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6-17 20:56
[6] 듣기 싫어하는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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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8,721  

1.1.21. 외국어로 말하고 그 말을 해석하는 것.

 

목사가 외국어를 말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말이 좋기는 하지만 우리말로 설명이 안 되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랑이라는 말이 그렇다. 천국이나 지옥이나 낙원이라는 말도 그 중에 속한다. 사랑이라는 말의 차이는 이미 잘 알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천국이라는 말은 천국으로 안다. 그러나 지옥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는 불교의 지옥을 연상하고 낙원을 말하면 천국과는 조금 다른 세상으로 천국 가기 전에 임시로 머무르는 세상 정도로 안다. 케도릭식 사고 방식이다. 이럴 때 목사는 그 말을 설명할 필요가 있고 설명을 위해 그 말의 원래의 단어를 사용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어나 헬라어나 라틴어나 영어나 독일어나 다른 외국 언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는데 구태여 그것을 말하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외국어들은 주석에 얼마든지 나와 있는 단어들로서 누구든지 쉽게 찾아 사용할 수 있는 단어들이요 단어의 해석이다. 그런데도 성도들이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상한 외국어를 말하고 설명한다는 것은 성도들의 비웃음을 살 우려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성도들이 외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목사와 그렇지 못한 목사를 너무 잘 구분한다. 사용할 수 있는 사람, 즉 신학대학원의 교수가 영어를 말하고 간단히 설명하면 거부감을 느끼지 않지만 영어를 못하는데 영어를 잘하는 것처럼 설교 노트에 문장을 우리말로 기록해 말하고 설명한다면 비웃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영어를 잘하는 목사라고 생각해서 미국 사람이라도 오게 한다면 얼마나 망신을 당할까? 외국어는 가급적 안하는 것이 좋다. 우리 한국말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강단에서 누구든지, 그가 비로 신학교의 교수로서 영어를 아주 잘한다고 해도 안하는 것이 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덕이 된다.

내 조카는 아주 큰 교회를 다닌다. 그 교회의 부목은 미국의 어떤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교육학 박사를 받았다. 그 목사는 설교 중에 영어를 잘 사용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외국인을 위하여 영어로 설교하는 목사가 있다. 그 목사는 별 말이 없는데 미국에서 오래 살다 온 한 성도가 듣다못해 잔소리를 했다. 그 부목이 즐겨 사용하는 단어가 잘못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식한 단어 사용이 온 교회에 널리 널리 퍼졌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 목사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가 받았다는 박사 학위에 대해서도 이런 말 저런 말이 많았다. 그가 잘못 사용한 단어가 누군가에 의해 그의 박사 논문까지 검토하게 하는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리고 박사 논문을 본 그 성도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논문이라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 꼭 그 이유만은 아니겠지만 그 목사는 10년도 더 넘게 있었던 그 교회를 사임했다.

성도들은 목사의 한가지 허물을 목사가 가진 모든 허물이라고 생각한다. 무엇 때문에 안해도 되는 외국어를 해서 그런 부끄러움을 자초하겠는가? 우리가 우리말도 잘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옛 날에는 말을 잘하기 위해 수사학이라는 것을 배웠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목사들이 설교를 잘하기 위해 수사학을 공부한 사람이 있는가? 차라리 외국어를 할 것 같으면 그만 두고 말 잘하는 방법을 가르친 책이나 사서 탐독하는 게 훨씬 목회에 도움이 될 것이다.

 

1.1.22. 같은 말을 반복하는 설교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설교를 성도들은 듣기 싫어한다. 위대한 설교가라고 이름이 알려진 어거스틴도 필요 없는 말을 반복했다고 자신의 설교 이론에서 밝힌 바 있다 그는 그가 남긴 '크리스마스'라는 설교에서 동일한 대명사를 한 문장에서 12회나 사용할 정도였다. 이런 반복되는 말은 설교의 본질을 흐리게 하고 복잡하게 하며 지루하게 만든다. 더욱이 설교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말을 반복하는 목사도 있다. ‘에---에---’, ‘그리고, 그리고’, ‘일테면, 일테면’, ‘말하자면, 말하자면’, ‘에 또, 에또 가서는’, ‘그러므로, 그러므로’ 따위의 설교에 전혀 불필요한 말들이다. 설교자가 설교할 때는 그렇게 필요없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반듯이 실제 설교를 녹음해서 설교의 언어 사용에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을 고쳐야 한다. 이런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말의 사용은 듣는 성도들의 신경을 매우 거슬르게 하며 혼란스럽게 해서 설교가 은혜가 되지 못하게 한다.

