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6-17 20:55
[5] 듣기 싫어하는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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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7,917  

1.1.14. 주제가 많은 설교.

 

목사들은 설교에 욕심을 가진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되 많은 것을 충분히 잘 전하려 한다. 이런 생각은 매우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한 설교에 주제를 몇 개씩 설정하고 설교하면 듣는 사람이 혼란스러워 하고 무엇을 말하는지 종잡을 수 없게 되어 머리 아파한다. 목사가 설교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요한 복음 3:16절에는 성경 말씀의 모든 중요한 진리가 함께 들어 있다. ‘하나님’이라는 말은 신론이고, ‘세상을’하는 말씀은 인죄론이며,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는 말씀은 기독론이다.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라는 말씀은 교회론 이며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구원론이다. 그런데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신론도 기독론도 얼마나 그 범위가 넓고 그 진리가 심오한가. 그런데 목사가 이 말씀을 본문으로 선택해서 설교를 할 때 모든 것을 다 말하려 하면 정말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이 말씀에서 한가지만 설명하고 설교하기도 사실 쉽지 않다. Reuel L. Howe는 수백 개의 설교 테이프를 듣고 성도들과의 토의를 거친 뒤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회중 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목사가 설교에 너무 많은 사상을 포함시키고 있다고 불평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많은 사상들이 너무 복잡해서 자신들의 삶과 의미 있는 연결을 시킬 수가 없다고 한다“라고 했다.

설교의 주제는 한가지만 해야 한다. 두 가지도 많고, 세 가지는 혼란하며, 네 가지는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한가지도 알아듣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머리가 아파 다시는 설교들을 생각을 못하게 한다.

 

1.1.15. 대지와 소지가 많은 설교.

 

20-25분 동안 설교를 하는데 대지와 소지가 많으면 아주 혼란스러워진다. 설교하는 목사는 설교를 질서 있고 알아듣게 하기 위해 대지와 소지를 설정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설교의 대지와 소지는 원고에만 있어야 한다. 첫째, 둘째, 둘째의 첫째 소지는 ---. 이렇게 설교하면 듣는 사람은 설교 내용 보다 대지와 소지의 숫자를 세는데 신경을 쓸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할 때는 대지, 소지를 말하지 않고 물 흐르듯이 설교를 해서 앞뒤의 말씀과 내용이 잘 연결되도록 해야 한다. 대지는 많으면 세 가지 정도로 하고 적으면 한가지만 해도 좋다. 특히 대지 가운데 소지를 나누고 그것도 모자라 소 소지를 나누어 설교를 한다면 정말 설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혼란스러울 것이며 나중에는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게 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 혼란스럽게 대 소지를 나눈 설교가가 있다. 그 유명한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문이 그렇다. 그러나 그 목사는 설교할 때 대지, 소지를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듣는 성도들은 그 목사의 설교 원고가 그렇게 복잡하게 나누어진 대 소지를 가졌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은혜를 받는다.

대. 소지를 나눌 때는 반드시 다른 색연필로 표시를 해서 설교자가 혼란을 일으키지 않게 해야 한다.

 

1.1.16. 싫증이 나고, 지루하며, 재미가 없는 설교

 

틸리케는 “우리의 설교가 이제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닿지 않고 있으며 선명하지 못하고 지겹기만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의사 소통이 안되는 중요한 원인들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재미없고 지루한 설교는 성도들로 하여금 설교에 염증을 내게 하며 흥미를 잃게 만든다. 그리고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바로 설교자 자신이다. 설교가 싫증 나고 재미없는 증거는 아주 쉽게 판단된다. 설교를 듣는 성도들이 대부분 졸고 있으면 바로 그것이 재미없는 설교에 대한 무언의 질책이라고 받아 들여야 한다. 졸고 있는 성도들 깨우기 위해 종을 치고 강대 상을 칠 필요가 없다. 졸리지 않도록 설교를 하면 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목사의 설교에 흥미를 잃은 이유를 찾아 개선하지 않으면 밤 낮 잠만 자야 하는 목사가 되고 말 것이다.

 

1.1.17. 알아듣기 어려운 설교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학문적인 면에서 전문적으로 공부 한 사람이다. 그럼으로 전문 지식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목사의 전문 분야인 신학을 설교에 자주 이용하는 버릇이 있다. 이런 신학을 말할 때에 목사는 아주 잘난 척하기도 한다. 듣는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가 신학을 아느냐’라는 말투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련한 목사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신학을 말하되 신학이 아닌 성경으로 풀어 말한다. 성도들도 목사에 뒤지지 않을 만큼 알 것은 다 안다. 그들이 신학교를 다니지 않았을 뿐이지 수 십년 동안 설교를 듣다 보면 신학도 알고 성경도 안다.

