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7-04 11:34
[2]미래교회를 위한 설교-내러티브 설교
인쇄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10,979  
왜 이야기인가?-언어의 연금술이 필요하다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한 편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조형해 낸 것으로 평가 받고 있는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연금술사』에는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4)한번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아기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수도원을 찾으셨다. 수도사들이 길게 줄을 서서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렸다. 어떤 이는 아름다운 시를 낭송했고, 어떤 이는 성서를 그림으로 옮겨 보여 드렸다. 성인들의 이름을 외우는 수도사도 있었다. 줄 맨 끝에 있던 수도사는 별로 잘하는 것도 없고, 제대로 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잘하는 것이라고는 한 가지, 곡마단 출신의 아버지로부터 공을 가지고 노는 기술을 배운 게 고작이었다. 다른 수도사들은 수도원의 인상을 흐려 놓을까봐 그가 아기 예수께 나아와 경배 드리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아기 예수께 자신의 마음을 바치고 싶어 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오렌지 몇 개를 꺼내더니 공중에 던지며 놀기 시작했다. 그것만이 그가 보여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재주였다. 아기 예수가 처음으로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마리아는 그 수도사에게만 아기 예수를 안아 볼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하나님이 진심으로 기뻐하시는 것은 틀에 박힌 말이 아니라 온몸으로 말하는 새로운 언어를 원하고 계시며, 그가 바로 진정한 연금술사라는 말일 것이다. “연금술”은 철이나 납을 금으로 바꾸어내는 신비로운 작업을 가리키는 용어인데, 평범한 물건을 가치 있는 것으로 바꾸는 비법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설교는 하나님 앞에서 행해지는 일종의 언어를 통한 연금술과도 같다. “만물과 통하는 우주의 언어를 꿰뚫어” 궁극적인 실재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보면, 설교는 그냥 던져지는 것이 아니고 말씀의 연금술인 셈이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틀에 박힌 언어와 설교 형태를 벗어나 어떻게 미적 감각을 회복하여 보다 신선한 언어로 들리게 할 것인지가 중심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현대 설교학에서는 이러한 미학적 감각에 깊이 관심을 기울이면서 설교에 있어서 이야기 형식을 새롭게 발굴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야기의 중요성은 단순히 설교학에서 뿐만 아니라 신학의 다양한 장르에서 추구하는 바이고,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일반 경영학에서나 협상 테이블, 광고 커뮤니케이션, 문화 컨텐츠에서도 중요한 내용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일본을 곧 방문한 예정인 미국 협력 회사 여직원에게 한 일본인 직원이 메모를 보냈다. 일본 에 가서 근무할 때 도움을 주기 위해 회사에서 그녀에 대해 그가 보고 느꼈던 사실을 전하려고 다음과 같은 메모를 써 보냈다. 일본에 가서 근무할 때 몸에 꼭 끼는 빨간색 옷은 입지 마십시오. 길게 파인 가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블라우스도 입지 마십시오. 무늬가 있거나 밝은 색의 속옷을 입지 마십시오. 무늬가 있거나 밝은 색의 속옷은 입지 마시오. 향수를 뿌리거나 화장을 진하게 하지 마시오. 달랑거리는 귀걸이나 굽이 5cm 이상 되는 하이힐은 신지 마시오. 메모를 본 그녀는 발끈했다. 미국인인 그녀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런 유의 편지는 사생활을 침해하는 아주 무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도움을 주려고 했던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면서 남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아주 기분 나쁜 사람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만약 그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통해 전했더라면, 상황은 훨씬 달라졌을 것이다. 

일전에 한 미국 여성이 저희 회사를 방문한 적이 있었지요. 그녀는 지나가는 남자들이 자신을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거나 툭툭 건드리자 몹시 당황했습니다. 내가 혹시 이상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닐까? 내가 뭘 잘못했을까? 그녀는 하루 종일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녀는 미국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옷차림에 속하는 빨간 드레스를 입고, 기다란 귀걸이를 하였으며, 하이힐에 꼭 끼는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사실 일본에서는 그런 차림새가 ‘헤픈 여자’라는, 전혀 다른 의미를 담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지요. 이런 메모를 받았다면 그녀는 메모의 무례함에 분노를 느끼기 보다는, 사려 깊은 친절과 상대편을 향한 배려에 깊은 감사와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이야기를 통해 살아가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살아간다. 언어는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전자는 직관적이고 합리성을 근간으로 한 논리의 언어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면, 후자는 경험과 감성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의 언어를 중심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는 “실천적 힘”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을 형성하고 사람을 움직이는 일종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5)사람들은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고, 이야기를 통해서 들려질 때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연다. 인간의 삶은 크고 작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형성하기도 하고, 그것을 들려주며, 또한 그것을 새롭게 구성하는 여정이다. 또한 인간은 이야기에 의해서 형성되는 존재이다. 이렇게 인간 의식은 이야기 형태로 구성되어 있고, 기억과 회상이라는 이야기 구조에 의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이야기는 인간 삶에 있어서 폭넓게 작용한다. 이것은 개인뿐만 공동체의 정체성을 규정해 줄 뿐만 아니라 하나로 묶어주고 통합하는 기능을 한다. 또한 이야기는 외면 세계뿐만 아니라 내면세계를 묘사하고 본뜨는 모사(模寫) 기능을 가지며, 5)이야기를 통해서 그들의 의식 속에 새로운 세계를 형성해 간다. 이야기가 반복해서 들려짐으로 그들은 이야기에 의해서 새롭게 그들의 세계를 만들어 낸다. 이들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전통을 만들어 가고, 이야기를 보존하면서 전통을 새롭게 형성해 가기도 하고, 변형해간다. 이렇게 이야기는 인간 삶의 중심적 양식일 뿐만 아니라 인간들은 언어의 연금술사로 살아가게 된다. 