1.1.23. 복잡한 말이나 고어를 자주 사용하고 해설하는 설교

설교자가 당하는 유혹 가운데 아는 체하려는 것이 있다. 이 유혹을 떨어버리지 못하면 필요 없는 유식(有識)을 자랑하게 된다.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말이나 고어, 외국어들이 바로 아담과 하와가 따먹은 동산의 과일이다. 설교는 설교자의 무엇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다. 가급적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듣는 성도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들을 사용해야 한다. 꼭 써야 할 전문적인 용어들은 아주 쉽게 풀어 아무 저항 없이 듣도록 요리해서 사용해야 한다. 설교자와 듣는 성도 사이에 의사 전달이 안되면 그 설교는 실패한 설교다.

 

1.1.24. 너무 심한 사투리와 방언 사용.

 

너무 심한 사투리와 지방 방언을 사용하는 것은 듣는 성도들에게 이질감을 불러일으키며 심한 경우에 협오 감을 준다. 그러나 가벼운 사투리와 호감이 가는 방언은 오히려 좋은 인상을 줄 수도 있다.

 

1.1.25. 반복 설교

 

반복 설교와 예화를 하지 말라. 똑 같은 자기 이야기를 반복하지 말라. ‘좋은 노래도 세 번 들으면 싫증이 난다’는 말이 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특별히 절기 설교는 그 내용이 모두 같고 짧게 해야 하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언제가 한 설교를 대충 대충 손보아서 설교를 재탕 삼탕한다. 성도들은 아무 표정이 없이 듣고 있지만 알 것은 모두 다 알고 있다.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 전하는 것은 잘 듣는다. 그 말씀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다윗의 이야기 같은 성경 인물에 대한 이야기와 사건의 이야기들은 수 백 번을 들어도 들을 수 있는 진리가 있다. 그러나 자기 이야기와 예화는 절대 그렇지 않다. 수 십년 전에 했던 예화를 성도들은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세 번만 자기 이야기를 하면 백 번도 더 많이 들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생각할 뿐 아니라 ‘우리 목사님은 설교 준비를 하지 않는 개으르고 나태한 목사’, ‘우리들을 무시하는 목사’라고 낙인을 찍는다.

 

1.1.26. 과감하지 못한 어정쩡한 설교

 

목사들이 설교하는 것을 두렵게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하고 듣는 성도들이 관심이 크기 때문이 아니라, 올바르게 전한 말씀에 대한 성도들의 저항 때문에 이런 현상이 생겼다. 이런 이유로 목사의 설교가 단호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현상을 가져 왔다. ‘여러분 새벽 기도회에 나와 꼭 기도하라는 말이 아니고 시간과 장소 구별 없이 언제나 기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정성을 다한 11조를 받으실 것입니다.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너무 바쁘신 분들은 언제 성경 말씀을 읽겠습니까? 요즘 시중에서 파는 성경 녹음 테이프를 사서 차를 타고 가시면서 듣도록 하세요.’ 이런 말은 수 없이 많다. 다 나쁨 말은 아니지만 시류(時流)에 편승한 목사의 어정쩡한 자세가 잘 나타나는 말들이다. 목사가 단호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고 핍박을 받는 것이 바른 태도라고 생각한다. 미리 겁을 먹고 개으르고 나태하며 자기 변명을 일삼는 성도들과 타협점을 찾아 흐리멍덩한 설교를 자꾸 하면 그 자체를 하나님께서 용납하시지 않으실 뿐 아니라 성도들도 싫어한다. 설교가 치유적이기도 해야 하겠지만 단호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는 도전적이고 심령을 뒤집어 엎는 설교도 할 줄 알아야 한다.

 

1.1.27. 아첨(阿諂) 설교

 

작금에 와서 목사들이 아주 즐겨 하는 설교는 성도들이 듣기 좋아하는 설교다. 그런데 그 설교들이 복음이 아니라 다분히 ‘아첨 설교’가 많다.

