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6-29 21:01
(2)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행위론
인쇄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7,899  

바울이 보는 율법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규범으로서의 율법(롬 2:14, 15)

도덕적 규범으로서의 율법은 성문율(成文律)을 가진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적용되는데, 이 법은 그들의 양심과 마음에 기록된 본성 율법(the law of nature)이다. 이런 의미에서 규범으로서의 율법을 갖지 않은 사람은 없게 된다.


- 율법은 정죄한다(롬 3:19)

이방인이 본성의 율법을 어기든 유대인이 받은 바 모세의 율법을 어기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이를 온전히 지키지 못할 때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게 되며, 율법없이 범죄한 자나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나 똑같이 심판 아래 있게 되는 것이다(롬 2:12).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은 자는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니요 행하는 자라야 하기에(롬 2:13) 육체에 거하는 자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기는 불가능하다(롬 3:20).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 깨끗하게는 못하는데 이는 마치 거울이 더러운 곳을 보여주긴 하되 깨끗이 씻는 역할을 감당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한다(롬 4:15).

율법이 그 아래 있는 자들에게 의를 이루게 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를 더하게 하며(롬 5:20) 마침내는 하나님의 진노를 이루게 한다.


- 율법은 거룩하고 선한 것이다(롬 7:12).

죄를 드러내고 죄를 죄 되게 하는 율법이 죄일 수 없고(롬 7:7), 죄가 있었기에 더해진 것으로(갈 3:19) 율법은 그 본성상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것이다(롬 7:16).


- 율법은 생명을 줄 수는 없으나 생명의 길로 인도한다(갈 3:24).

율법이 생명을 줄 수 있었다면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주어질 터이나(갈 3:21) 율법은 죄 아래 가둘 뿐(갈 3:22) 죄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다. 인간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죄 아래 가두고, 정죄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 밖에 없도록 한 율법은 그 자체가 생명을 주진 못해도 생명의 길로 죄인을 인도한다(갈 3:24).


- 율법의 완성(롬 8:4).

우리를 향한 율법의 요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고,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롬 10:4). 죄인을 가두는 죄와 사망의 법(롬 8:2)에서 우리를 해방하시려고 예수께서 대신 죄를 받으시고 율법의 저주 아래 십자가에 달리심으로(갈 3:13) 우리를 율법의 저주 아래서 속량하시고 구원을 성취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고(롬 8:1) 그와 연합함으로 죄 아래가 아니라 은혜 아래 있게 된다(롬 6:15).


- 율법은 신자들의 생활 규범으로서 존속한다(롬 13:8 10).

반율법주의자들은 "의문(儀文)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고후 3:6)이란 표어 밑에서 율법의 효용성을 부정한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으므로 그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율법은 필요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원은 미래의 죄까지 용서한 것이므로 신자의 회개와 기도는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반율법주의자들의 이론과는 달리 율법은 신자들의 생활 규범으로서 그 가치를 계속해서 간직하는 것이다.

신자들에게 마땅히 행할 바 규범을 보여주며 이에 이르지 못했을 경우 경건한 슬픔을 일으켜 이를 하나님께 고백케하여 사죄의 확신과 위로를 받도록 하는데 유용한 것이 율법이다. 구원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신자의 새로운 영적 생활의 지침으로서 율법은 필요한데 에베소서 6장 2절에 밝힌 것처럼 여전히 율법은 신자생활에 규범이 된다.

이 생활 규범들은 사랑 안에서 완성되며 사랑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율법은 정죄하는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구원 얻은 자의 생활을 온전케 하며 선행을 위한 삶의 지침이 되는 것이다(딤후 3:16, 17).


② 야고보의 견해

야고보는 그의 편지에서 "법"이란 말을 10회 사용하고 있는데 이 말은 어느 경우에나 도덕법과 관련이 되어 있다. 1장 25절에서 율법은 신자생활의 지침으로 복음적 메시지를 가리키는데 이는 신자들이 듣고 행해야 할 도(Word)이며 구약의 율법과 대조되는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이다. 2장 8절 이하에 나타나는 법은 모세의 율법으로 계명을 가리킨다.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는데(10절) 최고의 법(the royal law)인 사랑으로 행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4장 11절 이하에 쓰인 율법은 준행해야 할 온전한 법으로서 신자생활에 적용되는 자유케 하는 율법이다.


