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9-12-21 01:42
[2]기독교 창조론의 개혁 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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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288  

 

기독교 창조론의 개혁 방안

구약성경에 나타난 각 구절들에 의해 주석서들에서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대개 [참고 자료] 그림과 같은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현대인들 중에 [참고자료] 그림과 같이 서술한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문자 그대로'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현대우주론의 기본 개념이 거의 일반적 상식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그림에 관련하여 더 이상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보다는 창세기를 읽으면서 모순을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모세의 서술을 올바르게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글개역성경은 이것들을 각각 '궁창'과 '땅 위 궁창'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개정개역판은 욥기의 '후그 샤마임'은 '둥근 하늘'로 고쳤으나, 이사야의 '후그 하아레츠'는 '땅 위 궁창'으로 그대로 쓰고 있다. 지구의 모습은 높은 산들이 '라키아'를 떠받치는 기둥의 역할을 하고 있다. 높은 산들 사이에 땅 끝이 바다에 닿아 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직접 하신 말씀은 '광명들이  있으라'는 명령어뿐이라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넷째 날의 나머지 시간을 지구에 살아갈 사람들의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광명체들의 운행을 아주 정밀하게 미세조정(fine tuning)하는데 사용하셨다. 모세는 그동안 하늘을 바라보면서 해와 달과 별들에 관해 그가 보고 생각했던 소견과 기억에 따라 이 구절을 서술했던 것으로 보인다.

 

 

2. 넷째 날 창조의 문자적 해석의 문제점 

모세의 창세기 1:15절 וְהָיוּ לִמְאֹורֹת בִּרְקִיעַ הַשָּׁמַיִם לְהָאִיר עַל־הָאָרֶץ וַיְהִי־כֵן׃ [베하유 라메오르트 베레키아 하샤마임 레하이르 알하아레츠, 베예히=켄]에 의하면 이 구절에서 광명들이 하늘의 궁창에(베레키아 하샤마임) 있어 땅을 비추라고 명령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의 명령이 그대로 이루어졌다고 찬양하는 후렴구 때문에 '베레키아 하샤마임'에 대한 해석은 더욱 주목을 받게 된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 구절의 모순적 서술에 대해 고대 히브리인들처럼 '문자 그대로의' 해석 방법을 따른다면, 기독교에 치명적인 한 가지 문제가 부각된다. 앞의 [참고 자료] 그림과 같이, '베레키아 하샤마임'의 광명들이 라키아(궁창) 밑에 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대에서도 모세가 창세기에서 서술한 '라키아'의 실체가 '과학적 사실'이라고 주장한다면, '라키아'가 왜 보이지 않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듯이 지구의 하늘에서 '라키아'의 실체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적 사실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라키아'의 존재가 '과학적 사실'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일부 기독교 창조론자들로 인하여 기독교는 '라키아'의 존재를 현대인들에게 입증해야 할 책임을 지게 된다. 여기서 기독교가 직면하게 되는 치명적인 문제는 '라키아'의 존재 여부에 따라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그것을 서술한 창세기의 사실성이 결정될 것이라는 점이다. 

모세가 서술한 '라키아'가 현재에는 보이지 않는 이유를 찾으려면, '라키아' 위에 있던 물이 쏟아져 내렸다고 하는 노아의 홍수 때에 '라키아'도 없어졌는지를 가장 먼저 확인해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노아의 홍수 때에 '라키아'에 있는 '하늘의 창들이 열려'(창 7:111) 40일 주야로 비가 내렸다가 '하늘의 창들이 닫혀'(창 8:2) 비가 그쳤다고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성경에서 '라키아'가 없어진 기록은 창세기를 비롯하여 성경 전체를 뒤져보아도 발견되지 않는다. '라키아'에 대하여는 현재 지구의 하늘 어디에서도 그 존재가 발견되지 않고, 과거에 '라키아'가 존재했었다는 역사적 흔적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그렇다면 '라키아'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모세의 서술에 의하여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 안에서만 존재했던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현대우주론을 알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모세에 의하여 광명들이 '라키아'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서술된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아직도 '과학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모세의 '라키아'에 대한 서술이 과학적으로 또한 '문자 그대로' 정확무오한 사실이므로 그대로 믿지 않으면,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억지 주장을 하는 일부 신학자나 목회자, 또는 창조론자들이 없지 않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일부 신자들(특히 젊은이들)은 반감을 갖고 교회를 떠나거나, 유신진화론자가 되는 길을 택하게 된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기독교를 무지의 종교라고 배척하면서 우리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존재까지도 불신하게 된다. 왜냐하면 모세가 창세기에서 서술한 '문자 그대로의' 우주를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우리우주와 전혀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3. 천동설을 믿게 한 '라키아' 

