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6-29 21:04
(1)속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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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7,632  

속 죄 론 (贖罪論)

개 요

I. 구약의 속죄 (Atonement in the Old Testment)

1. 희생의 기원

a. 하늘에서 정해졌다.

b. 지상에서 제정되었다.

2. 희생의 본질

3. 희생의 효력.

a. 구약의 희생은 좋은 것이였다.

b. 신약의 희생은 보다 좋은 것이다.

II. 신약의 속죄 (Atonement in the Newl Testament)

1. 속죄의 사실

2. 속죄의 필요성

a. ---- 에 대하여 반응을 이르킨 하나님의 거룩함.

b. ---- 을 발생케 한, 인간의 죄악.

c. ---- 에 의하여 피하게 된 진노.

d. ---- 속 죄.

3. 속죄의 본질

그리스도의 죽음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a. 속 죄

b. 화목 제물

c. 대 속

d. 구 원

e. 화 해

4. 속죄의 효력

a. 죄의 용서

b. 죄로부터의 구원

c. 죽음으로부터의 구원

d. 영생의 선물

e. 승리의 선물

I. 구약의 속죄 (Atonement in the Old Testament)

구약의 희생을 기술하기 위하여 아까운 시간과 지면을 사용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 까닭은 단순한 "희생"이라는 말 속에서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뜻을 알아 볼 수 있는 열쇠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현대의 학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속죄의 요소를 제거한 학설이 있다면 이는 비성서적 학설이다. 왜 그러냐 하면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설명하는 희생의 용어의 사용보다 더 특징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피고 인간의 죄를 씻어 구원하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를 제거하기 위한 참다운 희생이 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약의 용어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이 용어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해석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왜그러냐 하면 구약의 희생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예배의 의식)은 완전한 희생을 가르키는 예언의 표식 (모형)이기 때문이다. 이 모형으로서의 희생을 분명히 이해하면 희생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은 구약의 희생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의 초림과 더불어 보다 높은 고차원의 시대가 도래하였는데 하나남의 백성들로 하여금 이에 대하여 준비하게 하였다.

최초의 복음 전파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켜 인류의 죄를 속하는 피를 가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선언하였다. 이 최초의 복음 전파자들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린 양이란 무엇을 가르키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용어를 정의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수 천년 후인 오늘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속죄의 희생을 통한 구속의 도리를 처음부터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본항에서는 구약의 희생의 기원과 역사와 본질과 효력에 대하여 취급하기로 하겠다.

1. 희생의 기원 (The Osigin of Sacrifice)

a. 하늘에서의 정해졌다.

속죄는 결코 하나님의 때 늦은 방편이 아니다. 인간이 타락하게 되자 하나님은 뜻밖의 일이라고 놀라서 그 대책을 세우기 위하여 성급히 만들어 낸 것이 속죄의 도리는 아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처음과 나중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 인간을 구속할 속죄의 도리를 마련하였다. 마치 어떤 기계 제작자가 기계를 만들기 전에 벌써 그의 머리 속에 설계를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속죄의 도리가 실제로 성취되기 이전에 그의 마음속에 속죄의 도리를 설계하셨다.

이와 같은 진리를 우리들은 성경을 통하여 찾아 볼 수 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13:8). 유월절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하기 몇일 전에 "미리 정해졌다"(출12:3,6) 이와 마찬가지로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니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벧전1:19,10) 그는 인간의 영생을 위하여 댓가를 지불하셨다. 그런데 이 영생은 "하나님의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다."

(딛1:2) 이와 같은 희생을 통하여 인간들이 의롭게 거룩하게 될 것이라고 "창세 전에" 선언되었다.(엡1:4).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비록 그들이 무지하여 악한 손을 들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으나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성취되었다고 하였다.

왜 그러냐 하면 그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준 바 되었기" 때문이다 (행2:23).

그러므로 기독교는 천 구백여 년 전에 비로소 시작된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목적이 역사적으로 나탄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b. 지상에서 제정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완성되기까지는 수많은 세월이 흘렀는데 이 동안에 죄인들은 어떻게 해야만 했는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며 또한 회개하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은혜를 의미하는 제도를 설정해 놓으셨다. 곧 이 제도는 동물의 희생을 가리킨다. 이 제도는 인간의 가장 오래된 제도 중에 하나이다.

