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7-21 12:36
[1]십계명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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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8,606  

십계명 강해(十誡命 講解)

서론

기독교는 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의 대상을 성경이 가르치는 방법에 따라 예배하며, 또한 모든 생활의 기준을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실상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러한 까닭에 기독교 내에도 많은 교파가 있고 심지어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이단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조차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원리의 보편적인 기초가 되는 십계명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그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해석에 있어 다소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인간 생활의 기초가 되는 가장 중요한 규범으로 인정하는 점에서는 쉽게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십계명은 구약 시대 뿐 아니라 전기독교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자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규범으로 인정되어 왔다. 그런데 그 내용에 있어서는 담백한 일면을 지니고 있으나 지금으로부터 3500여년 전에 주어진 규범이므로 다소간의 해설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은 어떤 한 부분을 해석할 때 보다 폭 넓게 성경의 다른 부분과 유기적인 관계를 생각하며 해석해야 한다. 십계명 역시 구약 다른 부분의 기록과 신약의 언급 및 특히 율법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의 사역과 비교하여 해석할 때 보다 깊은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한편 성경 가운데 십계명은 단순한 형태로는 출 20:1-17과 신 5:6-21에 중복되어 기록되어 있으며 일부 계명들은 성경 여러곳에 산재되어 반복되고 있다. 여기서는 출애굽기에 기록된 십계명을 기준으로 하여 해설하고자 한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은 이 십계명은 흔히 두 부분으로 구분한다. 그 가운데 전반부 1-4계명은 절대자 하나님에 대해 인간이 지켜야 할 규례를 담고 있고, 후반부 5-10계명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 상호간에 지켜야 할 규례를 담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무엇보다도 우선하여야 함을 보여 주는 동시에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자는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성실하여야 함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는 사람이 정신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의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기독교 윤리의 세부 지침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은 한 시대를 위한 법이 아니라 영구불변적인 가치를 지니는 법이다.

이러한 사실은 십계명이 상세한 법규나 세부적인 규칙이 아니다 일련의 원리라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즉 십계명은 어떤 상황을 전제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주어진 규칙이 아니다. 십계명이 인간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바른 태도이다. 따라서 아무리 환경이 변하고 상황이 달라져도 이 태도는 달라질 수 없으며 단지 시간과 상황에 따라 이 원리를 적용하는 방법은 다소 변경될 수 있다. 여기서는 이러한 십계명의 근본적인 원리와 더불어 현재의 상황 속에서 십계명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의 문제까지 다루고자 한다.

애굽에서 400년간이나 종노릇하던 이스라엘이 출애굽한지 3개월후에 주어진 이 십계명으로 인하여 그들은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 역시 죄에 종노릇하던 자에 불과했으나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리스도의 속죄의 권능으로 인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바른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사명이다. 이러난 사명감을 가진 자에게 십계명은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훌륭한 이정표가 될 것이고 이러한 이정표에 따라 살아갈 때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삶의 승리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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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계명(출20:2-3)

"나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이외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2, 3)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은 십계명 가운데 처음 네 계명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그 중 첫째 계명은 예배의 절대 유일의 대상이 하나님임을 명시하고 있다. 마치 성경의 맨 처음이 '태초에 하나님'으로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십계명의 맨 처음도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선언으로 시작한다. 즉 다신론적인 당시 시대 상황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 여호와만이 참신임을 천명함으로써 바른 신관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십계명은 십계명의 제정자이신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규정하면서 시작함으로써 이 이후에 나오는 계명들의 정당함의 근거를 확보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

십계명의 제일 계명에는 신앙의 유일한 대상이신 참신의 이름을 두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여호와'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다. 먼저 하나님이 자신을 일컬어 선언한, 여호와JEHOVAH)라는 이름의 깊은 의미에 대해 알아 보자. 이 여호와(Jehovah) 라는 말은 세 개의 히브리어 단어가 합성되어 이루어져 있다. 이 세 단어는 다음과 같다. Yehi(그는 존재할 것이다), Hove(존재하도 있다), Hahyah(그는 존재했다). 이 세 단어에서, 첫 단어의 첫 음절인 YEH-(i)와 두번째 단어의 두번째 음절인(h)-OV-(e), 세번째 단어의 마지막 음절인 (hy)-(ha)-AH가 합성 되어 여호와(YEHOVAH)라는 단어가 합성 된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라는 이름에는 그것을 구성하는 세 단어의 의미가 모두 들어 있으며, 그것은 다음과 같은 뜻을 갖게 된다. "장차 계실 분이며 지금 계시는 분이고 이미 계셨던 분이다." 그러므로 바로 이와 같은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시고 영원하시며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여호와란 이름에서 암시되어지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은 유한한 인간의 지성으로는 영구히 풀 수 없는 커다란 신비요, 인간이 아무리 분석해도 거의 알 수 없는 사실이다. 사람이 마음 속으로 미래 세대로 끝없이 뻗어나간다 할지라도 거기서 하나님은 "나는 장차 있을 자이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또 사람들이 생명과 질서와 신비와 계시의 모든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는 현재 순간을 생각한다 할지라도,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은 "나는 지금 있는 자이다" 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마음 속으로 가능한 한 무한히 먼 과거를 생각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는 전에도 있었던 자이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 자신의 기원에 대해서나, 현재 상태, 혹은 자신의 미래의 운명 그 어느 것에 대해서 생각하든지, 하나님은 바로 그곳에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은 "나는 JEHOVAH" 라는 말씀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시를 벗어날 수 없다.

