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7-21 12:41
[5]십계명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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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7,993  

제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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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을 두 부분으로 나누는 데 있어서 학자들간에 이견이 있어 왔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두 돌판에 기록해주셨다. 그런데 처음 네 계명은 첫번째 돌판에 기록되었고 나머지 여섯 계명은 두번째 돌판에 기록되었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두 돌판에 각각 다섯 계명씩 기록되었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첫번째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십계명의 앞 부분에서 사람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법이 규정되어 있는 반면에 뒷 부분에서는 사람 상호간의 관계에 대한 법이 규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두번째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다섯번째 계명도 사람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법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파라(Farrar)는, 처음 다섯 계명은 첫번째 돌판에 새겨졌는데 이는 피조물된 인간이 반드시 행해야 아는 '피에타스'(Pietas:의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두번째 돌판에 새겨진 다섯 계명은 성숙한 인간이 생활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프로비타스'(Probitas:성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다섯번째 계명을 어느 쪽에 두느냐는 것이 어려운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채드윅(Chadwick)은, 다섯번째 계명은 십계명의 두 부분을 연결하는 다리라고 말한다. 아마도 이것이 가장 합당한 설명일 것이다. 그러나 다섯번째 계명이 전반부에 나오는 네 계명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계명인데 반해 사람들 상호간의 관계를 다루는 계명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 계명을, 인간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십계명의 후반부의 첫번째 계명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 계명은 이미 앞에 나온 네 계명들의 사상과 의도에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부모가 자녀에게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녀들은, 아직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조차 파악할 수 없는 어린 시절에는 부모들이 보여 주는 개념을 통해서 하나님에 관한 아주 중요한 사실들을 배우게 된다. 자녀는 성장하는 동안 전적으로 부모의 은혜를 입는다. 그런데 모든 사람의 본성에서 일치하며 가장 명백하고 뚜렷하게 드러 나는 것 중의 하나는 어린 아이들이 부모에 대해서 마음을 열어 놓고 있으며 또 깊은 애정을 품는다는 것이다. 이 태도는 어린 아이들이 부모이외의 다른 사람에 대하여 취하는 태도와는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시는 태도는 마치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태도와 같다. 그것은 곧 입법자와 사랑하는 자가 취하는 태도요 부양자와 통제자가 취하는 태도이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인식하게 되는 더 높은 대상들에 대한 아이들의 태도는 기본적으로 부모와의 관계에서 형성된 아이들의 태도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관계에 의해 부모를 공경하는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부모가 공경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공경하는 데로 나아가게 되며 이러한 자녀들은 복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와 같이 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맡아서 돌보아야 할 자기 자녀들을 신앙의 길로 이끄는 부모 역시 복된 사람들이다.


다섯째 계명의 이러한 이중적 개념은 이 계명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첫째, 이 계명은 자녀들이 아주 엄중하게 지켜야 하는 법이긴 하지만, 이 계명에 부모들이 실천해야 할 이상적인 생활도 포함되어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제하여 인간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첫부분에 나오는 이 계명의 중요성을 결코 과소 평가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 계명에 복종하는 정도에 따라서 그 뒤에 제시되는, 인간 관계에 관한 나머지 율법들을 순종하는 것이 쉬울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먼저 이 예명이 의미하는 바 그 자체를 고찰하고 이어서 신약의 사상과 교훈으로써 이 계명의 보다 깊은 뜻을 밝힌 다음 마지막으로 이 명령을 현대 생활의 여러 상황에 실제적으로 적용시켜 보자,

