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7-21 12:42
[6]십계명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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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8,025  
제6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다"(출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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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의 두번째 돌판에서 두번째로 기록되어 있는 이 계명은 순전히 사람 대 사람의 관계를 다루는 것으로서는 첫번째 계명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상호 관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과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결정짓는 이 첫째 계명은 후자의 관계 즉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초해 있다.


한편 여섯번째 계명을 설명하기에 앞서 인간 사회 구조의 맨 밑바닥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사람 개개인의 생명을 지배한다는 사실이 깔려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따라서 사회 복지의 세부적 법규를 규정하기에 앞서, 순전히 인간의 의지로써만 다룰 수 없는 영역이 뚜렷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실로 생명은 신성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해야 한다. 인간의 생명은 그 기원과 지속성과 역동성에 있어서는 신비하고 장엄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어떠한 인간의 통제나 이해도 완전히 초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생명의 충분한 의지를 결코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서는 그것을 마음대로 제거할 수 없다.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께서 현재의 모양과는 전혀 다른, 각 개인과 인류에 대한 목적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과 따라서 단 한사람의 생명이라도 없애는 것은 피조물인 사람의 지혜를 창조주며 섭리자이신 하나님의 지혜보다 더 낫게 여기는 경솔한 행동이라는 점을 입증한다. 죽음의 결과는 너무도 엄청나기 때문에 생명을 없애는 것만큼 심각하게 비인도적이고 따라서 하나님을 거스리는 죄는 없다. 그러므로 이 간단한 계명에는 아주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할만큼 분명하고 지극히 중요한, 인간 생명에 대한 중요한 원칙이 진술되어 있다. 그러면 이제 우선 그 명령 자체를 살펴보고 다음에는 그 명령에 담긴 원칙을 오늘날에 적용시켜 보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에 그 원칙을 적용시켜 보자.

여섯째 계명의 이해

피조물인 사람은 그 자신이 의식하고 있든지 혹은 망각하고 있든지 실제로는 제일 처음에 창조주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 그런 의미에저 사람은 하나님께 의해서 비로소 존재하게 된 하나님의 자녀이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의지와 능력에 의해 존재하고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지닌다. 이밖의 다른 모든 관계는 이 첫번째 관계로부터 생겨나고 따라서 이 관계를 보조한다. 혈연 관계, 사회 관계, 시민 관계를 다루는 이하의 모든 계명은 사람에 대해 구속력을 갖는데, 그 이유는 그 계명들이 생명에 대한 첫째 되고 가장 상위 개념인 하나님과의 관계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혼의 신성함, 소유권, 평판의 중요성, 인격의 우위, 이 모든 것은 비로소 생명이 있을 때에만이 그 효력과 가치를 얻는다. 사실 이런 모든 것이 삶에 있어서 귀중한 가치를 지닌 것이며 여러 가지 형태로 팽명이 계속되고 있음을 표시한다. 따라서 생명을 주는 것은 이러한 모든 것을 지닐 가능성을 주는 것이며 생명을 중지시키는 것은 모든 것을 끝내는 것이다. 각 사람이 지니고 있는 모든 능력은 다 하나님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가 지니고 있는 모든 가능성도 역시 똑같은 근원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선물인 생명 그 자체에는 아주 놀라운 관계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관계가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이 다섯번째 계명은 모든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는 아주 간단한 말이면서도 엄한 어조로 인간의 생명을 처음에 그 생명을 주신 분에게 그것을 끝낼 수 있는 권리를 귀속시키고 있다.


영어 성경이 보여온 번역상의 변화는 의미 심장하고 중요하다. 영어 개역 성경(R. V.)은 "사람을 죽이지 말지니다"(Thou shalt not kill)는 말은 "고살하지 말지니다"(Thou shalt do not murder)로 바꾸어 번역 하였는데, 여기에는 암시되고 있는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 죽이되 살인을 범하지 않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살인의 실제적인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구약 시대에는 도피성이 마련되어 있어서, 사람을 죽인 자가 거기 들어가면 피의 보수자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다. 민 35:9-34에 나오는 이 도피성 설정에 대한 기사를 잘 읽어보면 죽이는 것과 살인 사이의 차이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어떠한 살인일지라도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지만 사람을 죽이는 것이 반드시 다 살인은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구절에서 "뜻하지 않게"(unwillingly;R.V.), "그릇"(unawares:A.V.)이라는 말이 그 차이를 보여 준다. 실수로 우연히 동료 인간의 생명을 없앤 사람은 이 도피성들 중의 하나로 들어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행위가 고의적인 것이라면 도피성이라도 그들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점이 명백하게 진술되었다.


