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9-12-21 01:38
[1]기독교 창조론의 개혁 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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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449  

 

기독교 창조론의 개혁 방안

         창세기의 ‘욤’과 ‘라키아’의 현대적 해석을 중심으로

Ⅰ. 서론

오늘날 기독교가 당면한 심각한 문제의 하나는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창조론이 현대인들로부터 배척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를 놓고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갈등하고, 논쟁하고, 심지어는 교회를 떠나기까지 한다. 이 문제의 심층을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창세기의 서술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충돌하고 있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창조자 하나님과 그의 창조를 믿는 현대 기독교인들조차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읽을 때, 믿을 수 없는 모순적 서술들에 부딪치는 경우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창세기가 그런 문제를 안고 있다면, 창세기를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먼저 읽고 있는 문헌의 배경부터 알아보아야 한다. 

창세기는 BC. 약 1,500년경에 고대 히브리인 지도자 모세에 의하여 고대 히브리어로 쓰인 문헌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자국어로 번역된 창세기를 읽고 있다. 번역서에는 항상 번역자에 의한 오역과 왜곡된 서술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번역된 창세기를 읽는 현대인들에게 모순적인 서술이 발견되는 경우에는 히브리어 원문 창세기를 읽으면서 논의해야 할 것이다. 



모든 문헌에 대한 해석은 저자가 서술할 당시에 사용했던 문자의 의미를 분석하면서 진행하는 것이 원칙이다. 저자의 서술은 그의 경험적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고, 그것을 표현하는 문자들의 의미 역시 그의 경험적 인식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저자의 경험적 인식은 비록 표면적 서술에 드러나지 않았을지라도, 서술의 행간에 또는 서술의 배경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창세기에 나타나는 모순적 서술 역시 저자의 경험적 인식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제기되는 근본적인 질문은 창세기의 저자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듣고 서술한 것인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창세기 해석에서 크게 이견을 보이고 있는 문제들 가운데 이 논문은 특히 '욤'(날)과 '라키아'(궁창)의 문제를 논의하면서 그 결과에 따라 기독교 창조론의 개혁 방안을 찾아보고자 한다. 


Ⅱ. 창세기의 모순적 서술에 대한 현대적 해석의 이유 

창세기를 읽어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창조명령과 창조사건들의 진행을 서술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창세기에 모순적 서술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을 꺼려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세기에 모순적 서술이 존재하고 있다면, 그 책임은 모세에게 있는 것으로 한정해야 한다. 

모순적 서술의 책임이 하나님에게 전가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권위는 훼손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창세기의 모순적 서술에 대한 현대적 해석의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창조사건들을 보게 되었을까? 그 대답은 성경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기독교적 방법으로 모세가 하나님의 영에 인도되어 환상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창조사건을 듣고 보고 창세기를 썼다고 추론하는 길밖에는 없다. 모세가 환상 중에 듣고 본 경험과 그의 인식 수준에서 이해하고 기억한 것들을 바탕으로 창세기를 서술했다고 인정하면, 창세기의 모순적 서술은 모세가 한 일이므로 하나님에게 책임이 전가되지 않는다. 

현대인들이 고대 히브리인 모세가 맨눈으로 보이는 대로 믿고 서술할 수밖에 없었던 창세기를 읽을 때, 모순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역사발전의 당연한 결과로 이해된다. 모세의 서술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이고, 현대인들은 첨단 광학기구로 관측한 현대 우주론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인류의 역사가 그렇게 진행된 것도 하나님의 섭리일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기독교인들이 창세기의 모순적 서술에 대해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을 탈피하여 현대적 관점에서 논의하는 일에 아무런 거리낌을 가질 필요가 없다. 아직도 문자주의 해석에 빠져 창세기를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없지 않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지식이 고대 히브리인들의 수준에 머물러 있거나 또는 거짓말을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현대 우주론을 알고 있는 현대인들은 결코 그런 주장을 하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기독교가 창세기의 모순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고 문자주의 해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기독교는 창세기의 모순으로 인하여 현대사회에서 점점 외면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마침내 기독교가 믿는 창조자 하나님의 존재까지 배척하게 될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증거는 그가 쓴 것으로 알려진 민수기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민수기에는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 민족이 신 광야 가데스에서 마실 물을 찾지 못하여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모세와 아론에게 나타나서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20:6)는 말씀을 하셨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어지는 서술을 보면 회중 앞에서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20:11)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말씀대로 따르지 아니한 모세의 어긋난 행동에 대해 하나님은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드러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민 20:12)고 심판하셨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서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도 '손에 쥔 지팡이로 바위를 치는' 행동을 했었다. 여기에서 모세의 서술에 모순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이유가 그의 자의에 의한 불순종인지, 아니면 그의 불완전한 기억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의 잘못은 그의 책임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과학적 사실'과 비교하면서 창세기의 모순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해보면, 창세기의 현대적 해석을 위한 4단계의 이해가 정립된다. 

