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6-17 20:57
[7] 듣기 싫어하는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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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9,381  

1.1.30. 말장난이 많은 설교

 

‘축원합니다’ ‘믿습니다' ’원합니다' ‘바랍니다' ’생각합니다' ‘느낍니다' ’기원합니다' ‘할렐루야’ ‘아멘’들. ‘아멘을 크게 해야 축복을 받습니다’

언젠가 부터 우리 한국 교회는 이런 설교의 분위기 맞추기 화답이 성도들에게 강요되어 왔다. 그런 화답을 유행시킨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고 이것을 본 많은 목사들이 그 교회와 같아지기 위해 모방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화답 말이 대 유행하게 되었다. 이런 화답하는 말은 성경 말씀에 있다. 민수기서 5장에서 27장까지 모세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백성들이 순종하며 복종하겠다는 의미로 아멘이라는 말을 화답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오늘 날 우리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아무 생각도 없고 의미도 마치 무슨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난발되고 있다.

이런 말들은 모두 좋은 말들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좋은 약이라고 해도 잘못 쓰면 오히려 병을 키우는 것처럼 좋은 말도 잘못 사용하면 성도들의 거룩한 양심을 더럽히고 어리둥절하게 하여 신앙적 방향 의식을 잃게 할 것이다.

그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아멘”

“병 고쳐 주심을 믿습니다” “아멘”

“은혜 주심을 믿습니다” “아멘”

“능력 주시고 권능 주심을 믿습니다” “아멘”

심지어 나는 이런 말까지 들었다. 설교 도중에 목사는 이런 예화를 했다.

“도적이 한 밤 중에 복면을 하고 이웃집의 담을 넘었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축구팀이 오늘 축구를 합니다. 꼭 이기기를 바랍니다” “아멘”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믿는 대로되는 것입니다.” “아멘”

이렇게 “아멘” “아멘” “아멘” “아멘”이라는 말들이나 다른 말들의 홍수 속에 설교가 되고 있는 현실이 정말 개탄스럽다. 모세가 그 백성들에게 “아멘”을 하게 한 것은 “주님의 말씀이 진실하시니 그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겠습니다”라는 의미가 있는 신앙 고백이요 순종 맹세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순종과 복종의 의미가 없는 “아멘”이 대 유행되고 있으며 그 외에도 다른 거룩한 말들도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마구잡이로 사용되고 있다. ‘축원합니다’ ‘믿습니다' ’원합니다' ‘바랍니다' ’생각합니다' ’기원합니다' 이런 사람의 소원이 가득 담긴 말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너무나 간절한 성도들의 소원이기 대문에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이 들어 주셔야만 하는 것처럼 설교자에 의해 유도되고 있다. 그래서 많이 축원을 받고 ‘믿는다’는 말과 ‘기원한다’는 말들을 많이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리라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설교자에 의해 유도되는 이런 말들은 복음도 아니며 설교도 아니다. 오로지 말장난에 의해 유도되는 극도로 유치한 자기 최면이다. 오늘 우리 교회의 강단에서 설교자에 의해 자행되는 자기 확신의 말들은 얼마나 하나님을 부끄럽게 하고 성도들의 신앙을 오도(誤導)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아무 생각도 없고 아무런 느낌도 없이 오로지 목사에 의해 유도되어진 ‘축원합니다’ ‘믿습니다' ‘기원합니다' ‘할렐루야’ ‘아멘’이라는 말들을 큰 소리로 외쳐야 믿음이 좋은 것처럼 착각되고 그렇게 큰 소리만 지르면 하나님께서도 꼼짝 못하신다는 사단의 말장난에 성도들이 놀아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망말이 기복 신앙을 만들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우상 종교로 타락하게 만든다.

믿음이 좋고 칭찬을 듣고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받는 사람은 이런 말들을 크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충성하는 성도들이다. 지각이 있는 성도들은 이런 구호를 외치도록 강요하는 목사의 설교에 실망한다.

