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6-29 21:06
(2)속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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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12,748  

(c) 진 노 (Wrath)

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명예와 성결에 대한 공격이다.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다. 사람이 고의로 죄를 범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게서 자기의 명예가 침해를 받도록 허용한다면 그는 하나님으로서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명예는 그를 항거하는 자를 멸망시키기를 요청한다. 또한 그의 의는 유린된 육법을 회복하기를 요구한다. 또한 그의 성결은 죄에 대하여 반응을 이르키는데 이 반응을 가리켜 진노라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의 반응을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손을 불에 뎃을 때에 일어나는 반응과 같이 곧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신의 진노는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인격적 고려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손으로 지은 것을 조급히 파멸시키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경고하고 기다리면서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신다.

그의 인자하심이 인간들을 인도하여 회개시킬 것을 바라면서 그는 심판하시기를 더디하신다 (롬2:4,벧후3:9).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지연됨을 오해하고 심판에 대한 생각을 비웃는다."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전8:11).

아무리 심판이 지연될지라도 심판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세상은 법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음으로 반드시 최후의 심판은 있을 것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이와 같은 진리를 갈보리 언덕에서 나타났다.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동안에 지은 죄를 용서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려 하심이이다." 또 이 구절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의역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이 시대에 나타난 그의 정의의 계시에 비추어 하나님의 용서의 시대인 전 시대의 죄에 대한 심판을 중지하셨다. 이 때에 의로운 재판장이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들의 죄를 무죄로 선언할 수 있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는 만방의 죄를 못본체 하는듯이 보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계속하여 범죄하였다. 그러나 저들은 죄의 삯을 거두어 드리지 않는듯이 보였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길 것 이다.

하나님은 죄를 무시하고 있는가?

그러나 예수게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의 무서운 형벌이 제시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에 대하여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도 결코 무관심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어떤 학자의 글을 인용하면, "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그의 분노를 가끔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형벌을 내림으로써 나타냈다. 그러나 그는 더할 나위 없이 극악한 형벌을 내리지는 않았다.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결코 살아 남을 인종은 하나도 없었으리라. 어느 정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간과하셨다. 그런데 어떤 임금이 죄를 간과하여 형벌을 지연시킨다면 그는 불의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를 잘못 해석하여 그의 형벌을 피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

스도로 하여금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죽게 함으로써 그의 정의를 들어 냈다."

(d) 속 죄 (Atonement)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였고 또한 義의 원리를 위반하고 말았다.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했다는 사실이 인간의 뇌리 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인간의 양심이 그 것을 죄로 증언하고 있다. 죄악된 과거를 속함 받고 미래의 확신을 얻게 위하여 어떻게 하면 좋을가? 율법을 범한데 대한 속죄의 방도가 가능한가?

이 물음에 대하여 세 가지 답을 줄수 있으리라.

1. 어떤 사람은 속죄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인생이란 가혹한 법에 의하여 지배를 받고 있다. 이 가혹한 법은 이 법을 범한 자에게는 기계적인 냉혹성을 갖고 벌한다. 사람은 심은대로 거두기 때문에 도저히 피할 길이 없다. 죄는 영속하는 것이므로 죄인은 결코 과거로부터 피할 수 없다. 그의 미래는 그의 죄악 된 과거에 저당잡혀 있기 때문에 도저히 사함을 받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사상을 나타내주는 시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

움직이는 손가락이 글을 쓰네.

자꾸 계속해서 움지이며 글을 쓰네.

너의 온갖 지혜와 동정으로 써 놓은 글을 한 줄이라도 지을 수 없네

너의 눈물로 단 한 자인들 씻어버릴 수 없네.

이와 같은 이론은 인간을 환경의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 인간은 자기의 운명에 하등의 영향력도 줄 수 없는 무력한 존재가 되고 만다. 이와 같은 이론을 지지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시인하드래도 자기 자신의 법칙에 제재를 받아 꼼짝 못하는 신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신은 죄인에게 구원의 길을 마련해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2. 그 다음에 속죄는 필요없다고 가르치는 또 하나의 다른 극단론이 있다.

