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5-02-14 23:23
[4]히브리서 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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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7,043  

▣ 우리의 위대하신 대제사장-히브리서 5장

 

 

 

처음 두 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선지자나 천사들보다 더 위대하시다는 것을, 그리고 3-4장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모세보다도 크신 분이심을 보여 주었다. 이제 그는 이스라엘의 첫 대제사장인 아론을 가리키며, 그리스도께서 그보다 크신 대제사장이심을 입증한다. 만일 그의 독자들이 유대주의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버린다면 이들은 위대하신 대제사장을 보다 못한 대제사장과 바꾸려고 하는 것이 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아론보다 우월한 분이심을 세 가지 방면에서 보여 준다.

 

 

 

1. 그리스도는 더 뛰어난 반열에 속하신다(5:1, 4-6)

 

 

 

아론은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 대제사장의 직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이 영광을 그의 장자에게 물려 주었으며, 이와 같은 식으로 계통이 이어졌다. 아론은 레위 지파에 속하였는데, 이 지파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제사장 지파로 따로 구별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반열은 보다 뛰어나다! 그 한 가지 예로서, 그리스도는 한갓 인간만이 아닌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인자(人子)이시다! 그는 이러한 제사장직의 영광을 자기 본위적인 방식으로 취하지 않으셨다. 민수기 16장을 보면, 고라의 자손들이 이런 식으로 행하다가 그들의 죄로 인하여 죽었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아들을 임직시키셨다! 여기서 저자는 시편 110편 4절을 인용하는데, 이 구절은 성부께서 성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주시는 구절이다. 그는 이 구절을 5절에서 인용한 시편 2편 7절과 연결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이 그의 부활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며, 시편 2편 7절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다루고 있다(행 13:33).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은 히브리서 7-10장의 주제이므로 지금은 상세히 다룰 필요가 없겠으나, 그 배경을 알려면 창세기 14장 17-20절을 읽어 보라. 히브리서 7-10장의 논증은 그리스도께서 더 크신 제사장이심을 다루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의 반차가 더 위대하기 때문이다. 곧, 아론의 반차가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인 것이다.

 

“멜기세덱“이란 이름은 “의의 왕“이란 뜻이다. 그는 또한 살렘(Salem)의 제사장, 또는 “평강의 왕“이었다. 아론은 결코 제사장인 동시에 왕(priest-king)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사장이시며 동시에 왕이시다! 그리스도는 보좌에 앉으신 제사장이시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3-4장에서 토론한 안식인 평강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레위 지파가 아니라, 왕의 지파인 유다 지파 출신이셨으며, 멜기세덱은 창세기에서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의 시작이나 끝에 관한 아무런 기록도 없다. 따라서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아들되심을 표상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역시 “시작과 끝“이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아론은 죽었고 그의 자리는 채워져야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결코 죽지 않으시며 그의 제사장직은 영원하다! 아론은 지상의 세대를 맡은 제사장이었지만, 그리스도는 하늘 백성을 맡은 제사장이시다."

 

 

 

 

 

2. 그리스도는 동정심이 더욱 뛰어나시다(5:2-3, 7-8)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선택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백성을 동정하고 그들을 도울 수 있어야만 했다. 물론, 아론 자신도 한갓 인간으로서 자기 백성의 연약함을 어느 정도는 알았을 것이다. 사실상, 그는 자신과 자기 가족을 위해서 희생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의 필요와 문제들에 더욱 깊이 들어갈 수가 있으시다! 7-8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이 “고난“을 받으셨음을 말해 준다.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에겐 아무것도 필요치 않으셨음을 기억하자. 그러나, 인자로서 대제사장이 되신 날에는 그리스도께서 연단과 고통을 겪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2장 10-11절에 언급되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고통을 겪어야 했던 것 때문에 그리스도를 경멸하며 그의 신성을 의심하였을 것이나, 이러한 고난들은 바로 그의 신성의 징표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이 그의 백성을 위해 동정심 많은 대제사장이 되도록 예비하고 계셨다.