 

첫째로 출애굽 당시 어느 날에 하나님의 영은 모세를 환상으로 인도하시고, 창조 사건을 보여주셨다. 모세는 그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그가 본 환상을 창세기에 서술했다. 

둘째로 모세가 들었던 하나님의 창조명령은 동사와 목적어로만 이루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창조명령에 이미 창조의 목적물에 대한 정보를 모두 넣어놓으셨으므로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히브리어로 쓰인 하나님의 창조명령에 수식어가 길게 붙어 있는 것은 모세가 그의 생각을 덧붙인 설명이다. 

셋째로 모세는 하나님이 한 글자씩 불러주시는 것을 들으면서 창세기를 쓰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창세기에 일부 모순적인 서술이 있는 부분은 저자인 모세의 불완전한 이해와 기억에 원인이 있다. 

넷째로 창세기의 모순적 서술이 인간 모세에게서 비롯된 것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창세기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창세기의 현대적 해석은, 필요한 경우에는, '문자 그대로'의 해석방법을 버리는 것이다.  



Ⅲ. '욤'(빛 또는 날)의 현대적 해석

 

 

창 1:5 : וַיִּקְרָא אֱלֹהִים לָאֹור יֹום וְלַחֹשֶׁךְ קָרָא לָיְלָה וַיְהִי־עֶרֶב וַיְהִי־בֹקֶר יֹום אֶחָ

[바이크라 엘로힘 라오르 욤, 베라호셰크 카라 라엘라, 바예히 에레브 바예히 보케르, 욤 에하드] 

이 구절은 한글 성경에서 '하나님이 빛을 낮(욤)이라 부르시고 어둠(호셰크: 흑암)을 밤(라엘라)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에레브)이 되고 아침(보케르)이 되니 첫째 날(욤 에하드)이니라'고 번역하고 있다. 

앞 구절들에서 창조자 하나님은 그의 영을 보내 지구를 감싸고 있는 물 위를 살펴보셨다. 그리고 흑암에 빛을 있게 하심으로써 빛과 흑암을 나누셨다. 이 구절은 흑암에서 빛을 나누신 하나님이 밤과 낮이 이어지는 '욤'(날)을 제정하시는 모습을 서술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수없이 많이 존재하는 행성들 중에서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생태계가 지구에만 만들어져 있다는 아주 특별한 사실을 알고 있다. 

이 특별한 사실을 알고 있고 창조를 믿는 기독교 신자들은, 하나님이 흑암에 싸여있던 지구에 좋은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서 빛이 있게 하셨다고 믿지 않을 수 없다. 창세기 저자는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빛에 대한 정보를 자세하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 신자들은 이 구절에 서술된 빛의 의미와 '욤'의 길이에 대해 좀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창조자 하나님은 이 구절에서 빛을 '욤'으로 불러 낮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썼다. 이어서 '욤'은 밤을 포함하여 한 '날'을 의미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창세기 뒤에 이어지는 성경들에는 '욤'이 불특정한 시간(예를 들면, 어떤 사건의 기간 또는 한 시대)을 의미하는 등으로 말의 의미에 변화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빛이라는 말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보다 심오한 의미를 내포한 비유로 쓰이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인간의 지적 능력이 향상됨에 따라 사물에 대한 이해가 그만큼 깊고 넓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구약성경을 더 읽어보면 아담과 그의 자손들이 '세상의 빛'으로 만들어졌으나, 창조자 하나님의 창조계획대로 살지 아니하여 '세상의 빛'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신약성경에 이르면 창조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빛의 특별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서 가장 잘 나타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빛의 의미를 더 알기 위해서는 창세기에서부터 신약성경에까지 두루 살펴보아야 한다(하지만, 지면상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스가랴 14:7에서는 '주의 오심'을 예언하면서 빛으로 표현하고 있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서술은 '70인 역본'을 통하여 그리스어 신약성경으로 연결할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게 된다. 