이렇게 사람을 죽이는 것과 고살에는 차이가 있다. 사람을 죽이는 것(killing)은 부지중에 우연히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지만, 고살은 순전히 책임 있는 인간 의지에 의해서 사람의 생명을 고의로 빼앗는 것이다.


이 문제를 생각하는 김에 한걸음 더 나아간다면 부지중에 사람을 죽이는 것도 가벼운 죄로 간주되지는 않았다는 사실들 명백히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이렇게 부지중에 사람의 생명을 없앤 자는 불확정한 기간 동안 자유를 잃고 지냈다. 그는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에서 지내야만 안전하였던 것이다. 만일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도피성의 안전한 울타리 밖으로 나간다면 피의 보수자의 손에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살인자 곧 악의를 품고서 사람의 생명을 해한 자에 대 대서는 세상 천지 어디에서도 그를 보호해 줄 은신처는 없었다.


이 계명이 간단하다는 사실은 오히려 그 적용 범위가 매우 넓다는 것을 나타낸다. 누가 누구에게 살해되었든지간에 하나님의 법은 그 살인 행위 자체를 반대한다.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모든 말씀과 마찬가지로 이 계명은 절대로 어떤 특정 계급에만 적용되는 법령이 아니다. 인간의 생명은 그 사람이 상류 사회의 생활을 누리고 있든지 인생 밑바닥의 삶을 살고 있든지간에 그것이 사람의 생명인 까닭에 고귀한 가치가 있다. 사람이 동료 인간의 손에 죽지 않도록 자신의 안전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그가 하나님에게서 받아 누리고 있는 생명에 근거해 있는 것이지, 거의가 사람이 조정한 인위적인 결과로 생긴 일시적인 환경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하는 자는 사회적 지위가 어떠하든지간에 살인자이다. 사람의 생명을 없애는 일은 권력상의 특권이나 가난을 구실로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하나님은 생명 곧 생각하고 활동하는 생명은, 사람이 마음대로 그것을 지속시키거나 중지시킬 수 있는 권리가 전혀 없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히신다.


곧 이 사실은, 개인이 하든 사회가 하든 혹은 국가가 하든지간에 고의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취하는 일을 살인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에 따라 행해지는 사형이나 사람을 죽이는 일 그리고 전쟁을 제외한 그와 같은 일은 모두 다 이 계명을 어기는 일로서 낙인찍는다.


구약 히브리 백성들의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은 의에 기초한 사회 질서를 유지하도록 사람들에게 자신의 권한을 위임하셨다. 사형은 정해진 몇 가지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에 따라 집행되었다. 하나님의 뜻이 명백하게 드러난 상황하에서 사람이 동료 인간의 생명을 취한 경우에는 언제든지 그것은 살인이 아니다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일이었다. 돌에 맞아 죽은 아간은 동료 인간의 결의에 의해서 생명을 잃은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사람들의 손을 빌려 생명을 잃은 것이었다. 아간을 돌로 친 자들은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었다. 사사든지 왕이든지 혹은 선지자이든지간에 구약의 어떤 지도자도 국가의 이익을 위하는 일에서조차도 자기 마음대로 사람의 생명을 취할 권리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을 자신의 대리자로 삼으셨을 때는 문제가 매우 달랐었다. 사형 판결이 사람의 변덕스러운 의지에 따라 내려진 적이 결코 없었다는 사실은 모세 율법을 주의깊게 연구해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모세 율법에는 사형에 처할 만한 죄들과 그 죄들을 조사하고 판결하는 법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구약 시대의 전쟁에 대하여서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된다. 인간 역사에 있어서 정당화할 수 있는 전쟁들은 오직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에 복종해서 즉시 그리고 직접 치른 전쟁들뿐이었다. 이런 경우에 하나님은 자신의 심판의 대리자로서 역병이나 기근을 택하시지 않고 사람을 택하신 것이다. 구약 백성의 역사는, 이런 조건 하에서 전쟁이 치러졌을 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군대를 보내어 치게 하신 편만 전적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종종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스스로 나서서 전쟁을 벌였을 때는 많은 수가 죽고 패주하였다. 히브리 백성의 전체 역사는 여섯째 계명이 변함없이 중요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모든 경륜 가운데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고귀한 생명은 자의적으로 나서서 살인을 시도하는 사람의 부당한 공격으로부터 신성한 것으로 보존되어 왔던 것이다.