야고보의 율법관은 예수님의 견해(마 22:37 40)나 바울의 견해(갈 3:10; 롬 13:8 10)와 일치하며 구원 얻은 자가 준행해야할 최고의 법으로 인식하고 있다.


2) 은혜관

① 바울의 견해

- 예수님과 은혜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란 말을 종종 쓰는데(롬 16:20, 고전 16:23, 갈 6:18 등), 이 예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는 기초로 이해하고 있다. 축복의 순서에서도 하나님의 사랑 앞에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함으로 은혜가 사랑을 실감케 하는 선행적인 것으로 그 차례를 정하고 있다.


- 하나님의 은혜

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함을 강조하며(롬 15:15, 고전 1:3, 3:10, 15:10 등),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이 값없이 선물로 주어지는 사실을 뜻하고 있다.

  

- 성령의 은혜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신자의 마음에 전달된다고 본다.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은혜는 성령의 임재와 동일시된다(고전 12:4 11, 엡 4:7 13 등). 성령이 임하는 것은 예수님도 언급하셨다(행 1:8).


의인은 선물로서 은혜로 주어지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속죄(롬 5:9)와 이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경험 즉 믿음을 조건으로 한다(엡 2:8) 바울은 은혜와 율법을 대립시켜 말하고 있다. 율법의 행위는 은혜로 구원받는 일에 도움 되지 못하고(롬 11:6) 은혜는 죄 많은 곳에 풍성하여(롬 5:20) 행위가 할 수 없는 구원을 가능케 한다. 그리스도는 율법이 할 수 없던 일 즉 구원을 이루시는 분으로서 율법을 완성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것이다(롬 10:4).


② 야고보의 견해

야고보는 그의 글 가운데 한 절(약 4:6)에서만 은혜란 말을 사용한다. 야고보는 구원과 관련된 개념보다는 일반적인 뜻으로 gratia에 해당되는 의미로서 "총애" 또는 "호의"를 가리키고 있다. 바울이 구원을 논할 때 은혜와 행위를 대조하듯 야고보는 믿음과 행위를 대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야고보의 행위론(行爲論)은 바울의 행위와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믿음에 관한 뜻매김도 두 사람의 입장이 똑같지 않다. 겉보기에 서로 어긋나는 듯한 바울과 야고보의 이해를 통해 믿음과 행함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밝히고 그 조화됨을 규명하려 한다.


3) 바울(믿음)과 야고보(행함)의 조화

① 겉보기의 부조화

같은 사건의 해석이 서로 다를 경우, 특별히 모순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경우에는 어느 것이 옳은가하는 선택의 문제가 등장한다.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한 가지 사실을 두고 바울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롬 3:28)고 하는 반면, 야고보는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 만이 아니라(약 2:24)고 함으로써 상반되는 진리를 진술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믿음으로만(sola fide) 구원얻는다는 이신득구(以信得救)의 교리에 어긋나는 선언으로 간주되어 야고보서는 정경형성의 과정에서도 많은 논란을 받았고 칠의서(七疑書:Antilegomena)로 분류되어 정경성(正經性)을 인정받는데 상당한 시일이 필요했다.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의 내용 때문에 종교개혁의 기수인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의 서신(eine strohene Epistel, an epistle of straw)"이라고 혹평했다.


야고보의 교훈은 다른 성경의 교훈 특히 바울의 사상과 모순되는 것인가를 규명해 보자. 야고보와 바울은 구약의 아브라함을 논할 때도 모순되는 듯한 기록을 보인다. 아브라함의 의인(義認 창 15:6)을 믿음의 결과라고 바울이 말할 때(롬 4:3), 야고보는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라고(약 2:21) 진술한다. 튀빙겐 학파에서는 이 사실을 들어 성경의 영감설을 부정하고 성경은 인간적 모순과 대립으로 구성되어 헤겔의 변증법 논리인 정.반.합 범주로 진행된다는 극단론을 펴는 것이다.