하나님은 너무나 인자하시기 때문에 죄인에게 벌을 주시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은 너무나 자비심이 깊기 때문에 범한 율법에 대한 배상을 요구치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속죄는 필요치 않으며 용서함은 당연한 것으로 받게 된다. 어떤 의사가 그의 환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말을 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속죄 같은 것은 필요없습니다. 나는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는 하나님께 죄송합니다 고 말하면 충분합니다.." 얼마 후에 그 환자는 의사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사 선생님, 지금 나는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다시 병들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 하겠습니다." 동시에 그 환자는 치료비를 의사에게 줄 필요없다는 것을 암시했습니다. 아마 여기서 의사는 독특히 교훈을 받았으리라. 곧 다시 말하면 단순한 회개만으로는 죄의 댓가를 지불할 수 없으며 또한 죄로 말미암아 손해를 입은 것을 변상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으리라.

3. 신약 성경은 속죄는 가능한 동시에 또한 필요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속죄 가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은 의로운 동시에 또한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속죄가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은 인자하신 동시에 의롭게 때문이다.

위에서 인용한 두 가지 그릇된 이론은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두 가지 진리를 너무 과장한 것리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쩨의 이론은 하나님의 정의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그의 은혜를 배제하는 경향으로 흘렀고 두 번째의 이론은 그의 은혜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그의 정의를 배제하는 경향으로 흘렀다. 속죄는 하나님의 두 가지 품성에 다 타당한 면을 지니고 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의 은혜와 정의를 다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는 죄를 취급하는데 있어서 그의 은혜를 나타낼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러냐 면 그는 죄인이 죽는 것을 원치 않게 때문이다. 그러나 용서하는데 있어서 그는 정의를 나타낼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러냐 하면 이 우주의 안전성은 하나님의 지배권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속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하나님으로서의 그의 품성에 타당한 공정성을 유지하였다. 그의 정의는 죄인의 형벌을 요구하나 그의 은혜는 죄인을 용서하는 길을 마련하였다. 또한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정의의 하나님으로서의 그의 품성에 타당한 공정성을 유지하였다. 죄를 경시하며 죄악의 비극적 실제를 무시해 가면서 죄인에게 동정심을 나타냈다면 하나님께서는 정의의 하나님의로서 공정성을 잃게 되고 만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무관심하며 엄하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갈보리 언더에서 죄의 댓가가 지불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도 손상을 받지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불의치 않으면도 은혜로울 수 있으며 무자비하지 않으면서도 의로울 수 있는 것이다.

3. 속죄의 본질 (The Nature of the Atonement)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는 말은 십자가의 고난의 역사적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죄를 위하여"라는 말 자체가 그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께서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돌아 가셨는가? 신약에 이 사실이 어떻게 설명되어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련된 다음과 같은 중요한 말 속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속죄,화목 제물,대속,구원,화해 등이다.

(a) 속죄 (Atonement)

히브리어로 속죄라는 말은 "가리우다"(cover)를 의미하는데 영어 성경 흠정역에는 여러 가지 말로 번역되었다. 속죄하다, (죄를) 속하다,화햐,화해시키다, 진정시키다, 용서하다,자비스럽게 대하다, 연기하다 등 여러 가지 뜻으로 번역되었다.

히브리 원어의 속죄라는 말은 죄와 (시78:38, 79:9, 레5:18), 죄인 (레4:20)을 가리워 주는 것을 의미한다. 죄를 사한 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이르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시지 않도록 죄를 가리우는 것을 의미한다.

