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9-09-09 12:22
{1}삼위일체, 바로 알고 계신가요?
인쇄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927  

삼위일체, 바로 알고 계신가요? 


(1) (요 1:1; 마 3:16-17)

삼위일체, 교인이라면 얼마나 귀에 익숙한 어휘입니까? 그런데 솔직히 얼마나 난감한 어휘인지요? 기독교의 핵심적 진리에 속한다는 것은 알지만 막상 설명하라면 말이 막히는 진리, 그것이 ‘삼위일체’란 진리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설명한다고 하는 많은 기독교인이 삼위일체를 양태론이나 삼신론 식으로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양태론과 삼신론은 모두 삼위일체에 대한 잘못된 이론으로서 실제로 ‘이단’인 이론들입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니, 양태론이니 골치 앓을 것 없이 그저 열심히 믿으면 된다고 해야 할까요? 그러나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태도는 기독교의 건강한 신앙이 항상 ‘믿음의 열정(fervor of faith)’과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right understanding of truth)’의 균형에 의해 유지되는 사실과 역행합니다. 이 균형은 정확히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과 ‘진리’의 균형입니다(요 4:24). ‘열심’이라면 이단 추종자들도, 공산주의자도 다 갖는 것인데 그들의 문제는 ‘진리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점입니다.

 

 

 

   ‘삼위일체’는 어떤 진리입니까? 삼위일체는 하나님께서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 보여주신 ‘하나님의 본질적 구조’에 대한 진리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존재구조’ 안에 분명한 ‘세 분’이 계시며, 그 세 분은 깊은 관계성 안에서 ‘한 분’이시라는 것, 그것이 삼위일체입니다. 이러한 삼위일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어 주신 하나님의 ‘본질적 구조’에 대한 진리이기에 매우 중대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누구신가를 알려면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주실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는 (1)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를 위하여 필수이기 때문이며, 또한 (2) 기독교인으로서의 ‘바른 삶’을 위하여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는 ‘기독교인으로서의 바른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 계시하신 진리 중 필요 없다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정확한 일조량의 햇빛이 지구에 닿게 하셨겠습니까? 지구 위의 생명체들이 그것을 통해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사실을 계시하셨을까요? 믿는 자들이 그 진리를 통해 생명 있는 자들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진리의 내용을 바르게 알려는 ‘진지함’ 없이 그저 자기 생각대로 믿어도 된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지한 고집일 뿐입니다. 성경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마 5:5).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배워야 할 것을 배우려는 자세를 포함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라고 물으면 다수의 교인이 ‘유일신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유일신’이라고 하는 순간 그들의 머릿속을 장악하고 있는 생각은 “단독적 주체의 신,” 그저 영원부터 영원까지 ‘싱글’인 신, ‘영원한 솔로’인 신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영원한 솔로’로서의 유일신은 정확히 이슬람의 알라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제 알아볼 것이지만, 성경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러한 ‘영원한 솔로’의 신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그저 ‘단독적 주체’로, 즉 ‘영원한 솔로’로 생각하는 교인은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가장 흔한 이해가 삼위일체를 하나님의 ‘세 면(面)’이나 하나님의 ‘세 역할(function)’로 보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버지, 아들, 성령이란 ‘한 분 하나님’의 ‘세 면,’ 혹은 ‘세 역할’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혹시 삼위일체란 ‘한 남자’가 집에서는 아버지, 직장에서는 과장님, 교회에서는 집사님인 것과 같다는 식의 설명을 들은 적이 있는지요? 마치 한 남자의 ‘원맨쇼’처럼 말입니다. 혹시 주일학교에서 그런 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본 적이 있는지요? 유감스럽게도 그 ‘원맨쇼의 하나님’ 설명은 정확히 ‘이단’에 속하는 이론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2세기에 사벨리우스(Sabellius)라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삼위일체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한 분 하나님’이 구약에는 ‘아버지’로, 신약에는 ‘아들’로, 교회시대에는 ‘성령’으로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단독적 주체의 하나님’이 역사 안에서 ‘세 역할’을 했다는 것이지요. 아버지, 아들, 성령을 단순히 한 하나님의 세 면(세 양상, 세 역할)으로 본다고 해서 그의 이론을 ‘양태론(Modalism)’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성경의 삼위일체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교회의 지도자들(교부들)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교부들은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을 반(反) 성경적 이단으로 단죄하였습니다(AD 262).