왜 이야기인가?-인간 삶은 이야기로 구성된다

쟌 도미닉 크로산은 “물고기가 물에서 사는 것과 같이 사람은 이야기 속에서 살아간다”고 했다. 사실 사람들은 누구나 이야기를 좋아하며, 이야기와 함께, 이야기에 묻혀서 살아간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사건들을 경험하게 되며, 그 이야기를 통해서 개인적인 간격과 시간적 간격을 좁혀 나간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종교적 이야기들과 개인적인 경험과 함께 엮어져 가는 이야기들 속에 뿌리를 두고 살아간다.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를 낳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람들은 함께 연결되어가며, 인간적인 결속을 다져나간다. 또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며, 오늘에서 그것을 기대하면서 비전으로 공유하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는 인간 삶의 기본적인 양식일 뿐만 아니라 의미를 가져다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야기 속에 나타나는 세계에 대한 경이감과 그 세계와 관련된 존재와의 교감을 가지면서 사람들은 경험하고 어떤 사실을 새롭게 인식해 간다. 이야기는 추상적인 개념들을 구체화시키며, 인간 삶이 갖는 의미들과 깊은 연결을 지어준다. 이야기에는 뛰어난 수용성과 전달력이 있으며, 기억하는데도 뛰어난 장점을 가진다. 이야기는 청중들로 하여금 말씀을 가장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며, 사람들의 감성적인 부분을 고양시켜 주면서 오래 기억하도록 해주며, 사람들의 흥미와 관심을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들의 삶은 이야기로 채워져 왔고, 이야기에 의해서 아름답게 채색되어져 왔다. 사람들은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살아간다. 그러므로 이야기가 시작될 때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며,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 기대하게 된다. 이야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단순하게 이야기가 전달해 주는 사실 이상의 무엇인가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한다. 효과적인 이야기는 그것이 끝난 다음에 말하는 사람의 마지막 단어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의 가슴속에서 새로운 싹이 움터오게 하는 어떤 씨앗을 남기기 마련이다. 이야기는 듣는 사람을 그 장소와 사건 속으로 함께 끌고 들어가서 그것들을 함께 경험하게 한다. 이러한 것을 이야기가 가지는 동일시(identification)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는 세계를 형성하고 변혁하는 힘을 갖는데, 기본적으로 개인의 세계관과 생활 방식에 있어서 그것들을 형성하고 변혁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야기는 보다 넓은 자아 인식과 사회 인식을 갖도록 할뿐만 아니라 상상력을 자극하여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쉽게 전달되지 않는 실재들을 볼 수 있게 하며, 문화적 가치들과 행동 양식들이 이야기를 통해 형성되고 변혁된다. 이렇게 이야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신선한 묘사들, 즉 새로운 관점들이나 새로운 전망들을 소개하면서 새로움”을 더해준다. 이렇게 인간의 삶은 이야기로 채워진 어떤 결정체이다. 

성경, 설교, 그리고 이야기

이렇게 이야기는 어떠한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하나의 방법이나 테크닉 이상의 것이다. 왜냐하면 이야기는 인간 의사소통의 중요한 양식이며, 문화의 전달 통로이고, 잠재적으로 심오하고 원대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의사소통을 위해 아주 먼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이야기를 사용해 왔다. 사람들은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살아간다. 그러므로 이야기가 시작되면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며, 기대감을 갖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로 이야기를 사용해 왔다. 또한 복음의 선포는 언제나 이야기의 형태를 취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기독교의 설교는 본질적으로 이야기의 형태를 가졌다.8) 그래서 h. 리챠드 니버는 이야기는 하나님과 세상(world)을 드러내는 도구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 당신을 선명하게 노출시키고 계시하신다고 주장한다.9) 

