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7-21 12:38
[3]십계명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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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8,686  

제3계명(출20:7)


성경본문: 출애굽기 20: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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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언제나 그 자체가 하나의 뚜렷한 계시적 성격을 지닌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신을 알리신 모든 호칭을 통해서 자신의 신성 가운데 있는 어떤 속성을 계시하셨다. 히브리 사람들의 이름은 모두 부모의 희망에 따라서 기도 문구나 예언의 의미로 지어졌었다. 이 원칙과 비슷한 어떤 점이 하나님의 이름에도 해당된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알리신 새로운 이름이나 명칭을 통해서 그래 그때마다 하나님의 본성이나 섭리 방법에 관한 새로운 사실들을 배웠다. 따라서 우리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라는 이 셋째 계명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상에서 언급한 대로 하나님께서 그 성호를 통하여 자신의 속성을 계시하셨다는 점과 이스라엘 백성 역시 그 성호를 통하여 하나님을 이해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셋째 계명에 대한 이해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할 때는 마땅히 그 이름의 의미와 의도에 맞는 방법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 이름 속에 내재된 의미와 의도를 무시하고 그 이름에 의해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을 부정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 셋째 계명을 깨뜨리는 범죄 행위이다.


사 48:1을 보자.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유다의 근원에서 나왔으며 거룩한 성 백성이라 칭하며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성실치 아니하고 의로움이 없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느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는 너희는 이를 들을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나 성실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나 의로움이 없는 이런 태도야말로 아주 명백하게 이 계명을 깨뜨리는 행위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 이름에 담겨 있는 계시의 내용은 따르지 않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셋째 계명을 어겼던 것이다.


마 7:22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서도 사람들은 예언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권능을 행하는데 주의 이름을 사용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상 주님은 전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이 계명이 경고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오히려 신성 모독의 교묘한 형태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본래 정하신 합당한 방법대로 사용하지 아니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내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계시의 내용에 충실하지 아니할 때 실재로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다.


"여호와는 그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히브리 원문에는 죄 없다란 표현이 아니라 깨끗하다는 말이 이 구절에 들어 있다. 따라서 그 본래의 의미는 이렇다.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그를 깨끗하다고 판결하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실로 엄한 경고의 말씀이다. 또한 이 말씀을 바꾸어 생각하면 도덕적으로 깨끗한가를 알아보려면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그 사람의 태도를 보면 된다. 즉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진실되이 사용하느냐 망령되이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깨끗하거나 부정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사람 즉 의심스러운 문제에 대해서는 진지한 태도를 취하느라고 하나님의 이름은 빼고 얘기하는 사람이, 항시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면서도 생활에서는 늘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보다 오히려 깨끗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많다. 이것은 사실 매우 엄격하고 두려운 테스트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지를 즉 깨끗한지 부정한지를 알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기도는 이 주제를 아주 잘 밝혀 준다. 물론 주님은 몸소 드리신 그 기도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기도-사람들이 흔히 말하듯이-를 보여 주려고 하셨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우리 또한 드려야 하는 이 기도를 깊이 음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단순한 암송으로는 이 기도가 지니고 있는 참된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 6:9, 10에 나오는 이 기도를 시작하는 간구를 주의해 보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나라이 임하옵소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한글 개역은 이 전체 문장 증간에 마침표가 없이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필시 이것은 구두점이 잘못 찍힌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에 있어서는,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행위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기원이 있은 뒤에, 세폭의 병풍처럼 이어진 세 마디의 간구가 있고, 이어서 바로 뒤에 있는 한 가지 간구만 꾸미는 것이 아니다 세 마디 간구 전부를 꾸며 주는 한 문장이 세 가지 간구 앞에 선행되어 나오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이에 따라 이 문장을 분해하여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이루어지이다.