창세기 3장에서 우리들은 동물을 살해한 최초의 기사를 읽어 볼 수 있다. 우리들의 최초의조상은 범죄한 후에 그들의 몸이 벗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즉 몸이 벗었다는 것은 양심이 벌거벗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외형적으로 나타내 준다. 그들은 벗은 몸을 나무 잎으로 가리우려고 하였으며 마음 속으로는 온갖 변명을 하려고 하였으나 쓸데 없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짐승을 잡아 그 가죽으로 그들의 벗은 몸을 가리워 주었다는 것을 읽어 볼 수 있다. 비록 여기에 기술되어 있는 내용은 매우 간단하지만 동물을 잡은 것은 확실히 하나의 희생의 제물이였고 또한 그 행위의 영적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면 구속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속죄의 도리를 마련해 주셨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우리들은 여기서 인간의 죄를 가리우기 위하여 무죄한 동물이 죽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양심을 가리워 주기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희생의 근본적 목적을 살펴 볼 수 있다.

성경의 맨 처음에 있는 창세기는 죄인의 죄를 가리우기 위하여 무죄한 짐승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고 있고 성경의 맨 마지막에 있는 요한 계시록은 인간의 죄를 사유하기 위하여 죽임을 당한 흠없는 어린 양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2. 희생의 본질 (The Nature Sacrifice)

이와 같은 희생의 근원적인 제도는 왜 인간들은 어느 시대 어느 것에서나 희생의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그 이유를 우리들에게 설명해 주고 있다. 비록 이바인의 희생은 본래의 모범에서 의곡되기는 하였지만 희생의 두 가지 근본 사상인 예배와 속죄에 근거를 두고 있다.

(1) 인간은 자기를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는 신의 능력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신의 이와 같은 권리를 인정하여 자기 자신을 신 앞에 복종시키는 표시로서 인간은 예물 또는 희생을 신 앞에 바친다.

(2) 그러나 때때 로 인간은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본능적으로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또한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 때 만일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다시 원만히 회복하기 위하여 어떤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자기는 신의 노염을 사서 멸망을 받게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된다. 동물을 잡아 그 피를 흘려 제사를 드림으로써 신의 노여움을 피하는 동시에 신의 은총을 받고저 하는 제사 행위는 고대인의 가장 뿌리 깊은 신앙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저들이 이와 같은 모든 것을 배웠을가?

바울은 저들이 하나님을 알던 때가 있었다고 말하였다.(롬1:21).

마치 타락한 인간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의 자죽이 남아 있는 것과 같이 이방인의 희생에도 하나님의 계시의 자죽이 남아 있다.

언어에 혼동이 있은 후에 (창11:1-9) 노아의 자손들은 산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때가지 우상 숭배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흩어질 때에 하나님에 대한 참다운 지식을 갖고 흩어졌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인간들은 온갖 죄를 범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매우 간략하게 롬 1:19-32은 기술해 주고 있다.

많은 민족은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일로부터 돌아섰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곧 다시 말하면 저들은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져 천체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는 대신에 그 천세를 하나님으로 섬기게 되었다.

또한 저들은 나무나 동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신 것을 깨닫는 대신에 도리어 이 자연물들을 하나님으로 섬기게 되었다. 그리고 저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신을 인간의 형상으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지게 되자 저들은 자연히 우상을 숭배하기에 이르렀다. 우상 숭배는 결코 지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방 종교의 근거가 되는 자연 숭베의 사상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의 정욕을 신으로 삼아 그 결과는 도덕적 부패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 타락하였을지라도 인간의 예배 의식을 살펴 볼 것 같으면 인간이 하나님을 보다 잘 알고 있던 때가 있었다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알 수 있다. 애굽이나 인도나 중국의 우상 숭배를 돌이켜 볼 곳 같으면 만물을 창조하신 영원한 영인 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거기서도 찾아볼 수 있다.

노아 홍수 이전에 온 세상이 도덕적 부패로 가득 차 있었던 것과 같이 영적 어두움이 온 민족 위에 뒤덮혔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舊세계의 모든 것을 깨끗이 청산하고 새로운 세계를 시작했던 것과 같이 아브라함을 사용하여 새로 시작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세워 하나님의 영광과 지식의 빛을 이 세상에 다시 비추어 줄 한 민족의 조상으로 삼았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다른 이방인 민족과는 구별되는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들의 도덕적 생활과 국민적 생활과 종교 생활을 다스릴 수 있는 율법을 주셨다.