이러한 특성 때문에 성경은 이야기를 메시지를 드러내는데 있어서 가장 중심 되는 매개체로 삼았으며, 예수님도 늘 이야기를 통해 말씀하셨다. 실로 이야기는 복음을 전달하시는 예수님의 방식이었다. 그는 개념이나 조직적인 논리를 통해서 어떤 진리의 말씀을 전하려고 하시기보다는 늘 이야기를 즐겨 사용하셨다. 이것은 단지 이야기의 효과성(effectiveness)이나 탁월성 때문만은 아니었으며, 청중들의 관심만을 끌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야기는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복음의 본질적인 특성 때문이었다. 가난한 과부의 억울한 탄원이 여지없이 무시하고 왜곡되게 판결하고 있는 불의한 재판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청중들은 끊임없이 문을 두들기고 있는 현장에 서게 되며, 불의로 가득 찬 아픔과 고난이 있는 삶의 현장에 동참하게 된다. 또한 초대교회의 설교자들이었던 제자들은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교인들을 예수님이 친히 거니셨던 현장으로 초대한다. 설교자들의 말씀을 따라 그들은 갈보리 십자가의 현장에 서게 되며, 부활의 아침 손을 내미시며 평안을 외치시던 그 현장에 함께 서게 된다. 실패한 디베랴 바닷가에서 친히 조반을 준비하고 계시는 그분 앞에 함께 설 수 있게 되는 것은 이야기를 통해서이다. 그래서 에이모스 윌더(amos wilder)는 복음의 바로 핵심적인 본질은 이야기의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주장한다. 10) 예수님이 이야기를 즐겨 사용하신 것은 청중들의 관심만을 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적인 특성 때문에 그리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메시지를 삼단논법이나 지적인 논증, 혹은 정의로 바꾸어서 전한다면 복음 그 자체의 본질적인 특성을 변형시키는 것이 된다. 

구약의 대부분도 이야기로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스리시며, 이스라엘이 어떻게 그 다스림 가운데서 살아가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시대를 넘어서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현존과 역사를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경험한다. 기억하고(remembering), 이야기하면서(telling)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건들은 새롭게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이야기(storytelling event)를 통해 현존하신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는 형성되고, 11)거룩한 이야기들을 되뇌면서(retelling)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고, 미래의 사건을 기대하게 된다. 

왜 성경은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이야기를 사용하고 있는가? 복음은 이야기의 특성을 가지기 때문이며, 복음으로 중심으로 엮어지는 우리의 신앙생활 역시 이야기의 특성을 가지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이 그러하듯이 우리의 개인의 신앙여정도 주님이 세례 받으시고, 공생애의 삶을 사시며, 죽음으로, 그리고 부활로 옮겨가는 것과 같은 이야기의 특성(narrative quality)을 가진다. 사람들은 이야기 안에서 자신을 인식할 수 있고, 설교의 다른 수단을 통해서 일어나지 않은 것도 이야기를 통해서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이야기(narrative)는 하나님과 세상(world)을 드러내는 도구였으며 사람들도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을 노출하고,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나님께서도 이야기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선명하게 노출시키고 계시하시는 장(場)으로 삼으셨다.12) 이렇게 복음의 본질적인 특성은 이야기의 형태를 통해서 전달된다. 그래서 부머샤인은 복음은 본래 “이야기로 말하는 전통”(storytelling tradition)이었다고 주장한다.13) 그러므로 설교자는 이러한 성경이 가진 특성을 바로 이해한다면 이야기에 대한 관심을 던져버릴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윤리적인 지침을 주거나 신앙생활을 잘하도록 안내하라고 하거나, 교의적인 명제들을 제공해 주려 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우리를 위한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고 증언하는 책이다. 즉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이야기책이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깊이 이해하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달하는데, 이야기로 전달하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14)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이야기를 사용한 다른 이유는 이야기가 본질적으로 경험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하고, 듣는 것은 우리의 삶의 경험과 같은 구조를 가진다. 경험은 본질적으로 이야기의 특성을 가진다. 우리 삶은 이야기와 같이 하나의 에피소드 뒤에 다른 에피소드들로 이어지면서 채워진다. 우리가 서로를 알아 가는 방식의 하나도 우리의 이야기들을 말함으로서 이다. 이렇게 이야기가 말해질 때 공동체는 형성되게 되며 서로가 서로를 깊이 알아가게 되면서 깊은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복음의 선포인 기독교의 설교도 원칙적으로 이야기의 특성(narrative quality)을 가질 수밖에 없다. 삶이 이야기라면 인간 삶이 신앙으로 채워지기 위해서는 이야기는 가장 중요한 표현 수단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신앙이란 삶이며, 신앙은 곧 이야기여야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이야기,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이야기들이 들려질 뿐이다.15)

여기에서 우리는 마이어 스턴버그(meir sternberg)는 성경의 저자들이 세 가지 원칙을 따라 기록하였다는 주장은 설득력있는 주장으로 다가온다. 즉 관념적(ideological), 역사 편찬적(historiographic), 미학적(aesthetic)인 원칙들의 규제를 받았는데, 성경 기록에 있어서 이러한 원칙들은 서로 역동적 긴장관계를 가지고 행해진다. 관념적 원칙은 교리적이고, 교훈적 내용을 담으려는 경향성인데, 이러한 원칙은 가급적 미적인 세련됨은 배제하고 역사적인 사실이 그 내용에 배치될 때는 그 패턴에 맞도록 다듬는다. 반면 역사 편찬적 원칙은 어떤 사실 위에 또 다른 사실을 더하고, 그 위에 또 다른 사실을 부가해가는 끝없는 행렬과 같다. 이것은 미적인 요소를 배제하면서 가능하면 사실적인 기술에 중점을 두지만 미적이며, 이념적인 디자인을 가로지르면서 기록되어 간다. 미적인 원칙은 역사나 교리가 아니라 언어를 어떻게 창조적이고 예술적으로 활용하여 그 청중들에게 효과적으로 들려주려는 관점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다. 