다섯째 계명의 이해

흔히 사람들은 이 계명이 오직 어린 아이들에게만 해당된다고 그릇되게 생각한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면 이 계명에 내재된 더이상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계명이 맨 먼저 어린 아이들에게 적용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부모와의 관계에 있어서 자녀들은 언제나 처음에는 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녀들이 커서 어른이 되면 이 계명이 그 효력을 상실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적어도 이 계명이 지닌 깊은 의미의 절반은 잘못 생각하는 처사이다. "공경하라"은 말에는 순종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가 들어 있다. 물론 이 계명에는 필연적으로 순종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어린아이는 성인이 되며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이른다. 이 때가 되면 사람들은 인생의 크고 작은 문제에 봉착해서 자신이 직접 결정해야 한다. 자녀가 언제까지나 부모의 말을 들어야 한다면 결코 성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에게 복종해온 어린 시절의 훈련은 그 이후 인생의 모든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보호와 통제를 받는 시기가 지나면 그 때부터는 자신이 자신의 문제를 결정하며 그것에 따르는 책임을 져야 한다. 이상의 사실을 생각할 때, 이 계명이 단지 어린 시절에 순종하는 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일생 동안에 해당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면 모두 다 자기 부모에게는 언제까지나 자식이며 부모에게 마땅히 복종해야만 하는 때가 지나갔을지라도 마땅히 공경해야 하는 시절은 언제까지나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계명은 두 시기에 걸쳐 즉 어린 시절과 성인 시절에 모두 적용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한편 "공경한다"은 말의 의미는 "중히 여기다", "높은 위치에 두다", "높이 평가하다", "가장 좋은 의미로 존경하다"는 것이다. 아직 스스로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며 의지를 발휘할 만한 나이에 이르지 못한 아이들이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그리고 기꺼이 부모의 의사에 복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이다 그렇듯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법 역시 아이들에게 스스로를 보호받는 자비로운 요구이면서도 동시에 절대로 필요한 요구이다.


이 법이 자비롭다는 것은 인격이 형성되고 지성이 훈련을 받아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기까지는 아이들이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면에서이다. 아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배려는 언제나 아이들은 놀면서 자유롭게 성장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어리고 젊은 시절은 희망과 활동과 유머로 가득차 있다. 하나님은, 혈연 관계에 의하여 아이에 대해 가장 좋은 배려를 하며 아이에게 가장 좋은 프로그램을 계획할 사람들에게,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발랄한 면이 방해받지 않으면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부모로 하여금 그 생명과 생활을 책임지게 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어린 아이들이 아직 겪을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걱정거리들을 전혀 염려하지 않고 거리낌없이 자라며 방해받지 않고 발전할 수 있게 하셨다.


어린 시절의 미숙한 상태는 성숙한 사고로 발전하기 위한 준비와 훈련이 반드시 필요하고, 이와 같은 것들을 갖춘 후에야 비로소 아이들이 자기에게 내려진 의무를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명령은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가장 자상한 보호자인 부모에게 복종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며, 실로 생의 파멸을 가져오는 치명적인 행위이다. 또한 이는 인생의 아주 아름답고 고귀한 모든 가능성을 이를 수 없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명령의 강제적인 성격은 또한 이 명령의 자비로운 의도를 보여 주는 것이 된다.


이 계명의 아주 훌륭한 점은, 하나님께서 아이에게 단순히 부모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복종하라고 요구하고 계신다는 것에서 또한 볼 수 있다. 즉 가정 교사나 학교 선생이 부모의 입장을 대신해야 하는 경우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이에게 급박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 경우에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학교 선생에 대한 복종의 원리는 거의가 권위에 대한 두려움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하나님이 바라시는 복종의 원리는 보다 차원이 높은 사랑의 원리이다. 물론 교사들의 역할에 대한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런 견해에서 볼 때 나의 견해는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학교 선생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내 아이들이 일년 중 육개월 이상을 아이들 어머니의 생활과 아버지의 관심의 영향을 받지 않는 채 지나도록 두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아이를 가장 사랑하는 부모에 대한 복종은 하나님께서 아이를 보호하시기 위한 것이며 어린 시절의 인격 성장의 원리가 되기 때문이다.


한편 자녀가 온전한 인격 성장을 위해 부모의 통제를 벗어나서 행동해야 하는 때가 오는데 그 때에도 여전히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이 때는 새로운 형태로 공경을 하게 된다. 즉 예의 바른 태도와 친절한 행동을 통해서 또한 부모님께 만년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공급해 드림으로써 공경을 하게 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복종을 잘 한 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공경을 잘 할 것이다. 부모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시기를 지가서 자 신의 의지로 혼자 선택하고 행동해야 하는 때에 이르게 되면 자식은 어렸을 적에 부모가 대신해서 생각하고 계획하고 명령을 하는 가운데서 받았던 사랑의 참된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가 사랑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부모의 말년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으로 존경과 사랑을 표할 것이다. 혹독한 삶의 투쟁을 현실적으로 깨닫게 될 때 자신이 어린 시절에 참으로 많은 보호를 받았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게 될 것이다. 또한 어릴 때에는 놀기만 했는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부모의 염려와 끊임없는 수고와 간절한 기도 덕분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따라서 점점 더 성숙할수록 더 깊이 부모를 공경하게 되며 과거에 부모가 자기에게 쏟았던, 그리고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서는 어쩌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바랄지도 모를 자식의 사랑을 부모가 쏟은만큼 부모에게 부어주는 것을 삶의 기쁨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1) 장수에 대한 약속