첫째 계명은 이러한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나아가 "나는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하나님'(God)이란 말은 '엘로힘'(Elohim)으로 예배의 최고 대상을 뜻하는 '엘로아'(Eloah)의 복수형이다. 이는 '강하다', '능력 있다'란 뜻을 지닌 어원을 갖는 말로써 하나님께서는 강한 권능과 위엄을 지니신 세상의 주관자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곧 앞으로도 있고 지금도 있으며 전에도 있던 예배의 최고 대상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처럼 과거 현재 미래에 항상 계시는 권능과 위엄의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그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첫째 계명은 바로 이 사실에 근거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전제 없이 이 계명을 생각하는 것은 그 계명의 중요한 의의를 쓸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다."


첫째 계명의 이해

만일 하나님이, 친히 주장하시듯이 앞으로도 있을 것이고 지금도 있으며 전에도 있었던 존재라면 그는 예배의 최고 대상이심에 틀림없다. 만일 그가 여호와 곧 사람의 하나님이심이 분명하다면 하나님만 섬기라는 이 계명은 합당한 것이며 따라서 그 외에 다른 어떤 신을 둔다는 것은 지극히 불합리한 일임에 틀림없다. 만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며 따라서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 여호와 이외에 그러한 묘사에 적합한 다른 존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신을 들어 보라. 그것은 분명 제한된 존재이다. 따라서 다른 신을 섬긴다는 것은 참 하나님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무례한 행동이며 속이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라고 먼저 자신과 자신의 영광을 선언하시고 그 다음에 이에 대한 당연한 결과로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다" 라는 중요한 첫번째 명령을 하신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으며 절대적인 합리성에 근거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신을 필요로 한다. 마음이든지 생활이든지 혹은 자신이 가장 중히 여기는 곳이든지 그 어딘가에 자기가 예배하는 신이 자리잡고 있는 성소를 갖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공기가 없으면 새가 날아다닐 수 없듯이 사람은 예배하는 대상을 두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인간 생명의 기질 자체와 인간 존재의 신비가 예배의 중심 인물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그러므로 생활 전체가 예배이다라고 말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전제가 성립할 때 존재의 모든 행위와 생명의 모든 활동력, 어떤 대상에 대한 능력의 헌신적인 사용, 이런 것들이다 예배 행위이다. 문제는 사람의 생명과 능력이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바쳐지느냐 아니면 거짓 신에게 바쳐지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을 마음에서 몰아내면 스스로 신이 되어 자신을 예배하게 되거나 또다른 거짓 신을 섬기게 된다. 오늘날은 마음의 힘과 뜻을 다하여 자신을 예배하고 오직 자신만을 섬긴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은 언제나 신이나 왕이나 입법자 즉 자신의 계획표를 조정하며 자기에게 명령을 내리고 복종을 요구하는 자를 원한다. 그것이 참 하나님이 아니라면 거짓 신이나 죄악된 자기 자신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첫 계명에서 "너는 나 이외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리라"라고 명하신다.

