의미에서 사람들에 의해 촉발됩니다. 첫째, 그들의 사악함은 하나님의 심판의 불에 연료를 공급합니다. 사악함이 사라지면 불을 지속시킬 연료가 없을 것입니다. 둘째, 그들은 불에 타서 소실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불은 단지 사람들의 사악하고 혐오스러운 정욕으로 인해서 그들 사이에서 타오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불을 피우거나 불을 피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회에 만연한 불의로 추방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사 10:1-4) 불의한 법령을 선포하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습니다. 그들은 정의에 굶주린 사람으로부터 빼앗고, 과부가 그들의 먹이가 되게 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것을 착취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불공평하게 대했고 약한 사람들을 짓밟았습니다. 그들은 장차 임할 형벌의 날에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겠습니까? 여호와께서는 나 없이는 원수들 앞에서 너희에게 소망이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앗수르의 교만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10장)
하나님의 지팡이인 앗수르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앗수르를 아람, 북 이스라엘, 남 유다에 대한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이라고 계시하셨습니다. 하지만 앗수르는 세 나라들보다도 더 사악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앗수르를 세 나라들을 심판할 분노의 지팡이로 사용하셨습니다. 앗수르는 목자들이 양을 인도하고 시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지팡이와 같이 사용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앗수르는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앗수르는 아람, 북 이스라엘과 유다를 공격할 때 주님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심부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전리품을 잡고 나라들을 정복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앗수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앗수르는 하나님의 뜻이나 영광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많은 국가를 파괴하고 많은 전리품들을 취하기만을 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앗수르 제국을 북 이스라엘과 아람을 심판하는 도구로 쓰실 것이지만, 또한 그들의 오만함으로 인해 앗수르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앗수르 왕의 오만한 마음의 열매와 그의 거만한 외모의 영광을 처벌할 것입니다. 앗수르 왕의 자존심은 그의 오만한 마음에서 발견되었고 그의 거만한 외모를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앗수르 왕은 자신의 손으로 모든 나라들을 정복했다고 자신의 지혜와 힘을 과시하며 자신에게 영광 돌립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앗수르의 높은 콧대를 꺾으시며 그들에게 위기를 보내실 것입니다. 그의 심판은 모든 것을 불태우는 불과 같을 것이며, 그들의 숲과 밭의 열매들을 모두 소멸시킬 것입니다. 주님은 앗수르를 예전 모습의 그림자로만 남기실 것입니다.
하지만 다가오는 앗수르 인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보존하실 것입니다. (사 10:20-27) 주님은 유다에게 아람과 북 이스라엘의 위협이 닥쳤을 때 앗수르를 그들의 구원자로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7 장).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아람과 이스라엘의 손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며 그들이 앗수르를 신뢰할 필요가 없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 왕 아하스는 하나님의 조언을 따르지 않았고 앗수르를 의뢰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앗수르를 사용하여 아람 군대와 북 이스라엘을 물리치셨지만, 또한 앗수르를 사용하여 유다를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실 것입니다. 이제 여호와께서는 앗수르의 공격에 대비하여 유다를 준비시키시며 이 모든 일을 그분이 다스리고 계시며 지금이라도 그분을 신뢰할 수 있음을 상기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오래 참으심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다시는 앗수르 같은 나라들을 의지하지 않고 여호와를 의지할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백성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이런 일들을 겪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의 남은 자들을 보존하실 것이며, 그들을 변화시켜 하나님을 다시 신뢰하며 여호와를 의지하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따라서. . . 앗수르 인을 두려워하지 말라! 심판의 때가 오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 계획이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이것은 사실 믿기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가능에 직면할 때나 질병으로 고통 당할 때든지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을 신뢰하기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날에 그의 짐이 당신의 어깨에서, 그의 멍에가 당신의 목에서 제거될 것입니다. 앗수르는 참으로 유다를 괴롭히고 압제할 것이지만 영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앗수르 군대의 도착에 대해서 예언적으로 설명해 주십니다. (사 10:28-32) 위안과 격려의 말씀을 바로 전에 주셨기 때문에 유다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전혀 심판을 보내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유다의 많은 도시들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과 함께, 비록 그가 공격 후에 회복될지라도 하나님께서 실제로 앗수르 인들의 침략을 허용하실 것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 언급하고 있는 도시 목록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앗수르의 침공의 과정을 보여줍니다. 놉은 예루살렘의 바로 외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앗수르 군대가 유다를 대적하기 위해서 올 수 있는 곳이 여기까지였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룻밤에 185,000 명의 앗수르 군대를 죽이시는 심판을 이곳에서 행하셨고, 그들의 침략은 여기서 멈추게 될 것입니다. (사 10: 33-34) 여호와께서는 유다 백성 가운데 교만한 자들을 낮추실 것입니다. 거대한 숲은 영원히 서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은 그것을 잘라 내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교만한 자와 유다의 높은 키를 꺾으실 것입니다. 한때 강력한 숲에 남게 될 모든 것은 그루터기뿐 일 것입니다. 그리고 레바논은 권능이 있는 자에 의해 무너질 것입니다. 레바논의 숲은 크고 거대한 백향목들로 유명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와 모든 민족 가운데 교만한 자를 심판하실 것이며, 모든 삼림들이 찍혀 버리듯 그들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제 11 장: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메시아의 의로운 통치
이사야 10:33-34에서 마치 거대한 나무가 잘리는 것처럼 교만한 자는 주님으로부터 잘려 나간 것과 같습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그루터기를 살펴보시고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가족의 뿌리인 그루터기로부터 가지를 다시 자라게 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앗수르 인들과 다른 사람들이 와서 심판을 내리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사용하시며 그들로부터 생명 역사를 가져오실 것임을 유다가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래전에 죽은 그루터기 같더라도 하나님은 그곳에 생명을 불어 넣으실 수 있습니다. 죽은 것처럼 보이는 그루터기에서 나오는 가지는 간신히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가득하고 주님의 영으로 충만합니다. 메시아는 주님의 영의 일곱 가지 특성인 충만함과 완전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혜의 영이 메시아 위에 있습니다. 오실 메시아는 모든 일에서 온전히 지혜로우십니다. 이 구절은 계시록 1:4에서 사용된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는 용어의 배경이 됩니다. 계 3:1, 4:5, 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