이것은 서로 창조적이면서 역동적인 긴장관계를 형성하게 되는데, 어떤 요소가 지배적이라면 성경의 내용은 어떤 한 요소에 의해서 지배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긴장관계를 이야기가 협동하는 상호관계가 되도록 조종하는 것으로 스턴버그는 주장한다. 성경의 기자들은 역사를 하나님의 섭리와 다스리심의 장으로 이해하였으며, 무질서하고 연결성이 없는 사건들의 집합이 아니라 분명한 형태(shape)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역사를 말할 때 그들은 이야기로 표현하려고 하였으며, 줄거리가 있는 플랏을 따라 표현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역사는 신학적 형체를 필요로 하며, 미학적으로 들려줄 수 있는 예술적인 차원을 필요로한다. 여기에서 세 가지 원칙들은 서로 배타적인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요소로 자리 잡게 되는데, 이러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야기라는 주장이다. 스턴버그에 의하며, 그렇다고 아무런 이야기나 모두 역사적이고 신학적 형태를 미학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이야기, 하나님의 이야기(the story)만이 그러한 사실을 드러낼 수 있다. 전지하신 하나님은 초월해 계신 분이시지만 그분은 인간에게 효과적으로 들려주시기 위한 방편으로 이야기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그 이야기는 역사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원하신 목적의 결과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나타난 결과는 이야기에 대한 감상이나 소감이 아니라 이야기 그 자체가 된다. 이런 점에서 성경에서 이야기는 “어떤 것을 서술하는 방법이 아니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표현”(expression)이다. 16)이렇게 성경은 이야기를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매체로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현대 설교학에서의 이야기와 설교

그러나 성경의 메시지를 증거하는 기독교의 설교는 계몽주의 이후 인간의 이성에 우위를 두는 영향을 받아 전반적인 지적 구조를 합리성을 근간으로 한 토대 위에 세워진다. 자연히 기독교의 설교 역시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기 위해 논증과 명제 중심의 설교의 형태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경향은 300여 년 동안이나 기독교에 설교는 그러한 틀에 사로잡혀 있게 되면서 이야기의 일식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현대 설교학에서 이야기의 특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들은 새로운 도전과 흐름으로 와 닿고 있다.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설교 방법은 하나의 방법론으로 자리를 잡아갈 뿐만 아니라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야기를 통한 설교 방법이 여러 설교 방법들 중에서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라거나, 단지 가장 감화력을 주는 방법이기 때문에라기보다는 최소한 설교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오늘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의 명확한 전달이라는 측면에 깊이 관심을 가져 온 현대 설교학은 설교에 있어서 이야기의 사용의 중요성을 새롭게 발견하였다. 복음의 선포로서의 설교는 이야기로 되어 있으며, 성경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로서 이야기를 사용하고 있음을 새롭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설교에 있어 이야기의 중요성을 고려하도록 논의의 방향성을 제시해 준 사람은 그래디 데이비스(h. grady davis)였다. 그는 칼 바르트 이후 신정통주의 설교학에서 강조해 온 설교의 내용에 대한 강조로부터 이제 설교의 형식으로 설교학의 핵심적인 관심을 이동시킨 역할을 한다. 설교자들은 종종 복음서의 대부분이 등장인물, 장소, 사건, 그리고 대화 등으로 되어 있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 같다. 복음서는 어떤 일반적인 사상을 언어적으로 주해하고 설명해주는 주석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설교의 9/10정도는 언어적 주해나 논쟁으로 채워지고 있다. 사실 복음서에는 주해는 고작 1/10도 안 된다. 복음의 중심 내용은 주로 구연되는 이야기의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17)