요한복음 1장은 신약성경의 창세기라고 부를 만하다.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자 하나님과 공동 창조자로 서술되어 있다. 요한은 '태초에(ἐν ἀρχῇ) 말씀(λόγος)이 하나님과 함께(πρὸς τὸν θεόν) 있었으니, 곧 하나님(θεὸς)'이라고 서술했다. 여기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이어서 서술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라는 구절을 보면, 요한은 만물의 창조자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요한은 예수를 '사람들의 빛' (φῶς τῶν ἀνθρώπων)으로 서술했다(요 1:4). 요한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세상의 빛'(φῶς τοῦ κόσμου)이라고 말했고(요 8:12, 9:5, 11:9),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증언했다(마 5:14).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태초에'(ἐν ἀρχῇ)는 창세기의 '태초에'(베레쉬트)와 같은 시기를 말한다. 또한 창세기의 '오르'와 요한복음의 'ㅎ포스'는 동일하게 빛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창조 이전 태초부터 '세상의 빛'으로 예정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공동으로 창조를 계획하고 협의하셨던 사실이 요한복음에 의하여 명백해진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공동 창조자라면, 사람은 창조되기 이전에 이미 계획되었다는 사실도 입증된다. 그렇다면 흑암을 나눈 빛은 물질적인 빛이 아니라, '세상의 빛'이시고 '사람들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지구에 생태계를 창조하시기 위해 직접 임재하셨다는 사실을 가리킨다는 점도 분명하게 이해된다. 신약성경은 사람들과 세상의 빛이신 그분을 알아보고 그분을 믿는 사람들만이 그와 같이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 말하는 빛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일부 신자들은 물질적 빛의 의미인 '욤'의 시간적 길이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욤'의 길이를 지구와 우주의 연대 계산에 적용하여 논쟁을 벌이고 있다. 어쨌든 논쟁이 벌어지면 결론을 내야 한다. 

'욤'의 길이에 대해서 논의하자면,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창세기에서 처음 나온 빛은 하나님의 물질적 천지창조의 시작 때에 만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창세기의 첫 마디인 히브리어 '베레시트'(처음에)가 하나님의 천지(우주)창조가 시작된 때를 알려주는 말이다. 그러나 창1:5에서 쓰인 히브리어 '욤 에하드'를 '첫째 날'(the first day)이라고 번역한 성경들 때문에 오해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오해의 원인 '베레시트'와 '에하드'를 동일하게 '처음'의 의미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에하드'는 서수(序數)의 '첫째'가 아니라, 그저 '하나'(one)를 의미하는 기수(基數)이다. 창 1:9에서 물이 '한' 곳으로 모이라는 구절에도 이 말(에하드)이 쓰이고 있다. 하나님에게 '욤 에하드' 그저 일하시는 '하나의 날'(one day)이었을 뿐이다. 서수를 의미하는 '첫째'의 히브리어는 '라숀'(רִאשֹׁון)이다. 이 말은 '베레시트'의 어근이며, 창32:18에서 에서와 야곱의 순서를 말할 때에 쓰였다. 그렇다면 '베레시트'와 '욤 에하드'의 시간적 차이는 어떤 것일까? 간단히 말하자면 '베레시트'는 우주의 창조를 시작한 때를 말하고, '에하드'는 창조자 하나님이 지구에 임재하여 생태계의 창조를 시작한 어느 때를 가리키는 것이다. 

만약 창세기 저자에게 이 구절에서 하나라는 기수 '에하드'를 쓴 이유를 묻는다면, 그는 이미 앞에서 '첫째'를 의미하는 '베레시트'라는 말을 썼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라숀'과 '레시트'(앞에 붙인 '베'는 전치사이다)는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라는 사실은 이러한 차이를 설명하는데 확고한 증거가 된다. 