이 여러 가지 율법 가운에 희생의 법 (The Laws of Sacrifice)이 포함되어 있다. (레1: - 7: 까지) 이 법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나가 올바르게 예배를 드리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예배 의식을 타락시켰으나 하나님께서는 다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순전한 예배 의식을 타락시켰으나 하나님께서는 다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순전한 예배 의식을 회복시켜 주었다.

모세의 희생의 제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창조주에게 대한 제일의 의무인 예배를 드리는 수단이었다. 저들이 이와 같은 희생의 제물을 드린 목적은 하나님과 저들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함이었다. 가령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여 저들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을 때에 저들은 속죄의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던 것이다.

또 자기 이웃에 대하여 죄를 범했을 때에는 속건제를 하나님께 드렸다.(레 6:1-7)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다시 원만하게 회복하고 나서 저들은 자기 자신을 다시 헌신하기 위하여 번제를 드렷다 (레1장)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아 다시 용납되어 하나님과 행복하고 즐거운 교제를 회복하고 나서 그는 화목제를 드렸다. (레3장)

이와 같은 피의 제사의 목적은 온전한 희생의 제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의 죽음은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는 대속의 죽음이다.(고후5:21)

여호와께서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셨다 (사53:10). 그는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막대한 빚을 갚으셨다. 그리고 또한 그는 우리의 죄악된 과겨를 깨끗이 씻어 주셨다. 그는 우리들의 번제물이시다. 왜 그러냐 하면 그는 우리를 위하여 온전히 생명을 바쳤기 때문이다.(히9:14,엡5:2).

그는 우리들의 화목제가 되신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만들기 위함에서 였다. (요6:53-56,레7:15,

20 참조).

3. 희생의 효력

어느 정도까지 구약의 희생을 효력을 발생하였는가? 구약의 희생은 실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며 깨끗이 씻을 수 있었는가? 이와 같은 희생의 제물을 드리는 사람에게는 어떤 이익이 있었는가? 이와 같은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왜 그러냐하면 레위인의 희생과 그리스도의 희생을 비교하고 대조하여 봄으로써 그리스도의 희생이 마지막 희생이 된다는 점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히브리서는 잘 다르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핍박을 받고 실망 낙담하여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 행위를 다시 하고저하는 히브리 교인들에게 권면의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성전의 화려한 예배 의식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같이 보일지라도 저들이 믿는 실재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 교인들의 잘못된 생각을 돌리기 위하여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하여 새 언약이 옛 언약 보다 영원한 것이며 완전한 것이라고 하였다. 제사장과 동물의 희생이 있는 성전의 예배 의식으로 돌아 가는 것은 그림자를 잡기 위하여 실체를 저버리는 행위요, 불완전한 것을 붙잡기 위하여 완전한 것을 버리는 행위에 불과하다. 히브리서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논한 것을 볼 것 같으면 옛 언약도 그 설정 목적에 있어서 좋은 것이나 새 언약은 보다 좋은 것이라고 하였다.

(a) 구약의 희생의 좋은 것이었다.

만일 구약의 희생이 좋치 않은 것이였다면 하나님께서 이 제도를 정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구약의 희생도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는 일정한 목적을 성취하였다는 점에 있어서 좋은 것이었다. 즉 다시 말하면 여호와 백성들이 여호와께 범죄한 후 다시 은혜의 상태로 돌아가 그와 화목을 누리고 원만한 교제를 갖게하는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희생의 모든 조건을 수행하는 한에 있어서 그들은 약속을 의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사장이 그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숙죄한 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레4:26).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제물들을 하나님께 바칠 때에 두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첫째, 회개 자체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의 죄가 제거되었다는 것을 지시해 줄 수 있는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히9:22). 그러나 한편 저들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마음의 올바른 자세들 갖추지 않고 드리는 예배 의식은 하나의 무가치한 형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희생의 제사 행위는 즉 다시 말하면 상한 심령의 희생에 대한 외적 표현이어야만 한다 (시26:6,50:12-14,4:5,5:16,잠21:3,암5:21:24,미 6:6-8,사1:11-17 참조). "악인의 제사 (피의 희생)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 고 솔로몬은 선언하였다.(잠15:8). 영감을 받은 성경 기자들은 올바른 마음의 자세를 취하지 않고 드리는 의식의 행위는 하나님게서 받아 드리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 놓았다.