알프레ㄷ 케이브 (Alfred Cane) 박사의 글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 히브리 언어로 속죄라는 말은 "가리운다" 의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보시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가리우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을 다른 곳에 집중시키게 하는 것을 또한 뜻한다. 즉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의분을 이르키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죄를 속한다는 것은 죄가 보이지 않도곡 빛나는 베일로 죄를 가리워 완전히 시선을 다른데로 집중시키는 것을 뜻한다. 신약에서는 (의의) 새로운 옷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구약에서는 " 속죄"를 의미하였다. 율법 하에서 속죄가 행하여 질 때에는 죄와 더러움을 보고 노여워 불타 오르는 하나님의 눈을 죄를 가리운 옷으로 진정 시켰던 것이다.

좀 더 비추어져 들어났을 때에 그 빛으로부터 감싸지는 것을 말한다. 속죄는 죄인을 가리우는 것을 의미하므로 어떤 의미에 있어서 죄는 보이지 않으며 또한 존재치 않음으로 죄가 인간과 그의 창조주 사이에 이 이상 더 끼어 들 수 없는 것이다. 독일 신학자의 말을 빌리면 `범죄한 영혼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거하는 하나님의 제단 앞에 나올 때에 범죄한 영혼의 죄의 본질은 그와 하나님의 제단 앞에 나올 때에 범죄한 영혼의 죄의 본질은 그와 하나님 사이에 끼어 든다.

그러나 속죄의 능력이 죄를 가리움으로 고발된 그의 죄는 도말되는 것이다."

제사장이 제단에 피를 받쳤을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이 자기를 위하여 실현되었다고 확신하였다. "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출12:13).

속죄의 결과는 어떤 것들인가? 죄가 말살되었다 (렘18:23 사43:25,44:22).죄가 제거되었다 (사6:7). 죄가 가리워졌다 (시32:1). 죄가 깊은 바다에 던지워졌다.

(미7:19). 죄가 하나님의 등 뒤에 던져졌다 (사38:17). 죄가 사해졌다 (시78: 38). 위에 인용한 성경 구절을 상고하여 보면 속죄의 결과는 죄가 제거되고 보이지 않게 되고 무효로 되어 종당에는 죄가 가리워지는 것을 알수 있다. 여호와께서는 이상 더 죄를 보시지 않는다. 그리고 죄도 그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류의 죄를 제거하기 위한 죽음이기 때문에 속죄의 죽음이 다 (히9:26,28,2:17,10:12-14,9:14). 또한 그의 죽음은 희생의 죽음으로서 죄와 관련된 죽음이다. 그러면 그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2:24)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게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5:21). 죄를 속하는 것은 죄를 범한 사람으로부터 죄를 제거하는 것을 뜻한다. 죄를 범한 사람이 속죄함을 받음으로써 모든 불의를 떠나 의롭다함을 받게 되며 온갖 더러움으로부터 깨끗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깨끗하게 한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의 글자 그대로의 뜻은 "죄를 제거한다."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의 죄는 제거된다. 곧 저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저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b) 화목 제물 (Propitiation)

"화목 제물" (Propitiation)이라는 말은 "가까이" (near)를 의미하는 라틴어 "Prope"에서 유래한 것으로 믿어 진다. 이 말은 접촉 시킨다. 또는 총애를 받게 하다. 또는 화목케 한다를 의미한다. 화목의 희생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접촉케 하며 그의 죄를 속하고 하나님의 총애와 은혜를 받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화목케 한다.

