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9-09-09 12:25
{2}삼위일체, 바로 알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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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197  

 (3) (요 3:16; 요일 4:16)

 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머리 좋은 신학자들이 원탁에 둘러앉아 짜낸 이론인가요? 신학자 몰트만(Jurgen Moltmann)은 삼위일체에 대한 결정적 계시자는 다른 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지적했습니다. 구약에서 이미 암시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복수성과 단수성(삼위일체의 본질), 그것의 의미를 예수께서 오셔서 밝히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누구십니까? 예수는 삼위일체의 한 멤버이십니다. 삼위일체에서 ‘아들(Son)’이신 분입니다. 삼위일체는 말하자면 삼위일체의 멤버이신 분이 세상에 오시어 드러내 주신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아버지(Father)’의 존재를 분명하게 해 주셨고, 

                       예수님 자신이 ‘아들(Son)’이심을 밝히셨고, 

                       보혜사 성령(Holy Spirit)을 소개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심을 명백하게 알게 된 것입니다. 몰트만(Moltmann)은 그래서 삼위일체에 대한 바른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에서 출발하여야만 옳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 분’보다는 ‘세 분’에서 시작하는 이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누구십니까? 그는 태초부터 하나님의 삼위일체 존재구조에서 ‘아들 하나님(God the Son)’으로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을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창조의 일을 누가 하셨느냐고 하면 어떤 사람은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아들’이신 예수님도 창조의 일을 하셨음을 분명히 합니다(요 1:3). 성령께서도 자신의 몫을 하셨습니다(창 1:2). 창조는 아버지, 아들, 성령 삼위의 ‘합작’입니다.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살리는 ‘구원의 일’도 역시 삼위(三位)의 합동적 일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구절인데 놀랍게도 삼위일체적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보내시는 아버지(Sender)

 

                            독생자를 주셨으니 ------------------- 보내심을 받은 아들(The Sent)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 믿도록 돕는 성령(Helper)

 

                            (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 삼위일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축복)

 

 

 

   기독교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진술의 의미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여기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 전부가 아닙니다! 여기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아들 하나님(God the Son)’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고 할 때, 그 ‘인간이 되신’ 주인공은 ‘아들 하나님’이십니다. 그 ‘아들’도 분명한 하나님이시기에(요 1:2)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진술은 참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목합시다. 그 아들이 인간이 되신 것은 ‘아버지’가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구원의 일을 완성하실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도우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일”은 역시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의 합동적 일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고 선포합니다. 이 선포가 삼위일체와 직결된 중대한 진리임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몰트만(Moltmann)은 하나님이 오직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시기에 이러한 선언이 가능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사랑이시라”는 말의 시제는 현재형인데 이 현재형은 영원성을 함축합니다. 즉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도 하나님은 본질에서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아버지, 아들, 성령 사이의 사랑입니다. 몰트만(Moltmann)은 절대유일적 신은 본질에서 사랑일 수 없음을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이슬람의 알라(Allah)같은 절대유일신은 창조 전에 ‘홀로’이기에 사랑할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면 자기 자신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나르시시즘(narcissism), 즉 ‘자기애’ 이상이 되지 못합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참 창조주 삼위일체 하나님은 본질에서 사랑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절대 단독자가 아니고 삼위일체시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가 창조하신 세상을 움직이는 중요한 원칙이기도 합니다. 동물들의 본능 속에 심어져 있는 ‘사랑의 원리’는 매우 놀랍습니다. 단단한 호두껍질은 마치 ‘사랑’처럼 속 알갱이를 보호해 줍니다. 태양열은 ‘사랑’처럼 적당한 온기로 우리에게 내리쬐어 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인간 피조물 안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긍휼의 힘’이 있습니다! 