아첨 설교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우리가 목동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 고향 후배 한 가정이 합세를 해 주었다.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그 고향 후배 부부는 여의도에 있는 어떤 아주 큰 교회를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그 부인은 그 교회의 부 구역 장이었다고 해서 더욱 더 고마웠다. 한 사람 일군도 귀한 개척 교회에서 그렇게 큰 교회의 부 구역 장을 출신 집사를 얻게 되었으니 얼마나 큰 축복인가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부부를 즉시 집사로 임명하고 구역이 확장되었을 때 한 구역을 맡겨 구역 장이 되게 했다. 그런데 구역 장이 된 여 집사가 전혀 구역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닌가? 구역 관리를 위한 심방은 고사하고 구역 예배를 드리는 금요일이 되면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나나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구역 예배를 인도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를 기도시키면 안된다고 신신 당부를 했다. 몇 번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수요 예배 드릴 때 그 집사에게 기도를 하라고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기도를 하지 않아 눈을 떠보니 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그리고 더욱 더 가관인 것은 성경을 읽으라고 하면 성경을 찾지 못해 읽지 못하는 것이다. 완전히 초신자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사람을 부 구역 장으로 임명했을까? 나중에 기회가 있어 물어 보았다. 그 집사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자기가 그 교회에 등록 한 후 몇 달 후에 구역을 맡은 목사가 부 구역 장으로 자기를 임명하면서 ‘자매님은 정말 열심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엄청난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 열심을 가지고 교회 일을 안하면 어쩝니까? 부 구역장을 하십시오“했다는 것이다. 자기는 교회를 다닌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무 것도 몰라 거절했는데 담당 목사가 다시 말하기를 ”다른 사람도 알아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소리 말고 목사인 내가 하라는 데로 따라 하면 잘할 것입니다. 자매님이 교회 일을 안한다면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할 만한 성도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일이 별 것이 아니로구나 생각되기도 하고 따라 다니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데 못할 것이 무엇인가 싶어 허락을 했더니 선물도 많이 주고 사람들이 부 구역 장님이라고 불러 주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집사가 마지막 내게 한 말은 “내가 꼭 성경을 일고 기도를 해야 하나요. 목사님만 따라 가면 되고 누가 기도하면 아멘 하면 되지 않아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감투를 씌어 자기 교회 교인을 삼으려고 그런 수작을 해서 사람 병신을 만들다니. 내가 만나 본 그 교회 교인들은 대체적으로 상당히 교만했다. 마치 자기가 그 큰 교회를 만든 것처럼 생각되는지 우리 같은 작은 교회 목사 알기를 아주 우습게 알고 목사를 자기 교회 주일학교 교사 정도로 취급하는 것을 몇 번 경험하고 아에 상종 못한 인간들의 집단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성도들에게 아첨하는 목사들, 아첨 설교, 초신 자에게 그렇게 믿는 것은 아주 잘 믿는다고 칭찬하여 그 심령을 죽이는 목사들이 있다. 무엇을 얻자는 짓인가? 잘못된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에 진노하시지 않는 너그러운 분이시라고 거짓 말을 하고, 개으르고 나태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성도들을 앞에 놔두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복을 주실 것이라고 장담한다. 성도들의 작은 헌신에 터부니 없는 축복 약속,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지 아니하신 것만도 감사해야 할 사람에게 과장된 칭찬들, 주님의 이름으로 가짜 싸인이 된 근거 없는 약속들,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을 공수표의 확신들이 모두 목사가 가진 아첨의 목록들이다.

바른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바른 말씀을 가르치지 못하면서 성도들의 비위를 맞추면 성도들은 처음에는 좋아할 줄 모르나 양들이 목자를 아는 것처럼 결국 아첨꾼 목사를 알아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런 목사 곁은 떠난다. 성도들에게 아첨해서 교회가 성정하고 부흥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바른 복음을 전하므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성장하도록 해 주셔야 바른 교회가 된다.

목사는 성도를 사랑하되 두려워 말며, 성도들을 양육하되 죄와 의와 심판을 가르쳐 양육하고, 성도들이 죄는 모양이라도 버리도록 돌보는 그런 종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설교했다고 쫓겨나면 이슬과 바람을 마시면서라도 잘 살 수 있게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실 것이다.