 

 

 

   우리는 진정한 삼위일체는 양태론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한 단독적 주체의 신이 ‘세 역할’을 하는 그런 신관이 아닙니다! 성경이 증언하고 교회가 ‘정통’으로 유지해온 삼위일체론에 의하면, 하나님의 존재구조 안에는 참으로 ‘세 분’이 계십니다. ‘세 분’ 아버지, 아들, 성령은 ‘단독적 신’의 세 면이 아니고, 각자가 자신의 주체성(selfhood)을 가지신 분명한 ‘세 주체들(three Persons)’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 대화, 일 등을 나누시는 ‘인격적 관계(personal relationship)’ 안에 있는 분들이신 것입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각자가 자신의 ‘개별적 정체성’을 가진 ‘주체’시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마태복음 3장 16-17의 예수님 세례 장면입니다. 이 세례 장면에서 삼위일체 안의 ‘아들(Son)’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위한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런데 거기에 누가 나타나십니까?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또 다른 분이 나타나시는데 하늘의 음성으로 나타나시는 ‘아버지(Father)’이십니다. 주목할 것은,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이 ‘동시에(simultaneously)’ 나타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각 분께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현현(顯現)하여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증거가 사벨리우스의 양태론 이단과 어떻게 다른지 보시는지요? 사벨리우스 말대로 ‘솔로’인 단독신이 어떤 때는 아버지로, 어떤 때는 아들로, 어떤 때는 성령으로 혼자 ‘원맨쇼’를 했다면, 마태 3장에서와 같이 아버지, 아들, 성령이 ‘동시에’ 각자의 신분으로 현현(顯現)하실 수는 없겠지요. 이 마태 3장의 예수님 세례 장면은 그래서 양태론이 거짓인 것을 증명하는 중요한 성경 말씀입니다. 이러한 성경적 증거 때문에 2세기의 현명한 교부들이 양태론을 이단으로 단죄했던 것입니다. 

 

 

   양태론에 반(反)하는 다른 성경의 증거들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를 존재적으로 분명하게 구별하십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향해 기도도 하시며(요 17:5), 자신의 뜻과 아버지의 뜻을 구별하시기도 합니다(눅 22:42). 또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셨다는 구절은 성령과 아들(예수님)을 구별하는 말씀입니다(막 1:12). 

 

 

   ‘삼위일체’란 언어는 성경에는 없는 언어지만 위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삼위일체의 ‘내용’은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습니다. ‘원죄’라는 말이 성경에 없지만 원죄의 진리가 성경 전체에 흐르듯이 말입니다. ‘성육신’이라는 말이 성경에 없지만 성육신에 대한 진리가 성경 전체에 있듯이 말입니다. ‘삼위일체’란 용어는 3세기의 터툴리안(Tertullian)이 양태론을 반박하기 위하여 처음 사용하였습니다. 

 

 

 

   주목할 것은, 삼위일체의 진리는 이미 구약에서 힌트와 암시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약에서 자신의 복수성과 단수성을, 즉 삼위일체적 특징을 나타내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주 ‘우리(we, our)’라는 표현을 쓰십니다(창 1:26; 사 6:8). 또한 놀랍게도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엘로힘’은 정확히 ‘하나님들’입니다! 즉 단수가 아닌 복수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도 정확히 하면 “태초에 하나님들(엘로힘, Gods)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입니다. 그리고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 12:1)”는 말씀의 ‘창조주’는 히브리 원어에서 ‘에쓰보레카’로서 ‘창조주들(Creators)’입니다. 즉 “창조주들을 기억하라”입니다! 그런데 구약은 하나님이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것도 아울러 강조해 가르칩니다(신 6:4). 자유주의 신학자 중에는 하나님의 복수적 표현인 ‘엘로힘’을 삼위일체와 무관한 것으로 해석하지만, 구약과 신약 전체의 전후관계와 문맥 안에서 볼 때, ‘엘로힘(하나님들)’은 삼위일체적 계시의 용어로 충분히 볼 수 있다는 것이 복음주의 신학의 해석입니다. 