 

1.1.31. 죄송하다고 말하면서 하는 설교

 

이름을 말하면 알 만한 유명 목사는 설교 가운데 꼭 한 번씩 “죄송합니다. 용서하시고 들으십시오”라고 말하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버릇이 있다. 듣고 보면 죄송한 말도 아니고 잘못된 말도 아니다. 아마 자기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죄송한 마음을 가지는 것 같다. 그렇게 죄송한 생각이 들면 안하면 된다.

설교는 이미 여러 번 말했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목사를 시켜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목사는 많이 연구하고 준비해서 설교를 하지만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잇는 것이다. 물론 말씀을 잘 전하기 위해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것은 전혀 잘못된 말이 아니며 죄송한 말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 목사는 언제나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죄송합니다. 어제 제가 최전방에 잇는 군인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그것에는 하나님을 아주 잘 믿는 지휘관이 있었습니다” 이런 식이다. 왜 이렇게 말해야 하는가? 내가 듣기에는 자기가 얼마나 겸손한가를 듣는 성도들에게 말하기 위한 것 같았다. 겸손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겸손히 살면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서 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죄송하다는 말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면 듣는 다른 성도들도 이미 그렇게 그 말을 이해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죄송하다고 사죄를 하는 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짓이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짓인 것이다. 성도들은 이런 모순되고 강요된 겸손과 잘못을 고백할 수 없는 위치에서 잘못했다고 머리를 조아리는 목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짓은 하나님 앞에서도 좋은 짓이 아니다.

 

1.1.32. 대독 설교

 

목사의 큰 고민 가운데 한가지는 설교다. 설교를 하기는 하는데 듣는 성도들이 도무지 감동이나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정말 답답하고 괴롭다. 그리고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이 마지막 카드로 내놓은 이유가 목사의 설교에 대한 비판이다. 도무지 목사의 설교가 은혜가 안되어서 떠난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면 목사는 기가 팍 죽게 꼼짝 못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리 정이 든 성도라고 해도 더 이상 붙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설교를 잘하기 위한 노력으로 유명 목사의 설교 책을 사서 본다. 나도 유명 목사의 설교 책을 많이 사 보았다. 설교를 잘하기 위해 설교 책을 사서보고 연구한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많은 목사들이 설교를 잘하기 위해 설교 책을 사 보는데 기독교 서적 가운데 설교 책에 가장 많이 팔린다고 하니 좋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또 한가지 설교가 지천으로 날려 있는 곳이 있다. 인터넷 홈페이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설교만 취급하는 곳도 있고 어느 교회나 목사 개인 홈페이지에 많은 설교들이 올라 와 있다. 아마 그 분량을 책으로 계산하면 수천 수만 권이 될 것이다.

그런데 내가 경험해 보니 인터넷에 올라 있는 유명 목사의 설교는 얼마나 내용이 풍부하고 그 문장과 예화가 적절하며 풍요로운지 경탄할 만했다. 그런 설교들은 내가 수 십일씩 기도하고 주석이나 다른 참고서들을 보면서 몇 시간씩 원고를 정리하여 완성한 설교와 도저히 비교할 수 없어 또 한번 나의 실력 없음과 감화력 없음을 깨닫게 했다. 그래서 수 십번도 더 내가 준비한 설교를 버리고 유명 목사의 설교를 마치 내가 만든 설교 인양 자신 있게 전하는 일들이 있었다. 이와 같은 버릇은 교회가 아주 어려운 시험을 당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나도 시험을 당하고 성도들도 시험을 당해 피차에 상처가 많았을 때에는 어떤 설교를 해도 시험이 되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우리가 가진 문제와 전혀 상관없는 설교를 하기 위해 유명 목사의 설교 책을 보고 그대로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그 설교에 성도들이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부터 남의 설교를 내 설교로 설교하게 되었다. 그러나 설교 책을 그대로 강단에 가지고 갈 수는 없는지라 원고지에 그 설교들을 적어 가지고 강단에 올라 가 설교를 했다. 그러다가 인터넷의 설교들을 보니 이것은 원고를 작성하지 않고 그 설교들을 있는 그대로 인쇄해서 사용할 수 있는지라 책을 보고 원고를 쓰는 일이 번거러워 인터넷 설교를 이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점점 남의 설교를 내 설교로 사용하는 빈도 수가 늘어나면서 설교 준비를 하지 않게 되고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역인 설교를 앵무새처럼 흉내를 내는 모창 설교자가 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모창 설교를 처음 할 때는 좀 괴롭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래서 그 설교가 우리 교회 현실에 맞도록 고쳐 설교했다. 그러나 조금씩 편의주의적 타성이 붙였다. 나중에는 아무 양심의 가책도 없어졌다. 그리고 괴로움도 없어졌다. 오히려 첨단적인 목회를 한다고 스스로를 미화했다. 나중에는 세계에서 가장 목회 잘하고 설교 잘하는 목사의 은혜로운 설교를 우리 성도들에게 먹인다고 자위(自慰)했다. 사람이, 목사가 참으로 이상하게 되어 갔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되더라는 이야기다.