부모에 대한 공경의 명령과 결부된 장수에 대한 약속은 하나님께서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거의 모든 약속처럼 각 개인에게 적용된다기 보다는 오히려 민족 전체에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약속은 개인적인 보상을 공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여 그것에 근거해서 행동한 결과로 얻게 되는 공동체의 축복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 주어진 장수의 약속에 개인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대체로 부모를 공경하는 가운데서 결국 수명을 연장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좋은 습관과 올바른 성품을 익히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부모를 공경하는 분위기에서 형성된 성품에는 수명을 연장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평온함이 있다. 반면에 자기를 낳아주고 희생적인 사랑을 베푸는 부모에게조차 복종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형성된 성품에는 수명을 단축시키는 경향이 있는 무모함과 흥분하는 기질이 있다. 이처럼 이 약속이 개인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보다 이 약속이 진정으로 적용될 수 있는 대상은 민족 전체이다. 사람들이 가정에 대한 신성한 개념을 유지하고 자녀들이 어릴 동안에는 부모에게 복종하고 더욱이 성숙한 후에도 언제까지나 부모를 공경하는 백성들은 자신의 소유를 잃지 아니하며 자기 땅에서 영구히 거하는 강한 민족이 될 것이다.


2) 부모에 대한 적용

부모를 공경하라는 다섯째 계명이 자식에게 일차적으로 주어진 계명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나 동시에 부모에게 적용되는 측면도 있다는 점에 관해 몇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적용은 상식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너무나 명백하다. 부모들이 자식으로부터 공경을 받으려면 그들이 반드시 공경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자녀로 하여금 즐거운 마음을 갖고 절대적으로 복종을 하게 하려면 반드시 사랑에 의해 결정되는 부모의 통제가 따라야 한다. 그 사랑은 선견지명이 있으며 포용력이 커야 하며 현재의 즐거움을 위해 앞날의 고통을 대가로 지불하는 일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 엄격함을 지닌 사랑이어야 한다.


그러한 성숙한 사랑은 오직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는 성품을 가진 사람에게만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올바른 부모가 되는 선행 조건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히 행하는 올바른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먼저 하나님께 복종하는 생활을 하며 모든 생활의 방식에 대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한, 어떤 부모도 자기 자식들에 대해 바른 사고를 하거나 자식들을 위해 진정 효과적인 프로그램을 계획할 수 없다. 사실 부모가 자녀로 하여금 장차 자신의 의지로 결단하여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일을 맡았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성품에 일치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자녀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바르게 보여 줄 수 있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끊임없이 가져야 할 책임이 그들에게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아이들에게 부모를 공경하도록 가르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부모가 자녀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나타내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신약의 교훈에 의한 다섯째 계명의 조명

이 계명이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고 또한 구약 성경에 기록된 구약 시대의 계명들 중의 하나이지만 아무도 이것이 신약 시대에 와서는 철폐되었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른 계명과 함께 이 계명도 부모와 자식 사이의 신성한 관계를 더욱더 명백하게 보여 주는 성경 다른 부분에 기록된 계시와, 하나님의 목적과 사상을 더욱더 뚜렷하게 진술하는 성경의 다른 기록 가운데서도 발견되고 있으며 또 거듭 강조된다. 특히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여 주신 모범은 대단히 아름다우며 암시하는 바가 많다. 하나님의 둘째 아담으로 보내신 그리스도께서 첫째 사람 아담처럼 청숙한 인간의 모습을 지닌 영광스러운 점을 다 갖추고 세상에 오시질 않고 유년 시절을 겪어야 하는 아기로서 세상에 왔다는 사실은 다섯째 계명을 해석하는 데에 많은 빛을 비춰준다는점에서 무한한 가치가 있다. 어린 시절 동안 아이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의 통제를 받았다. 아이 예수는 사람을 성장하게 만드는 부모의 따뜻한 사랑과 감독과 통제를 받으면서 지혜와 키가 자라갔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다.


