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6-29 20:59
(1)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행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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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8,558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행위론


- 율법과 은혜는 대립적 의미인가 -


성기호 박사


십자가의 도(道)는 구원의 도이다. 그러나 이 구원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수많은 이론과 논쟁이 쏟아져 나와 교회를 혼란케 하고, 그 결과 이단이 생겨나고 교파가 갈라지는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이번 논쟁에서는 구원에 대한 하고많은 주장과 주의(主義) 가운데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는 두 가지 논제(論題)를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 즉 구원에 율법을 준수하는 행위가 유효한 것인가? 또는 구원이 행위를 떠나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거져 주어지는 것인가에 중점을 두고 다루려 한다. 율법과 은혜를 두고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던 이단에 대한 역사적 살핌과 더불어 가톨릭과 신교의 입장을 살펴보고, 뒤이어 올바른 구원관 확립에 이해를 돕기 위해 율법과 은혜에 대해 뚜렷한 학문적 정의를 내리겠다. 끝으로 구원의 양면성을 바울(믿음)과 야고보(행함)의 조화를 규명함으로써 믿음과 행위 즉 은혜와 율법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다루려 한다.


1. 율법과 은혜의 대립

십자가로 구원이 완성된(요 19:30) 다음에 일어난 구원 방법론에 대한 잘못된 주장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율법주의(Legalism)

율법을 지키고 계명을 준수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특히 할례를 받아야 이방인도 구원에 이른다는 주장이 사도시대에 이미 존재했다.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이방 기독교인이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지는 것을 말하므로(갈 5:3) 그리스도의 은혜와 약속을 폐하는 행위가 된다.


이 문제는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기 시작하자 고개를 들었다. 사도행전 10장과 11장에서 이미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지만 율법준수 문제가 제기된 것은 이방인의 사도라고 스스로 여기는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의 결과로 이방인 교회가 설립되고 개종자가 많아지자, 율법준수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율법주의자가 유대로부터 이르러 자기들의 주장을 가르침으로써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 대립은 공동교회(The Catholic church)와 복음적 교회(The Evangelical church), 유대계 신자와 이방인 신자, 베드로파와 바울파의 대립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모인 회의가 예루살렘 총회로서 여기에서 "믿음으로만"(sola fide) 구원받는다는 기독교의 기본교리를 결정하였다. 극단적인 유대 기독교는 그 율법주의적 요소를 더하여 에비온파(The Ebionites)로 발전하고, 극단적 이방인 기독교는 노스틱주의(Gnosticism)로 변모하게 되었다.


2) 에비온파(The Ebionites)

에비온파는 사도 바울을 유대교의 입장에서 반대하는 바리새적 단체로서 초대교회에 존재하던 율법주의적 이단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할례를 받아야하고 모세의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님도 율법을 완전히 지킴으로서 메시야로 택함 받았다고 말하며 그의 신성을 부정하고 있다. 에비온파는 이방교회가 왕성해짐에 따라 차츰 그 영향력을 잃어가다가 5세기경 사라진 이단이다.


3) 노스틱 주의(Gnosticism)

성경에 직접적인 인용은 없으나 디모데에 보낸 바울의 첫째 편지에서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고 암시적으로 나타나 있다. 사도 시대부터 시작된 이 그릇된 종파는 2세기 경에 전성하여 시리아로부터 골(Gaul)에 이르기까지 교회를 어지럽히던 중요한 이단 사상이다.


노스틱주의는 그 이름에서 보는 것처럼 ‘지식’을 중요시 하며 신적 계시(神的 啓示)와 사색을 통해 얻어지는 이 초자연적 지식에 의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이원론적 사상 체계를 가지고 물질과 정신의 대립에서 죄와 고통이 유래하며, 육은 악한 것으로 보아 몸의 부활이나 그리스도의 수육(受肉.Incarnation)을 부정함으로 가현설(假現說.Docetism)을 말한다. 정신계를 지배하는 선신(善神)으로부터 파견된 최고의 aeon(신적 능력이 충만한 존재)이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가 환상적 몸을 입고 땅에 왔지만 육을 취하지는 않았다하여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한다.


영혼이 물질[肉]적 속박을 벗어나 빛의 나라에서 영혼 본래의 모습을 찾는 것이 구원인데 이는 금욕과 신비스런 의식을 통해 이어지는 초자연적 지식(Gnosis)에 의해 달성된다고 한 바울을 최고의 사도로 지지하며 케린터스(Cerinthus)와 말시온(Marcion)등 대표적 이단자를 배출했다.