이러한 데이비스의 주장은 1960년대와 70년대 북미의 설교학계에서 이야기의 설교와의 상호관계성에 대해 본격적으로 탐구하도록 촉발하였으며, 논리 중심의 논증적이고 명제 중심적인 설교 형태―계몽주의 영향과 함께 형성되어 지난 300년 동안 중심적으로 사용되던 설교의 틀인―로부터 설교의 새로운 형태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에 크게 공헌한 사람은 찰스 라이스(charles rice)와 프레드 크래독이었다. 18)그들은 이야기와 설교에 대한 상호 연관성에 대한 연구를 불러 일으켰으며, 현대 커뮤니케이션의 발달, 문학 비평과 같은 새로운 성서연구방법론, 언어신학 이론(linguistic theory), 그리고 이야기 신학(narrative theology)과 같은 주변의 연구들이 이러한 흐름의 토대로 작용한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설교의 패러다임은 북미의 설교학계에서는 가장 영향력 있고, 대중적인 흐름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물론 많은 저자들에 의해 수많은 저작들을 쏟아지는데, 이야기와 설교에 대한 그들의 이해와 주장들은 각기 다르다고 할 만큼 다양한 형태와 관점들이 제시되지만 설교에 있어서 이야기의 중요성을 함께 인식해 간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새로운 설교의 형태의 중심에는 이야기를 통한, 이야기와 같이, 이야기에 의한 설교의 형태를 개발하게 되었다. 이러한 설교의 형태는 획기적인 발전을 거듭해 왔는데, 이러한 모든 설교 형태의 가장 기본적인 골격은 언제나 이야기에 있었다. 이제 설교를 “이야기를 말하는 것”(story-telling), 혹은 “이야기 나눔(shared story)”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야기를 통한 설교의 틀은 어느 한 가지라기보다는 커다란 우산과 같이 다양한 형태를 포괄하는 형태로 발전되어 간다. 일반적으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설교는 현대 설교학에서는 두 가지 관점으로 나누어지는데, 설교에서 실제로 하나의 이야기 혹은 몇 개를 이야기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주장과, 이야기와 같은 형태, 혹은 이야기의 형식을 따라서 설교를 구성할 것을 주장하는 관점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이러한 설교의 틀이 제시되면서 가져온 긍정적인 공헌이 있다. 먼저 교회로 하여금 이야기에 관심을 유도하면서 결국은 성경에 관심을 갖도록 했다. 설교자는 대체적으로 설교에서 특정 주제나 명제를 해설하고 논증하는 설교를 거부하고 성경본문 자체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본문의 특성을 따라 이야기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둘째로는 설교의 형태를 더욱 풍성하게 해 주었는데, 성경 본문의 형식을 중요하게 인식하게 되면서 다양한 설교 형식들을 추구하게 되었다. 셋째로는 성경이 어떤 영적 실체를 이론적으로 논증하려 하거나 설명하려고 하기보다는 그것을 서술하려는 특성(indicative character)을 가지고 있음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넷째로는 설교에 있어서 지성뿐만 아니라 이제는 감성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점이 부각되면서 설교의 전반적인 특성이 새롭게 재편성되었다는 점이다. 논리적 논증 중심의 설교는 이제 지배적인 방법이 되지 못하게 되었다. 다섯째로는 설교의 언어에 내포된 시적이고 은유적인 측면이 부각되면서 설교에서의 상상력의 역할이 새롭게 강조되게 되었다.19)

이와 같이 이야기는 설교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수단(vehicle)일 뿐만 아니라, 복음의 본질적인 특성은 그것이 이야기의 형태를 통해서 전달된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야기는 기독교 설교의 본질적인 구조를 이룬다. 성경과 사도들에게서 찾게 되는 설교의 원형은 논리의 틀이 아니라 이야기의 틀을 통해서 전해져 왔음을 고려할 때, 기독교의 설교는 필연적으로 이야기의 특성(narrative quality)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1970년대 이후 현대 설교학에서는 설교에 있어 이야기의 특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들로 전개되고 있음은 고무적인 사실이다. 오늘의 설교에서 이야기의 특성을 회복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의 설교를 계속하는 것이 되며, 보다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면서―이것은 어떤 점에서 기독교 설교의 기초에 대한 재발견이었다―논리와 명제 중심의 설교, 성경을 설명하는 해설식 설교, 설교의 개념을 전달하는 논증식 설교에서 이야기와 같이 흐름과 전개가 있는 설교의 틀을 발전시켰다. 특히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설교(preaching-as-storytelling)는 논리적이고 명제 중심적인 전통적인 설교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등장한다. 전통적인 설교는 교리를 중심으로 엮어지며, 명제를 중심으로 한 대지로 구분하여, 논리적이고 논증적인 설교의 형태를 가진다. 그 동안 설교는 주로 성경의 내용을 강해하고 설명해 주는 형태(an exposition of scripture)를 취하게 되었으며, 설교의 가장 두드러진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설교는 논리를 통해 성경의 교훈과 교리를 가르치고(teaching), 성경의 내용을 전수해 주는(transmitting)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설교에서는 이야기의 특성(narration)은 사라지고, 논리적인 사고(reflection)가 설교의 기본적인 구조를 형성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이야기는 어떤 명제를 설명하고 예증하기 위한 예화(illustration)의 차원에 머무르게 된다. 

