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7-21 12:37
[2]십계명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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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7,437  
제 2계명(출20:4-6)


성경본문: 출애굽기 20:4-6)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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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이 이 둘째 계명이 첫째 계명의 반복이 아니냐고 반문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둘째 계명은 첫째 계명을 반복한 것이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이 계명의 초점이 첫째 계명처럼 다른 신들에 대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계명이 금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한 분 하나님을 믿고 예배할 때 흔히 범하기 쉬운 습관적 잘못들에 대해서이다.

첫째 계명은,

우리에게 "나는 예배의 최고 대상인 여호와 주 너의 하나님이라"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알리시는 그 한 분 외에는 어떤 신도 두지 말라고 금하고 있다.

그러나 둘째 계명은,

한 분 참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다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서, 사람들의 예배를 돕기 위해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어떤 것을 만드는 행위를 금하고 있다.

둘째 계명의 이해

과거 초창기의 일부 청교도들이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만드는 것 자체가 금지된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모든 형태의 미술을 우상 숭배적인 것이라고 간주한 적이 있다. 필자도 그리스도인들 중에 둘째 계명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사진 찍기를 싫어하고 집안에 그림을 걸어 놓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본적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을리가 만무하다. 왜냐하면 이 계명을 주신 후에 즉시 하나님은 성막에 속한 물건들 중 가장 거룩한 지성소에 있는 속죄소를 두 그룹의 형상으로 가리우게 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제사장이 직무를 수행하러 성소에 들어갈 때 입은 옷의 가장자리에도 방울과 석류가 달려 있었다. 이처럼 사람은 무슨 모양이든지 만드는 것을 금지받은 것이 아니다 단지 예배를 돕는 보조물로서 형상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받은 것이다.


오늘날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가보면 한때는 형상들이 서 있었으나 이제는 텅 비어 있는 벽감들을 아주 많이 볼 수 있다. 그 형상들이 제거된 이유는 그것들이 단순히 무슨 모양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앞에 불이 켜있고 예배자들이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 계명을 위반하는 행위였다. "사람은 자신을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아야 한다"는 이 계명의 강조점은 마지막 말씀에 들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자신을 도울 어떤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독실한 신자들은, 자기들은 형상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에 계시는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공언한다. 또 자기들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상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상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를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말할지라도 이것은 둘째 계명이 금하고 있는 일킴에 틀림없다.

둘째 계명이 금하고 있는 일이란, 사람이 실제로 형상이나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상을 예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이 예배를 돕는 형상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지니다. "물질적인 것은 영적 것을 돕지 못한다.

사람의 형상을 만드는 이유

둘째 계명을 내리신 이유를 보다 주의깊게 살펴보기 위해서, 왜 사람들이 형상이나 그림을 만들어서 자기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그 것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자. 그 답은 간단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는 영적인 감각이 있는데 그것이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나 매일 하나님과 교제한며 살아가는 사람치고 기도하도록 자신을 돕는 그림이나 형상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 주일간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며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예배할 때 자기들 앞에 놓인 형상에게서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성령으로 거듭남으로써 회복된 영적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살아 있는 영적 감각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직접 교제를 나눌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며 예배하는데 있어서 돕는 수단을 갈망한다면, 바로 그 점에 의해서 그에게 영적 의식이 없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또한 이 영적 의식의 결핍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바르게 나타내는 것을 전혀 만들지 못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내 보려고 한 시도는 지금까지 결국 다 하나님을 잘못 묘사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이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이런 사실 때문이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결여되며 하나님의 임재를 상실한 사람들로서는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무엇인가 만들지라도 하나님을 잘못 표현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게다가 그들이 예배하려고 할 때는 더구나 잘못된 그 형상으로 인해 하나님께 대해 더욱 그릇된 개념을 가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될 것을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이다.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자.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을 깨닫도록 돕는 어떤 종류의 형상을 세우는 순간 바로 그는 하나님에게 있는 본질적인 면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그 형상이 조각이나 그림 혹은 어떤 예배 제도라고 생각해 보자. 사람은 그것을 가리켜 "이것은 내가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돕는 보조물로 만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결국 그가 무슨 짓을 했는가 그 결과를 살펴 보라, 조각이나 그림 혹은 예배 제도는 제한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질은, 그는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자존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즉 그의 존재는 끝이 없고 그의 능력은 한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한성이야말로 하나님께 대한 사상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어떠한 형상을 만드는 순간부터 그는 하나님의 본질을 부인하는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단지 형상 자체가 거짓된 것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사람을 잘못 인도하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번 이 문제를 생각해 보자. 사람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 놓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는데, 그 형상이 거짓되고 제한된 것이라면, 그것을 예배함으로써 그 사람에게 어떤 결과가 발생하겠는가?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 23:7). 하나님을 잘못 표현하고 있는 형상에 의해서 생겨난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사고는 그릇된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우상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저희 우상은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시 115:6, 7).