하나님께서 화목의 제물을 받고 죄인에게 그의 사랑을 다시 준다. 이와 같은 사상은 신약 성경을 기록한 헬라어에도 나타났다. 화목케 하는 것은 속죄의 희생을 드림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분을 진정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가르켜 "화목 제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롬3:25,요1서2:2,4:10).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였음으로 하나님과 인간을 대신하여 죄의 문제를 해결하였음이로 하나님과 인간을 격리케 하던 죄의 세력은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게 되었다. 가장 고상한 특권인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권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의 댓가를 지불하고 획득된 것이다. 제임스 데니(James Denney)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마치 옛날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사용되던 모든 기구에 속죄의 피를 뿌렸던 것과 같이 하나님 앞으로 접근케 하는 모든 기독교인의 예배를 의식적으로 그리스도의 속죄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 같은 것은 값으로 살 수 없는 특권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것은 값으로 살 수 없는 특권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 숨어 들어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과 하나님과 화목케 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단번에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롬3:25속에 기록되어 있는 "화목 제물"(Propitiation)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 속죄소"(Mercy Seat)라는 말로는 번역되었다. 히브리어로 "속죄소"라는 말의 글자 그대로의 뜻은 "가리움"(Covering)을 의미한다.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있어서 속죄소라는 말은 다 같이 속죄의 희생을 의미하는 개념을 전해주고 있다. 언약의 법궤 (출 25:10-22)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로, 법궤는 이스라엘의 의로운 통치자의 보좌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 속에 그의 의로우신 뜻의 표현으로서의 율법의 돌비가 들어 있다. 둘째로,법궤의 뜨껑인 속죄소에는 그룹이라는 천사의 상이 얹혀 있다. 이 법궤가 우리들에게 전해 주는 두 가지 현저한 교훈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율법을 새긴 돌비는 하나님은 의의 신으로 죄를 간과하지 않으시며 그의 율법을 선포하여 악인을 징벌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나 죄악된 백성이 어떻게 그가 보시는 앞에서 살 수 있었을가? 율법을 덮고 있는 속죄소는 백성들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일 년에 한 번씩 피를 뿌리는 장소였다. 속죄소는 죄를 덮는 곳으로 하나님은 의로우사 속죄의 희생으로 인하여 죄를 끊임 없이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속죄의 보혈로 말미암아 심판의 보좌는 은혜의 보좌로 변하게 된다.

법궤와 속죄소는 속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음으로 예시해 주고 있다.우리들 롬3:25,26속에서 속죄의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살펴 볼 수 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믿음로서 받아 들임으로)말미암는 화목제물 (속죄의 희생)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심판이 지연 된다고 하나님께서 죄를 간과하시는 것이 아니다).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죄인을 의롭게 만들 수 있는 그의 길) 나타 내려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으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죄에 대한 형벌을 내 리시는 동시에 또한 죄에 대한 형벌을 취소할 수 있을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 자신이 그 형벌을 받음으로써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하나님의 율법도 존중시되는 동시에 죄인은 구원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형벌을 나리시는데 얼마나 의로우시며 또한 죄를 용서하는데 얼마나 자비스러운가를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어떻게 의롭다고 하실 수 있겠으냐는 상당히 이해키 어려운 난문제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갈보리 언덕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짐으로써 해결되었다.

옛 그리스도께서 화목의 제물로 되었다는 것은 실제적 사건이었다는 점을 거듭 강조해 둘 필요가 있다. 왜 그러냐 하면 어떤 사람들은 속죄를 다만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명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표명됨으로써 죄인들이 회개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남으로써 죄인인 회개할 수 있다는 것도 속죄의 결과 중에 한 가지라고 할 수는 있다. (요1서3:16). 그러나 이것이 속죄의 전부라고 는 할 수 없다. 가령 예를 들면 어떤 가난한 사람이 보는 데서 우리들이 강물에 뛰어 들어 빠짐으로써 그 사람에 대한 우리들이 사랑을 나타낼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들이 강물에 빠졌다고 그 가난한 사람이 지불하지 못하고 있는 식료품 사회의 계산서가 자동적으로 지불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업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 막혀 있는 죄의 장벽을 무너뜨리며 우리들이 갚지 못하여 쩔쩔매고 있는 죄의 빚을 지불하기 위한 실제적 행동이다.