노스틱 사상으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올바른 교리 진술의 필요성을 느껴 신앙의 표준(Regula Fidei)을 설정하였고 교회의 보편성(catholicity)을 확립하여 복음을 세계로 수출하는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유대교적 율법주의와 구별되는 바울의 기독교 사상을 강조하여 복음의 자유케 함을 반율법적 방종으로 대체시킨 극단적 거짓 이방인 기독교의 탈을 쓰게 되었다.


4) 반 율법주의(antinomianism)

율법주의와 반대되는 입장이 반 율법주의인데 은혜로 구원받았기에 무슨 행동을 해도 관계가 없다는 탈율법적 극단의 복음주의 운동이다.


노스틱주의의 영향을 받은 말시온은 율법과 복음을 분리하여 구약의 하나님은 창조주이나 엄격한 공의의 신으로 완전치 못했고 이스라엘 민족신(民族神)에 불과하다고 본다. 신약은 복음이며 신약의 신은 선한 하나님인데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계시했으며 이 선한 신)을 믿음으로 율법에서 벗어나 복음에 서게 되며 구원의 길이 전개된다고 말한다. 말시온은 바울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참 이해한 사도로 받아들이고 신약 정경을 바울의 10서신(목회서신 제외)과 누가복음으로 제한하였다. 말시온 운동은 교회로 하여금 정경(正經)을 형성토록 자극했으며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이 결합된 창조주이며 구속주라는 사상을 파악케 했다.


5) 갈라디아인 주의(Galatianism)

갈라디아인 주의는 갈라디아 지방에 널리 퍼져 있던 사상이었으므로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구원의 시작과 보존에는 은혜와 율법이 다같이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앞서 살펴본 율법주의는 율법의 준수가 구원의 요건이라고 보며, 반율법주의는 믿음으로 구원받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행위는 필요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갈라디아인 주의는 이 두 가지를 다 주장한다. 즉 구원은 행위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지만, 구원받은 다음에는 율법을 순종해서 지켜야 한다는 사상이다. 다시 말하면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지만 행위로 그 구원이 보존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성령의 은혜로 율법에서 해방된 이방인 신자에게 다시 율법의 굴레를 씌우려는 속임수에 불과하다(갈 3:3). 또한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불완전한 것으로 이해하고 율법의 도움으로 구원은 완성된다고 주장하였다.


6)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

펠라기우스(Pelagius)는 360년 영국에서 태어난 수도사로서, 그는 어거스틴의 이론 즉 하나님의 독점적 사역인 은혜로 구원받는 것에 반대하여 일어섰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타락 이전의 상태로 원죄 없이 태어남으로 자기의 자유의지를 이용하여 하나님께서 명하신 선을 행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는 선행에 있어서 절대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상대적 의미에서 필요하다고 본다. "율법은 복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한다"고 말한다. 이 이론은 431년 에베소 대회에서 이단으로 확정되고 펠라기우스는 정죄되었다.


7) 가톨릭의 구원관

종교개혁 이후 구교와 신교의 일치를 위해 모였지만 마침내 신구교 최후의 회담이 된 트렌트 회의(The Council of Trent, 1545. 12~1563. 12)에서 결의한 내용은 오늘날 가톨릭의 구원에 대한 교리를 밝혀주고 있다. 루터가 말한바 믿음으로만(sola fide) 구원받는다는 신교의 주장을 일축하고 구원은 믿음과 아울러 행위도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갈라디아인주의와 마찬가지로 구원은 계명을 지키고 선행을 하는데서 보존되고 또한 구원을 더욱 확실히 하는 것이라고 결정함으로⒀⒁) 신교에서 주장하고 사도 시대부터 내려온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정통교리에서 떠난 또 하나의 다른 복음을 탄생시킨 것이다. 13세기 공적축적설(Treasury of Merits)에 근거한 속죄표의 판매를 인정하고 교회가 저장하고 있는 은혜는 성례집행을 통해 신도들에게 전달된다고 하며 연옥설을 받아들임으로 기독교와는 타협할 수 없는 요소들 즉 행위와 공적에 의한 구원을 말하고 있다.