아이 예수가 열두 살이 되어 부모가 그를 하나님 앞에 보이려고 성전에 데려갔을 때 예수께서 모친을 대하시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여기에서도 암시하는 바가 매우 많다. 주의 모친이 근심하며 그를 찾았다는 사실은 분명 예수께서 그 이전에는 모친이 금방 찾을 수 있는 곳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따라서 아이를 잃어버리고서 즉시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은 마리아로서는 처음 당하는 이상한 일이었다. 근심에 싸여 남편과 함께 아이를 찾아다니는 어머니의 모습은 나사렛 집에서 가졌던 그들 사이의 사랑과 복종의 원만한 관계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마침내 모친 마리아가 아이 예수를 찾았을 때 아이가 모친에게 한 질문을 잘 읽어 보면 바로 그 사실 즉 주께서 모친을 공경하고 신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이 말을 글로 기록했기 때문에 이 말의 아름다운 소리가 상실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 말에 대해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품고 있는 생각은 확실히 이 기사의 전체적인 장면과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과는 다소 어긋나 있다. 여기서 주님이 어떤 의미로든지 자기 모친을 책망하고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알지 못하셨나이까"라는 말을 중심적으로 생각해 보라. 그러면 즉시 그것이 모친에 대한 사랑과 신뢰에서 나온 질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말은 마치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


"어머니, 어머니는 어머니께서 제게 가르쳐 주시고 보여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일 외에는 내가 어떤 일에도 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아실 만큼 나를 아주 잘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보가 예수께서는 부모의 통제를 뿌리치고 나간 일이 전혀 없으셨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어

지는 성경 구절에 "예수께서 한 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고 분명하게 진술되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리켜 나의 모친이요 형제요 자매라고 말씀하셨을 때 다소 모친을 무시하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주님의 말씀의 뜻을 오해한 데서 기인한 것이 틀림없다. 그 말씀에도 모친을 무시한 흔적이 전혀 없다. 다만 그렇게 말씀하심으로써 모친과 형제와 자매의 친밀함은 그대로 두신 채 제자들을 아주 명예롭게 높이신 것 뿐이다.


주님에게서도 역시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시기는 지나갔지만 공경해야 하는 때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 주님은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음을 눈앞에 둔 마지막 두려운 시간에 갈보리 언덕의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저주스러운 어둠 속에서도 그 동안 깊이 사랑해온 모친을 여전히 생각하고 계셨다. 더욱이 모친이 현재 겪고 있는 어려운 사정을 감안하여, 주님의 사랑과 그 사랑의 표현 방법을 가장 깊이 깨닫고 있던 제자에게 모친을 맡기고 사랑으로써 돌보아 드리도록 부탁하셨다. 이렇게 주님은 자신의 인품과 모범을 통해서 다섯째 계명을 가장 영광스럽게 지키셨다.


또한 주님은 가르치시는 중에 그 당시 성행하던 한 가지 악습에 다섯째 계명을 적용시킴으로써 이 계명에 대해 아주 설득력 있는 해석을 하셨다. 그 당시 사람들은 부모를 봉양하는 데 쓸 수도 있는 재물이 "고르반"되었다고 말함으로써 즉 제단을 봉사하는 데 드려졌다고 말함으로써 부모를 보살펴 드리는 의무를 기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부모를 봉양하는데 써야 할 것을 제단에 바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즉 주님은 늙은 부모님을 돌보고 위로하는데 재물을 사용하는 것이 그것을 하나님의 제단에 바치고 부모님은 소홀히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거룩한 일임을 가르치심으로 부모 공경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던 것이다.


주님의 이러한 모범과 가르침이 곧 신약 성경이 나타내고자 하는 부모 공경에 대한 교훈인데 이것을 사도들은 그들의 글에서 거듭 거듭 밝히고 강조한다.