그런 성도들을 앞에 두고 목사가 “인죄론이라는 것은. 신론이라는 것은, 신학적인 입장에서 칼빈을 어떻고 루터는 어떠하며, 발트는 어떠하다.”라고 하면 듣는 사람 가운데 속이 뒤틀린 사람들은 “칼빈이고 루터고 발트고 좋아하시네. 빨리 끝이나 내시지”하면서 주보에 안경 쓴 목사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한다.

신학 뿐 아니다. ‘무슨 무슨 적(的)’이라는 말을 쓰지 말라. 철학적, 과학적, 의학적, 예술적등 가급적이면(여기서 나도 그 버릇이 나온다) 적, 적, 쩍, 쩍하지 말라. 그런 전문적인 지식을 아주 평소에 말하는 일상 용어로 바꾸어 알아듣기 싶게 바꾸어 말하는 고도의 표현 기술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용되는 전문 용어에 대한 해박하고 확실한 지식이 있어야 할 것이다. 부모가 어린 자식들에게 일상적인 대화 중에 ‘무슨 무슨 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강단에 올라가기만 하면 자기가 무슨 대 학자나 된 것처럼 연신 ‘무슨 적, 어떤 적’을 찾으니 듣는 성도들은 공부를 하는 것 같아서 머리가 아프다.

 

1.1.18. 말의 뜻이 분명하지 않는 설교

 

말은 하나님이 자신을 세상에 드러 내는 가장 좋은 도구다. 그리고 그 도구는 사람의 말을 통해 나타난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쓰이는 형태의 언어가 바로 설교다. 설교는 설교자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죄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게 하는 아주 중요한 매개체다. 그리고 설교는 말로서 이루어진다. 말은 입에서 나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다른 형태의 말도 있다. 몸짓으로 하는 말이 있고 음악이나 그림이나 다른 어떤 매체를 이용한 말도 있다. 그렇지만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는 입의 말이다. 설교자의 설교도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여 이루어진다. 그런데 설교자의 말이 분명하지 않고 그 의사 전달이 확실하지 않는다면 성도들은 은혜를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말 잘하기를 위해 특별한 공부가 필요하다. 옛날에는 수사학이라는 것이 있어서 말 잘하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다. 그렇다고 말 잘하기를 배우지 않고 천연적인 말투와 어투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쉴새없이 말 잘하기를 연구하고 배워야 한다. 그런 학원을 찾아 가 배우고 국어 사전을 옆에 놔두고 말의 바른 사용법을 배워야 한다. 긴말을 짧고 간결하게 하는 법을 배우고 같은 말이라고 상대방에게 감동과 기쁨과 확신을 줄 수 있는 말 잘하기를 배워야 한다. 사람이 자기 생각을 상대방에게 바로 전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성공의 방편이다. 그것은 목사에게도 마찬가지다. 언어로 전달되지 않는 의사를 위해 설교자는 바디 렝게쥐(Body lange)를 연구하고 배워야 한다. 눈 마추기(Eye contact), 표정 관리, 손놀림, 발의 움직임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한시간 동안 설교했는데 내용 구성이 잘못되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 없어 지루해 하는 것 보다 설교하는 목사의 종잡을 수 없는 말투는 정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가져다 준다. 호소적인 설교, 결단을 촉구하는 설교, 회개를 말하는 설교, 헌신를 말하는 설교, 사랑의 고백 설교, 위로와 치유의 설교들이 모두 한결 같은 어투로 설교된다면 그것은 이미 설교가 아니라 연설이다. 설교 가운데 논술, 전개, 사건 설명, 대화, 이야기, 베드로가 물에 빠져 죽게 되었을 때에 구원을 바라는 화급한 소리, 귀신 들린 아버지의 말,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을 대에 주변 사람들의 놀라는 말들이 한결같이 같은 음성과 어휘로 되었을리는 없다. 입체적인 언어 구사법을 훈련하라. 그래서 듣는 성도들이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눈을 감고 있으면 그 상황이 눈에 보이듯이 설교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구와 노력이 있어야 할까?

 

1.1.19. 말하고 그 말을 해석하는 잔소리 많은 설교.

 

설교의 초보자들은 어떤 말을 하고 그 말을 다시 설명하는 일이 있다. 그렇게 되면 그 설명하는 말은 대개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한데 결국 그 아까운 20분 동안에 말하고 설명하느라 다른 말씀 전할 시간이 짧아지고 그 설명은 잔소리가 되어 버린다. 설명할 때 쓰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잔소리’ ‘다시 말하면---- 잔소리’ ‘ 이 말에 대하여 누구누구는 이런 설명을 했다----잔소리’, ‘본문에 말씀하신 이 말을 내가 생각해 보니 이런 말이다---- 잔소리’ ‘일테면----잔소리’

설명을 할 필요 없이 설명하는 말을 먼저 하면 얼마나 좋을까? 만 부득이 설명을 해야 하거든 아주 짧게 알아듣기 쉬운 말로 해야 한다. 설명이 길어지면 하나님의 우리 사랑하심도 잔소리로 듣게 되어 버린다. 그런 설교를 듣고 나가면서 성도들은 “우리 목사님은 우리들이 다 아는 이야기를 왜 그렇게 잔소리로 말하는지----졸려 혼났네”라고 한다.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와서 목사의 설교를 듣고 혼이 나가면 되겠는가?