로마가톨릭교회가 지동설을 주장했던 갈릴레오를 1633년 종교재판에서 가택연금에 처하는 판결을 내리고, 그를 지지하는 과학자들을 박해했던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기독교 전체의 역사적 과오이자 수치이다. 전통적으로 유대교인들은 모세가 서술한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믿었고, 초기 로마가톨릭교회가 구약성경에 수록된 '토라'에 의하여 천동설을 믿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믿음의 핵심은 '라키아'에 있는 길을 따라서 별들과 태양과 달이 지구를 돈다는 천동설이다. 모세가 태어나서 왕자로 양육되었던 고대 이집트에서도 그들의 신화에 따라 천동설을 믿었다. 이집트에서 살았던 모세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이 그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어쨌든 로마 가톨릭교회는 지구에서 망원경으로 관측하는 자료에 의하여 지동설이 '과학적 사실'로 밝혀진 이후에도 천동설을 버리지 않았다. 결국 교황 바오로 2세가 공식적으로 천동설을 버리고 지동설을 인정한 것은 1977년 발사된 태양계 탐사선 보이저호가 사진과 관측 자료를 보내오면서, 태양계의 시스템이 완전히 밝혀진 1996년에 이르러서였다. 바오로 2세는 지동설을 인정하면서 갈릴레오를 사면하고 역사적 과오를 사과했다. 

이후 모세의 창조론을 믿지 못하게 된 로마가톨릭교회는 다윈주의 유신진화론을 수용하는 입장으로 돌아서고 말았다. 이런 과정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창세기 저자 모세의 모순적 서술을 별 생각 없이 '문자 그대로' 해석했다가 초래한 참사였다. 잘못된 천동설이 믿음의 핵심에 자리 잡게 만든 것이 바로 '라키아'다. 

모세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라고 서술한 '라키아' 때문에 잘못된 천동설을 믿었던 사람들의 믿음을 창조자 하나님은 칭찬하셨을까? 개혁교회 신자들은 누구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교회 신자들이 아직도 모세의 모순적 서술을 '문자 그대로'의 사실이라고 믿는 과오를 되풀이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어떤 종교의 경전도 '과학적 사실'이 아닌 서술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런 서술을 가진 경전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감출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모순된 서술을 '문자 그대로' 사실이라고 거짓말을 하거나 세상에 떠들면서 스스로 드러낼 필요도 없다. 

각 종교는 그런 서술에 대해 침묵하거나, 그냥 지나치거나, 또는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으로, 그 책임이 신앙의 대상이신 분에게 돌아가지 않도록 하고 있다. 각 종교의 핵심은 신앙의 대상이신 분이 신자들에게 가르치는 삶의 길이다. 기독교 신앙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위일체적 하나님이시다. 현대 기독교는 이제 창세기의 '라키아'의 모순적 서술에 대해서는 모세가 망원경을 가지고 관찰한 것도 아니고,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모세에게 일일이 설명하신 것도 아니라는 관점에서 대안적 해석을 찾아야 한다. 

기독교는 이제 '라키아'는 '과학적 사실'이 아니며,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모세에 의하여 서술된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 안에서만 존재했던 것이었음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기독교의 창조론은 그 바탕 위에서 개혁적으로 다시 써야 한다.

Ⅵ. 창조론의 개혁 방향

1. 기독교가 버려야 할 창조론 

1860년대에 미국에서 진화론 비판의 선봉에 나선 것은 안식교회(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였다. 안식교회는 설립 이전부터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를 주장하는 근본주의 집단으로 예수의 재림과 환난이 닥칠 시기를 몇 번이나 예언했다가 모두 빗나간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안식교회는 지금도 신자들에게 예수의 재림과 말세의 환난에 대비하여 사회와 격리된 생활을 택하도록 권유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바람에 미국을 제외한 곳에서 개혁교회는 대개 안식교회를 이단 교파로 인식하고 있다. 