 

7절은 겟세마네에서의 주님의 기도에 관한 언급이다(마 26:36-46).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으로부터“(흠정역에는 이렇게 되어 있음) 구원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out of death) 구해 달라고 기도한 것임에 주의하자. 그는 십자가에서 구해 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한 것이 아니라 무덤에서 그를 일으켜 달라고 기도하셨던 것이다. 이 기도는 응답되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십자가를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잔을 마실 준비가 되어 있었다(요 12:23-34).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아론과 같은 인간이 했던 것보다도 우리가 당하는 시련을 정말로 더 잘 알 수 있을까?“물론이다. 첫째로, 그리스도는 완전하신 분으로서, 모든 시련을 완전히 겪으셨다. 그는 사람들과 사단이 제공해야만 했던 온갖 유혹을 맛보시는 온전한 분량의 시험을 받으셨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그 어떤 도덕적인 인간이 견딜 수 있었던 것 그 이상의 것을 견디셨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우리들 대부분은 시험이 참으로 어려워지기도 전에 굴복하기 때문이다. 50톤의 무게를 지탱해 낼 수 있는 교각은 불과 2톤의 무게만을 감지할 수 있는 다리보다 시험에 대하여 더 알고 있는 법이다."

 

 

 

 

 

3. 그리스도는 더 뛰어난 제물을 드렸다(5:3, 9-14)

 

 

 

아론의 주된 직분은 특별히 대 속죄일에 나라를 위하여 제물을 드리는 것이었다(레 16장).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그 해 내내 백성을 섬길 수 있었으나, 대속죄일에는 모두가 대제사장만을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그만이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갈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위하여 희생제물을 드려야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죄없으신 어린 양으로서 죄 때문에 희생제물을 드려야 할 필요가 없었으며, 그 백성을 위하여 드려야했던 제물은 짐승이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이것은 반복된 제물이 아니었다. 자신을 드릴 필요가 있었지만 단 한 번이었고 이로 말미암아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리스도는 아론이나 그의 계승자들보다 참으로 크신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시나, 아론은 이 일을 결코 할 수가 없었다. 수소와 염소들의 피는 다만 죄를 가리울 뿐이었으나, 그리스도의 피는 단번에 모든 죄를 소멸하셨다.

 

 

 

저자는 이제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로 들어가고자 하나, 난점을 발견하게 된다. 문제는 그가 우둔한 설교자나 저자인 것이 아니라 청중들이 우둔하다는 점이었다. 그는 6장 1-2절에 열거되어 있는 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단순한 일들인 젖을 먹는 상태에서 단단한 식물(그리스도의 하늘의 제사장 직분)을 먹을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의 독자들이 자각하고 성장하기 시작하지 않으면 이 일을 할 수가 없다.

 

젖(복음의 초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으로 살며, 단단한 식물(그리스도께서 지금 하늘에서 하시고 계신 일)을 먹지 못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대단히 많이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구세주시라는 것은 알고 있으나, 그가 대제사장으로서 그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을 만큼 구원받은 지가 오래 되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제2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누군가 그들이 잊고있는 것들을 다시 가르쳐야만 했다! 이들은 말씀 안에서 “경험하지 못했다“(익숙하지 못함. 13절). 역시 하나님의 말씀의 문제가 다시 대두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계는 그의 영적 성숙을 결정한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말씀으로부터 멀리 떠내려갔고(2:1-3), 말씀을 의심하였으며(3-4장), 말씀에 대하여 둔하게 되었다. 이들은 믿음으로 말씀에 화합지 않았으며(4:2), 그들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실천하지도 않았다(5:14). 이들은 “신령한 지각을 사용하지“ 않았으며(5:14), 따라서 그들의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성장이 둔하고 비효과적이었다. 그들은 전진하는 대신(6:2) 후퇴하고 있었다.

 

 

 

은혜 안에서 자라가는 것은 지식에서 자라는 것에 의존한다(벧후 3:18). 우리가 자신과 그리스도에 대하여 더 알면 알수록 영적으로 더욱 잘 전진해 갈 수 있다. 당신의 영적인 달성은 어디에 와있는가? 젖먹이의 단계에서 아직도 젖으로 살며 불신앙의 광야에서 방황하고 있는가? 아니면, 성숙하여 말씀의 단단한 식물을 먹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하나의 습성으로 되어 있는가?"

 

 

 

 

▣ 새롭게 하는 회개-히브리서 6장

 

성경의 그 어떤 장도 히브리서 6장 만큼 사람들을 혼란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신실한 신자들조차 “타락“에 관한 교리로 다투게 되었던 것은 불행한 일이다. 이 구절들에 대해서는 해석들이 분분하다. 그 예를 들어보자.

