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6-29 20:42
기독교 시각으로 본 로마제국의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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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11,030  

기독교 시각으로 바라본 로마제국의 멸망 원인

1. 서론

1200여년이 넘는 거대한 역사를 자랑하는 로마 제국은 왜 쇠퇴하여 멸망하게 되었는가? 어느 나라든지 멸망할 때를 보면 권력 다툼이 있기 마련이다. 왕권 내에서 서로 한 마음으로 자신의 나라를 위해서, 백성을 위해서 어떻게 하면 더 잘 살게 될 지를 연구하고 모색해야 하는 사람이 왕권을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왕권 내에서 분열이 일어나고 갈라지게 되면 이미 그 나라의 기강은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나라의 안방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곳이 정치를 하는 곳이다. 안방에서 부부싸움이 잦다면, 주위에서 볼 때 그 집안을 어떻게 보겠는가? 곧 ‘이혼 하겠구나’ 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나라의 중심부인 정부에서 다툼이 일어난다면 주위 나라가 우습게 볼 것이 아닌가. 그 때 비로소 무너지는 것이다. 물론, 한 나라의 멸망 원인은 내적인 요소도 있고 외적인 요소도 있다. 하지만 외적인 요소는 내적인 요소에 의해 생기게 마련이다. 내적으로 강하게 무장되어 있다면, 아무리 외적인 요소가 다가와도 이겨낼 수 있게 된다. 통일신라가 수많은 외세의 침입 속에서도 1000년 동안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힘이 강해서일까? 힘이 없어서 당나라의 도움을 받은 신라이다. 하지만 그만큼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내적인 요소가 강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결국, 통일신라도 내적인 분열로 인해 외적인 요소에 대해 멸망하게 되었다.

내 마음만 바로 서 있으면 외부의 어떤 소리가 들려와도 현혹되지 않고 내 갈 길을 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마음 자체가 삐뚤어지면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쉽게 현혹되는 것처럼 크게 나아가 나라, 국가라는 거대한 집단을 볼 때도 내부적인 요소-국민의 마음이 하나로 뭉쳐져 있으면 그 나라는 존속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바인 이 문제와 더불어 기독교적인 시각과 곁들여 로마 제국의 멸망 원인을 살펴보려 한다.

 

2. 로마 제국의 쇠퇴와 몰락

2-1. 풍요로움 속의 로마 제국

기원을 전후하는 그 사이에 로마는 전쟁에서 승리하며 부유하게 된다. 이민족들을 정복하여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부를 얻게 되었다. 피정복지들로부터 유입된 각종 생산물은 로마를 부유하게 만들었으며 쌓여만 가는 막대한 부는 로마 시민들의 생활조건, 기호품, 풍속 등을 근본적으로 변모시켰다. 로마 시민들은 여가를 식탁에서 즐기거나, 원형 경기장에서 피비린내 나는 경기에 열광하기도 했다. 또한, 이제는 평민들도 값싸고 손쉽게 귀금속과 예술품들을 구할 수 있게 되고, 무상으로 배급해주는 곡물들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되었다. 그리고 노예로 전락한 전쟁포로의 수가 급증하면서 이제까지의 생활양식도 바뀌었다.

이 결과로 로마인들의 사회와 풍속은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로마의 근간이었던 소농민들은 수많은 정복전쟁의 결과로 전쟁을 수행하던 중 전사한 사람, 황무지로 변해가는 토지를 복구하기 위해 많은 돈을 빌려야 했던 것으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와는 반대로 지배계층은 정복 전쟁의 결과로 커다란 혜택들을 입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로마의 귀족들 사이에 사치풍조가 나타났다. 로마 사회에 사치풍조가 만연해감에 따라 로마인들의 유구한 미덕이었던 가족관계, 시민정신, 임무충실 등과 같은 건전한 정신이 점점 사라져 갔다.

정복 전쟁에서 계속된 승리로 인해 영토가 넓어지고 부유해짐에 따라 전쟁하기도 귀찮아지는, 로마의 평화 시대가 찾아 온 것이다. 그 결과의 산물이 위와 같은 물질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해 가는 것이었다.