즉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라는 구가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말만 꾸미는 것이 아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과 "나라가 임하옵시며"을 다같이 꾸미고 있는 것이다. 주기도에 나타난 이런 서술들 즉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과 나라를 임하게 하는 것 그리고 뜻을 행하는 것은 모두 동일한 사실이 각기 다르게 표현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복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름을 거룩히 여긴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을 존경한다는 의미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이름들 중의 하나는 왕이라는 칭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왕권에 복종할 때에야만이 왕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게 된다. 하나님의 또 다른 명칭은 아버지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것처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할 때에야만이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칭호를 부를 때는 그 이름에 합당한 행위가 뒷받침 되어야만이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지 않게 일컫는 것이 된다.

셋째 계명의 현대적 적용

오늘날 사람들은 세 가지 방법, 즉 신성을 더럽히는 언행과 경솔함 그리고 위선으로서 셋째 계명을 위반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불경스럽게 맹세하는 죄가 만연해 있다. 이것은 그 무엇보다도 가장 조심해야 할 습관으로서 흔히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짓는 죄이다. 악은 정서의 불안정 뿐 아니라 지성의 결핍 때문에도 일어난다.


어떤 사람들은 어느 때 맹세할 수 있는지를 바로 알지 못한다. 그 들은 도덕적으로 아주 부패한 환경에서 태어났기에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말을 자주 해왔다. 이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청결한 환경 가운데서 자라났으면서도 그와 같은 습관에 빠진 사람들보다는 훨씬 죄가 적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들이 특별히 하나님의 이름에 관계된 모독적인 욕설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많은 유익이 있을 것이다. 아주 빈번하게 사용되는 욕설 가운데 "천벌을 받을 녀석"(God damn you)이라는 말이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누가 자꾸 자기를 애먹이면 즉시 이런 욕설을 퍼붓는다.

그러나 이것은 실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짓이다. 왜냐하면 그 욕을 하는 사람은 상대방이 정말 그처럼 되기를 바라지는 않기 때문이다. 욕을 하면서 정말로 그 욕이 상대방에게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이 욕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해주시기를 결코 바라지 않는 일을 하나님 보고 하라고 비는 모순된 행위이다. 그러나 이것이 구체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사용하는 가장 충격적인 양상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해주시기를 원하지 않는 일을 하나님께 하라고 요구할 뿐만 아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하시지 않는 일을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결코 저주하신 적이 없으시다. 하나님이 저주하실 수 있다는 생각은 이교적인 두려운 견해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구원의 일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 자신의 영적 자살 행위로 인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능동적으로 사람을 버려서 멸망의 구렁텅이 속으로 영원히 떨어져 나가도록 하는 일을 하고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빛되신 하나님 없이 지냄으로 길을 잃어버린 자가 완전한 어두움 가운데 들어가는 끔찍스러운 일은 순전히 그 사람 자신의 잘못이다.

왜냐하면 제 발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강제로 어둠에 들어 가는 사람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결코 강제로 사람을 어두움에 들여보내는 일을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을 저주하신다는 그릇된 생각은 사람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말을 씀으로써 그들 마음 속에 생겨난 것이다. 그런 생각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탁월한 모든 성품을 모독하는 죄악된 발상이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신성 모독적인 말에 들어 있는 그릇된 견해는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의 신관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이 영향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사상을 타락시키고 혼란시킨다. 신성을 모독하는 욕을 하는 습관에 빠진 사람마다 거의 자신도 모르게 그 욕설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데, 그들은 오늘날 우리 귀에 천등 소리처럼 울리는,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시내산에서의 말씀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또 다른 형태가 사회 여러 곳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경박스럽게 사용하는 일로서 다름 아닌 하나님에 관해 농담을 하는 행위이나. 사람들을 웃기기 위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한 농담들이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진다. 그러나 그런 얘기들은 사람들이 지옥 불을 피하듯이 피해야 한다.