 

 

 

-이것은 배교의 무서운 죄를 묘사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을 수있다는 의미이다.

 

-“거의 구원을 받을 뻔한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스코필드 주석).

 

-이것은 아직 성전이 파괴되지 않은 시기 동안에 생존해 있던 유대인들만이 범할 수 있는 죄이다.

 

-이것은 “가상적인 경우“ 또는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을 사례를 제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존중해야 하지만, 위에서 열거한 견해들은 거절해야만 한다. 우리는 히브리서 6장이 이 책의 나머지 부분과 마찬가지로 신자들에게 쓰인 것이지만, 신자가 “그의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는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 책의 전체적인 문맥과 사용된 단어들을 주의깊게 보면 본 장의 주된 교훈이 회개와 확신임을 발견할 것이다.

 

 

 

1. 호소(6:1-3)

 

 

 

저자는 독자들의 영적인 우둔함을 신랄하게 꾸짖었는데(5:11-14), 이제는 성숙한(완전한)데 나아갈 것을 그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이는 물론 이 책의 핵심 주제이다. “완전“(성숙)이란 단어는 누가복음 8장 14절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사용된 것과 같은 단어이다(“...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 이 단어는 히브리서 6장 7-8절에 나오는 밭의 예화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이 뜻을 마음에 꼭 새겨 두자.

 

“나아 갈지니라“는 호소는 직역하면 “지탱함을 받자, 또는 계속해서 나아감을 받자“는 뜻으로, 1장 3절에서 “붙드시며“라고 번역된 말과 같은 단어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저자는 자기 노력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곧 온 우주를 붙들고 계시는 바로 그 능력에 자신들을 굴복하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면 어찌 떨어질 수 있겠는가!

 

 

 

이 유대인들은 전진하는 대신 2-3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초보“를 다시 세우려는 유혹을 받았다. 이러한 초보에 들어 있는 여섯 가지 항목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오히려 유대주의의 기본적인 교리들을 가리키고 있다. 박해가 극렬해지자 이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신앙고백을 버리고 “곁길로 빠지려는“ 유혹을 받게 되었다(4:14/10:23).

 

이들은 이미 “유아시절“로 돌아가 있었고(5:11-14), 급기야는 유대주의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띠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기독교의 충만한 빛을 드러내기 위해 길을 예비했던 그 기초를 다시 세우게 된다.

 

이들은 죽은 행실, 곧 율법 아래 있는 행위를 회개했었고(9:14),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보였었다. 이들은 씻음의 교리를 믿었는데 이는 신약적 세례가 아닌 레위기에서의 씻음이다(막 7:4-5/히 9:10 참조). 안수는 대 속죄일을 가리키며(레 16:21), 모든 참된 유대인은 장차 부활과 심판이 있다고 주장한다(행 24:14-15). 만일 이들이 앞으로 전진하지 않으면 후퇴할 수밖에 없을 것인데, 그것은 그림자를 위해 본체를 버리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2. 논쟁(6:4-9)

 

처음부터 문제가 된 것은 구원이 아니라 회개인 것에 유의하자. “다시 새롭게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4, 6절). 만일 이것이 구원에 관하여 말하는 것으로서 신자가 구원을 잃을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신자는 구원을 다시 얻을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는 결과가 된다! “그런데도 구원을 잃는다“고 가르치는 교회들이 타락한 자들을 향해 주께로 돌아오라고 언제나 초청하고 있다! 이것은 비논리적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회개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는 자의 태도이다. 4-5절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묘사하며(10:32/2:9/2:14 참조). 9절은 저자가 그들이 참으로 구원받았다고 믿었음을 시사한다. 여기서는 “구원받을뻔한“ 사람들이 아니라 참된 신자들인 것이다.

 

 

 

6절에 나오는 두 개의 핵심 단어는 “타락한“과 “십자가에 못박아“이다. “타락하다“의 헬라어는 “배교“라는 말이 유래한 아포스타시아(apostasia)가 아니라 파라핍토(parapipto)로서, 이는 “벗어나다, 길을 잘못들어 방황하다“는 뜻이다. 이 말은 갈라디아서 6장 1절에 나오는 “범죄“라는 단어와 비슷하다(“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따라서 6절은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을 맛보았지만 곁길로 벗어났거나 또는 범죄한 신자를 나타내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이 행하였으므로 이제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히 12:15-13) 영적으로 버려지게 될(고전 9:24-27)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상급을 잃는다는 것과 하나님의 비난을 받게 된다는 뜻이지 구원을 잃는다는 뜻은 아니다.