이어서 우상 숭배에 대한 철학이 나온다. "우상을 만드는 자는 그와 같으리로다." 사람은 다 자기가 섬기는 신과 같아진다.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 놓은 것을 닮아간다. 만일 사람이 자신의 우상이나 형상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관념을 갖는다면, 그는 자신의 신과 같이 그릇되어진다. 바로 이 점이 하나님께서 이 계명을 내리신 두려운 이유이다. 이것은 그저 일시적인 계명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다른 모든 명령처럼 영원한 원칙에 근거해 있는 것이다. 사실상 하나님은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너희는 나를 무엇에든지 견주려고 하지 말라. 그러한 노력은 하나같이다 실패하게 마련이고 오히려 사람에게 끊임없이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둘째 계명의 현대적 적용

현대인들에게도 과거 모세를 통해 주어진 이 둘째 계명을 깨뜨릴 위험이 있는가? 물론이다. 둘째 계명을 위반하는 몇 가지 예로는 사제 제도의 부활, 종교 의식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품고 있는 감정, 기독교의 종교적인 의식들을 부당하게 높이고 지나치게 강조하는 태도, 공공연한 자연 숭배, 예배와 종교로까지 발전하고 있는 인간 숭배와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런 모든 일을 하면서도 자기들은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불행하게도 자신들을 위하여 만든, 하나님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려다가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실패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사제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 그는,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마음에 하나님을 계시해 주는 일을 한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 또한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는 사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생각해서 자신의 영혼을 사제에메 맡길 때는 언제나 사제가 그 사람에게 형상이 되고 우상이 된다. 따라서 이런 일이 행해졌을 때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개념은 왜곡되었고, 그 결과 예배하는 자들이 타락하였다.


이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살펴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성직자가 횡포를 부려 왔던 세계의 여러 나라들을 보라.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는가? 스페인을 예로 들어보자. 스페인의 쇠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솔직이, 스페인 국민들이 하나님에 대해 그릇된 견해를 지녀 왔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지를 않고 사제를 통해서 하나님께 이르려고 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제 제도는 허다히 많은 악을 일으키는 여러 근원 중의 하나가 되어 왔다. 특히 사제 제도는 지금까지 둘째 계명을 깨뜨려 왔다. 하나님은 첫째 계명에서 "나는 네 하나님이니 나를 경배하라"고 말씀하시며, 둘째 계명에서는 "내게 직접 오너라,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도 너와 나 사이에 두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직접적인 교통 외에는 어떤 것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다.


종교적인 의식에서도 똑같은 위험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화려한 예배, 아름답고 예술적인 환경이 진정한 예배 분위기를 조성한다고 그릇되게 생각한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이 사람의 영적 본성에 미치는 결과는 무엇인가? 과연 어떤 형태의 의식주의에 몰입다는 사람들은 더욱더 영적으로 되어가고 있는가? 이런 사람들의 생활이 성령의 열매를, 그리스도의 성품을, 하나님의 생명력을 나타내 보이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의식주의가 진정 신앙에 도움을 줄 수는 없다. 그것은 항시 감각으로 시작해서 감각으로 끝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순전히 미적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이르도록 도움을 받았다고 말한다면, 그는 참 하나님께 가까이 간 것이 아니라 거짓 미적인 것으로 포장된 신에게 가까이 간 것이다.


같은 원리가 개신교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개신교회는 많은 회중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모든 남녀가 각각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자격으로 예배드린다. 이처럼 각 개인이 제사장의 자격으로 예배할 때, 화려한 예배 의식에 현혹된다면 과거 사람들이 새긴 우상이나 그림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엎드려 절한 것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우상 숭배자들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주의 만찬에 있어서도 이를 단순한 기념 의식 이상의 어떤 것으로 만들려는 심각한 위험이 있다. 그러한 시도에는 아주 큰 위험이 따른다. 최근에,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몇몇 사람들이 "주의 만찬은 참석자들의 신앙을 돕는 어떤 신비한 요소가 있다"는 주장을 발설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명령하신 것처럼 주의 만찬에 참석하여 그리스도를 기억하기만 하면 그 사람은 도움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단순한 의식이 그 이상의 어떤 신비나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될 때 거기에는 큰 위험이 따른다. 주의 만찬에 특별한 어떤 감화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순간 그 의식은 그리스도의 위치로 올라가서 우상 숭배의 잘못을 범하게 된다. 따라서 그런 식으로 그 의식이 행해지자마자, 그 의식 이면에 있는 모든 영적 진리는 손상을 입는다.