 

 

 

   요즘 이단들에 대한 경계를 많이 하는데 막상 ‘정통교회’에 속해 있다는 교인은 이슬람의 알라(Allah)신과 성경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적 차이를 모르고 있습니다. 당혹스런 사실이지요. 알고 보면 삼위일체는 기독교 진리의 근본이며 근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성육신의 진리,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셨다”는 속죄의 진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이시다”라는 기독론적 진리는 모두 삼위일체의 진리에 서 있는 것들입니다. 과연 삼위일체는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위해 가장 근본적이며 중대한 진리인 것입니다. 본 장에서 저는 특히 양태론(Madalism)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아버지, 아들, 성령 각 분이 참으로 서로 구별되는 분들임을 말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 ‘세분들’이 어떻게 ‘한 분’이신지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신 6:4; 요 17:5)

 미국 한 성경공부반에서 삼위일체를 가르쳤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구조 안에 참으로 ‘세 분’이 계시다는 것을 제가 강조했을 때, 한 교인이 화를 내면서 “목사님, 왜 이상하게 가르치십니까?” 하며 도전하였습니다. 알고 보니 그분은 한국 한 대학의 교수였고 미국에 방문 중인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교회에서 배웠다는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시작했는데 들어보니 양태론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영원한 싱글’로 이해하면서 아버지, 아들, 성령이란 단지 그 ‘단독적 주체’ 신의 세 면일 뿐이라는 양태론을 그분은 믿고 있었습니다. 저는 성경의 예를 들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각 분’이 다른 분들과 구별되는 주체시라는 것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존재구조 안에 참으로 ‘세 분’이 계시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그 다음의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결국 ‘세 하나님들(three Gods)’을 가르치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호히 ‘아니오’입니다. 기독교 신학은 ‘세 하나님들’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습니다. 그 표현은 삼신론(tritheism)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삼신론이란 쉽게 말해서 서로 분리된 ‘세 신들’ 론입니다. 즉 각자가 자신의 주체성을 가진 세 신들이 ‘서로 따로 노는’ 식으로 존재한다는 이해의 신론입니다. 따라서 삼신론에서는 만일 한 신이 없어져도 다른 ‘두 신들’의 존재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이러한 삼신론은 정확히 힌두교에서 발견되며(부라마, 비쉬누, 시바), 몰몬교에서도 볼 수 있는 신관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삼위일체는 삼신론과는 전혀 다른 신론임을 이제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의 신학은 아버지, 아들, 성령은 분명한 ‘세 분’이시지만 그분들은 ‘함께’ 분명한 ‘한 분’이시기도 하다고 가르칩니다. 즉 3 = 1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역으로 1 = 3임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버지, 아들, 성령이 ‘분명한 세 분의 주체들’이시면서 동시에 ‘한 분(one)’이시란 말입니까? ‘한 분’이신 분이 어떻게 동시에 ‘세 분’이시라는 것입니까?

 

 

   삼위일체의 진리는 알고 보면 다양성(diversity)과 일체성(unity)의 관계를 말하는 문제입니다. 주목할 것은 ‘3의 요소(threeness)’가 모여 ‘일체 됨(oneness)’을 이루는 것은, 즉 다양성(diversity)이 일하여 일체성(unity)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 속에 충만히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 만물이 하나님의 능력(power)과 신성(divinity)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합니다(롬 1:20). 바울의 말대로 자연은 하나님의 여러 면 - 하나님의 능력, 지혜, 아름다우심 등 - 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자연이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도 많이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을 주시해 볼 때 자연 안에는 ‘3의 요소’가 모여 ‘일체성’을 이루는 것으로 차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환경인 ‘3차원 세계’는 물질, 시간, 공간이라는 ‘3 요소’로 되어 있습니다. 우주의 물리적 세계를 지배하는 힘은 강력, 전자기약력, 만유인력으로 되어 있습니다. <요즘 과학자들은 전자기력과 약력을 본질적으로 하나의 힘으로 봅니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되어 있으며, 공간은 가로, 세로, 높이로 구성돼 있습니다. 음악에서 장조의 으뜸화음은 도, 미, 솔 ‘세 음’의 화음입니다. 미술에서 물감의 삼원색은 빨강, 노랑, 파랑입니다. 우리의 생태계는 육지, 바다, 대기 3 요소입니다. 이렇게 자연이 ‘이상하게’ 3의 요소를 드러내며 그 ‘3의 요소’가 함께 일하여 의미 있는 ‘일체성’을 이루는 것은 단지 우연일까요? 아니면 바울의 말대로 자연이 하나님의 신성(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면일까요?