② 저작 동기에서 표출되는 차이점

바울과 야고보의 표면적 부조화는 저작 당시의 믿음과 행위에 대한 그릇된 견해를 바로잡기 위한 독립적 견해를 발표할 때 한쪽을 강조한데서 유래된다. 즉 바울은 복음이 세계로 전파될 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그의 복음(롬 2:16)을 혼잡케 하는 다른 복음(갈 1:6)의 위험을 경계한다. 이미 살펴본 대로 초대교회의 이단 사상인 율법주의를 배격하는 입장에서 행위의 무가치성과 믿음의 효용성을 고조함이 바울의 사상 체계를 구성한다.


반면 야고보는 실천적 도덕 생활이 무시되는 당시의 폐습을 시정코자 야고보서를 기록한데서 행함의 필요성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당시 신자들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교리를 강조하면서 생활할 때 도덕조차 무시하며 사랑은 입에 머물고(약 2:14) 피차 비방하며(4:11 12) 원망하였다(5:9).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는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율법을 범하는 유대인의 폐습(롬 2:23), 즉 신앙과 행위가 유리되는 경향을 경계하기 위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격렬한 논조로 야고보서를 집필하여 기독교 윤리를 확립하려 하는 데서 오는 이른바 저작 동기에서 바울과 겉보기의 차이를 가져오는 것이다.


③ 믿음의 조화 문제

의로 여기시는 하나님의 행위에서 "여기신다(Logidzomai; reckon)"는 법정 용어로서 하나님께서 재판관의 입장에서 행하시는 선언을 의미한다. 신약에서 41회 쓰여지는 이 용어가 바울에 의해 35회 사용되는 가운데 믿음이 의로 인정받는 일에 관해 주로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의로 인정하시는 믿음은 세 단계로 구별할 수 있다. 즉 사실의 인식,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임 및 신뢰와 복종의 단계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믿음 즉 중심으로 거듭나고 그리스도에 복종하여 그와 일체되는 요소를 바울은 믿음(갈 2:16 21)으로 보고 있다. 그러기에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교리로 굳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살아있는 믿음이다(갈 5:6).


한편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믿음은 넓은 의미의 믿음으로 단지 교리를 승인하고 교회에 출석하여 교인생활을 영위해 가는 외형적 믿음을 말하고 있다. 야고보서 2장 14절의 그 믿음은 바울의 믿음과 같지 않으니 유일신관을 고백하고도(약 2:19) 참된 행함이 없는 불신앙의 믿음이다. 고백과 의식 수준의 `그 믿음'은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 살아있는 믿음과 구별된다. 여기에는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바울의 믿음은 행위를 수반하는 야고보의 믿음과 같은 것이다.


- 행함의 조화 문제

`행함'에도 서로 다른 두 가지로 뜻을 매길 수 있다.

바울이 말하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는 행위(롬 3:28)는 믿음에서 동떨어진 도덕적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이런 류의 행위로 세속적 선은 행할 수 있을 지언정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선을 행할 수가 없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성경은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2)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이란 믿음에서 출발된 행위이며(약 2:5, 22 24) 믿음에 기초한 행위이다(약 2:21 26). 야고보의 행함은 믿음을 입증하는 필연적 결과로서의 행위이지 바울의 뜻하는 도덕적 또는 단순한 선행으로서의 행함이 아니다.


- 내면적 조화

겉보기에 바울은 믿음만을, 야고보는 행위만을 강조하여 그 주장하는 점이 다르고 다른 한쪽은 무시한 것으로 오해받기 쉬우나 사실 두 사도의 견해는 원칙적으로 일치한다. 바울 사도는 믿음을 강조하면서 선한 행위가 올바른 믿음에 따라야할 것을 힘주어 교훈하고 있다(롬 2:6 10, 고후 9:8, 엡 2:10, 살전 2:12, 살후 2:17, 딤전 6:18, 딛 3:8).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도 믿음을 앞세우는 복음적 신앙체계를 가지고 있으며(약 1:18, 21; 2:1, 22 24; 4:5; 5:7) 믿음을 떠난 단순한 행위 즉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약 2:5)


두 사도는 믿음과 행함에 있어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며, 행함은 믿음의 산물로서 필연적인 것이라는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즉 행함으로 믿음은 증명되고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르는 것이니 이 교리를 두 사도의 입을 통해 진술케 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약 2:26). 이제까지의 연구를 통해 두 사도의 진술은 다 같이 진리이며 모순이 없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뿐만 아니라 두 사도의 저작에 나타난 그들의 사상은 문학상의 비슷한 점까지 보여주고 있다.