 

2-2. 평화 속에 찾아오는 위기감(A.D193~)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콤모두스가 황제에 오른 이후 로마는 병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혼란기에 아프리카의 트리폴리타나 출신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재위193~211)가 군대의 지지를 얻어 로마 황제에 즉위했다. 그의 아들, 카라칼라 황제가 즉위하던 시기에는 커다란 위조 화폐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것이 제국 쇠퇴의 징후이자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212년에 모든 주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 것은 과연 너그러운 마음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현대 학자들은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경향이 있지만 실은 조세 인원을 늘리려는 조치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235년 세베루스 알렉산더의 통치 시대 때, 제국의 영토는 최대에 달했으나, 황제의 전제정치는 한층 더 강화되어 로마의 위기는 시작되었다. 또한 수많은 야만족들이 국경선을 넘어 왔고, 제국 내부로의 침입도 점차 증가했다. 급격하게 감소한 인구 때문에 로마는 이제 더 이상 군단병사들에게 의지할 수 없게 되었다. 때문에 방어정책에 사실상 변형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는 또한 크리스트교가 보급되어 로마 사회의 혼란이 표출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요소들은 제국에게 암울한 미래를 가져다주는데 박차를 가했다.

 

2-3. 본격적인 위기의 시작 a-정치적 측면

점차 외부로부터의 위험은 명확해졌다. 동방지역에서는 독립적인 하나의 국가가 팔미라 지역에서 성립하는 한편 페르시아 신제국이 사산 왕조의 주도하에 형성되었다. 260년에 페르시아의 군주 샤푸르에게 패배한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포획되어 암살당했다. 도나우 강 연안에서는 게르만인들이 로마의 국경선을 넘어 이동해왔다. 이들은 아시아 쪽으로부터 도래해 온 이민족들의 압력으로 로마인의 차지였던 다키아의 데쿠마토 평원까지 침입했다. 또한 알라마니인들이 북부 이탈리아로 침입해오는 동안에 침략 당한 갈리아는 한때 독립적인 제국으로 발전해갔다(258-273). 제국은 붕괴 직전에 있었고 야만족들에 의해서 주도되어 가는 형세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연히 군대의 역할이 증대됐다. 군대는 자기 마음대로 시골출신의 비천한 인물을 황제로 옹립시키기도 하고, 폐위시키기도 했다. 그 결과 30년 이상 동안에 로마 제국에서는 심각한 무정부 상태가 초래되었다.

 

2-4. 본격적인 위기의 시작 b-경제, 사회적 측면

로마 제국에서 나타난 인구 감소는 많은 경작지들을 황무지로 변모시킬 위기를 초래했고 소작인들은 토지경작에서도 예전과 같은 열의를 보여주지 않았으며, 로마 시민들은 군대 복무에 불만을 토로하였다. 부담스러운 세금 징수로 인해 도시인들이 도시를 떠나 도시의 인구는 급격하게 감소해갔으며 대부분의 토지들은 경작되지 않은 채로 버려졌다.

그리하여 로마인들은 제국을 수호하기 위해 야만족을 끌어 모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제국은 방어적 입장으로 바뀌어 패배자로부터 재물을 약탈해올 수 없게 되어 동방지역에서 많은 생산품을 구입할 수 없었고 로마의 화폐는 가치를 상실해감으로써 물가는 급격하게 상승했다.

 