나는 이렇게 설교를 모방하거나 다른 목사의 설교를 참고하거나 또는 그 설교를 한자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선포하는 것이 반드시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설교에 대한 몇 가지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일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①. 유명 목사의 설교를 참고하되 그 설교를 녹음기 재생하듯 따라 하지 말고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선포해야 한다.

유명 목사들의 설교는 많은 성도들이나 성숙된 성도들을 위한 설교가 대 부분이다. 그리고 그 분들은 목회를 아주 오래 하신 분들로 목회 경험이 풍부하며 그런 목회 경험들이 바탕이 되어 그런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연륜과 목회 경험이 없는 젊은 목사들에게는 그 설교가 설교를 하는 목사나 듣는 성도 모두에게 맞지 않는다. 그렇게 설교하는 목사는 한가지 아주 위험한 착각을 하고 있다. 설교를 듣는 성도들이 유명 목사의 설교를 자기 설교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착각이 그것이다. 천만의 말씀이다. 성도들은 자기 목사의 설교 수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자기 목사에게 걸맞지 않는 설교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아주 쉽게 알아차린다. 몇 번은 속고, 몇 번은 알면서 넘어 가지만, 계속되면 무시하고 멸시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의 것을 훔쳐 자기 것인 양 속여 먹이는 목사를 배척하던지 교회를 떠날 것이다. 인류 호텔의 요리사가 만든 요리를 요리사 견습생이 손님들에게 가져가서 “이 요리는 바로 내가 만든 것입니다.”라고 속이면 싫어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②. 성경 말씀을 많이 알고 잘 알고 난 후에 다른 유명 목사의 설교를 사용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후 좌우 위 아래로 많이 알고 자세히 알고 나면 다른 목사의 설교를 자기 교회에 맞도록 요리하는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수 천년 동안 이어 온 설교자들의 설교는 어차피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내가 아무리 새롭게 설교를 작성해서 선포한다고 해도 그 근거는 성경 66권에 있는 것이며, 어느 때에 누군가에 의해 선포된 말씀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같은 본문, 같은 내용의 설교를 했음에도 유명 목사의 설교에는 힘과 감동이 있는데, 내 설교에는 그것이 없다면 감동이 없는 설교를 한 목사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다. 우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목사의 인격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말씀은 그렇게 전하지만 실제 생활은 전혀 그렇지 않는 이중적인 인격을 가졌다든지, 아니면 그 말씀을 고지 곧 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목사의 외식된 생활을 성도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는 그 설교를 준비하면서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능통해서 유명 목사의 설교든지 무명 목사의 설교든지,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이면 얼마든지 진리를 정확히 선포할 수 있는 말씀의 실력과 영력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읽고 연구하는 일과 신령한 기도 생활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이 선행되지 않는 모방 설교는 영양은 높지만 싸늘하게 식어 그 맛을 잃은 음식을 성도들에게 먹이는 것과 같다. 그리고 성도들이 ‘우리 목사님이 저런 좋은 설교를 할 수 있는 실력이 없는데 저런 설교를 하는 걸 보니 설교 준비도 안하는 구나’ 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게 되면 목사가 가는 길이 뻔하다.