다섯째 계명의 현대적 적용

아마도 오늘날, 자녀들이 어린 시절에는 부모에게 불순종하고 성장해서는 부모에 대해 불손한 행동을 하거나 존경심을 갖지 않는 태도가 만연해 있는 이 현상만큼 슬픈 징조는 없을 것이다. 이 현상은 여러 면에서 아주 많이 나타나는데, 슬프게도 이것이 불신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나는 과거 십 육년 동안 많은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함께 지낸 경험이 있다. 그들 중 몇몇 가정이 보여 준 신앙적 행동의 아름다움은 아직도 내게 끊임없이 피어나는 향기로 남아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다른 몇몇 가정은 아주 고통스러운 인상을 내게 남겨 주었다. 제 멋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항시 실수하며 또한 접촉하는 모든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는 아이들은 그들의 좋지 못한 행동을 통해서 그들 자신의 미래가 불행할 것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아버지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남자 아이들은 경박하고 무례한 별명을 대신 사용해왔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양식있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녀들이 부모를 경박한 말로 조롱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그들의 부모를 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 자신이 형편없는 아이임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자 아이 들은 흔히 자기 어머니를, 엄청나게 많은 집안의 하찮은 일에 자기들이 전혀 손대지 않을 수 있도록 해주는 가정부 정도로 보는 것 같다. 가정에서 멀리 떨어져 생활하므로 부모의 금지나 명령을 받지 않아도 될 날을 고대하는 현상이 도처에서 보이는데, 그것은 아주 슬픈 현상이다.


이러한 불행한 현상이 만연하는 현실에 있어서 대부분의 경우 아이들은 부모보다는 책임을 덜 지게 된다. 어떤 경우이든지간에 이와 같이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부모에 대한 개념이 무너 데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들은 자신을 자기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나타내는 자로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의식주를 제공하는 자로 혹은 도덕 수호자 정도로만 생각해 왔다. 오늘날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자기 자녀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서 사람들은 아버지라는 이름이, 자녀들과의 참된 관계를 유지케 하며 자녀들에게 지워져 있는 무거운 책임을 깨닫도록 교육하는 자의 이름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생계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을 가리키는 호칭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버지들이 자녀를 훈련시키는 문제에서 지은 죄는 그들이 이제까지 생각해 왔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살렘의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예수께 데려 왔을 때"라고 시작하는 찬송이 성경의 이야기를 바르게 해석한 것인지 매우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이 사건이 기록된 마태복음 19:14에서 사용된 헬라어의 대명사는 남성이며, 또한 당시 아버지가 자녀를 훈련시키는 책임을 졌기 때문이다. 아버지들이, 하나님이 그들에 대해 의도하시는 것보다 자녀에 대한 자신의 역할을 과소평가한다면, 자녀들이 자기들을 더이상 공경하지 않을지라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또한 오늘날 어머니들도 흔히 자발적으로 자식의 노예가 되어서 육체적으로 자식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일일이 간섭하면서도 자신이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하나님의 은혜를 분명하게 나타내야 하는 사람 이라는 중요한 사실은 잊고 있다.


다섯째 계명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해야 한다는 명령이라는 사실에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계명이 그와 같이 명령하는 이유는,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가 자녀에게 하나님을 바르게 보여줌으로써 아이의 잠재력을 완전히 개발시키는 데 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부모들이 먼저 자신의 거룩한 위치에 대한 높은 이상을 품어야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틀림없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는 명령에 순종할 것이다.


한편 자녀들은 그들이 십계명 중 이 다섯째 계명에 복종하는지 여부에 따라서 다른 모든 계명들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 처음 네가지 계명을 잘 지키느냐는 것은 이 계명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불신앙, 신성 모독, 반역, 이 모든 것 역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죄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여섯째 계명 이하의 모든 계명도 다섯째 계명에 포함되어 있다.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들은 살인, 간음, 도적질, 비방, 탐욕의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젊은 남녀들이 순식간에 일어나는 야릇한 유혹을 받으면서도 경건한 부모를 기억함으로써 거듭 그 유혹을 이겨냈다는 사실은 수세기 동안의 많은 이야기들이 집증하고 있다.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대중이 무어라고 비판하든지간에 자상하면서도 엄격하게 다스리는 가운데서 태어나면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자로서 거룩한 존재인 부모의 그 신성한 역할이 공격받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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