그러나 시대적인 상황과 함께 맞물려 1970년대 이후 현대 설교학은 논리 중심의 논증적이고 명제 중심적인 계몽주의 설교로부터 기독교 설교의 새로운 형태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설교의 형태의 중심에는 이야기를 통한, 이야기와 같이, 이야기에 의한 설교의 형태를 개발하게 되었다. 이러한 설교의 형태는 지난 30여 년 동안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어 왔다. 혹자는 그것을 귀납적 설교(inductive preaching)라고 명명하기도 했고, 혹자는 이야기 설교(story sermon)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자는 이야기식 설교(narrative preaching), 현상학적 전개식 설교(phenomenological move preaching)라고 부르기도 했다. 또한 최근에 이르러서는 보다 에피소드로 엮어 가는 대화체 설교(episodial conversation preaching)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했으며, 이러한 방법론들의 한계를 보완하면서 포스트리버랄(postliberal preaching)이라고도 이름 붙이기도 하고, “네 장면으로 이어지는 설교”(four pages sermon)라고 한다. 20)이러한 설교의 새로운 형태는 현대 설교학에 있어서 획기적인 발전을 거듭해 왔는데, 이러한 모든 설교 형태의 가장 기본적인 골격은 언제나 이야기에 있었다. 이제 설교를 “이야기를 말하는 것”(story-telling), 혹은 “이야기 나눔”(shared story)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야기의 틀거리를 통한 설교 

이야기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해주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의미와 삶의 변형을 경험할 수 있게 한다. 이야기를 말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신비한 능력과 같은 요소이다. 이제 설교자들이 그 신비한 능력을 발굴하는 것과 그것을 활용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로 등장한다. 그동안 기독교 설교는 주로 논증과 해설을 중심을 이루는 설교를 해왔다. 인간의 사고 작용이 두 가지 요소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실은 이미 심리학자들에 의해 밝혀진 바이다. 칼 융은 논리적 특성을 바탕으로 하는 직접적 사고(directed thinking)와 이미지와 상징을 바탕으로 하는 간접적 사고(indirected thinking)에 의해서 인간 사고가 결정된다는 점을 밝힌바 있다. 21)전자가 언제나 옳고 그름에 주안점을 두면서 논증의 구조를 통해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형식적이고 경험적인 절차를 통해 증명하여 옳음을 설득하려는 구조를 취한다. 반면 후자는 이야기의 특성을 가지는 것으로 옳음을 증명하는 형식이 아니라 “정말 같음”(verisimilitude)에 주안점을 두고 행해진다. 그러므로 전자는 언제나 추상적이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진리를 거론한다. 그러나 후자는 구체적인 경험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어떤 결론으로 나아가는 구조를 취하는데, 공감과 참여, 경험을 그 근거로 삼는다. 22)이야기의 틀을 따라 설교한다는 것은 전자에 충실하기보다는 후자에 충실히 하는 구조이다. 

그렇다면 이야기의 틀거리를 설교를 구성하는 방식은 어떠한 것이 있을까? 이야기는 여러 방법으로 전개될 수 있는데, 이것을 설교자는 먼저 결정해야 한다. 이야기로 설교하는 설교자는 이야기의 내레이터와 같은데, 어떻게 전개할 것인지, 어떤 무드를 조성할 것인지, 시선 방향을 어디로 향하게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마치 카메라의 앵글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어떤 영화가 찍어질 것인가가 결정되는 것처럼 청중들의 관점과 시야의 각도를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야기로 이어지는 설교를 형태론적인 관점에서 몇 가지 형식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플랏 형식을 따라 설교를 구성하는 방식(plot method)이다. 이것은 주로 유진 라우리가 5단계 혹은 4단계로 제시한 내용으로 모순점을 제기하고, 그것을 심화하면서 평형상태를 깨뜨림으로부터 극적인 반전을 시도하면서 문제 해결 방식으로 나아가는 플랏을 통해 구성되는 설교의 형식이다. 이 형식은 언제나 갈등 구조가 먼저 제기되고, 이것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는 특성을 가지는데, 유진 라우리가 제시한 방법이다. 이것은 어떤 점에서는 문제 해결식의 양상을 띤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모순점이 제시되느냐와 그것이 어떻게 심화되느냐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되며, 그것이 해결되는 반전의 과정을 따라 복음을 경험하게 하는 특징을 가진다. 이러한 반전으로 극적으로 주어지게 되며, 대단원의 끝으로 이끌어가는 과정으로 설교를 끝맺게 된다. 

사람들로 하여금 주의를 흩트려 놓지 않고 설교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호기심과 기대감이다. 설교가 어떻게 결론이 날까라는 호기심이 없다면 청중들의 주의는 흩어지게 될 것이다. 호기심은 청중들이 주의를 기울일 수 있도록 도와줄 뿐만 아니라 기대감을 갖게 한다. 기대와 긴장감을 가진다면 청중들은 그것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된다. 긴장감을 통해 호기심과 기대감을 갖게 된다면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늘어져 있던 몸은 곧추 세우게 될 것이며, 잡념에 사로잡혀 있던 눈은 반짝이게 될 것이다. 이야기로 구성되는 설교는 청중들로 하여금 긴장감을 갖게 하면서 호기심을 갖도록 해준다는 장점을 가진다.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제시되고, 그것이 심화되는 동안 그것이 어떻게 해결 될 것인가에 대해 기대감을 가지고 그들은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는 어떤 긴장감(tension)으로부터 시작되어, 그것을 해결해 가는 구조를 취하게 될 것이다. 