(C) 대 속 (Substitution)

구약의 희생은 본질적으로 대속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이스라엘 사람을 대신하여 제단에서 행하여 지는 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행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제단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것이요, 제사장은 죄인을 대표하였다. 희생의 제물은 이스라엘 사람을 대신하여 드린 대속물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들 스스로가 할 수 없는 것을 십자가 상에서 행하였다.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의 공로로"받게 되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우리들의 참회와 감사와 헌신을 드리는데 이것들을 드릴 때에도 우리들의 참회와 감사와 헌신을 드리는데 이것들을 드릴 때에도 우리들은 "그의 이름으로"행한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그는 화목의 제물인데 우리들은 그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약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들은 대속의 사상을 두드러지게 살펴 볼 수 있다.

구약에서 희생의 피가 죄를 범한 사람을 속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우리들은 이사야53장에서 희생의 의미가 최고에 달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느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와 같은 모든 표현은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한 저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나릴 형벌을 짊어지는 여호와의 종의 모습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영원하고 무한한 가치가 있는 희생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형사을 취하시여 인간과 같이 되어 인간의 형벌을 담당할 수 있었다.

그는 우리들을 위하여 죽으셨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 형벌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 상에서 이렇게 부르짖었다.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본시 죄가 없으시고 또한 일생 동안 사시는 동안에 한번도 죄를 범한 일이 없는 그가 죄인이 되었다 (죄인의 자리 취하였다). 바울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또 베드로의 말을 빌리면 "친히 나무에 달려 그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벧전2:24).

(d) 구 원 (Redemption)

구약에 있어서나 신약에 있어서나 "속죄하다"(Redeem)라는 말은 댓가를 지불하고 되사는 것을 의미한다. 댓가를 지불하여 구속에서 해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는 시장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주 예수는 구속자시다. 그리고 그의 속죄의 사업은 구원을 뜻한다 (마20:28,계5:9,14:3,4, 갈 3:13,4:5,딛2:14,벧전1:18). 구원에 대한 가장 흥미있는 예를 들어 근족을 속량하는 구약의 율법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레25:47-49) 이 율법에 의할 것 같으면 빚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토지를 팔았거나 자지 자신을 노예로 팔았던 사람이 다음과 같은 자격을 갖춘 사람이 속량한다는 조건 하에서 언제든지 자기의 토지를 다시 찾을 수 있으며 또한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첫째로, 그는 그 사람의 친척이어야 했다.

둘째로, 그는 속량 또는 다시 사리를 원하지 않으면 안된다.

셋째로, 그는 속량할 돈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 가지 자격을 구비하였다.

그는 우리와 꼭같은 인간의 본성을 취함으로써 우리들의 친척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우리들을 구속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기를 원하였다 (고후 8:9). 그리고 또한 그는 신이시기 때문에 그의 보배로운 피로써 댓가를 지불할 수 있었다.

우리들이 구원의 사실을 생각해 볼 때에 구원이야말로 값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구원을 가법게 생각해서는 안되겠다. 어떤 기독교 신자들이 그들의 생활을 멋대로 사는 것을 보고 바울은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여기서 예수께서는 인간의 참다운 생명은 잃거나 혹은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한 번 이 생명을 잃어버리면 그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구할 방도가 없기 때문에 생명을 되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다. 부자는 자기의 제물을 믿고 자랑하였다. 그러나 제물의 힘은 유한한 것이다.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적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의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저로 영존하여 썩음을 보지 않게 못하리니"(시49:7-9). 그러나 인간들은 죄 속에 살면서 그들의 참다운 생명을 상실하고 말았기 때문에 인간의 수단으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면 구원을 받기 위하여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숩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 28).

예수께서 이 땅 위에 오신 가장 큰 최고의 목적은 영적 생명을 잃은 인류에게 다시금 그 생명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대속물로 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생명을 대속물로 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생명을 버림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상실했던 참다운 생명을 다시 찾게 되었다.