좀더 높은 차원의 문제를 떠나서, 오늘날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는 말이 얼마나 많이 나도는가를 기억하라. 아무도 자연의 역할을 과소 평가해서는 안된다. 꽃, 골짜기, 언덕, 햇빛, 새, 이런 것들은 아름답기 그지 없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께 이르지는 못한다. 사람이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을 통해서 자연에 이를 수는 있다. 즉 사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한다면 그는 자신에게 모든 자연을 열어 보여 주는 신비한 열쇠를 얻을 것이다. 그러나 피조물인 자연을 통해서 창조주인 하나님께 올라가려고 하는 자들은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사람이 꽃을,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 예배에 사용할 때는 언젠가 거짓 신을 모실 수밖에 없으며 그로 말미암아 스스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인도주의에 대한 지나친 숭배 역시 사실 인간성을 통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하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인도주의란 미명하에 인간을 사고의 중심에 놓는 것은 하나님이 마땅히 계셔야 할 자리를 인간의 것으로 대체하는 참으로 딱한 일이다. 하나님은 인류 보다 훨씬 뛰어나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류를 사랑하시고 그들이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려고 한다면 그들을 구속하실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에게 이르기 위해서 피조물이며 구원의 대상인 인간을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나타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왜곡하는 행위이다.

둘째 계명에 내재된 경고와 약속

둘째 계명과 연결된 하나님의 엄숙한 경고와 은혜로운 약속을 특별히 주의하여 보자. 이 구절은 사람들이 흔히 잘못 이해하는 구절들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이 계명의 앞 부분을 읽은 다음 뒷 부분으로 넘어가서, 만일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은 그 죄 때문에 그의 자식을 벌하실 것이라고 단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둘째 계명은 명백히 다음 세대에서 나타나는 죄의 결과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이 결론 부분의 말이 지니고 있는 단순하 면서도 명백한 의미는 무엇인가? 만일 사람이 무엇인가를 자신의 창조주의 자리에 올려 놓는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바로 그 죄악이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의 후손 삼 사대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에 무엇인가를 놓고 예배를 드린다면, 혹은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무엇인가를 놓으려고 하는 예배의 영향을 받는다면 그 때 사람들은 자신들뿐만 아니다 그들의 후손들도 해치고 있다는 것이다. 필시 예배에 대한 그들의 잘 못된 개념을 그들의 자식에게 전달될 것이고, 그들 자식의 왜곡된 예배에 대한 의식은 또 그들의 후손에게 전달될 것이다. 그대서 그들은 하나님을 잘못 나타내는 가운데서 스스로 범하는 잘못을 마찬가지로 그들의 후손에게도 저지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자손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실로 심각한 일이다. 그것은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일 중 가장 두려운 일이다. 사람들은 종종 이보다 낮은 차원의 문제를 들어서 자녀들에게 악한 영향력과 습성을 물려주는 것의 폐해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물며 구원과 관계된 이 문제에 있어서는 무엇으로도 그와 같은 행위가 지닌 두려움을 경감시킬 수 없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예배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의 자리에 놓으면 그는 바로 그 습관을 자기 후손에게 넘겨주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참으로 끔찍한 유산을 이렇게 해서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이어서, 이 끔찍한 경고와 함께 나란히 붙어 있는 은혜로운 약속인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은 말씀을 주의하여 보자. 이것은 만일 어떤 사람이 우상을 깨끗이 없애버리고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아무것도 놓지 않은 채 하나님을 예배함으로써 하나님과 살아 있는 관계를 맺는다면, 그 결과 그의 자식의 자식도 그와 꼭같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현저한 대조에 주의를 기울여보자. 즉 하나님께서 죄악은 삼 사대까지 갚으시지만 은혜는 천대까지 베푸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후손에게 참되고 확고하며 전심을 기울이는 순수한 예배를 물려주려고 한다면 그는, 잘 못된 예배를 물려주는 사람이 그의 후손에게 악한 영향을 끼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감화를 그의 뒤를 잇는 천대 후손들에게까지 끼칠 것이다.


사람에게는 한 분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라고 하더라도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가라는 지극히 중요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만일 그가 사제를 통하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면 혹은 의식이나 자신이 만든 어떤 물건을 통하여 예배하고 있다면 그는, 바른 예배를 드릴 때에야 비로소 얻는 본질적인 축복을 스스로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기 앞으로 오라고 즉 직접 예배 드리라고 요구하신다.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있을 때나, 음악의 형태와 양식에 신경을 쓸 때, 또는 그리스도 고난의 표상들인 떡과 포도주가 차려진 식탁을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설교를 뚫고 나아가고, 표상들을 넘어서며, 하나님을 마주 볼 때에야 비로소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사람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마주 대하는 예배에 이르지 못할 때 언제나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있는 까닭에 결과적으로 자신을 파멸시키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감사하게도 오늘날은 아무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아도 된다. 휘장이 갈라졌고 제사장이 사라졌으며 의식도 보이지 않게 치워졌으니 이제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부터 영원하신 하나님에게로 곧장 통하는 길이 생겨난 것이다. 사람은 제사장이나 선지자 혹은 설교가 없이도 곧바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새롭고 바른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무엇인가를 두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본질적으로 우상 숭배의 행위이다. 하나님은 이 행위를 그의 고대 백성들 즉 이스라엘의 시대에도 싫어하셨고 오늘날도 여전히 싫어하신다. 따라서 이러한 진리를 깨달은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것을 떨쳐버리고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감으로 우리 자신 뿐 아니라 천대의 후손까지 축복받는 영광을 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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