 

 

 

   알고 보면 삼위일체의 사실은 기독교의 모든 중대한 진리들의 근거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성육신(incarnation)’은 삼위일체 없이 설명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대속(代贖)의 힘’을 가진 십자가라는 것도 삼위일체를 통해서만 사실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의 십자가도 대속(代贖)의 십자가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고찰했듯이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도 삼위일체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진리입니다. 기독교가 선포하는 복음, 그것은 오직 구원이 삼위일체의 합작이기에 있을 수 있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신 분이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사실이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낮춤의 하나님’이시며, ‘희생의 하나님’이시며, ‘긍휼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가 사실이 아니면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들이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삼위일체를 가르치다 보면 받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이 모두 하나님의 신분을 가진 분이라면 어느 분에게 우리가 기도를 해야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제가 언급했던 그라이더(J. K. Grider)교수께서 정확히 이 문제를 수업시간에 다루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분의 강의와 또 제가 그 후 공부한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엄밀히 아버지, 아들, 성령 모두 하나님이시기에 어떤 분에게 기도해도 신학적 오류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공중기도를 할 때는 흔히 아버지, 하나님, 주님 등의 좀 더 대표적이며 포괄적인 명칭이 적절하다고 보겠습니다. 개인적 기도에서는 이러한 명칭들 외에 ‘예수님’께 직접 기도를 하는 것도 좋습니다. 인간이 되어 오신 중보자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 ‘성령’을 부르며 기도하는 일은 드문데 실제로 성령님께 기도하는 것이 잘못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역할은 ‘아버지’와 ‘아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일이기에 성령님은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을 부르는 것으로 만족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할 때는 실상 삼위일체 전체를 대상화하는 것이기에 성령님도 포함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특정한 분에게 기도하던지 간에 궁극적으로는 항상 ‘삼위(三位)’ 전체께 기도를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를 부르며 기도할 때 우리는 이미 ‘아들’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 기도를 할 때, 우리는 이미 ‘아들을 보내주신 아버지’에 대한 감사 안에서 그 기도를 하는 것이며, 또 성령의 도움으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분을 부르며 기도할 때 다른 분들이 섭섭하실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요. 어떤 분에게 기도를 드리던지 기독교의 기도는 항상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께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에 관한 다른 질문은 아버지, 아들, 성령 사이에 어떤 위계질서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현재 복음주의의 어떤 신학자들은 삼위(三位)의 존재적 동등설을 주장합니다. 즉 아버지, 아들, 성령 사이에 지위적으로 높낮이가 전혀 없다는 관입니다. 그러나 어떤 신학자들은 ‘지위의 차이’를 주장합니다. 그들은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은 ‘하나님의 신분’이라는 점에서는 동등하지만, 위계질서에서 ‘아버지’의 우선됨(the primacy of the Father)이 있다고 합니다. 즉 ‘아버지’가 삼위일체 안에서 으뜸이시며 지도자급의 존재시라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의 증거가 ‘위계질서의 실재’ 쪽으로 더 강하게 말하고 있다고 보는 신학자입니다. ‘아들’ 예수께서 항상 아버지의 지도력과 권위를 인정하신 것이 한 증거입니다. ‘아들’께서 역사 안에 오시어 분명하게 하신 것이 인간의 ‘불순종의 역사’를 깨고 ‘순종의 역사’를 시작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정확히 ‘불순종의 아들들’의 자리에서 떠나 ‘순종의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을 천명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우선성에 대한 성경의 증거라고 봅니다.

 

 

 

   삼위일체의 진리는 하나님 자신께서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 자신에 대한 ‘놀라운 사실’입니다. 삼위일체는 그저 이론적 유희나 즐기라고 주신 지식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삼위일체의 진리를 알게 될 때, 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참으로 우리의 기쁨과 힘과 생명이 되도록 하나님은 이 진리를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이해를 통해 우리는 나 같은 죄인을 위해 하나님께서 참으로 인간이 되신 것을 압니다. 그 하나님께서 참으로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을 압니다. 이런 깨달음과 반응이 우리의 마음 중심에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삼위일체의 영광을 우리에게 드러내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다소 길게 3차례에 걸쳐 삼위일체의 진리를 설명하였습니다. 이러한 저의 ‘노력’은 삼위일체 진리의 중요성에 대한 저의 인식 때문입니다. 모쪼록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생각 속에 성경의 삼위일체 진리가 새로운 이해로 뿌리내리기를 바라며, 또한 그 이해와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감사가 더욱 마음속에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김형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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