 

“십자가에 못박아“라는 구절은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동안에“로 번역되어야한다. 말하자면 히브리서 6장 4-6절은 죄짓는 성도는 전혀 회개에로 인도함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계속해서 죄를 지으며 그리스도께 욕을 돌리고 있는 동안은, 회개에로 인도함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계속 죄 가운데 있는 신자는 그가 회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삼손과 사울이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히브리서 12장 14-17절은 이와 마찬가지로 에서의 경우를 인용한다.

 

 

 

7-8절에 나오는 밭의 예화는 히브리서 12장 28-29절과 고린도전서 3장 10-15절에 주어진 진리, 곧 하나님의 시험의 불에 대한 개념과 연관된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열매를 맺도록 하시기 위해서 구원하셨다. 우리의 삶은 언젠가 시험받을 것이며 인정받지 못한 우리의 행실은 불에 타게 될 것이다. 밭이 불에 타는 것이 아님을 주목하자. 불에 타는 것은 열매이다. 이러한 신자는 “불 가운데서 얻는 것 같은“ 구원을 받는다.

 

결국 이 난해한 구절이 주는 전체 멧세지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신령한 생활에서 후퇴할 수 있고 그리스도께 욕을 돌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죄가운데 머물러 있는 동안 그들은 회개함으로 인도될 수가 없으며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위험에 처한다. 고집을 부린다면 그들의 생활은 불에 견디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잃는 고통“을 겪어야 할 것이다. 신자들이 죄에 대한 핑계로 “은혜“를 헛되이 하는 일이 없도록 히브리서 10장 30절은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라!“고 상기시킨다."

 

3. 확신(6:10-20)

저자는 독자들이 그의 권면을 오해하지 않도록(벧후 3:16),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영원히 보증받는 견고한 귀절로 종결한다. 그는 먼저 그들의 삶을 지적하고(10-12절)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온갖 증거를 나타내야 할 것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이 세 구절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은 참된 신자의 특성이다(살전 1:3/롬 5:5).

 

그러나, 그는 12절에서 “게으르지 말라“고 경고하는데, 게으르다는 말은 5장 11절에서 “듣는 것이 둔하므로“와 같은 단어이다. 하나님은 약속을 주셨으므로 그들은 축복을 받기 위해 다만 믿고 기다릴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저자는 인내하는 믿음의 실례로서 아브라함을 든다. 물론 아브라함은 죄를 범하였으며, 같은 죄를 두 번이나 반복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셨다! 결국 하나님의 언약들은 확실성 있는 성도들의 믿음에 달려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 약속들은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창세기 22장 16-17절의 약속을 친히 맹세하심으로써 확증하셨고,이루셨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선함이나 순종으로 말미암아 약속된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이다. 아브라함은 히브리서의 독자들처럼 여러 가지 시련들과 시험들을 통과했고, 하나님은 그를 내내보고 계셨다.

 

17절에서 저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행하셨던 것은 “후사들“에게 그의 뜻과 약속의 불변함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쓰고 있다. 18절에 의하면 이런 후사들은 우리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갈 3장 참조). 그러므로 우리를 확신시키는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이 있는데, 곧 하나님의 약속(하나님은 거짓말할 수 없으시다)과 하나님의 맹세이다. 하나님의 변치 않는 말씀과 하나님의 변치 않는 인격은 우리가 구원받아 영원히 보존된다고 확신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이다!

 

우리는 영혼의 닻 같은 “소망“을 가지며, 이 “소망“이 바로 그리스도 그분이시다(7:19-20/딤전 1:1).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닻을 내리고 있는데 어찌 표류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확실하고 견고한 닻을 지니며, 우리를 위하여 길을 열어놓고 앞서 가신 “선두 주자“(그리스도)가 계신다. 또한 우리는 언젠가 영광중에서 그와 함께 하게 됨을 볼 것이다.

 

 

 

본 장은 성도들에게 버림받는다는 생각을 들게 하여 두렵게 한다기보다는 회개치 않는 마음에 경고를 하며, 우리가 영원에 닻을 내리고 있음을 확신시키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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