 

1.1.28. 성도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비유나 말의 표현

 

내가 개포동에서 목회를 할 때 있었던 일이다. 설교를 마치고 성도들이 돌아가는데 한 집사가 매우 불쾌한 표정으로 인상을 쓰며 인사도 하지 않고

나가 버렸다.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내가 설교를 하면서 무슨 실수를 했는가 해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설교를 잘못한 것 같지는 않았다. 본인에게 왜 기분이 나빴는지 물어 볼 수도 없고 며칠 동안 심란해 하다가 함께 우리 교회를 나오는 그 언니 집사에게 왜 기분이 상했는지를 알아보게 했다. 언니 집사가 며칠 후에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해 주었다. 지난 주일에 설교 가운데 사람을 더러운 벌레로 비유해서 기분이 아주 나빴다는 것이다. 그러나 설교를 하는 목사가 어떻게 사람을 벌레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주일에 내가 선택한 본문은 시22편인데 6절 말씀인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라는 말씀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실 때 그 처지가 벌레와 같이 비참해 지셨다는 말씀이다. 내가 이 말씀을 인용하여 한 말씀은 “주님께서 벌레와 같이 되셨음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벌레와 같이 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들이 벌레와 같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니 벌레가 아니라, 그 보다 더 못한 비참한 신세를 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 말에 기분이 상했다고 했다. 사람을 벌레로 비유했다는 것이다. 오해도 이만 저만한 오해가 아니다. 그 여 집사는 서울에 있는 어떤 유명 대학교의 미술 대학을 졸업했고 남편은 어떤 상선 회사의 중역이었다.

그 여집사가 교만해서인지 아니면 내 설명이 부족해서인지 알 수 없으나 여하튼 성도들은 자기들을 비하하는 듯한 비유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설교들을 듣기 싫어한다. 이런 자존심이 훼손되었다는 성도들의 생각을 나는 바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만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이지 그렇지 못했다면 세상에서 어떤 처지에 있던지 간에 지옥의 형벌을 면치 못할 죄인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점점 더 성도들은 오만하고 교만하여 자기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설교를 듣기 싫어한다. 그럼으로 같은 말씀을 설교할 때에라도 이 점을 주의해야 한다. 우선 충분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같은 말이라도 ‘아’와 ‘어’가 다르므로 자극적이고 기분 상하지 않는 표현을 해서 충분히 말씀의 진의(眞意)를 전달할 수 있는 실력과 성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1.1.29. 저속한 비유와 강력한 표현들

 

내가 어떤 교회의 집회를 참석했다. 그런데 설교하는 목사가 유치하고 저속한 비유를 말해서 몹시 기분이 상해서 그 자리에서 빨리 나오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을 정도로 언짢은 마음을 달래야 했다.

그 목사가 한 비유는 이런 것이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 누나의 젓꼭지를 보고 싶어서 목욕하는 누나를 훔쳐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것이 그렇게 보고 싶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고 싶던 여자의 젓꼭지를 장가를 가고 보니 날마다 볼 수도 있고 만지고 빨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마 그 목사는 어렸을 대에 그런 호기심을 가졌던 모양이다. 자기가 그렇다고 다른 사람도 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인지, 아니면 그런 비속하기 짝이 없는 말을 해서 듣는 사람들의 무엇을 자극하려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정말 들어 줄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첨단적인 예화나 하고 있는 것처럼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자신감이 넘치는 태도로 말하고 있었다.

어떤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강원도 어디를 다녀오는데 그 깊은 절벽에서 차가 뒹굴었어요. 아우성이 터지고 사람들이 죽어 너부러졌습니다. 창자가 튀어나온 사람, 머리가 박살 난 사람, 손과 발이 절단된 사람-------”

우리 동네에 있는 교회를 갔더니 목사가 월남에 선교 여행을 다녀왔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월남 전쟁 때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말도 못합니다. 사람이 그냥 죽은 것이 아닙니다. 아이 밴 임산부를 죽였는데 아이를 엄마 뱃속에서 꺼내서 땅에 떼기를 처서 죽이고 그것을 다시 엄마 자궁에 밀어 넣었다고 합니다. 또 땅에 대창을 수 십개 세워 놓고 그 위로 사람을 집어 던져 창자가 터지고 뼈가 으깨어져 죽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 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살인자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있는 성도들이 한없이 불쌍했다. 그들은 일주일에 한 번 하나님의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먹고 새 힘을 얻기 위해 교회를 찾아 온 것이지 살인자의 악귀(惡鬼) 같은 모습을 이야기 듣고 싶어 온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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