여섯째 계명의 현대적 적용

인간 사회에서는 생명의 보호에 대한 이같은 신성한 기본법이 오늘날까지 존재한다. 기독교 시대와 히브리 시대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그 법이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완전해졌다는 사실뿐이다. 구약 시대로부터 이제까지 하나님의 이 권한이 인간의 어떤 재판소나 법정에 위임된 적은 없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 1:1, 2).

아들의 말씀은 특별히 이 점에서 율법을 확대 해석하여, 순전히 우연한 사고가 아니면 죽이는 것은 모두 다 살인으로 간주하였다. 오늘날에는 사사로운 원한을 풀기 위해 살인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이 주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은 자들에 대해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저희에게 내리게 하시기를 원했을 때, 그들이 공적인 목적을 위해 생명을 멸하려는 일을 꾸짖으셨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는 위기 상황에서도 베드로가 검을 사용한 것에 대해 책망하시며 "검을 집에 꽃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빌라도 앞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웠으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친히 행동과 교훈을 통해서 전쟁을 완전히 정죄하셨다.


약하고 억압 받는 자를 보호하기 위한 전쟁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종종 주장되었다. 확실히 그럴 듯한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는 행위의 표준을 아주 세련되고 교양 있는 이교 타상에서 취하질 않고 오늘날도 말씀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취한다. 그러므로 앞으로 제시 한 인용문들에서 주님이 전쟁을 공공연히 비난하셨던 바로 그 때가 일찍이 세상에서 볼 수 없었던 가장 사악한 연합 세력이 횡행하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악한 세력에 대해 주님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전쟁을 치를 수 있는 가능성이 암시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주님은 자신의 경우에 행악자를 처벌하거나 압제자에 대항하여 싸우심으로써가 아니라 고난을 당하고 죽음을 겪으심으로써 승리를 얻으셨다. 어떤 상황하에서라도 전쟁을 정당화하려는 자는 누구든지 주님의 지혜로운 태도를 의심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이러한 논의는 사형 제도에도 역시 적용된다. 사람들에게는 각각 나름대로의 통치 방식이 있고, 세상은 정치와 철학을 통해서 좀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기 위한 시도를 계속해서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에는 단지 한 왕 곧 그의 기름 부으신 아들밖에 없으며 한 가지 윤리 법전 즉 그 아들의 말씀밖에 없다. 그리고 한 가지 통치 원칙 즉 그 아들의 은혜뿐이며, 하나님 나라의 경륜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가하는 처벌은 모두 궁극적으로 치료와 구 조를 위해서 행해지는 것뿐이다. 해를 입은 자를 구제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해를 가하는 자를 교화하기 위해서도 십자가가 세워졌다. 따라서 사람이 사람을 사형시키는 것은 교정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처벌을 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은 기독교 시대에서는 전쟁이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으며 사형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전쟁이나 사형 외에도 여러 형태의 살인이 있는데, 특별히 이 시대에 생겨난 것들이다. 그와 같은 살인은 거의가 살인이라고 전혀 불려지지 않는데, 그 이유는 때때로 인간 생명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진범을 찾아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 이 부를 추구하는 데서 타인에 대해 가하는 압계는 곧 살인이다. 비록 우리 인간의 실정법은 완전하지 못하여 범죄자들을 일일이 다 색출하여 처벌할 수 없을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 날카롭고 신속한 말씀은 살인자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집안 구석 구석까지 추적해 간다. 그리고 자기의 고통당하는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고통을 가한 모든 자를 불러 그 이유를 밝히도록 하실 것이다. 도기 제조 공장에서 일하는 납중독 희생자들과 성냥 공장에서 일하는 파스퍼러스 네크로시스(phosphourus necrosis:옛날 성냥 제조공에게 많던 위턱뼈에 생기는 병) 희생자들은, 자기는 전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부정한 재물로 헌금을 하여 하나님의 장막을 더럽히는 돈만을 추구하는 기업가들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지옥 같은 초만원의 빈민굴에서 발생한 어린 아이들의 죽음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죽는 아이들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은 채 엄청난 집세를 부과하여 그로부터 재물을 모으는 집주인이 저지르는 살인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한 가인의 파렴치한 항변은 오늘날에 와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품고 있는 감정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인조차도 그러한 감정을 갖는 것을 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은 기독교 시대에 와서 완전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인간의 생명은 일찍이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욱 고귀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명을 다스리는 자신의 권한을 어떤 국가나 단체나 개인에 위임하신 적은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 승리를 얻기 위해 검을 사용하는 것을 거절하신 이래로 하나님께서 전쟁을 명령하셨다고 증거하는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여섯째 계명의 적용