마이클 로그니스는 어린 두 자녀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난 어느 젊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행한 설교의 예를 들고 있는데, 그 본문은 시 121편이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치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그는 이 본문을 가지고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지키심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지 않고 그렇게 모순점을 제기함으로 긴장감을 갖게 하는 구성을 취한다. 

오늘 고인이 되신 이 젊은 어머니의 이 땅에서 마지막 시간들을 생각할 때, 그리고 우리의 이 슬픔을 생각할 때 우리는 도저히 여기에 묻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 당신은 주무시고 계셨습니까?’ 그녀가 그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를 받고 있을 때 당신의 그늘은 어디에 있었으며, 이제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아 엄마와 아내가 없는 현실에 직면해 있는 바로 지금 여기에 당신의 그늘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주님, 당신은 주무시고 계셨습니까?

흔히 설교자들이 위로하려고 하고, 몇 마디 교리적인 말로 천국의 소망을 이야기하려고 할 때 청중들은 늘 익숙한 메시지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픔과 고통, 슬픔과 분노를 전혀 감추지 않고 큰소리로 항변하듯이 외칠 때, 그 설교자의 입에서 도대체 어떤 내용이 전개될 것인지에 대해 깊은 기대감을 가지고 말씀을 경청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설교가 모순점을 제시하면서 시작된다는 것은 호기심을 끌어내고 기대감을 갖게 한다는 장점이 있으나 거창하게 시작한 후에 그에 대한 해답이 적절하게 제시되지 못한다면 오히려 의혹과 혼동만 일으키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반전을 통해 복음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모순점을 제기하고, 심화시키면서 불평형을 만들면서 설교를 시작하는 이유도 복음을 더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딜레마에 깊이 빠져 있던 사람은 그것이 반전될 때 “아하”를 더 크게 외치게 된다. 이것은 마치 공을 강하게 내리칠수록 강하게 튀어 오르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그러므로 “모호함”를 적절하게 제시하는 것은 설교 구성에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요소이다. 

둘째는 리텔링의 형식을 따라 설교를 구성하는 방식(retelling method)이다. 이것은 본문의 구성이나 설교자의 의도에 따라 스토리를 중심으로 구성해가는 방식으로, 반드시 모순점을 제기하고 그것을 해결해가는 방식을 취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설교 구성이 좀더 자유스러울 수가 있다. 이것은 설교자가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하 포인트”를 향한 치밀한 구성을 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질 수 있다. 이때 설교자는 기승전결의 구조를 따르거나 문학적인 기교를 따라 문단을 만들어 설교를 전개할 수 있다. 또한 성경 본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전개 과정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설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본문의 구성이나 설교자의 구상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야기를 따라 설교할 때

이야기를 통한 설교에 대해서 다소의 오해와 혼란이 전혀 없지 않다. 설교에는 본문성(textuality)과 구두성(orality)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는데, 그동안 한국 교회 강단에서는 상대적으로 본문성이 많이 약했던 것이 사실이다. 특별히 부흥회와 같은 집회 설교에서는 본문은 단지 성경 봉독한 것으로 끝나고, 주제 중심의 설교가 주종을 이루면서 다양한 예화와 체험들로 가득 채워진 설교가 진행되었던 사실이다. 마치 설교는 감동이 있는 예화의 진열장과 같이 변질되면서 설교의 중요성까지 침해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러한 부흥사들의 영향으로 강단에서 행해지는 주일 공동 예배의 설교에도 이러한 현상들이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러한 경향과 이야기를 통한 설교와 혼동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본다. 분명한 것은 재미있는 이런 저런 이야기나 예화, 자신의 경험담을 나열하는 것이 이야기 설교는 아니라는 점이다. 예화 중심의 설교와는 전적으로 다른 이유는 이야기 중심의 설교는 논리성을 탈피하여 설교에 있어서 이야기의 중요한 특성들을 되살리는 설교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추구 흐름의 한 양상은 본문의 중심 메시지를 한편의 이야기에 담아 설교를 전하는 스타일이 있는데, 이러한 형태를 그대로 소개하기도 하고, 혹은 이러한 경향을 취할 때 오는 한국 교회 현장과의 괴리감 때문에 선입견을 가지고 보는 경향도 있다. 필자도 석사과정 때 북미 설교학의 새로운 경향들을 연구하면서 지도교수가 평가하라고 던져준 책을 읽으면서 거기에 제시된 설교문을 읽으면서 그러한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한편의 이야기를 통해 본문의 중심 메시지를 잘 표현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곳에는 본문에 대해서도 크게 언급하지 않고 기존의 설교 형태와는 너무 다른 생소한 형태 때문이었다. 그 지도교수는 그러한 설교 형식에 있어서 아주 탁월한 분이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문화적, 상황적 차이를 들면서 그것이 가지는 문제점들을 제시한 적이 있었다. 기독교 메시지만 담으면 한편의 단편 소설도, 영화도 모두 설교가 될 수 있는 것이냐는 반문과 함께 설교의 중심 자료와 내용은 성경 본문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제시하였다. 새로운 경향에 대해서 열린 경향을 가진 미국 교회의 경우에는 그것을 아주 뛰어난 것으로 판단할지 모르지만 전통적인 경향들에 대해 다소 보수 성향이 강한 한국 교회 상황에서는 이것은 당연히 문제가 될 수밖에 없음을 지적했던 기억이 난다. 너무 문학적 기교에만 사로잡힌다든지, 미사려구만 나열하면서 언어의 유희에 빠지지 않는 것은 이야기의 구조를 통해 설교하려는 설교자들이 유념해야 할 사실이다. 