베드로는 그의 독재자에게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이 "망령된"(vain) 이라는 말은 텅빈 것과 불만족스러운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 가시기 전의 인간의 생활은 공허하고 헛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인간의 생활이란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을 암중 모색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실재와 접촉할 수 없는 생활이였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실재와 접촉할 수 없는 생활이였다. 이 공허한 생활은 영원한 열매를 맺을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 이 따위 공허한 생활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라고 부르짖고 있다.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기반에서 우리들을 구원하였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의 권세를 받아 드릴 때 그의 생활은 결코 불만족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를 받아 드린 사람의 생활은 결코 예수 전통이나 기성 관습에 얽매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권세로 자극을 받아 형성된 새 생명에서 솟아나는 것이다. 인간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은 영혼을 해방하며 소생시킨다.

(e) 화 해 (Reconciliation)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 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8,19)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우리들은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게 되었다.(롬5:10).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골1:21-22). 속죄의 의미는 가끔 오해되거나 잘못 인식되는 수가 있다. 어떤 사람은 속죄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에 대하여 노하셔서 그의 아들이 죄의 형벌을 죄인을 대신해서 지불하여 하나님을 위무할 때까지 하나님은 냉담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상상하고 있다. 즉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죄인과 화해하지 않으면 교리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것이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볼 때에 하나님 편에서 먼저 인간의 죄를 구속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였다.

우리들의 최초의 조상에게 옷을 입혀 주신 이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속죄의 제물을 정하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인류를 위한 희생의 제물로 그의 아들을 보내 주셨다. 인간의 구원의 창시자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인간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위엄성은 손상을 받았지만 그의 성결성은 이에 대하여 곧 반응을 이르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멸망받는 것을 원치 않고 (겔33:11) 도리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사람과 단순히 화해하였을 뿐 아니라 인간을 자기 자신에게 화해시키기 위하여 어떤 일을 하셨다고 바울은 말하였다.

이 화해의 행위는 이미 완선된 일이다. 이 화해의 일은 인간의 유임을 위하여 완성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 전 세계는 이미 화해된 것이다.

다만 전도자들이 이 사실을 전하여 사람들이 이 사실을 받아 드려야 한다는 문제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각기 개인들은 하나님과 화해하는 일을 실천에 옮겨 놓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진수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화해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화해의 일은 우리의 노력과 관계 없이 무한한 댓가를 지불하고 완성되었기 때문에 인간이란 다만 이 화해의 잔치에 초대를 받았을 뿐이다.

4. 속죄의 효력 (The Efficacy of the Atonement)

그리스도의 속죄 사업이 인간들에게 어떤 결과를 갖어 오는가? 인간의 체험 속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a) 죄의 용서 (Pardon of Transgressions)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업을 통하여 우리들이 갚을래야 도저히 갚을 수 없었던 빚을 갚게 되었고 과거의 죄를 용서받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에게는 이미 그의 죄가 도말되고 제거 되었음으로 죄악된 그의 과거가 어두운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따라 다니지 않는다 (요1:29,엡1:7히9:22-28,계1:5). 그는 새로운 삶을 출발했기 때문에 심판대 앞에 설 때에 결코 과거의 죄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요5:24).

(b) 죄로부터의 자유 (Freedom from Sin)

속죄를 통하여 신자는 그의 과거의 죄로부터 해방될 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로 부터 해방된다. 이 문제는 로마서 6장으로부터 8장까지에 언급되어 있다. 바울은 유대인 가운데 그의 주장에 반대하고 일어 설 자가 있을 것을 미리 예상하였다. 즉 다시 말하면 만일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믿는 신앙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면 사람들이 죄를 경시할 것이 아니냐고 그들이 바울에게 도전해 올 것을 미리 예상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롬6:1) 바울은 이와 같이 잘못된 신앙관을 거부하고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의 신앙으로 인하여 죄와 완전히 깨끗히 절연한다고 즉 다시 말하면 죄에 대하여 죽는다고 단호히 말하였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구세주를 믿는 산 신앙의 결과는 죄악된 낡은 것을 십자가에 목박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의 죄를 위하여 돌아 가셨다는 사실을 확고히 믿는 사람은 죄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확신하고 전심 전력을 다하여 죄를 물리칠 것이다. 십자가는 신자의 생애에 있어서 죄에 대한 심판이다. 그러나 유혹자인 마귀는 분주히 돌아 다니며 인간을 유혹하려고 애쓰고 있으며 또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끊임 없이 자지 않고 깨여 경계하며 날마다 죄악의 충동을 십자가에 못박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롬6:11). 이와 같이 하면 승리는 확실한 것이가. "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롬6:14). 즉 다시 말하면 율법은 인간에게 어떤 것을 행하라고 요구하고 있으나 인간이 죄의 종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지 못한다. 따라서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지 못하면 그것이 빚이된다.

