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1년 마르키아누스 황제가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려고 나서자 훗날 추방되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디오스코로스는 황제는 교회 문제에 개입하지 말라면서 반대했다. 황제는 칼케돈에서 대리인단을 통해서 자신에게 대담하게 반기를 든 디오스코로스 총대주교에 대해 혹독한 징계 조치를 내리도록 강권했다. 449년 디오스코로스 총대주교는 칼케돈파 역사학자들이 강도 공의회라고 규정한 제2차 에페소스 공의회 의장을 맡았다. 제2차 에페소스 공의회는 한 분이시며 강생하신 하느님 말씀의 그리스도론을 주장한 합성론을 확인하고 단성설을 주장한 에우티케스를 이단으로 단죄했다.
칼케돈 공의회는 디오스코로스를 세 차례나 소환해 출두시켰으며, 이후 그는 총대주교직에서 물러났다. 칼케돈 공의회는 에우티케스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그를 총대주교직에서 면직시켰으나, 실제로 그가 에우티케스의 단성설을 추종한 적은 없다. 디오스코로스는 공의회 교부들에게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합성론적인 해석을 허용해줄 것을 호소했지만, 거부당했다. 디오스코로스가 면직당한 후, 칼케돈 공의회가 부당하고 편파적으로 진행되었다고 생각한 콥트교회 측은 자신들이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정치적 억압을 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동로마 정부가 신임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로 칼케돈파 교회를 대변하는 프로테리오스를 임명하자 콥트교회가 자체적으로 티모테오스 아일루로스를 자신들의 총대주교로 선출하면서 칼케돈파 교회와 갈라섰다.
칼케돈 공의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두 본성, 즉 신성과 인성은 혼합되거나 분리되지 않으며 한 위격(휘포스타시스) 안에 일치되어 있다고 선포했다. 하지만 비칼케돈파(오리엔트 정교회) 측에서는 이러한 칼케돈파 교회의 주장이 네스토리우스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비판했다.[6] 오리엔트 정교회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녀 마리아께 나셨다”는 구절을 자기네 주장의 근거로 삼아 그리스도에게는 한 위격에 (신성과 인성이 혼합한) 하나의 본성이 있다고 이해했다. 이러한 교리적 차이점은 오리엔트 정교회와 동방 정교회를 구분하는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이집트, 시리아, 아르메니아 등 동로마 제국의 변두리에 거주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칼케돈 공의회를 수용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 때를 기점으로 알렉산드리아에는 두 명의 총대주교가 있게 되었는데, 한 명은 비칼케돈파인 콥트 정교회 총대주교이고 다른 한 명은 칼케돈파인 동방 정교회 총대주교이다.[7]
이집트인 대다수는 칼케돈 공의회를 수용하기를 거부하고 오늘날 알렉산드리아의 콥트 정교회라고도 알려진 이집트 교회의 신자로 남았다.[8] 나머지 칼케돈 공의회를 수용한 이들은 로마 및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제국 교회들과 일치하여 그들의 지도를 따랐다. 비칼케돈파는 오늘날 오리엔트 정교회라고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