 

 

   신학에서 자연이 드러내는 3과 1의 면들을 ‘삼위일체의 유비’라고 합니다. 자연에서 발견되는 삼위일체의 유비들은 결코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정확하게 대변하지는 않습니다. 때로 자연 안의 유비(analogy)를 잘못 사용하여 삼위일체에 대한 곡해를 낳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를 물의 기체, 액체, 고체로 설명하거나, 달걀의 노른자, 흰자, 껍질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런 유비로 삼위일체를 설명하면 흔히 양태론적으로 빠져 혼란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유비의 위험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연 안의 ‘3의 요소’와 그것이 이루는 ‘일체성’의 신비는 삼위일체에 대한 무시할 수 없는 ‘흔적’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양성’이 모여 ‘일체성’을 이루는 실체를 유기체(organism)라고 합니다. 신학교 시절 제가 존경하던 그라이더(J. Kenneth Grider) 교수께서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을 ‘유기적 일체성(organic unity)’으로 강의하던 것이 기억납니다. ‘유기적 일체’의 특징은 한 부분이라도 없으면 ‘전체’가 마비되고 없다는 것입니다. 물질, 시간, 공간 중 하나라도 제거하면 ‘삼차원세계’ 전체가 없어져 버립니다. 육지, 바다, 대기 중 하나라도 없애면 ‘생태계’ 자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존재구조에서 아버지(Father), 아들(Son), 성령(Holy Spirit) 각 분은 유기적으로 다른 분들과 관계되고 연결되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재적으로(ontologically) 한 분이 안 계시면 다른 두 분도 계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능적으로(functionally) 한 분의 일은 다른 두 분과의 관계 안에서만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세 분’이 ‘한 분’이시라고 할 때 그 ‘한 분’은 유기적 차원에서 ‘한 분’이신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아버지’의 일은 결코 ‘아버지 홀로’의 일이 아니며, ‘아들’의 일도 결코 ‘아들 홀로’의 일이 아닙니다. ‘한 분’의 일은 항상 ‘다른 분들’과 ‘함께’ 이루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창조도 ‘세 분’의 합동적 일이며(창 1:1-28; 요 1:3), 구원의 일도 ‘세 분’이 ‘함께’ 이루신 것입니다(요 3:16).

 

 

 

   삼위일체에서 중요한 신학적 용어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말입니다. ‘페리코레시스’는 ‘돈다(go round)’는 뜻의 희랍어로서 ‘상호투과,’ 혹은 ‘상호교통’을 의미합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은 존재적으로, 기능적으로 ‘상호 교통’과 ‘상호투과’의 관계에 있다는 진리입니다. 한 예로 육지, 바다, 대기는 서로 ‘상호투과’적 관계에 있습니다. ‘육지’는 대기에서 물을 내려주어 생명을 유지하며, 대기의 물은 바다가 줍니다. 바다는 또 끊임없이 육지로부터 공급을 받습니다. 남자가 여자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는 진리도(창 2:24) 육체적, 정신적으로 서로 주고받으며 하나 되는 ‘상호투과’적 진리입니다. 나무의 뿌리, 줄기, 잎에서 각 부분은 다른 부분과 연결되어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갖습니다.(‘나무’의 예는 양태론적으로 이해되기 쉬워 조심해야 합니다) 삼위일체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 ‘각 분’은 ‘따로 분리된’ 분이 아니고 항상 유기적으로 다른 ‘두 분’의 본질을 나누어 받아 자신의 정체성을 갖는 분입니다. 중세의 현명한 신학자들은 그래서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도형을 그렸습니다(위의 도형 참고).