(b) 신약의 희생은 보다 좋은 것이다.

동물을 잡아 드리는 희생의 제사를 하나님게서 정하신 것이라고 시인하면서도 개화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동물의 희생이 속죄의 완전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1. 비이성적이고 무책임한 동물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과는 크게 다르다. 동물들은 이지적으로 또는 자진하여 희생의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 희생을 드리는 자와 희생의 제물 사이에는 하등의 교제도 없었다. 동물의 희생이 인간의 영혼에 중요성을 줄 수도 없고 또한 속 사라에게 영적 능력을 줄 수도 없다는 것은 매우 명백하다. 비이성적인 동물의 피가 인간의 영적 구속에 하등의 영향도 줄 수는 없다. 완전한 인간의 생명을 희생의 제물고 드림으로써만 인간을 영적으로 구속할 수 있는 것이다. 영감을 받은 성경 기자는 구약의 신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10:4). 기껏해야 동물의 희생은 보다 온전한 속죄의 수단의 구실을 했던 것이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죄를 깨닫게 되었다.(롬3:20).

그리고 이와 같은 희갱의 제물은 다만 하나님의 진노를 이르키게 할 죄를 무력하개 만드는데 불과하였다.

2. 동물의 희생을 가르켜 "육체의 예법"이라고 하였다. 곧 의식은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하고 죄의 외적 행위만을 사하였다. (히9:10). 그러나 그속에 영적 가치를 지니고 있지는 못하였다. "염소와 황소의피와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켜 하여 거룩케 하거든"(히9:13). 즉 다시 말하면 동물의 희생은 이스라엘 회중으로부터 한 이스라엘 사람을 격리케 하는 외적 더러움을 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령 예를 들면 만일 어떤 이스라엘 사람이 육적으로 자기 자신을 더럽게 하였을 것 같으면 그는 다시 자기 자신을 깨끗게 하고 제물을 바칠 때까지 그는 이스라엘 회중으로부터 격리되었던 것이다. (레5:1-6).

또 만일 그가 물질적으로 자기의 이웃에게 해를 입혔을 것 같으면 속건죄를 드릴 때까지 그는 저주 아래 있었던 것이다 (레6:1-7).첫째 경우에 있어서 희생은 육체의 더러움은 씻을 수 있었으나 영혼을 깨끗게 할 수 없었다. 둘째 경우에 있어서 희생은 외적 행위는 속할 수 있었으나 마음의 변화를 이르키지는 못했다. 다윗 자신도 동물의 희새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영적 소생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시51:6-10).

3. 동물의 희생을 반복해서 끊임없이 드려 왔다는 사실 부터가 이 희생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동물의 희생이 희생을 드리는 자를 완전케 할 수 없었다 (히10:1-2). 즉 다시 말하면 이 동물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수립하는 인격을 함양할 수 없다. 이 동물의 희생으로 새로운 삶의 발단이 될 수 있는 영적 변화르이 체험을 단번에 할 수는 도저히 없다.

(히10:10).

4. 동물의 희생을 드린 제사장들도 완전치 못한 존재들이였다. 그들이 불완전한 임무를 행하고 있었다는 점을 그들이 언제나 마음대로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을 미루어 보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저들은 예배자들을 온전히 직접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히9:8) 제사장은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영적 체험을 갖게 할 희생을 갖고 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섬기는 자의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었다. (히9:9).