우상 숭배의 기원

인간이 참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잘못된 예배 대상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이러한 명백한 사실은 우상 숭배의 기원을 보여 준다. 즉 사람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기어 "나는 주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라고 말씀하시는 자를 보지 못하게 되는 순간 곧바로 그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어떤 것을 대치시킨다. 성경에 언급된 이방인의 신들 즉 몰록이나 바알, 그리고 맘몬과 같은 신들을 생각해 보라. 몰록을 예배함으로써 사람들은 몹시 잔인해졌고, 바알을 예배하려면 사람들은 짐승 같은 아주 추잡한 성적 행위들을 거쳐야 했다. 그리고 맘몬의 추종자들은 재물에 숨어 있는 막강한 힘을 맹렬하게 추구하며 이에 사로잡히도록 만들었다. 몰록이나 바알, 맘몬은 거짓 신들이다. 그런데 이 거짓 신들은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예배하고 있는 것들이다. 비록 이 신들이 오늘날과 같이 문명이 발달하고 계몽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다른 이름으로 알려져 있을지라도 세상은 그 신들을 예배하는 우상 숭배자들로 가득차 있다. 사람들은 그 실례를 보기 위매 구태여 우상 숭배가 성행하는 것으로 알려진 아프리카나 중국 혹은 인도에 갈 필요조차 없다. 그 예는 이 나라에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대도시에는 자신들의 잔인한 욕망이라는 몰록에게 인간이라는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그들은 그들의 비열한 욕망이 만족을 얻는 한, 싸움에서 얼마가 많은 사람들이 죽든지 상관 하지 않는다. 또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바알 곧 짐승 같은 행위를 숭배한다. 이 말이 참으로 틀림없다는 것은 매일 밤 런던 거리에 팔 만에 달하는 타락한 여자들이 있다는 사실로써도 분명히 알 수 있다. 누가 그들을 먹여 살리는가? 바알 숭배자들이다. 끔찍하고 가증한 이 정욕의 소용돌이에서 젊은 남자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두려운 모든 행위가 실상은 우상 숭배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사실 그렇다. 그것은 참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타락한 비너스의 전당에서 예배드리는 남자들이 바치는 충성의 맹세이다.

맘몬 숭배도 오늘날까지 살아 남은, 또 다른 악한 형태의 신앙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재물에 때한 강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따라서 오늘날이야말로 첫째 계명이 새롭게 강조되어야 할 때이다. 이 시대는 재물의 신에 대한 열렬한 숭배로 말미암아 저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우상 숭배에 대한 일반적인 문제들을 다루어 왔다. 그래서 더러는 자기들이 앞에서 언급한 신들 중 하나를 숭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언급된 다른 두 가지 형태의 예배가 있다. 하나는 구약에 나오고 다른 하나는 신약에 나오는데 둘 다 주의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럼 신약의 언급은 뒤로 미루고 먼저 구약의 언급을 검토해 보자. "그가 낚시로 모두 취하며 그물로 잡으며 초망으로 모으고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그물에 제사하며 초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식물이 풍성케 됨이니이다"(합 1:15, 16).

사람이 자기에게 많은 소득과 음식물을 마련해 주는 것들을 예배한다면 그것은 맘몬의 위력을 보여 주는 슬픈 증거이다. 오늘날 하나님 대신에 자기의 사업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다음의 이야기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를 가장 빠르게 전해 줄 것이다.

한 아이가 빵 한 덩어리를 들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너 들고 있는 게 뭐냐?"

"빵이 예요."

"어디서 났니?"

"빵 굽는 아저씨한테서 샀어요."

"그 사람은 그 빵을 어디서 구했지?"

"그 아저씨가 만들었지요."

"그러면 그 아저씨는 무얼 가치고 빵을 만들었니?"

"밀가루 로요."

"밀가루는 어디서 났지?"

"방앗간 아저씨 한테서요."

"방앗간 아저씨는 밀가루를 어디서 구했니?"

"농부한테서요."

"그러면 농부는 어디서 그것을 얻었니?"

그 순간 아이는 진리를 깨닫고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하나님 한테서요."

"그래, 그러면 너는 그 빵을 어디서 구한 것이지?"

"아. 맞아요. 하나님에게서 얻었어요. "


결국에 가서 아이는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현명함을 가졌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물질주의적인 시대를 사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일해서 나와 내 가족을 먹여 살린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하나님이 그와 그의 가족을 먹여 살리시는 것이다. 사람들은 단지 최후의 수단으로서만 하나님을 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이 세상을 하직할 때는 하나님이 마련하신 천국에 슬며시 들어갈 수 있기를 늘 바란다. 그러나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를 향하여 큰 소리로 이렇게 호통치신다. "너희는 나를 첫번째로 삼고 사업을 두번 째로 삼아라." 사람들은 그물에 제사를 해서는 안되며 초망에 분향을 해서도 안된다.