③. 듣는 성도들의 수준에 맞도록 설교해야 한다.

유명 목사의 설교라고 해서 모든 성도들에게 은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듣는 사람의 신앙적 수준에 따라 은혜를 받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목사가 자기 교회 성도들의 설교를 듣고 은혜 받는 수준을 안다면 자기가 아닌 다른 목사의 설교를 있는 그대로 선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명 목사의 설교를 참고할 경우에는 자기 교회 성도들에게 맞도록 설교를 다시 만들어 선포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용하면 처음에는 모를지 모르지만 나중에 그 설교가 자기 목사의 설교가 아니라 다른 목사의 설교 인줄을 알게 되고 결국 녹음된 설교를 하고 있는 목사를 배척하게 될 것이다.

 

1.1.33. 택배 설교

 

토요일 오후에 무슨 일로 후배 목사를 찾아갔다. 마침 목사가 없어서 잠시 기다리고 있는데 집배원이 편지를 가져왔다. 그가 두고 간 편지는 어떤 곳에서 보낸 인쇄물로서 큰 봉투에 담겨 있었다. 목사가 돌아 왔다. 그는 내가 건네주는 그 편지를 받아 아무렇게나 봉투를 찟어 내용물을 흘끔 살펴 본 뒤에 책상 위에 던지면서 중얼거렸다. “인간들이 언제나 이렇게 늦게 보낸단 말이야----” 나는 그가 왜 그렇게 그 편지에 기분이 나빠하는지 몰랐다. 그는 나를 잠시 기다리게 하고 몸을 씻으려 세면실로 갔다. 그 사이에 나는 그가 그렇게 기분 나쁘게 받은 그 편지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놀랍게도 이름을 말하면 누구도 알만한 어느 유명 목사의 두 주일이 지난 커다랗고 굵은 글씨로 기록된 설교 원고였다. 그것은 분명 그 유명 목사의 설교를 참고하기 위한 것은 아니였다. 설교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설교 원고였던 것이다. 후배는 그 원고를 자기 교회에 맞도록 손질할 생각이었는데 너무 늦게 도착을 해서 시간이 없다고 투덜거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내일 주일은 마침 부활 주일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손질을 해도 그 원고의 설교는 부활 주일에 할 수 있는 설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칼빈은 설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의 말씀을 전달하실 때에, 모여 있던 백성들의 귀에 하늘에서 직접 천둥소리로 말씀을 전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직접 모습을 들어내시고 백성들에게 그 음성을 발하여 말씀하신다면 그 앞에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목사를 시켜 그때 그 장소에 모이게 한 성도들에게 필요한 말씀을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대독 설교를 하는 목사는 설교의 깊은 의미도 모르고 설교를 말씀하게 하신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 듣기를 원하는 성도와 아무 상관없는 설교를 시간 때우기나 헛된 칭찬을 받기 위해 아무 양심의 가책도 없이 사용한다. 이 일에 대하여 어떤 목사는 ‘돈만 내면 주일 설교를 위하여 수 편의 설교를 파는 선악과가 우리의 땅에 나타났다’라고 말했다. 이런 일에 설교자가 맛을 들이게 되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설교자가 아니고 남의 설교를 읽는 단순한 대독자(代讀者)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데 무슨 목사 모임에서 내가 이런 놀라운 일을 보았다고 했더니 젊은 목사들이 “목사님, 그게 뭐 잘못된 거예요? 목사들이다 알고 있는 일인데----. 우편으로 배달되는 설교는요 다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뿐이에요. 그런 좋은 설교를 자기 교회 성도들에게 해 주는데 그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그리고요 그렇게 설교하는 목사들이 많아요”라고 했다. 정말 우리 한국 교회의 미래가 암담해 지는 사고방식이 아무 여과(濾過)도 없이 만연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아찔했다.