만일 어떤 영적 이스라엘 사람이 구속에 대한 자기의 소망에 대하여 질문을 할 것 같으면 그는 동물의 불완전한 희생을 통하여 그 문제의 해결은 미래에 가능하다는 것과 완전한 구속은 메시야의 출현과 더불어 도래할 완전한 질서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참으로 예레미야 선지는 이와 같은 계시를 받았던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는 그의 백성들이 율법의 언약을 언제까지나 늘 지킬 수 없으리라고 실망하였다. 이 백성들의 죄는 철필로 기록되었다.(렘17:1)

또한 그들이 마음은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였다. (17:9) . 구스인이 그 피부를 변할 수 없는 것과 같이 그들은 그들의 마음을 돌리킬 수 없었으며 (렘13:23)

또한 그들이 마음이 너무나 타락하고 냉담해져서 그들이 아무리 희생의 재물을 드려도 소용이 없게 되었다 (렘6:20). 참으로 그들은 희생의 참다운 목적으로 잊고 있었다. 인간의 안목으로 바라볼 때에 그들은 소망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시대가 임할 때에 백성들의 마음이 변하여 죄의 용서함을 받을 것이라고 예레미야를 위로하였다. (렘31:31-34).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였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우리들은 히10:17,18 속에서 조금 전에 인용한 예레미야의 예언의 영감된 해석을 읽어 볼 수 있다. 즉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완전한 희생의 수단에 완전한 속죄가 성취 되었음으로 동물을 잡아 드리는 희생은 필요 없게 되었다. (히10:6-10 참조).

이 완전한 희생을 통하여 인간은 단 번에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체험을 갖게 되었다. 율법의 희새으로 할 수 없는 것을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에 의하여 성취하였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펀에 앉으사." (히10:11,12).

5. 생각해 볼 문제가 하나 더 남아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업이 완성되기 전에도 사람들이 의롭다함을 받은것은 확실하다. 아브라함은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받았고 (롬4:23). 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다. (마8:11,눅16: 22). 모세는 영광을 받았고 (눅9:30,31). 에녹과 엘리야는 승천하였다.

이와 같은 영적 상태에 도달하기에 합당한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면 동물의 희생은 불완전하고 그리스도의 희생만이 완전한 희생이라고 인정하고 나면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어떤 것에 근거하여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었을가?

오늘날 인간들이 성취된 희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과 같이 저들은 미래의 희생을 미리 내다보고 믿었기 때무에 구원을 받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진리에 대한 논증을 히9:15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롬3:25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소급하여 효력을 발생하였다. 즉 다시 말하면 그의 죽음은 과거와 관련하여 효력을 나타 냈다.

히9:15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해 주고 있다. 옛 언약은 완전한 속죄를 주기에는 무력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옛 언약을 폐하시고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죽으심으로 새 언약을 주셨다. 즉 다시 말하면 하나님게서 구약 시대의 신자들을 의로운 것으로 여겼을 때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미리 예상하시고 하신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상에서 과거의 모든 빛을 갚기 위하여 댓가를 지불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옛 언약으로 도저히 불가능하지만 새 언약이 오면 오든 것이 가능케 될 것을 예상하시고 구약의 성도들을 의롭다고 칭하셨다.

구약 시대의 신자들도 신약 시대의 신자들이 누리고 잇는 특권과 꼭 같은 것을 누릴 수 있었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그 대답은 부정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구약 시대에는 회개와 믿음에 따르는 성령의 영원한 선물이 없었다. (요7:39). 또한 저들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영생의 완전한 진리를 누리지 못했던 것이다 (딤후1:10) 요컨대 저들은 저들이 살고 있던 시대의 불완전으로 말미암아 제한을 받고 있었다. 기껏 해야 저들은 장차 임할 선한 것을 미리 맛보 는데 불과했다.

II. 신약의 속죄 (Atonement in the New Testament)

1. 속죄의 사실 (The Fact of the Atonement)