- 야고보서의 가치

이신득의의 복음에 어긋나는 율법적 교훈으로 취급되어 그 가치가 과소평가되었던 야고보서는 교회가 타락하고 신앙과 행위가 괴리될 때 매우 적절한 처방으로서 바리새적 죽은 신앙과 교리에 활력을 불어넣게 할 것이다.


현대의 광신적 신비주의자들과 사랑이 결여된 고답적 경건주의자들에게 신앙의 실천적 교훈은 매우 필요적절한 교훈이 될 것이다. 야고보서의 교훈이 오늘날 교회를 통해 사회적으로 실행될 때 노사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윤리와 도덕이 확립되어 형제 사랑의 정신이 구현됨으로 기독교 정신이 높이 올려질 것이다.


맺는 말

유한한 인간이 어떻게 구원에 이를 수 있는가 하는 대명제를 중요하게 취급하는 철학과 수많은 종교에서 사변과 수양을 통해 자력구원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데 반해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소개한다.


그러나 역사상 기독교 내부에서 일어난 극단적, 이단적 주장들은 인간 행위의 유효성을 가미시켜 기독교 복음의 본질을 변질시켰고 자력구원의 저질적 종교로 기독교를 격하시켰다.


한편 최고의 윤리적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망각하고 은혜로 받는 구원을 강조하는 나머지 인간행위의 책임성을 도외시하는 폐단도 없지 않았다. 이러한 양극의 주장을 역사적으로 살펴본 이 논문은 성서적으로 이를 조명하여 행위와 믿음, 즉 율법과 은혜는 대립.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으로 조화되는 기독교 진리의 양면임을 구명하였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주시지만, 구원받은 믿음의 증거는 행위로 나타난다. 행위가 구원에 있어 유효한 수단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자의 행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마 5:16) 방편이며 마지막 날 심판대에서 상 받는 표준이 될 것이다(계 22:12, 고후 510). 입신 후의 행위를 가볍게 보고 마지막 날의 논공행상을 부정하는 일은 하나님의 속성인 그의 의로우심을 부인하는 불경이 된다(히 6:10 12).


율법을 지키되 두려움 속에서 저주를 면하기 위하여 할 것이 아니라(갈 3:10), 은혜로 구원받은 감격에서 자원하여 사랑으로 이루어 갈 것이다(롬 13:8 10).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은 신자는 항상 그리고 더욱 주의 일에 힘씀으로써 그 수고를 기억하시는 의로우신 재판장 예수 그리스도께 많은 상급과 칭찬을 받도록 해야 할 것이다(고전 15:58).



 
 

일반형 뉴스형 사진형 Total 3,387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2667 [1]듣기 싫어하는 설교 웹섬김이 06-17 7177
2666 [2] 듣기 싫어하는 설교 웹섬김이 06-17 7698
2665 [3] 듣기 싫어하는 설교 웹섬김이 06-17 8483
2664 [4] 듣기 싫어하는 설교 웹섬김이 06-17 7704
2663 [5] 듣기 싫어하는 설교 웹섬김이 06-17 7917
2662 [6] 듣기 싫어하는 설교 웹섬김이 06-17 8722
2661 [7] 듣기 싫어하는 설교 웹섬김이 06-17 9381
2660 기독교 시각으로 본 로마제국의 멸망 웹섬김이 06-29 11029
2659 목회자의 안식년 성경적인가 웹섬김이 06-29 10044
2658 (1)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행위론 웹섬김이 06-29 8558
2657 (2)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행위론 웹섬김이 06-29 7900
2656 (1)속죄론 웹섬김이 06-29 7632
2655 (2)속죄론 웹섬김이 06-29 12748
2654 (3)속죄론 웹섬김이 06-29 7528
2653 창세전의 택함이란 웹섬김이 06-29 8074
2652 사사 입다가 딸을 번제로 드린 의미는? 웹섬김이 06-29 9796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