2. 은혜와 율법의 뜻매김

1) 율법

① 율법의 기원

도덕법과 재판을 위한 민법인 출애굽기 20장에서 23장까지의 율법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어진 것으로 이는 죄 때문에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430년이 되기까지는 율법이 없었다(갈 3:17,18). 즉 아브라함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었던 것인데 범법함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주어진 것이다.


② 율법의 쓰임새

-A usus politicus or civilis

죄를 범하고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율법은 필요한데 죄를 전제로 하고 죄때문에 율법은 필요하게 된다.


-A usus elenchticus or podagogicus

율법은 죄를 정하고[定罪], 정죄된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는 율법의 요구를 채울 수 없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에게 나오게 인도하는 몽학선생(蒙學先生)의 역할을 한다.


-A usus didacticus or normotivus

신자생활의 규범으로서 율법은 신자들이 행할 의무가 무엇임을 지시하고 생명과 구원의 길을 지도해 나가는 일을 한다. 이 세번째 율법의 역할은 반율법주의자들이 인정하지 않고 있다.


③ 율법의 완성

범법함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했으니(갈 3:19) 그 약속하신 자손인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율법은 폐하여졌는가 완성되었는가의 문제는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자들의 관심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은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 더욱 굳게 세워졌다 했으며(롬 3:31),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폐하는 대신 완전케 하려 했으니(마 5:17) 아직도 율법은 건재하고 있다.


율법 그 자체는 죄도 아니며(롬 7:7) 오히려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것이라고 했다(롬 7:12). 율법 자체에는 흠이 없고 기뻐할 대상이 되지만(롬 7:22) 율법의 요구를 행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저주 아래 가두는 일을 하고 있으니(갈 3:10) 이 저주에서 스스로 벗어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자는 하나도 없다(롬 3:22,23).


만일 사람이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든지 또는 율법이 인간을 의롭게 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다면 그리스도나 그의 십자가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갈 2:21). 율법의 제한성 즉 인간을 의롭게 할 수 없는 제한성 때문에 예수께서 율법의 저주 아래 서시고(갈 3:13)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의 제물로 죽으심으로(롬 5:8, 3:24 25)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시키신 것이다(롬 8:2). 죄는 골고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 안에서 정죄되고 율법의 요구는 성취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로 이룩된 구원은 믿음을 통해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 율법의 행위로 얻을 수 없는 것이다(갈 2:16).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이 완성된 것이며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더 이상 율법의 저주나 두려움이 없게 된다. 율법의 요구는 완성되었어도 폐하여 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율법은 구원받은 신자가 사랑으로 완성해 갈 생활의 규칙으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롬 13:8 10).


2) 은혜

① 은혜의 신약적 정의

신약에서 은혜라는 말은 charis란 단어로 항상 표현되고 있는데 신약에 약 170번 가량 나타난다. charis는 "기뻐하다" "즐거워하다"라는 동사에서 나왔다.


이는 받을 자의 자격, 공로를 생각하지 않으시고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로서 특히 죄에서 구원하시는 은혜를 가리킨다(마 9:13). 이런 의미에서 "은혜"는 "구원"이란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


축복하는 말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표현(고후 13:13, 갈 6:18)은 그리스도께서 은혜가 필요한 자에게 적절히 대하는 태도를 뜻하기도 하고, 그리스도 자신이 은혜의 완전한 표현(엡 2:4 9)으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을 나타내시는 것을 뜻한다.


은혜라는 말이 내포하는 다른 몇가지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우미(優美)하고 사랑스러운 심적 태도의 외적 표현을 의미한다.

누가복음 4장 22절에 보면 "그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의 경우이며 이는 골로새?4장 6절의 표현과 유사하다.


- 품위있는 행동으로부터 받는 느낌을 표현하기도 한다.

요한 3서 4절의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 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의 경우이다. 그런데 많은 사본이 “은혜”보다 “즐거움”으로 쓰고 있기도 하다.


- 특별한 대상으로 부터 받는 정신적인 사랑과 애호를 뜻한다.

누가복음 2장 52절에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의 예이다.


- 사랑과 애호를 받는 측에서 느끼는 감사를 의미하기도 한다.

누가복음 17장 9절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의 경우이다. 로마서 6장 17절도 같은 표현이다.


- 구체적으로 표현된 고마운 행동을 말할 때도 있다. 고린도전서 16장 3절에 따르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의 경우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의미를 갖는 "은혜"란 말이 저자에 따라 의미하는 바가 다르게 쓰이고 있으므로 정확히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② 은혜와 의인(義認)

의인에 있어서 인간의 노력은 그 가치나 공로를 인정받지 못한다. 만일 인간의 행위가 의롭다고 인정받는 데 공로가 된다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며(롬 11:6) 행위가 의인을 얻는 데 삯과 빚으로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롬 4:4).