2-5. 재정비에도 불구하고 결국 멸망에 이른 로마 제국

3세기말 도나우강 지역 군대의 군단병들의 지지를 얻은 일리리아 출신의 황제로부터 시작하여 정비에 나서기 시작했다. 로마 세계 질서의 통일을 재건했으며, 방어벽 구출과 태양신 숭배와 연합하여 황제권을 강화시켰다. 이어서 디오클레티아누스 4분령 통치체제, 행정-군사적 개혁, 물가상승 억제, 토지 대장 작성을 실시했다. 이 후, 콘스탄티누스는 동방적인 군주 정체체제로의 변화를 시도했고, 수도 천도와 밀라노 칙령을 통한 크리스트교의 인정과 그 이후의 율리아누스의 크리스트교 박해, 이교 부활등으로 이어졌으며 반면 다시 테오도시우스는 신전을 폐쇄시키고 이교를 박해하여 크리스트교 제국을 건설했지만, 로마는 동로마, 서로마로 분리되었으며 서로마는 사회 계층의 세습화와 폐쇄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도시 시민들은 세금 징수의 책임으로 벗어나려 도망치려 했고 슬라브인들과 게르만인들이 대체로 소집단을 형성하여 국경선을 넘어 로마 제국 내로 들어왔는데 로마인들은 병사 또는 콜로누스로 이용하기 위해서 이들의 도래를 인정해 주었다. 허나 지금까지의 문제점이 쌓이고 쌓인 결과 게르만인 부대의 지휘자인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제국의 최후의 황제인 로물루스 안구스투스를 폐위시킴으로 로마제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6. 기독교에 대한 로마 제국의 태도

일반의 신념과는 달리 기독교에 대한 로마 정부의 박해는 빈번하지도 대대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크리스트교에 대한 황제들의 태도는 처음에는 매우 적대적이었다. 사람들은 특히 새로운 종교의 신봉자들이 황제숭배를 버리고 그들만의 비밀스런 집회를 갖는다고 비난했다. 따라서, 기독교는 허용된 종교가 아니었다. 다만 황제를 위한 제사 드리는 것을 거부하여 희생양이 필요한 때에 위협과 표적이 되곤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황제가 바뀌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기독교도 박해를 받는 시절이 있었는데, 1세기 및 2세기(네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에 시작되어 3세기에 데키우스, 아우렐리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치세기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전통종교의 부흥을 꾀하였던 황제였고, 303년에는 크리스트교도에 대한 대박해를 추진했다. 이 시기는 격렬한 정권 항쟁의 시대였으므로 크리스트교 문제는 항쟁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승리한 콘스탄티누스가 크리스트교에 호의를 표시했고, 이것이 크리스트교의 역사에는 결정적이었다. 큰스탄티누스는 아버지로부터 태양신 숭배 신앙을 계승 받았지만, 고전 끝에 승리를 거둔 그에게 유일신 크리스트교의 신의 가호를 받은 것이라고 설명한 크리스트교도인에 의해 ‘밀라노 칙령’이라는 엄청난 변화인 종교자유의 원칙을 내세웠다. 하지만 황제의 보호를 얻은 교회는 신속하게 이교에 대해 배타적인 자세를 취했고, 또한 크리스트교내에서 정통과 이단의 항쟁도 매우 치열해졌으므로 일순간의 것이 되었다. 그 후 율리우스는 기독교를 박해했지만, 다시 테오도시우스가 신전을 폐쇄하고 이교를 박해하여 크리스트교 제국을 건설했지만 그의 사후 두 명의 자식들은 로마 제국을 분리시켰다.

 

3. 내가 본 역사적 관점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멸망시켰다는 관점에는 현저한 오류가 있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한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의 대화라고 어느 분이 말씀하셨다. 따라서 역사를 알면 현재를 알게 되고 미래를 볼 수 있게 된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지금 이 시대를 역사를 통해 얻게 된 것을 과거에 비추어 보면 과거에도 성립한다는 말이 된다. 지금 미국이라는 나라를 보라. 그들은 기독교 국가이다. 그들의 역사를 짧다. 수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보다 천년도 안되는 그들이 훨씬 더 잘살고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다. 그들의 역사를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을까? 기독교라는 종교가 과연 나라를 망치는 종교인가? 흥하게 하는 종교인가? 알 수 있지 않은가? 우리는 역사를 통해 너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과거를 몰랐다면 현재를 통해 과거를 바라볼 수 있다. 기독교 국가인 미국이라는 나라가 예전의 로마제국처럼 최강국이라면 기독교는 나라의 멸망에 기여가 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히려 복음이 잘못되면 그 곳에서의 사람들이 타락하면 영국처럼 망하게 되지만 복음 속에서 청교도들처럼 바른 생활을 하는 복음이라면 그 복음으로 인해 오히려 나라가 흥하게 될 것이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통치된 동로마 제국은 붕괴되지 않았다면 점과 중세 시대 전반에 걸쳐서 동로마 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문명화된 국가였다는 점. 비록 신대륙이 발견 되기 바로 전인 1452년에 와서 오스만 터기에 의해 무너졌지만 콜럼버스가 이 미국의 대륙을 발견한 1492년. 동로마 제국, 그들의 타락을 통해 하나님께서 새롭게 자신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예비해 놓으신 미국이라는 땅의 발견이 하나님의 참된 복음의 연속성을 유지하시기 위함이 아니셨을까?