첫째 계명에 대한 신약의 교훈

우상 숭배에 대한 신약의 묘사는 빌 3:18, 19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라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이것은 사람들이 아주 흔히 행하는 일이나, 또한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 중의 하나이다. 즉 우리 주위에는 배를 자신들의 동물적인 욕망을 채우는 한 신으로 삼는 자들이 허다하게 많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육신의 욕망을 채울까? 이런 것들이 모두 그들의 신이다. 이런 류의 사람은 오히려 초망이나 그물에 분향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그것을 위해 살며 그것을 얻으려고 애쓰고 또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다 갖다 바치는 대상이 고작 먹고 마시는 일과 그 외에 다른 형태로 단지 감정적인 만족감을 주는 일일 때 그 사람은 훨씬 초라하게 더 타락한 것이다.

 이런 일들은 만연된 우상 숭배의 한가지 예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모든 현실적인 사실 앞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구히 전하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즉 "나는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다. "만일 사람들이 참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헌신과 힘을 요구 하는 자리에 몰록이나 바알, 맘몬, 그물, 초망, 식욕 혹은 그밖의 다른 어떤 것을 둔다면 그들은 비록 일생 동안 매 주일 교회에 나가 설교를 들으며 사도신경을 외운다고 할지라도 우상 숭배자들이다. 사람은, 자신의 피조물로 하여금 자기 앞에 어떤 다른 신도 두지 못하게 하겠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을 위하여 지어졌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바로 모든 피조물의 존재 목적이 되시고 또한 각 사람의 중심이 되신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요구는 인간의 본성 자체로 볼 때도 합리적인 것이다.


신약은 이 모든 계명을 환히 밝혀 준다. 신약은 이 계명들을 전혀 폐지하지 않고 오히려 강조하고 반복하며 새로운 뜻을 부여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람들이 율법에서 자유로와지는 것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그 율법을 지킬 수 있을 때 뿐이다. 그것은 마치 나라의 법률을 지키며 사는 도덕적인 사람이 체포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지내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율법을 파기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율법을 성쉬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율법에서 자유로와질 수 있는 길을 닦아 놓으셨다. 오늘날 기독교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예배하라는 자신의 주장을 포기 하시고 사람들이다른 신을 섬겨도 좋다고 말씀하셨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 점을 밝히는 신약의 빛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를 사랑하라"(마 22:37)는 주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 4:10).

우상 숭배에 대한 변명이 딱 한 가지 있는데 즉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정당화할 수 없는 몇 가지 사실이 있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그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온건히 계시하셨고 따라서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 계시를 알 수 있는 그러한 곳에서 살고 있다면 우상 숭배에 대한 마지막 그 변명도 결코 정당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하나님께서 옛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신 이 계명을 생각해 보자. 그 옛날엔 우상 숭배에 대해 구실을 댈 수 있었던 점이 참으로 많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예수께서 오신 사실 뿐만 아니라 또한 지난 백년 동안 과학이 밝혀낸 위대한 모든 사실로 말미암아서도 우상 숭배의 죄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 책임이 더 무거워졌다. 미신적인 사람들이 폭풍마다 귀신이 있다고 공상하고 번개와 천등은 설명하지 못하고 할 수도 없는 신비라고 생각하던 시대에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불이나 혹은 귀신을 숭배하던 사람들은 핑계거리가 더러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요즈음, 즉 사람들이 자연의 여러 가지 현상과 소리의 진상을 캐냈고 그것들은 결국 설명 할 수 없는 것도 신비 한 것도 아니며 다만 정밀한 법칙 체계의 진행 과정이며 표출일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이 때에는 우상 숭배에 대한 변명은 사라졌다. 사람이 입법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법칙의 영역 안에서 자연 현상이 설명되고, 지난 오십년 동안에 과학이 밝혀낸 모든 사실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를 찾으며 그를 보기를 원하는 자들이 마음속으로 더욱 실감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신비한 것들과 마술처럼 느껴지던 것들을 과학이 일일이 다 설명해냄으로 인해, 어떤 것이든 그것을 하나님처럼 숭배하는 죄는 더욱 가증스러운 것이 된다. 하나님의 빛이 밝으면 밝을수록 우상 숭배의 죄는 더욱 더 어두우며 그 형벌은 크다.

사람들로 오분만 시간을 내어 다른 모든 사실은 다 잊어버리고 자기가 흘로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중대한 사실을 생각해 보게 하라. 어떤 사람들은 그 시간만큼도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를 끔찍이 싫어한다.

 만일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하려고 한다면 그들에게 첫째 계명을 생각하면서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 보라고 하라. "나의 하나님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만일 하나님을 뒷전으로 몰아내는 어떤 대답을 하게 된다면 천국을 위해서, 그리고 영원한 삶을 위해서 그들로 "모든 우상을 부숴 버리고 모든 적을 쫓아내며" 앞으로도 계시고 지금도 계시며 전에도 계신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모시라고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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