그러나 의인은 행위를 떠나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바 선물로서의 은혜를 통해 온다(롬 3:24,5:17). 의인의 근거(procuring cause)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고(요일 1:7), 동인(動因.efficient cause)은 성령이시다(딛 3:5).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로서 의롭다하심을 받을 수 있는 조건적 원인(conditional cause)은 믿음이다(행 15:9). "현대인의 성경"과 "새번역 신약전서"에서는 "선물"로 번역하고 있다.


웨슬리 신학에 있어서 "의인"의 개념은 죄의 용서 또는 죄의 사유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되며 의인 전에 행한 도덕적 선이 하나님 앞에서 선행일 수 없으므로 인간의 행위는 죄사유와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된다. 오직 죄 많고 허물 많은 잃었던 자를 과거의 죄로부터 용서하시고 아들의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의인은 하나님의 자비이며 선물이다. 의인의 유일한 전제, 용서의 절대적 필요조건은 믿음이다. 행함이 없는 불경건한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믿음은 그로 하여금 의롭게 하는 것이다.


③ 은혜의 방편

죄인을 의롭다 인정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엡 2:8)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인간 편에서의 조건인 "믿음"에 관해 칼빈은 신주권적인 절대 예정의 입장에 선다. 즉 칼빈에 따르면 믿음 자체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이기 때문에 구원받는 은혜를 베푸심에 있어 누구는 구원하시고 누구는 버려두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뜻의 결정에 따른다고 했다.


즉 칼빈은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의인의 유일한 조건이지만 이 은혜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결정(예정)에 따라 제한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한편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은혜를 제한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믿음이 의인의 절대 필요한 전제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제공하셨고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⒀ ) 전적부패에 이른 인간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는 "선재은혜(preventing grace)"를 가리키는데 이는 죄 중에 속수무책인 인간을 향하여 행사하시는 성령의 예비적 은총이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이 선재은혜에 순응하여 믿음을 화합할 때(히 4:2) 구원에 이르게 된다.


가톨릭에서는 교회가 은혜의 저장소이며 성직자가 베푸는 성사(聖事)로서 이 은혜가 신도들에게 전달된다고 한다. 성사의 외적 표시를 통해 내적 변화를 나타내고 또한 실지로 그 변화를 이룩한다하며 7성사 즉 성세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혼인성사, 신품성사, 고백성사, 병자성사를 통해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며 새로운 생명으로 구원된다고 한다. 기독교에서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가 신자 개인에게 직접 임함을 말하는데 비해 가톨릭은 교직자에 의해 집행되는 성사(聖事)를 은혜 전달의 방편으로 삼고 있다.


3. 율법과 은혜의 조화

신약에서 율법과 은혜에 대하여 심각하게 견해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오해되는 두 사도가 있으니 곧 바울과 야고보이다. 직접 열두 사도에는 속하지 않았으나 부활하신 주님의 부르심으로 이방인의 사도가 된 바울과, 예수님의 아우로 예수님 생전에는 신앙을 가지 않다가 부활 후 신앙을 가져 예루살렘교회 감독(행 15:13)으로 사도의 권위를 인정받은(갈 1:19, 2:9) 야고보의 율법관과 은혜관을 각각 살펴보고, 겉보기에 서로 어그러진 정도의 범위를 넘어선 내면적 또는 실제적 조화를 살펴보겠다.


1) 율법관

① 바울의 견해

바울이 말하는 "법"(nomos)은 그 뜻하는 바가 다양하지만 주로 모세의 율법을 뜻하고 있다(롬 7:22, 25, 8:7, 고전 9:9 등). 그는 십계명과 구약의 다른 율법 부분을 분명히 구별하지 않고 모세의 율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nomos를 모세 오경에 대해 쓰고 있다(갈 4:21). "율법과 선지자들"이란 표현(롬 3:21)이 구약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율법"은 모세 오경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 바울은 nomos를 구약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고 있다. 율법에 기록된 바를 인용하면서 이사야 선지의 글을 말하고 있으며(고전 14:21), 이로써 바울은 nomos란 단어를 십계명, 율법서, 5경, 전체 구약을 의미하는 말로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롬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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