콘스탄티노플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통해 크리스트교의 종교 자유를 인정해 주며 자신 또한 세례를 받으며 기독교인이 되고 크리스트교를 보호하였다. 그가 수도를 천도한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한 동로마제국은 멸망치 않고 서로마제국은 여러 왕들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신을 섬기고 부유함 속에서 타락해가는 그 모습들이 멸망의 길로 인도했을 것이다.

 

4. 결론

로마 제국의 멸망 원인은 로마 제국의 풍요로움과 부요함부터 시작된다. 언제든지 풍요로움과 부요함 속에선 쾌락과 타락이 존재하게 되며 복음이 없다면 더더욱 그리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배가 부르면 색욕을 찾게 되고 자신의 쾌락을 즐기고자 하는 동물이다. 어떻게 하면 이 인생을 좀 더 즐겨보다 살까 고민하는 동물이다. 따라서 점점 강대해지고 영토도 넓어지고 더 이상 전쟁도 하기 싫어진 그 때부터 로마의 쇠락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일을 하기 싫어지면 게으르게 되고 그것이 망하게 되는 길인 것이다. 이런 것들로 인해 이런 사람들에게 참된 복음이 전해들어가지 못했고 주위에서만 빙빙 돌았기 때문에 또한 그들을 핍박한 황제도 있었기에 물론 전반적으로는 핍박하지 않았으나 깊숙이 스며들지 못하고 빙빙 돌고 돈 것이 결국 타락을 막을 수 없고 그들의 가치관을 바르게 이끌지 못했던 것이 멸망의 원인인 것이다. 뒤늦게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크리스트교의 종교 자유가 허용이 되지만 그 때는 약간 늦은 느낌이 있다. 이미 사람들은 많은 타락 속에서 살게 되고 이미 경제,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안게 되었으므로 새로운 시대만이 새로운 시대 속에서의 삶이 그들에게는 더욱 유익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렇게 시민들에게 지지 받지 못하고 허물어져버린 가까스로 정권을 유지하려다가 결국 그 약한 점을 이용한 자들에게 무너지게 된 것이다. 권력자들은 흠을 보이면 안된다. 그 흠, 약점을 노리는 이들이 꼭 있기 마련이다. 로마인들이 이용하려고 했던 게르만인, 그들에 의해 결국 약점이 노출되어 결국 로마 제국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의 정치가 어땠을 지 짐작이 된다. 윗 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아야 한다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니까 말이다. 시민이 어렵게 되고 타락하게 됨은 그들의 정치가 이미 타락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황제도 몇 번씩이나 바뀌고 무정부 상태도 가게 되고 그런 상황은 권력 다툼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권력 다툼이 있는 한, 절대 제국이 존속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정치적인 문제부터 시작하여 사회, 경제의 문제들이 한데 어울어져 로마 제국을 멸망의 길로 인도한 것이다. 다만 그들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황제의 재정비를 위한 개혁이 아닌 복음 말이다. 복음이 돌고 돌았지만 끝내는 너무나 관대했던 그들이 기독교도 하나의 종교로 치워버리고 말았다.

 

5. 참고 문헌

로마문명사, 도널드 R.더들리, 김덕수 옮김, 현대지성사, 1997

이야기 그리스.로마사, 신선희.김상엽, 청아출판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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