모든 설교자들은 나단의 전통에 서있다. 나단뿐만 아니라 예언자들, 그리고 예수님과 성경의 기자(記者)의 전통에 서있다.24) 그들은 모두 이야기라는 아주 독특한 표현 양식을 통해 생각하고, 말씀을 전하였다. 만약 나단이 논리적으로 설명하면서 그것은 율법에 위배되고, 윤리적으로 파렴치한 행동이라면서 논증하고 지적하는 방식을 따라 그의 죄를 지적하고 드러낼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논리적인 방식을 따라 설명하려고 했다면 그렇게 놀라운 결과를 얻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충신 우리야도 사지로 몰아넣었던 절대 권력자는 그의 비리를 알고 있는 그 사람도 넉넉히 독살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어느 동네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많은 재산과 가축을 가진 부자였고, 한 사람은 근근이 끼니를 이어가는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설교가 이야기로 진행되는 동안 그 설교를 듣던 청중은 이야기에 깊이 몰입하게 되고, 동일시를 경험하게 되면서 설교의 중심 메시지가 드러나게 될 때 그는 말씀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이것은 이야기가 가지는 효용성이면서도 파워라고 할 수 있다. 

하시딤(hasidim)은 논리와 명제, 논증을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삼았던 이성주의에 반대하여 18세기 중엽 동유럽에서 발생한 유대인의 한 분파였는데, 냉랭해진 이성주의의 틀에 갇혀 있었던 유대주의에 대한 일종의 개혁운동이었다.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종교적 실천이 무의미하고 학구적이 되어 왔다고 인식하였을 때 하시딤은 예배와 말씀 연구를 말없는 음악(nugunim)과 황홀한 춤, 그리고 이야기로 새롭게 하려고 했다. 하시딤은 청중들로 하여금 알고 있는 방법을 초월하여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보게 하고 듣게 해주는 방식을 통해 그 의미와 신비감을 맛보게 했다. 그들은 이야기의 특성을 잘 이해했고, 그들의 예배와 설교(가르침) 속에 이야기성을 새롭게 회복하려고 했던 한 흐름이었다. 마르틴 부버는 하시딤의 이야기들을 모은 책에서 하시딤의 창시자였던 바알 셈(baal shem)의 제자였던 그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설교의 이야기성 회복의 중요성에 대해 웅변한다:

나의 할아버지는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저는 장애를 가지고 있던 분이었습니다. 한번은 그의 선생님에 대해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의 거룩한 스승이었던 바알 셈은 기도할 때마다 깡충깡충 뛰기도 하고, 때로는 춤을 추기도 했는데, 그 부분을 말하면서 나의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그의 스승이 그러했던 것을 보여주기 위해 깡충깡충 뛰기도 하고 춤을 추면서 그분이 이렇게 하면서 기도했노라고 이야기를 계속해 갔습니다. 그는 그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그는 다리를 더 이상 절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말한다는 것이 바로 그러한 능력을 갖습니다.


 
 

일반형 뉴스형 사진형 Total 3,387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2635 심방?어떻게 할 것인가 웹섬김이 07-04 8402
2634 심방론 웹섬김이 07-04 6928
2633 좋은 설교법 웹섬김이 07-04 7911
2632 까다로운 사람을 다루는 법 웹섬김이 07-04 6570
2631 비신자를 끌어들이는 교회의 10대 특징 웹섬김이 07-04 6757
2630 설교가 전달되지 않는 18가지 이유 웹섬김이 07-04 8241
2629 [1]미래교회를 위한 설교-내러티브 설교 웹섬김이 07-04 12156
2628 [2]미래교회를 위한 설교-내러티브 설교 웹섬김이 07-04 10980
2627 [3]미래교회를 위한 설교-내러티브 설교 웹섬김이 07-04 7001
2626 목회자 자격 10가지 웹섬김이 07-04 6163
2625 [1]성경해석 어떻게 하나 웹섬김이 07-04 6996
2624 [2]성경해석 어떻게하나 웹섬김이 07-04 7411
2623 교회 개척에 필요한 실질적 자료들 웹섬김이 07-04 6710
2622 유아세례 성경적인가 웹섬김이 07-04 7967
2621 삼위일체 교리를 정립한 아타나시우스 웹섬김이 07-04 13383
2620 자비량 목회는 성경적인가? 웹섬김이 07-04 10809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