설교자는 주님께서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마 24:45)라고 말씀하신 말씀에서 그 사명을 찾아 야 한다. 주님의 자녀들에게 때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하는 직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이런 귀한 은혜를 다른 사람이 만든 설교를 가져다가 강단에서 대독하는 일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짓이다. 이런 목사는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 책망 받은 개으르고 나태한 종이다. 설교하는 목사가 모래 위에 집을 세우듯이 무성의하고 손쉬운 방법으로 강단을 지키려 하는 것이 어떤 잘못인지를 모른다는 것이 정말 개탄할 일이다. 이렇게 상당수의 한국 목사들이 소명을 받은 자로서의 임무 수행을 너무 소홀히 여기고 설교의 신성한 의미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설교를 위한 땀과 눈물과 살아 있는 생명이 없다. 오히려 설교를 목회의 한 수단으로 삼거나 자기 인생 목표 달성 방편으로 삼아 성도를 이용하려 드는 목사가 많아진다. 바로 이런 목사들이 한국 교회를 병들게 한다. 설교자의 땀과 눈물과 피로 성도들에게 말씀의 은혜를 끼쳐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하는 일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미 완성된 누구의 설교를 우편으로 파는 상혼(商魂)이 목사의 심령을 무사 안일주의로 빠지게 하고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자신들과 전혀 상관없는 ‘상업적으로 만들어 진 설교’를 들으면서 그렇게 소중한 하나님과의 만남과 말씀의 은혜를 희생당하고 있다.

 

1.1.34. 인터넷 설교

 

인터넷은 모든 분야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인류 최고의 문명의 이기(文明의 利器)다. 목사가 인터넷을 잘 이용한다면 목회에 많은 도움을 받을 거이다. 그러나 모든 문명의 이기가 그렇듯이 잘못 사용하면 목회를 그릇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런데 나는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인터넷을 잘못 사용해서 목회의 질적 저하를 초래하는 경우를 보았다. 이런 현상은 특별히 설교에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인터넷에 실려 있는 설교를 그대로 받아 사용하는 것이다.

인터넷의 모든 기독교 싸이트에는 한결같이 설교 게시판이 있다. 그곳에는 각종 설교가 올라 있고 그것도 모자라 설교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싸이트에 연결해 주기도 한다. 그 연결 고리를 찾아 가 보면 수천 수만 가지의 설교를 아주 쉽게 접할 수 있고 그 설교들을 다운 받아 프린트해서 즉시 사용할 수 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전하는 전달자의 인격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그리고 듣는 성도들의 상황과 형편에도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다른 목사들이 선포한 설교를 마치 자기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 인양 설교를 한다면 아무래도 무엇이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마치 슈퍼마켓에서 잘 만들어진 만두를 가지고 식구들에게 먹이면서 '엄마의 정성이 깃들인 만두'인양 말하는 것과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설교는 설교하는 목사가 기도 많이 하고 말씀을 깊이 연구해서 만들어야 한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시간에 자녀들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찾아야 하고, 설교 듣는 성도들의 형편과 입장이 깊이 고려되어 그 시간에 그들이 듣고자 하는 말씀을 전하야 한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을 만족하게 해 드리고 설교 듣는 성도들의 심령에 믿음의 확신을 주고 생활에 활력을 넣어 주며,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목사는 한 번의 설교에 자기의 모든 인격과 사랑과 믿음과 열정을 담아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이것은 설교자의 특권이며 큰 축복이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께서 주신 고유하고 아름다운 특권을 다른 목사의 설교를 대독해서 스스로 낡은 녹음기 같은 짓을 한다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런 설교에는 설교자의 영혼과 성도들의 생명의 부딪침이 없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설교를 듣는 성도에게 전혀 현실감이 없고, 영적인 감동도 있을 수 없고, 인격적인 감화력도 없는 거저 귓전을 스쳐 들리는 설교일 뿐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나는 서울의 모 교회의 집사인 조카의 말은 우리 목사들에게 하나의 경고로 들렀다. “목사님들이 다른 유명 목사님들의 설교를 카피해서 설교하면 성도들이 모르나요? 우리 목사님이 저런 설교를 하지 못하시는 분인데 갑자기 저런 설교를 하는 게 이상하네? 그러면서 고개를 끄덕거리지요. 물론 실망도 하구요”