어쨌든 안식교회 창립자인 엘렌 G. 화이트(Ellen G. White)는 하나님의 창조가 노아의 홍수까지 창세기의 서술과 똑같이 진행되는 환상을 보았다고 설교했다. 조지 맥그리디 프라이스(George McGready Price)가 화이트의 설교에 근거하여 진화론을 비판하는 『신지질학』(1923)을 저술했다. 『신지질학』은 진화론을 비판하는 방법으로 지구의 나이 6,000년설(젊은 지구론)과 노아홍수 단일격변설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제임스 어셔의 연대표에 따르면, 지구는 우주와 함께 BC. 4004년에 창조되었고, 노아의 홍수는 BC. 2348년(어셔의 창조연대 1656년)에 일어났다. 『신지질학』에 의하면 현재 지구의 지층은 노아의 홍수에 의하여 단번에 현재 모양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신지질학』은 '홍수지질학'으로 불리기도 한다. 프라이스의 '홍수지질학'은 오랜 연대를 주장하는 기존의 지질학을 무너뜨리면, 역시 오랜 연대를 토대로 하는 진화론도 무너지리라는 논리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홍수지질학'은 '욤'과 '라키아'를 잘못 해석한 것으로 지질학의 비판에 성공하지도 못했고, 진화론 비판에는 아예 실패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신지질학』은 잘못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창세기에 서술된 노아홍수를 문자 그대로 사실이라고 보증한 화이트의 설교에 힘입어서 안식교회의 창조론이 되었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집단으로 입증된 안식교회는 그렇다 치더라도, 개혁교회 일부 신자들은 왜 로마 가톨릭교회마저 이미 버린 모세의 우주관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미국 개혁교회는 진화론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헨리 모리스(Henry M. Morris)가 쓴 『창세기 대홍수』(1961)의 창조과학적 창조론을 가지고 진화론에 대항했다. 그러나 모리스의  『창세기 대홍수』는 프라이스의 '홍수 지질학'을 거의 그대로 편집한 것이었으므로 정상적인 '과학적 사실'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경을 올바로 해석한 것도 아니다. 

결국 개혁교회의 창조론은 안식교회의 실패를 그대로 답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창조과학적 창조론자들은 성경의 판본조차 보지 않고 '문자 그대로' 묻지마 식 문자적 해석을 강변하면서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 또한 창조과학적 창조론자들은 사실이 아닌 '라키아'의 실체를 옹호하기 위해 '과학적 사실'까지 부정하고 있다. 그런 행동은 일반 신자들 앞에서 성경과 과학을 동시에 왜곡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현대에 이르러서 개혁교회의 창조과학적 창조론은 진화론 비판에 실패한 것으로 드러났고, 과학계를 넘어 일반인들에게까지 외면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창조를 과학과 연결시켜 서술하려면, 비과학적인 방법으로 과학을 부정하거나, 사실과 다른 주장을 그대로 답습하는 이론이어서는 아니 된다. 

창조론은 과거의 오류를 점점 정밀하게 수정하면서 과학과 더불어 계속 발전하는 학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개혁교회는 안식교회처럼 모세의 우주관을 '과학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창조과학적 창조론이 도그마로 변질되는 것을 더 이상 방관하지 말고 버려야 한다. 개혁교회는 창세기를 현대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왜곡된 안식교회 창조교리를 답습하는 창조과학적 창조론을 버리고, 진정한 개혁주의적 창조론을 발전시켜야 한다.

2. 성경이 가르쳐주는 방향 

모세의 모순적 서술에 대해 성경은 창조론 개혁의 방향과 그 길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사야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위하여, '새 하늘과 새 땅(שמים חדשים וארץ חדשה: 샤마임 하다심 베아레츠 하다사)을 다시 창조하실 것이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사65:17). 여기서 '이전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바로 모세가 서술한 하늘과 땅을 가리킨다. 그것 외에 다른 것은 없다. 이 말씀에 의하여 모세가 이전에 해와 달과 별들이 매달려 있고 그 위에 물을 담고 있다고 서술한 '라키아'는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따라서 모세의 '라키아'는 잊어버리고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어졌다. 더욱이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면 뜨거운 불에 타서 하늘은 풀어지고 물질은 녹아서 땅의 모든 일이 드러나리라고 예언하면서, '그(예수 그리스도)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라고 권유하고 있다(벧후 3:13). 여기서 풀어질 하늘과 물질이 녹아질 땅은 모세의 하늘과 땅을 가리키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사야와 베드로의 예언에 의하면,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기에 앞서 모세의 하늘과 땅은 먼저 사라져야 할 것들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쓴 요한은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새 예루살렘도 내려올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계21:1-2). 요한에 의하면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계 21:4)으로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계21:5), 이기는 자들이 상속으로 받게 하시니(계21:7),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계217)이 될 것이다. 