영원 전부터 예정되었고 또한 구약의 예배 의식 속에 모형적으로 예포되어 있는 속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 갔을 대에 역사적으로 완성되었다. 곧 이 때에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은 이루워졌다. "다 이루었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하여 구약의 예언의 성취를 인용해 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어떤 다른 사람보다도 더 면밀하게 잘 기술 하였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단히 중요한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의 돌발적인 비극이라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공의 빛나는 소망을 갖고 인생을 출발하였으나 자기도 예측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피할 수 조차 없는 파멸로 이끄는 착잡한 환경 속에 빠지고 말았다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복음서의 증언에 의할 것 같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처음부터 고난과 죽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의 일부분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인자가 고난을 받아야겠다고 선언한 것을 보아 그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신의 사명이지 결코 미리 예측할 수 없었던 불가피한 운명은 아니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이런 음성을 들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말씀 속에는 두 가지 예언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는 메시야의 아들의 신분과 신성을 선언한 것이요 (시2:7) 둘째는, 주의 종으로서의 메시야의 사명을 선언하고 있다. (사42:1). 사42:1에 언급되어 있는 종은 이사야 53 장에 묘사되어 있는 고난은 그의 소명의 일부분임을 잘 의식하고 계셨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을 때에 사탄의 제안을 거부함으로써 벌써 그는 안일하고 인기있는 길보다도 고난과 역경의 어려운 길을 택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로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서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부터가 인간의 죄의 짐을 짊어지시기 위하여 죄악된 인간들과 한가지로 행도하셨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사야 53장에 의할 것 같으면 주의종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신 행동은 우리들의 비참을 친히 담당코저 하는 사상의 위대한 행위하고 할 수 있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그는 죄인으로 헤아림으로 받았는데 이와 같은 의미에서 그의 속죄 사업은 시작되었다.

주님께서는 그의 공생애를 통해서 여러 번 그의 죽음이 닥아 오고 있다는 사실을 은근히 비유를 들어서 암시하셨다. (마5:10-12,23:37,막9:12,13,3:20-30,3:6, 2:19). 그러나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그는 고난을 받고 죽은 것을 그의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후로 그는 그의 제자들의 마음 속에 그가 고난을 받게 될 것을 깊이 명심시켰다. 이와 같이 미리 경고하여 준 이유는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 갈 때에 그의 제자들의 믿음에 파탄을 가져오지 않게 하기 위함이 이었다 (막8:31,9:31,10:32).

그는 또한 그의 제자들에게 그의 죽음을 뜻하지 않은 불행한 비극으로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대속의 목적을 지닌 죽음으로 인식시키기 위함에서였다. 인자는 많은 사람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그의 생명을 주려고 세상에 왔던 것이다.

최후의 마찬시에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의 죽음으로 그의 공생애에 있어서 최고의 기념해 주실 것을 당부하였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는 것과 같이 예수께서도 인류의 죄를 사하시는 것을 기념할만한 의식을 정하시었다.

그때까지 아직 메시야와 하늘 나라에 대하여 유대교의 사고 방식의 영향을 받고 있던 그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에야 비로소 저들은 깨닫게 되었다. 그후부터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속죄의 수단으로 미리 예정하셨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되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증거하였다.

2. 속죄의 필요성 (The Necessity for Atonement)

다음과 같은 두가지 사실로 말미암아 속죄의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다. 즉 하나님의 성결과 인간의 죄악성이나,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성결의 반작용은 진노로써 나타났는데 이 진노를 막는데는 속죄의 수단이 요청되었다.

그러므로 앞으로 논할 요지는 성결과 죄악성과 진노와 속죄 등이다.

(a) 성 결 (Holiness)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성결하다. 즉 그는 인격면에서나 행위면에 있어서 의로우시다. 그의 인격의 이와 같은 속성은 그와 그의 피조물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시33:5)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시89:14).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세계를 그의 일정한 법을 따라서 창조하셨다.그의 법은 인간의 인격의 기초를 이룬다. 그리고 그의 율법이 돌비에 새겨지기 전에 이미 인간의 마음 속에 새겨져 있었다. (롬2:14,15). 이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창조주와 인격적 관계를 맺게 하여 주며 또한 인간의 책임의 기초가 된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17:28). 이 말씀은 일반적으로 인류를 두고 한 말이다. 이 성경 구절을 볼 것 같으면 죄가 하나님과 인간과의 단절시키며 회개치 않는 죄인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영원히 추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가리켜 "둘째 사망"이라고 한다.

언약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 즉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의로우신 분은 오직 의를 행하는 사람과 사귈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암3:3) 하나님과의 교제를 맺고 있다는 것은 생명을 의미한다. 처음서부터 끝가지 성경은 이 진리 즉 순종과 생명은 일치한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다. (창2:17,계22:14).

(b) 죄악성 (Sinfulness)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 관계를 단절시킨다. 마치 부정이 부부간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악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파괴시킨다 (렘3:20).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사59:2).

파괴된 율법을 다시 고치고 하나님과 인간과의 단절된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 속죄의 기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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