말을 많이 해야 설교자의 의사가 잘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잔소리가 된다. 적게 말하고 강력하며 생생한 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이라고 말하고 이제까지 한 설교를 다시 설명하고 계속 말하면 듣는 사람들이 짜증을 낸다.

 

1.1.20. 확신이 없는 말투와 불필요한 언어 사용

 

설교자의 확신 없는 말투는 그 정도가 참으로 심각하다. 그런 말투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것입니다"와 ‘같습니다’가 있다. 조그만 신경을 쓰고 듣고 있으면 설교 중에 이런 말들이 거침없이 무수히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여야 할 것입니다’,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되는 것입니다.’, ‘기원하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는 것입니다.’

또 확신이 없는 가정법의 언어사용이 심각하다. ‘인 것 같습니다.", "싶습니다.", ’짐작됩니다.‘같은 말들이 그것이다. 언제부터서 인가 이런 말이 우리 사회에 대 유행을 하고 있다.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 ’이 꽃은 정말 아름답다‘라고 말하지 않고 ’아름다운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의 이런 ’것입니다‘와 ’같습니다‘의 말 버릇은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 도저히 부합되지 않는 말들이다.

설교자는 언제나 확신이 차고 넘쳐 한다. 여기서의 자기 확신이란 자신의 신념이나 성격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자신을 통해 성도들에게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는 확정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설교하는 중에 "---인 것 같습니다.", "---인 듯싶습니다"등의 표현을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리성을 흐리게 한다. 이런 말버릇을 가진 목사는 "예수님께서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기도해야 주신다는 말인 듯 싶습니다.“ 또는 ”기도하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라고 한다. `---인 것 같다'는 완전한 추측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고 `--싶다' 역시 관형어 아래에 `듯' `성'들과 함께 쓰이어 추측을 나타내는 말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추측으로 전할 수가 있을까? 설교자 자신이 `이 말씀은 이 뜻이다'라는 확신이 없으면 그 메시지는 전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확실한 말씀을 설교자가 어정쩡한 표현으로 전하면 받아들이는 성도들은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 불 확실과 혼란만 가져 올 뿐이다.

일상적인 말버릇의 잘못 보다 그 정도가 훨씬 더 심각한 목사도 있다.

‘오늘의 이 말씀을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석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발트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글쎄요, 이 말씀의 뜻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생각은 그 뜻이 성령님의 말씀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각자 적당히 해석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도저히 들어 줄 수 없는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말들은 설교에 전혀 사용할 수 없는 말들이다.

설교에 사용해서는 안되는 말 가운데 ‘--라고, --라는’ 것도 있다. 이 말은 인용격 조사(따옴 자리토씨)로서 분별없이 사용할 때 그러한 폐단이 나온다 예를 들면 ‘성경은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 와야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우리가 항상 기뻐해야 한다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라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들이다. 이런 문장에 '---라고', '---라는' 등등의 인용격 조사가 사용되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한다라고"는 "---한다고"로 바로잡고, "---한다라는"은 "한다는"으로 바로잡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즉 ‘성경은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 와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라고 해야 한다.

이상의 경우는 거의 습관에서 울어나는 부작용이다. 어떤 설교자는 설교자의 단순한 분석이나 지식의 전달보다는 좀더 광범위하고 객관적인 자료를 인용하려 한다. 이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그럴 때는 이상과 같은 인용격 조사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습관화되어서 필요 없는 곳에서까지 이러한 말들이 사용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그런데 목사가 이런 세세한 언어사용 방법까지 공부하고 생각하며 사용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우리 한국말의 토씨와 형용사와 접두어와 접미어의 사용이 너무 어려워 여기에 대한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정확한 언어 사용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듣는 사람은 잘못된 언어 사용으로 인해 이질감을 느끼게 되고 은혜를 받는데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설교자는 최소한 언어의 사용에서 이질감을 유발하지는 말아야 한다. 가급적이면 설교자는 쉬운 말을 사용하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므로 단호하고 결정적인 어휘를 구사해야 한다. 그리고 문장을 짧게 해야 같은 말이라도 힘이 있고 듣는 사람이 잘 알아듣는 효과를 가져온다. 한 문장에 ‘그리고, 그러나, 그러므로,,---하였습니다 만, 같은 접두어를 계속 사용하면 설교의 진의가 흐려지고 혼란스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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