요한은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가야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실 수 있도록 모세에 의하여 서술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버려야 한다. 요한에 의하면 새 예루살렘 성 안에는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이 성전이 되므로 성전이 따로 있지 않다고 했다. 또한 그곳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므로 해나 달의 비침도 쓸 데 없고 21:23), 밤도 없다(계21:25). 요한에 의하면, 그곳에는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들어가지 못하고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간다(계21:27). 

이사야를 뒤이은 선지자 예레미야에 의하면 여호와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렘29:11)을 이미 가지고 계셨다. 그 소망은 이사야가 말한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유대인들이 그 소망을 받지 않았으므로 이방인에게 소망이 주어지게 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을지라도, 새 하늘과 새 땅, 더욱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소망을 성취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현대 창조론은 '이전 것'에 속하는 모세의 옛 하늘과 옛 땅을 모두 버리고 미래를 향한 관점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현대 창조론은 과학적 사실과 다른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있는 곳' 즉 하나님이 새로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기독교인들이라면, 누구나 생명책에 기록되어 하나님이 새로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 살아가는 소망을 갖지 아니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그런 소망을 위해 버려야 할 '이전 것'들을 버리지 못할 이유 또한 어디에 있는가? 

 

 

3. 개혁적 관점에서의 창조과학적 창조론 비판 

돌이켜 보면 1517년부터 시작된 종교개혁 운동의 실상은 로마가톨릭 교황이 가진 성경해석의 독점권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뒤이은 과학혁명의 불길은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가 로마가톨릭교회의 탄압을 피하려고 그의 사후에 출판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1543)에서 주장한 지동설에 의하여 점화된 것이었다. 

두 개의 혁명세력은 당시 지배세력이던 로마가톨릭교회의 억압에 눌려 한동안 어려운 시기를 보냈었다. 그러나 로마가톨릭교회의 무서운 탄압에도 물구하고, 두 개의 혁명운동은 삭으라들지 않았다. 당시 로마가톨릭교회의 천동설은 창세기의 문자적 해석에 의하여 옛 하늘과 옛 땅의 '라키아'에 매어 있던 것이었으므로 종교개혁자들에 의하여 개혁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종교개혁자들은 과학혁명의 도화선이 된 지동설이 장래 기독교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단지 성경의 문자적 해석과 지동설이 모순된다는 이유에서 지동설을 무시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황이 가지고 있던 성경해석의 독점권을 아무나 누릴 수 있는 만인사제설의 자유권에 넘겨주었다. 만인사제설이 교리가 된 개혁교회에는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이 읽는 이의 자유에 속하는 일이 되었지만, 로마가톨릭교회와는 다른 문제가 새로 발생한다는 사실이 곧 드러났다. 종교개혁가들이 만인사제설과 함께 주장했던 '오직 성경'(Sola scriptura)과 성경무오설은 어떤 판본의 성경과 누구의 해석이 무오한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야기했기 때문이다. 

결국 히브리어본의 문자적 해석이 기준으로 제시되었지만, 그것은 히브리어본의 '사실성의 문제'와 각종 번역본의 '불일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미봉책 수준이었다. 그래서 개혁교회는 지도자에 의하여 선택된 성경과 그 해석의 방향에 따라 숱한 분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런 현상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개혁교회 내의 창조론 논쟁도 결국 그 연장선상에서 파생된 것이다. 

종교개혁자로서 개혁적 신학을 가장 잘 서술한 것으로 평가되는 『기독교 강요』의 저자 칼빈(Jean Calvin)은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는 말로 중단 없는 종교개혁 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말에는 또한 교회일치를 위해 분파적 성경해석을 경계하는 뜻도 담겨 있다. 