따라서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지 못하면 그것이 빚이된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은혜는 죄인을 위하여 어떤 것 즉 갈보리 언덕의 완성된 구속 사업이 행하여진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자기를 위하여 행하여진 바를 믿을 것 같으면 그를 위하여 행하여진 바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강력한 우방을 갖고 있는데 그는 곧 성령이시다.

성령께서는 신자의 마음 속에 내주하면서 그를 하여금 죄악의 충동을 분쇄하도록 협조하여 주시며 또한 기도하도록 도와 주시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승리와 자유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 해 주신다 (롬8장). 실로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장벽을 무너드려 하나님의 성령이 인간의 생활 속에 들어 올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죽으셨다.(갈3:13,14). 십자가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자비로 구원받은 신자는 성결과 성령의 살려주시는 체험을 갖게 되는 것이다.(딛3:5-7). 옛날의 죄악 된 생활에 대하여 죽고 새로 중생하여 물로 나게 되고 (깨끗히 씻음받은 체험) 영으로 나게 된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음) (요3:5).

(c) 죽음으로부터의 구원 (Deliverance from Death)

죽음에는 육체적 의미와 영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육체적 의미에 있어서 죽음은 육적 생명의 종식을 가르킨다. 따라서 육체적 죽음은 질병과 자연死와 기타 돌발적인 원인으로 발생한다.

그러나 죽음은 영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인간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나리는 형벌을 뜻한다. 또 영적 죽음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불목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영적 상태를 나타내 주고 있다.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죽은 회개치 않은 사람은 하나님과 격리된 상태에 놓여 있다. 그리고 영원한 격리는 곧 둘째 사망을 뜻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이 다만 육체적 죽음을 뜻하는 것이였다면 그 말씀이 당장 성취되었다고 할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면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도 계속해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말 속에 죄악의 온갖 형벌의 결과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격리,불안,죄악의 경향성,육체적 연약성 종국적 육체의 죽음 등이 포함되어 있음을 생각해 볼 때에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선언은 참으로 실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돌아 가셨다고 성경이 말해 주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육체적으로 죽으셨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형벌로서 죽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을 나추어 죽음을 당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2:9). 그는 신성을 지니시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을 능히 할 수 있었다.

어떻게 이와 같은 사실이 가능케 되었는지 우리들은 알 수 없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으 신비로 되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 우주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사물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서도 기정 사실로서 받아 드리고 있다. 전기가 어떤 것이며 또한 전기의 작용이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고 전기가 제공해 주는 혜택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또한 속죄의 문제를 마치 수학 문제처럼 논증할 수 없다고 속죄의 은혜를 거부할 필요는 없다.

죄의 형벌은 죽음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히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자 상에서 몇 시간 동안 고통을 받으시며 돌아가신 그 죽음에 그 중대한 의미와 죙악의 형벌의 암담성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절망의 부르짖음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와 같은 부르짖음은 결코 순교자의 말은 아니다. 왜 그러냐 하면 순교자는 하나님게서 같이 계심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이 부르짖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격리되는 것을 체험하는 자의 부르짖음이다. 곧 이 행위는 죄를 짊어지는 행위이다 (고후5:21)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도 육체적 죽음을 당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롬 8:10). 그러나 그들이 죽는 것은 죄으 형벌로서가 아니라 보다 큰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은 참되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요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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