나도 몇 번인가 다른 목사의 설교를 대독하면서 설마 우리 성도들이 대독 설교 인줄을 모르겠지 라고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조카는 여지없이 대독 설교 목사의 그런 심리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목사가 대독 설교를 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①. 유명 목사가 그렇게 설교해서 목회를 잘하게 되었으니 나도 같은 설교를 하면 목회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②. 설교를 아주 잘하는 목사의 설교를 내가 대독했을 때 우리 성도들도 그 교회 성도들처럼 큰 은혜를 받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③. 가장 큰 이유는 좋은 설교를 하기 위해 많은 고민과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④. 아무리 정성 드린 설교라 해도 유명 목사의 설교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아무 유명 목사의 유명 설교라고 해도 대독 설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듣는 성도들에게 은혜가 안된다. 그것은 유명 목사의 설교가 대독 설교를 하는 목사의 교회 현실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목사의 대독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몇 번은 속아 넘어 가겠지만 얼마 되지 못해 설교 준비하지 않는 자기 목사의 약삭빠른 짓을 알게 되고 말 것이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내가 대독 설교를 하는 목사라는 것을 고백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려 나갈 때 사울의 갑옷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물 맷돌 던지기로 골리앗을 물리쳤다. 목사들은 맞지도 않는 다른 사람의 갑옷을 입고 잘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 때문에 자기 발전이 안되고 다른 사람들 보기에 웃음을 자아내는 피에로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처음에 인터넷이 마약과 같다는 말을 했다. 그렇다. 이런 식으로 모든 일을 쉽게 해결하려는 목사는 한 두 번은 양심의 가책도 느낄 것이고, 이런 일이 자기 발전에 큰 해악 된다는 것을 알고 자제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입맛 드린 쉽게 하는 버릇이 발동해서 기도 대신 컴퓨터 앞에 앉게 되고 펜을 들어 원고를 쓰는 대신 컴퓨터의 키보드를 두두리게 될 것이며, 그리고 순식간에 글자 화되는 프린트기 앞에서 ‘하나님, 오늘은 너무 바빠 할 수 없이 다른 목사의 설교를 참고합니다. 그러나 다음 주일 설교는 기도하고 주님이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받아 설교하겠습니다‘라고 맹세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도 바쁘고, 또 그 다음 주일에도 바빠서 프린트 앞에서 기도하다가 나중에는 ’이렇게 하는 것도 하나의 달란트다‘라고 이상한 감사 기도를 한다. 결국 인터넷 설교에 중독이 되어 이성적인 성경 연구도 없고, 하나님과 성도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도 없으며, 성도들을 살피는 발걸음도 생략된 체 온통 인터넷의 모든 지식과 정보와 설교들이 모두 자기 것인 양 착각하는 엄청난 오류에 빠지고 만다. 이런 사람은 결국 이렇게 말하며 자기를 합리화할 것이다. “나는 정보화 시대에 걸맞은 최첨단의 목회를 하고 있다. 일일이 책을 보고 지식을 얻어야 하는가? 그것은 한계가 있다. 인터넷에는 한계를 모르는 많은 지식이 있지 않는가? 노트 북 컴퓨터 한 개와 인터넷에서 내가 필요한 지식을 잘 찾아내는 검색 기술만 있으면 모든 지식이 다 내 것이다. 목회는 이렇게 첨단적으로 해야 한다. 설교도 마찬가지다. 착각하지 말라. 자기와 하나님을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만홀이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한 사람의 영혼도 구원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만일 그런 식으로 죄인을 구원하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었다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고생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지식을 계시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했던 사람들이 있음을 본다. 그들을 우리들은 선지자라고 한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지식을 인터넷이 아닌 직접적인 계시로 받아 그대로 죄인들에게 전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죄인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부족해서 하나님이 죄인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이 오셔서 죽으셨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는 우리 모든 목사와 성도들에게 ‘나를 따라 오라’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가를 우리 모두에게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우는 자와 함께 울며,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며, 죄인들과 함께 하며, 이곳 저것을 다니면서 식사할 겨를도 없이 복음을 전하시는 것이며, 밤을 세워 기도하는 것이며, 죄인을 사랑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연구도 없고, 그 말씀을 해석 책(주석)에 대한 탐구도 없고, 성경에서 감동과 감화를 받음도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기도도 없고, 성도들과 함께 아파하는 아픔도 없고, 성도의 즐거움에 동참하여 기뻐하는 기쁨도 없고, 이웃을 사랑하여 헌신 희생하는 섬김도 없이 오로지 인터넷을 구경 다니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할 것인가? 결국 첨단이라는 미명 아래 그리스도를 위한 조그마한 헌신도 거부하고 있는 첨단 목사와 성도들에게 우리 하나님은 무엇을 기대하실까?