그러나 청교도 이민자들의 주도로 미국 건국(1776)이 성공하자, 개혁교회에서 칼빈의 경고는 잊어진 것이 되었고, 교회의 부흥은 오히려 종말론에 빠져들어 예수의 재림과 종말의 심판이 주제가 되었다.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되면서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정면으로 반론을 제기하는 다윈주의자들의 등장은 기독교와의 논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특히 영국 국교회가 채택해서 KJV 관주성경에 실렸던 어셔 주교의 'BC 4004년 창조설'은 다윈의 진화론과의 논쟁에서 점차 모순을 노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기독교인들은 점점 다윈의 진화론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교회 내에서 다윈주의자 또는 유신진화론자로 불리게 되었다. 나아가 유물론과 결합한 무신진화론자들은 기독교를 근본적으로 말살하려고 획책하고 있다. 

결국 무신진화론자들의 도전과 압박에 직면한 기독교의 운명은 패배하면 사라져야 하는 막다른 처지에 빠진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전선의 최전방에 나서야 하는 것이 창조론이다. 개혁교회의 창조론이 바로 그런 책무를 맡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과 첨단과학이 주도하는 현대에서 무신진화론에 승리하지 못하는 창조론이라면, 그것은 기독교의 미래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것이 바로 창조과학적 창조론을 개혁교회가 개혁해야 할 이유이다. 

이제 개혁교회 창조론이 무신진화론에 이기는 길을 가기 위해서라면, 공인된 '과학적 사실'의 수용과 성경해석 방법을 바꾸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하나님은 성경에 이미 그런 일에 대비해서 창세기의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을 버리고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을 창조한다는 계시를 보여주셨다. 

그렇다면 그동안 안일하게 창조과학적 창조론에 머무르면서 성경에 계시된 길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일부 개혁교회 지도자들과 신학자들, 그리고 신자들은 지금이라도 기독교를 위해 창조과학적 창조론을 버리는 개혁적 행동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첨단과학은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과학적 체계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현대사회에서는 무엇이든지 '과학적 사실'에 근거해서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독교에서 이러한 시대정신에 가장 역행하는 부분이 아직도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창조과학적 창조론이다. 

창세기는 모세가 주전 약 1,500년경에 쓴 것으로 당시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을 반영한 것이다. 특히 '욤'의 잘못된 해석과 '라키아'를 과학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무신진화론자의 공격에 방어 불가능한 치명적 약점을 노출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런 주장들로 인하여 독실한 기독교인들조차 자녀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을 막지 못하고 있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현대에서 '라키아'가 사실이라고 주장한다면, 그에 대한 사실적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현대 포스트모더니즘과 첨단과학 교육환경에서 자란 세대들은 이전 세대들과 달라서, 사실이 아니면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따라서 기독교가 진화론의 득세를 이겨내고 미래에도 존속하려면, 가장 먼저 창조론을 개혁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4. 기독교 창조론의 알파와 오메가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기독교 창조론은 알파와 오메가의 두 가지 목적을 수행할 것이 요구된다. 창조론의 첫째인 알파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창조를 부정하는 무신진화론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종류별 창조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것이다. 창조론의 둘째인 오메가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이 새로 창조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있는 곳, 즉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서 살아가는 소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교회 창조론의 알파는 창조의 증거물인 자연에 대해 사실 그대로 설명하는 것이고, 오메가는 올바른 성경해석의 기초 위에서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을 설명하는 것이다. 알파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창조 방법에 대해서 과학적 사실과 성경을 비교 연구하고, 사실과 다른 부분이 발견되면, 다시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진화론에 대해서는 최신 가설에 이르기까지 과학적으로 세밀하게 검토하고, 여리고성처럼 무너질 때까지 반론하는 일을 계속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오메가의 목적 성취는 성경에서 계시한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있는 곳, 즉 하나님이 새로 창조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 대한 소망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창조론의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연구는 동시적으로 진행될 수도 있고, 별개로 진행될 수도 있지만, 최종적으로는 모두 하나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의 알파와 오메가는 바로 삼위일체적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실) 일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알파는 하나님의 창조를 서술한 창세기로 시작하고 오메가는 하나님에 의하여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이 새로 창조된다는 요한계시록의 예언으로 끝나는 것이 바로 그런 사실을 말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누구나 우주만물의 알파와 오메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있는 곳, 즉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창조론은 창조의 알파와 오메가를 통섭적으로 논의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새 창조론이 되는 것이다. 