지금까지는 여섯째 계명이 인간 역사의 전 시대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를 고찰해 왔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가 자기 생명의 절대적인 주인이시라고 고백하는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사는 자들에게 이 계명이 어떤 의미에서 구속력이 있는지를 물어볼 수 있다.


주님은 갈릴리 해변의 팔복산에서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법을 선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나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여기서는 살인의 범위를 보다 확대하여 그것이 숨어 있는 자리 곧 화(anger)에까지 추적해 간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 중 누군가가 노여움을 품은 채 생활한다면 그 사람은 심판을 받을 위험이 있고, 그 노여움을 터뜨려 경멸하여 "라가"라고 욕하면 그 사람은 "공회에 잡힐" 위험, 즉 징계를 받을 위험이 있다고 단언하신다. 또 그 사람이 쓸모 없는 존재라는 뜻인 "미련한 놈"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될" 위험이 있다.


이 말씀에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다른 사람의 생명을 취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문제는 아예 생각해 볼 여지가 조금도 없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자기 형제에게 노여움조차 품지 말아야 한다. 영어 개역 성경이나 우리말 성경은 본문에서 "까닭 없이"라는 말을 생략하였다. 그 이유는, 고대의 많은 문헌은 그 말을 삽입하고 있지만 유력한 견해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쓰시지 않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 화를 품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의 정신에 어긋난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공의로움을 가지고 죄에 대해서는 화를 품올 수 있고 또한 품어야 한다. 그러나 주님의 경우에서 보듯이 죄에 대하여 품는 화는 죄인에 대해 품는 화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의 모든 공격력은 죄를 향해야 하지 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을 향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상의 무기를 가지고 주님의 전투를 수행하려고 시도했을 때는 언제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거역해 온 것이다. 생명의 주의 이름으로 생명을 없앴을 때 주님은 모욕을 받으셨고 여섯째 계명은 깨뜨려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미 밝혔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 하에서는 사람이 살의를 품으면 그것은 살인으로 간주된다. 주께서는 언제든지 다른 모든 사람의 생명을 신성하게 여기는 사람을 일으키셔서 사람의 생명을 통해서 영적 승리를 거두신다.


국가나 사회나 개인을 막론하고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인간의 생명을 취할 경우 그것은 살인죄를 범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이 시대의 여러 가지 궤변에 넘어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역행하며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많은 운동들을 무서워하거나 속아서 그 일에 가담 하는 것을 철저하게 반대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제자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아주 훌륭하고 논리 정연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지대한 관심을 일으키는 많은 이교 사상이 산재해 있다. 그러나 맹세코 이 이교 사상과 기독교 사이를 아주 명백하게 구분해야 한다. "살인하지 말지니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천둥과 번개가 치는 가운데서 시내산에서 선포되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생명을 구하기 위해 죽으신 자이신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온, 어조는 부드럽지만 훨씬 더 엄중하고 구속력이 있는 그 명령은 기독교 시대 내내 살아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이 전장에서 살해되거나 사회의 이름으로 매장되며 혹 부자들의 이익을 위해 희생을 당할 때마다 주님은 다시 고난을 당하고 주님의 교훈은 짓밟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의 단순한 사실들을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한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다. 생명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명을 취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특권이다. 따라서 사람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명백한 명령에 의해 그 일을 하도록 직접 위임을 받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 은혜의 시대에 와서는 하나님은 그 권리를 사람에게 위임하시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는 전쟁을 반대하여야 하며 인간의 생명을 희생시키면서 이익이나 쾌락을 얻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능력을 힘입어 모든 형태의 악에 대해서는 화를 품지만 인간 그 자체에 대한 화는 마음속에서 스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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