 

 

 

 

 

   위의 도형에서 외곽선은 두 분 사이의 ‘구별’의 선입니다. 즉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영어 “IS NOT"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것은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시다,” 혹은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시다”를 뜻합니다. 그러나 내부의 선은 ‘동일화’의 선입니다. 본질에서 ‘하나님’이시라는 점에서 모든 분들이 “IS," 즉 “하나님이시다”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도형은 한 편으로는 양태론을 피하며 다른 편으로는 삼신론을 피하는 좋은 도형입니다. ‘셰마(들으라)’라고 하는 신명기 6장 4절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복수성과 단수성을 모두 천명하는 구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엘로힘’으로서 ‘하나님들’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 ‘하나님들(복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단수)”라는 선언입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존재구조는 이처럼 ‘분명한 3분’께서 유기적으로, 페리코레스적으로 연결되시어 ‘분명한 한 분’을 이루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한 분 되심’은 ‘도’라는 단순한 단수의 하나가 아니고 ‘도’와 ‘미’와 ‘솔’이라는 다양성이 만들고 있는 ‘풍요한 하나 됨’의 한 분 되심입니다. 저는 그래서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피아노 건반에서 도, 미, 솔 ‘세 음’을 함께 쳐 화음을 들려줍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 소리는 하나입니까, 여럿입니까?”하고 묻습니다. 눈치가 빠른 분은 “둘 다입니다”하고 대답을 하지요. (완전한 유비는 아니지만 도움이 됩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세 분이 함께 ‘풍요한 한 분’을 이루고 계신 진리는 놀랍기만 합니다. ‘아들’ 예수께서는 그래서 영원부터 영원까지의 삼위적 영광을 함축하는 기도를 아버지께 하십니다: “아버지, 세상이 있기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그 영광으로 지금 아버지 앞에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소서(요 17:5).”

 

 

 

   삼위일체가 얼마나 중대한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진리인지 ‘감’을 좀 잡으셨는지요? 삼위일체의 진리는 기독교의 신관을 이슬람의 단독주체적 신관과 구별되게 하며, 모든 이단들의 잘못된 신관과 구별되게 하는 중대한 성경의 진리입니다. 이단들의 공통적 특징은 ‘모두’ 성경적 삼위일체론에 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증인은 단독유일신을 주장하며, ‘지방교회’라는 이단은 양태론을 가르칩니다. 몰몬교는 삼신론적 신관을 갖고 있습니다. 이제 다음 글로 삼위일체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일반형 뉴스형 사진형 Total 3,387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2619 신약에서의 음식물 규정 웹섬김이 09-09 3828
2618 [6]삼위일체 웹섬김이 09-09 2600
2617 [5]삼위일체 웹섬김이 09-09 3013
2616 [4]삼위일체 웹섬김이 09-09 2203
2615 [3]삼위일체 웹섬김이 09-09 2549
2614 [2]삼위일체 웹섬김이 09-09 3816
2613 [1]삼위일체 웹섬김이 09-09 3972
2612 {2}삼위일체, 바로 알고 계신가요? 웹섬김이 09-09 2183
2611 {1}삼위일체, 바로 알고 계신가요? 웹섬김이 09-09 3928
2610 교리공부가 필요한 7가지 이유 웹섬김이 09-09 2185
2609 목회자가 갖춰야 할 리더쉽 웹섬김이 08-21 3146
2608 죄론(HAMARTIOLOGY) 죄 웹섬김이 08-21 2285
2607 우리네 교회는 믿음의 본질을 변질시켰다. 웹섬김이 08-21 2466
2606 그리스도인에게서 질병은 어떤 것인가? 웹섬김이 08-21 2248
2605 개혁주의 예배원리는 무엇인가? 웹섬김이 08-21 2652
2604 복음은 구원역사의 약속, 회개하고 믿을 때 … 웹섬김이 08-21 1892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