또한 하나님이 빛을 가장 먼저 창조한 것이라고 오해하면, 창조의 첫째 날에 밤은 없는 것이 된다. 그러면 이 구절에서 서술된 저녁과 아침의 순서에도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처음에 창조한 빛을 '낮'이라고 규정하였으므로, 빛이 있기 이전의 시간은 첫째 날에 포함되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첫째 '욤'(날)은 히브리인들의 '욤' 계산 방식과는 다르게 밤이 없는 반쪽 하루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밤으로 규정한 흑암(호셰크)을 앞의 구절에서 찾아보면, 깊음(테홈: 창1:2) 위에 있다. 그렇다면 빛을 만들기 이전에 이미 밤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한글성경은 이 구절(창1:5)에서 '호셰크'를 어둠이라고 오역해놓았고, 그 때문에 첫째 '욤'(날)이 반쪽만 있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고 있다. 이 '호셰크'(흑암)가 히브리인들의 첫째 '욤'(날)의 밤이며, 그 밤이 태초부터 처음 빛(낮)이 있기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히브리어 창세기는 처음에 하나님이 창조에 사용하신 밤(흑암)의 시간이 먼저 있었고, 그 밤의 길이는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시간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논의한 바탕 위에서 흑암과 빛을 나눈 처음 '욤'의 시간적 길이에 대해서 결론을 정리하기로 한다. 처음 '욤'의 밤으로 규정된 흑암에는 하나님이 천지의 창조를 시작하신 때로부터 처음의 빛을 있게 한 때까지의 시간이 포괄되어 있다. 처음 빛('욤', 낮)은 물리적 빛이 아니라, 하나님이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하여 지구에 임재하기 시작한 때이다. 현대 우주론에 의하면 물리적 우주의 시공간은 빅뱅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첫째 밤(호셰크)은 빅뱅에서부터 지구에 처음 빛('욤', 낮)이 나타나기까지 매우 길었던 시간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현대과학에서 계산하는 우주와 지구의 연대에 시비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기독교 신자들이 창세기에 나오는 6개의 '욤'의 길이를 멋대로 해석하여 우주와 지구의 나이가 젊었느니, 늙었느니 하고 논쟁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잘못 이해한 것을 자랑하는 어리석은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Ⅳ. 창조 둘째 날의 물의 나눔과 '라키아'(궁창) 

창1:6 וַיֹּאמֶר אֱלֹהִים יְהִי רָקִיעַ בְּתֹוךְ הַמָּיִם וִיהִי מַבְדִּיל בֵּין מַיִם לָמָיִם׃ [바요메르 엘로힘 예히 라키아 베토크 하마임, 비히 마브딜 벤 마임 라마임]. 이 구절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라키아)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라고 번역되어 있다., 영어성경에서는 firmament로, 한글성경에서는 궁창(穹蒼)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라키아'는 현대인들에게 '문자 그대로'는 이해될 수 없는 말이다. 

그렇다면 '라키아'는 무엇을 말하는가? 물과 물을 나눈 '라키아'의 어원은 '두드려 펴서 얇게 늘린 판'이라는 의미의 명사이다. 그러므로 '라키아'는 결국 실체적으로 '얇은 막 또는 판'이라고 이해된다. ''마브딜'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나누다는 뜻의 '바달' 동사 앞에 알파벳 '멤' 을 붙여서 명사화한 말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하나님이 물 가운데 '얇은 막'이 있으라고 말씀했다. 그러자 물과 물 사이에 나눠짐이 있었다'고 직역하면, 고대 히브리인들이 이해했던  '라키아'의 실체가 훨씬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라키아'가 아직 물속에 있는 동안,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 상태를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었으므로'(창1:7), 다음 구절을 보자. 

창1:8에서 '하나님은 '라키아'(궁창)를 하늘이라 부르셨다. 이 구절의 행간에는 읽어내야 할 것들이 많이 숨어있다. 먼저 모세의 위치와 시선의 방향을 파악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으면서 창조사건의 환상을 보고 있는 모세는 아직 물 위에 있었다. 모세는 공중에서 내려다보면서 물을 나눈 '라키아'를 찾고 있다가, 하나님이 '라키아'를 하늘이라고 부르는 말을 듣고, 위를 쳐다보았다. 하늘 색깔이 밑의 물 색깔과 같았으므로 모세는 그때 하나님이 '라키아'를 위로 들어 올려서 하늘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런 모세의 생각에 의해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이 형성되었다. 

고대 근동 지역의 신화들은 대개 가장 먼저 있었던 것이 물질이고, 그것이 물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집트 신화에서는 신들과 땅도 물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이와 같이 고대 근동 지역 사람들은 물을 만물의 근원으로 알고 있었다. 이집트 왕가에서 자란 모세도 이런 이집트 신화를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집트뿐만 아니라, 서양철학의 비조로 불리는 밀레투스의 탈레스(Thales of Miletus, BC.640-BC.546)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이집트를 여행한 적이 있었다. 그때 탈레스가 나일강이 홍수로 범람한 뒤에 진흙 속에서 작은 벌레들이 생겨나오는 것을 보고, 작은 벌레들의 자연발생설과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주장했던 사실은 서양철학사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모세도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시기 전에 물이 먼저 있었음을 서술하지만, 하나님이 물을 만들었다고 서술하지는 않았다. 모세는 물이 '처음에'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고, 그 계획에 따라 물이 만들어졌다고 믿었을 것이다. 