사람들이 거룩한 것을 거룩히 여기지 않고 경솔하게 생각할 때는 언제나 그 마음과 의식에 악한 영향을 되받는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존경심과 경외 의식을 스스로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그와 같은 거룩한 의식이 없이는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것도 불가능하며, 받으시기에 합당한 봉사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이름에 대한 존경심을 잃어버린 사람은 철저하게 부정한 사람이다.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떨지 않는 사람은 마땅히 해야 할 바대로 예배하지도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로움을 행하지도 않는다.


세번째 계명을 깨뜨리는 여러 유형 가운데 아주 교묘한 마지막 형태는 "주여 주여"하면서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행하지 않는 사람이 저지른다. 행함이 없는 기도는 불경한 짓이다. 존경하는 마음이 없이 드리는 찬양은 셋째 계명을 위반하는 행위이다. 사욕을 품은 채 헌금 하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대한 모독이다. 이런 생각들을 다르게 말해 보자. 교회내에서 행해지는 신성 모독은 세상에서 행해지는 신성 모독보다 한없이 더 악하다. 성당에서의 신성 모독은 빈민굴의 신성 모독보다 훨씬 더 악하다. 그러면 교회와 성당에서 신성 모독은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가? 실천이 따르지 않는 외식적인 기도, 하나님을 찬양하기는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그에 대한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의미가 상실되는 찬양, 이러한 기도는 신성 모독이며 이러한 찬양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범죄 행위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는 웅변적 말솜씨와 미사여구를 사용하고 경건한 태도로, 심지어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설교하고 기도하며 찬송하고서 집으로 돌아가 만약 이 계명들 중 하나라도 깨뜨린다면 그 사람은 기도할 때 하나님을 모독하였던 것이다. 설사 그가 세상은 속일지라도 전지하신 하나님은 속이지 못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다면,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진실함이 없다면 차라리 그는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이 낫다.


이 셋째 계명을 가장 철저하게, 그리고 아주 두렵고 끔찍하게 깨뜨리는 형태는, 바로 자기가 한 신앙 고백대로 전혀 생활하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계속해서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태도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신성을 모독한 자들이라는 얘기를 들으면 깜짝 놀랄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생활하면서 말의 실수를 후회하여 입을 다물겠다는 맹세를 해본 적도 없고, 신성을 모독하거나 저속한 말을 사용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오히려 이런 일에 구애받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런 사람들이 아주 노골적인 신성 모독자보다 오히려 더 자주, 더 무섭게 이 셋째 계명을 깨뜨리고 있는 것이다.


만일 입술로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신앙 고백을 하면서도 생활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공공연히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고백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방해하는 자이다. 누구든지 범할 수 있는 일로서 아주 교묘하고 두려운 형태로 셋째 계명을 깨뜨리는 행위는 바로 이와 같은 위선이다.


가장 간단한 음절이면서도 하나님의 마음과 능력과 사랑을 가장 많이 압축시켜 넣은 최상의 이름은 무엇인가? 옛부터 전해진 메시지로 다시 돌아가서 그 음성을 들어보자.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바로 그 이름은 원래 하나님이셨으나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신 자의 이름 예수이다.


여기,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그 이름에 관해 노래하면서도 자기 죄에서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자가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도 예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자이며 이 셋째 계명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구속주로 생각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를 칭찬하며, 그의 가르침에 관해 이야기하고 그의 행동을 비판도 하지만 그의 모든 언행을 장려한다. 그러나 그는 죄에서 구원받지 못한다. 그는 단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인 것이다. 인간이 부를 수 있는 최상의 이름 즉 인성과 신성을 담고 있는 예수라는 이름을 신앙의 대상으로, 그리고 악에서 구원하는 표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차라리 그 이름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편이 낫다. 왜냐하면 그런 의미에서 사용하지 않는 것은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름을 모든 사람이 진실로 사랑하며, 구원을 위해 부르는 의미로 쓰이기를 바란다. 또한 사람들이 그 이름에 대해 이렇게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예수는 죄수들의 족쇄를 깨뜨리시며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고

힘 없는 자들에게는 능력을

죽은 자들에게는 생명을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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