현대 기독교의 창조론이 '과학적 사실'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과학적 사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과학을 부정하면서 시대에 뒤떨어진 주장을 하는 창조과학적 창조론은 개혁교회에서 이제 그만 종식되어야 하는 것이다. 

창조과학적 창조론자들은 그동안 현대과학이 이룩한 현대문명의 거대한 실상을 보면서도, '과학적 사실'을 부정하는 안식교회의 창조론 교리를 답습하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현대과학에 의하여 발전한 첨단 의료기술과 통신기술 등의 혜택을 누리면서도, 그들의 '문자 그대로'의 성경해석과 모순되므로 과학법칙이나 공리(公理)까지 틀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창조과학적 창조론자들은 이제 그런 주장들이 현대인들에게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기독교의 창조론은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에 공명하는 과학적 이론의 실상을 소개함으로써 현대인들에게 신뢰를 얻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성경에는 모세가 서술한 옛 하늘과 옛 땅은 버려질 것이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을 새로 창조하실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다. 

개혁교회에서 창조과학적 창조론자들과 과학적 창조론을 믿는 신자들은 왜 이런 성경 구절들은 알지도 못하고 있는가? 이제 기독교의 창조론은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을 창조하실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게 하는 새 창조론으로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 시대적 요구이다.

Ⅶ. 결론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처음 말씀에 의하여 빛이 나타나서 첫째 '욤'이 되었다. 그 '욤'은 사실 지구에 임재하신 창조자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에서 '욤'은 물리적으로는 낮을 가리키는 말과 날(일자)을 가리키는 말, 또는 불특정 긴 시간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여기서 창세기의 처음 '욤'이 24시간의 하루(일자)를 의미이며, 이때부터 창조연대가 시작되었다고 해석하는 창조과학적 창조론의 오류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창조연대가 빛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석한다면, 하나님이 그 빛을 낮이라고 규정하셨으므로, 첫째 날에는 밤이 먼저 나오는 히브리인들의 일자 계산법과 달리, 밤이 없게 된다. 첫째 '욤'에 밤이 없다고 하면, 반쪽짜리 날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이 '호셰크'(흑암, *한글성경에는 어둠이라고 오역되어 있다)를 밤이라고 칭하셨다고 서술함으로써 히브리인들의 일자 계산법과 일치하게 빛(낮)의 창조 이전에 밤이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서술하고 있다. 

히브리어 창세기에서 첫째 '욤'(날)의 밤에 해당하는 '호셰크'를 찾아보면, 창1:2절의 깊음(테홈)위에 있었던 흑암(호셰크)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호셰크'는 태초의 천지장조 때부터 시작한 밤이었으며, 인간으로서는 그 시간적 길이를 알 수 없는 첫째 날의 밤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과학적 창조론자들이 창세기의 '욤'을 모두 24시간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을 왜곡되게 해석한 것일 뿐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리우주와 이 지구의 역사에는 창세기에서 모세가 서술한 '라키아'가 존재하지 않았다. 기독교가 현대인들에게 계속 우리가 살고 있는 하늘과 땅에 '라키아'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기독교의 하나님이 우리 우주의 창조주라고 믿을 사람이 점점 없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적 사실'로 드러난 우리우주의 모습과 '라키아'가 있는 창세기의 우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라키아'는 사실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에서만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창세기의 '라키아'는 저자 모세에게 그 책임이 귀속되는 모순적 서술인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하나님은 먼저 구약성경에서 이사야를 통해,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이전 하늘과 이전 땅을 버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개혁교회 신자들이 이제까지 모세가 서술한 옛 하늘과 옛 땅의 창조론을 그대로 믿었던 것은 안식교회의 창조론 교리를 답습한 창조과학적 창조론에 원인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에 알파와 오메가를 계시하고 있다. 현대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창조론의 알파는 무신진화론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창조를 입증하는 목적을 수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오메가는 하나님이 새로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 곧 예수님이 약속하신 그의 '의가 있는 곳'을 믿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 기독교의 새 창조론은 진화론을 무너뜨리는 노력과 병행하여 하나님이 새로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을 논의하는 것이어야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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