모세가 둘째 날의 하늘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서술하는 구절들을 읽는 현대인들은 큰 모순을 느끼게 된다. 이 구절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모세가 하나님이 물을 나눈 '라키아'를 하늘로 규정했다고 서술함으로써 '라키아' 위의 물이 그대로 하늘 위에 올라갔다고 이해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모세는 뒤에 노아의 홍수 때에 하늘 위의 물이 '라키아'의 문을 통해 쏟아져 내렸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렇지만 현대인들에게 '라키아'가 하늘 위에 있었고, 그것에 물이 담겨져 있었다는 생각은 발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라키아'는 실체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했었다는 흔적도 발견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일반적인 수준의 과학적 상식을 가진 현대인이라면, 모순을 가지고 있는 창세기의 '라키아'에 대한 서술들을 그대로 믿을 수가 없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물은 H2O로 구성된 분자 덩어리이고, 지구에서 하늘은 대기권을 말한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의 관점에서 '라키아'를 모세의 서술처럼 하늘 위의 실체로 믿고, 그 위에 물을 담고 있었다고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에서부터 창세기는 현대인들에게 과학적 사실과 모순되어 배척받게 된다. 오늘날에도 모순을 느끼지 않고 창세기의 서술을 그대로 믿는다고 말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일반적인 수준의 현대적 과학 상식을 갖추지 못했거나, 스스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다. 현대인들은 현대과학과 첨단기술이 만들어낸 현대문명의 거대한 시스템과 제품들을 보면서 그것들을 만들어낸 현대과학의 힘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그러므로 현대과학에서 입증된 '과학적 사실'과 창세기의 서술이 모순된다면, 현대인들은 과학적 사실을 믿는 쪽을 선택하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는 이제 현대인들에게 성경의 서술이 하나님의 말씀이니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모세의 서술에 영향을 받은 에스겔은 '라키아'를 가장 많이 언급했다. 에스겔은 '그 살아 있는 창조물의 머리들 위에 있는 라키아의 모습은 무서운 수정 색깔 같았으며 그들의 머리들 위로 펼쳐져 있더라'(겔 1:22)고 말했고, 또 '그룹들 머리 위 궁창(라키아)에 남보석 같은 것이 나타나는데 보좌의 형상 같더라'(겔 10:)고도 서술했다. 에스겔은 에스겔서 곳곳에서 '라키아'가 하나님의 보좌 밑에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시편과 다니엘서에는 '라키아'를 하나님의 '권능의 궁창'(시 150:1)과 '궁창의 광채'(단12:3)라고 서술되어 있다. 

모세에 의하여 고대 히브리인들은 피조물들의 하늘 위에 '라키아'가 있고, 하나님을 보좌하는 천사들과 하나님은 그 위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영향은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번역한 현대 히브리어 신약성경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고린도후서에서는 셋째 하늘에 다녀온 사람을 말하고 있다(12:2).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주의 재림을 영접하는 곳으로 쓴 '라키아'를 공중이라는 말로 번역했다(4:17). 

신약성경에서 '라키아'를 가장 많이 쓰고 있는 요한계시록의 한글 번역문에서는 대개 공중(空中)이라는 말로 되어 있으나(계 8:13, 14:6, 19:17), 공기(空氣)로 번역된 곳도 있다(계 9:2). 오늘날에도 궁창이라는 말이 나오는 구절은 강의와 설교 등에 자주 인용된다. 그 대표적 구절은 '하늘(하샤마임)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하라키아)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2)이다.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읽으면 '라키아'에 대한 오해는 더 많이 나타나게 된다. 왜냐하면 '라키아'가 아닌 다른 말까지 궁창으로 번역하여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한글성경에서는 히브리어 שחקים(셰하킴)을 '궁창'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셰하킴'은 '잘게 부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שחק (샤하크)의 복수 명사형이다. 그런 뜻에서 먼지나 구름 등을 의미한다. '셰하킴'이 궁창으로 처음 번역된 구절은 신명기 33:26절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샤마임)을 타시고 궁창(셰하킴)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이다. 여기서 '셰하킴'은 구름으로 번역해야 맞다. 한글로 번역된 욥기, 시편, 잠언, 그리고 이사야와 예레미아의 예언서에는 '셰하킴'을 거의 모두 궁창으로 번역하고 있다. 