 

이왕에 말이 나왔으니 여기서 한가지 아주 중요한 문제를 집고 넘어가야 하겠다. 강남에서 부목으로 있다 강동 어디에 교회를 개척해서 많은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어떤 목사는 미국의 유명 목사 설교를 많이 참고하여 설교한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그 목사는 많은 설교 책을 출판했는데 그 책에서도 그런 말을 한 것으로 안다. 그런데도 그는 아주 설교를 잘한다. 즉 유명 목사의 설교를 모방해도 설교를 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말이다. 나는 설교를 대독 설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방 설교를 말한다.

모방 설교는 어차피 설교하는 모든 목사들이 피할 수 없는 설교의 한 형태다. 주님의 설교와 사도들의 설교와 선지자들의 설교를 모방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모방 설교는 창조적인 설교 보다 위험성이 더 적고 안전하다. 그러나 모방 설교가 성도들에게 새로운 말씀으로 은혜 되게 하려면 고도의 무엇이 필요하다. 모방 설교에서 필요한 고도의 무엇에 대해서는 ‘성도들이 듣기 좋아하는 좋은 설교’에서 설명하겠다.

 

1.1.35. 다른 사람의 말만 인용하는 설교

 

내가 아는 어떤 목사는 설교 가운데 유명인 들의 말을 많이 인용한다. 그 분의 설교를 듣고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도 없고 자기 생각도 없이 오로지 유명한 사람들이 말만 있는 느낌을 가진다. 목사가 설교하면서 명언이나 금언들이나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설교를 기름지게 하고 짧은 말 가운데 가장 많은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이런 말의 인용이 크게 잘못되는 경우가 대단히 많이 있다. 설교는 하나님을 잘 믿으라는데 포인트가 맞추어져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대적했던 자들이나 교회를 극도로 핍박했던 자들의 말이 설교에 유익이 도는 말처럼 사용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불타의 말도 등용하고 공자 맹자의 말은 아주 즐겨 쓰이는 말들이 된다. 나와 동기 동창인 목사는 너무나 공자 맹자를 설교 가운데 많이 이용해서 공자의 이야기를 하는지 맹자의 이야기를 하는지 구분이 안될 정도였다. 그는 어려운 한문을 말하고 풀이하는 것을 아주 즐겼다. 그런 그의 심중에는 아는 자의 교만이 가득했으며 자기가 아는 것을 모르는 성도들에 대한 멸시가 있었다. 그는 결국 퇴계로 어떤 교회에서 시무 하다가 경기도 어디 시골 교회로 갔는데 그 후 소식을 전혀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복음을 듣고 은혜를 받으려 온 사람들에게 복음이 아닌 다른 무엇을 말해서는 안된다. 유명한 사람의 말을 인용할 때는 명언집(名言集)의 여기 저기를 찾아 필요한 단어를 골라 가며 인용하지 말고, 그 사람이 그 말을 하게 된 동기와 이유를 충분히 알아 써야 한다. 문학 작품을 인용(引用)하여 복음을 잘 설명하려면 그 작품 전체를 알고 인용해야 한다. 작품의 한 구절을 떼어 내서 인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인용의 신중 여하를 듣는 성도들이 결국 알게 된다. 인용에 대해서는 예화 사용하기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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