'셰하킴'과 '라키아'를 비교하여 가장 잘 알 수 있는 구절은 תרקיע עמו לשחקים חזקים כראי מוצק׃ [타리키아 이모 라셰하킴 하나킴 키레이 모자크](욥 37:18)이다. 개역성경에서 '네가 그와 함께 하여 부은 거울 같은 견고한 궁창을 펼 수 있느냐'로 번역된 이 구절에는 '라키아'에 접두어 '타'를 붙여 의문형 동사 '타리키아'(펼 수 있느냐)가 있고, '셰하킴'의 목적격 명사 '라셰하킴'도 있다. 개역개정판에서는 '그대는 그를 도와 구름장들을 두들겨 넓게 만들어'라고 번역하여 '셰하킴'을 구름장들로 해석한 본문을 보여주고 있다. 이사야 40:22절 앞 구절은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 구절에서 궁창은 חוג הארץ(후그 알레츠)이며 땅의 구(球)라는 뜻이다. 이 구절의 영어 번역을 보면, the circle of the earth로 번역하고 있다. 어떻게 이 말을 궁창이라고 번역하여 혼란을 초래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한글성경의 실상이 이러함에도 문자적 해석을 강변하는 근본주의적 창조론자들은 모든 성경은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오히려 왜곡된 해석을 조장하고 있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이 '라키아' 위에 물을 올려놓으셨다고 서술한 창세기에 의하여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늘 위에 물이 있고, 하늘의 창이 열리면 비가 내리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현대인들에게 납득될 수 있는 창조론은 진리의 기준을 사실성에 두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현대의 창조론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론이 서술된 창세기의 창조 사건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사실'과 비교하면서 해석하는 것이어야 한다.

Ⅴ. 넷째 날의 '라키아'(궁창)와 광명들

1. 창 1:14절의 현대적 해석 

וַיֹּאמֶר אֱלֹהִים יְהִי מְאֹרֹת בִּרְקִיעַ הַשָּׁמַיִם לְהַבְדִּיל בֵּין הַיֹּום וּבֵין הַלָּיְלָה וְהָיוּ לְאֹתֹת וּלְמֹועֲדִים וּלְיָמִים וְשָׁנִים׃ [바요메르 엘로힘 예히 메오르트 베레키아 하샤마임 레하베딜 벤 하욤 우벤 하라엘라 베하유 레오토트 우레모아딤 우레야멤 베샤님]. 이 구절에서 '메오르트'는 복수이므로 광명들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 광명들은 해와 달과 별들을 포함하고 있다. 

모세의 넷째 날의 서술에 대해 살펴보면, 모세는 먼저 하나님이 '궁창에 광명(들)이 있으라'고 명령하시는 소리를 들었다. 모세는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모세는 하나님의 '있으라'는 명령어 외에 그 광명들의 처소를 '하늘의 궁창에'(베레키아 하샤마임) 정하신 일, 그 광명들이 주야를 나누신 일, 그리고 그 광명들이 운행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이루는 일도 말씀하신 것으로 서술했다. 

이런 서술들은 하나님의 창조 명령어에 모세가 덧붙여 놓은 설명문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모세의 서술은 그가 이미 그 광명들이 '라키아'에서 날자와 사시와 연한을 이루고, 징조를 나타낸다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모세의 서술에 의하여 형성된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은 세월이 가면서 점점 더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모세는 야곱의 입을 빌려 땅 밑에 음부(שאלה: 쉐올라)가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창 37:35). 그리고 신명기에서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모든 '하늘의 하늘'(신 10:14)을 서술함으로써 하늘들은 천사들이 거주하는 '라키아' 위의 하늘과 '라키아' 밑의 하늘을 포함하여 3개의 하늘로 구성되었다. 

토라 이후의 구약성경에서 '라키아'의 가장 큰 변모는 평평하게 펼쳐졌던 '라키아 샤마임'이 욥기(22:14)에서 '(베)후그 샤마임'(וחוג שמים)처럼 '후그'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로 [참고 자료]와 같이 '고대 히브리인들의 우주관'에서 '라키아'는 반구형(半球形)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사야 40:22에서 '후그 하아레츠'(חוג הארץ)가 나오는 것을 보면, 고대 히브리인들은 이때부터 지구도 반구형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어 성경 주석에 있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세계관 그림
                 ▲중국어 성경 주석에 있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세계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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