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6-17 20:54
[4] 듣기 싫어하는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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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7,704  

1.1.10. 발전 없는 목사의 설교

 

1960년대 후반에 클라이드 리드(Clyde Reid)는 ‘설교의 위기(Empty Pulpit)’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는 여기서 강단이 비어 있다는 말(empty pulpit)을 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설교가 없는 교회 강단을 의미한 말이 아니라, 오히려 목사가 설교를 하는데도 좌석에 앉아 있는 성도들은 말 할 수 없이 허전해 하고, 전혀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며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심각한 곤경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은 ‘비어 있는 강단’이 아니라, 더욱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설교의 몰락' 또는 '설교의 임종'이라는 슬픈 비판들이 등장했다.

이와 같이 된 가장 큰 이유는 목사들이 설교에 대해여 공부하지 않으며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되어진 결과다. 한국 목사 특히 앞으로 교회를 책임지고 나아 갈 젊은 목사들이 ‘하나님의 바른 종’되기 위해 공부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 단적인 증거가 있다. 인터넷 싸이트 가운데 회원이 1,500명이 넘고 매일 접속하는 사람이 500명이 넘는다는 싸이트 운영자를 만났다. 젊고 의욕이 넘치는 강도사는 목회에 대한 유익한 세미나를 교통이 좋은 지역에서 그 분야에 실력 있는 강사 목사들을 초청하여 가졌다. 그는 적어도 1,500의 회원들 가운데 1/10인 150명은 오지 않겠는가 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회비를 한푼도 받지 않는 목회 세미나에 참석한 사람은 겨우 10여명이었다. 강도사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목사님, 요즘 목사들은 공부하려 오라고 하면 안 옵니다. 그 대신 인터넷에 동영상을 띄우면 많이 봅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내가 Moksa 홈을 운영하면서 설교 게시판을 이용해 이런 광고를 한 일이 있었다. “나는 30여년 동안 설교를 했습니다. 그 경험을 살려 설교 분석을 해 드리겠으니 혹 원하시는 분이 있으시면 설교 원문을 이 메일로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책이 기록되어 있는 친구 목사의 설교 한편을 분석해서 올려놓았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반응이 좋지 않았다. 겨우 한 분 목사가 자기 설교를 보내 와서 분석해 보내 주었을 뿐이다. 물론 나의 이런 잘난 척하는 짓이 가소로워서 반응이 없었겠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목사들이 설교를 배우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아니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쩐 일인지 나는 목사들이 자기 나름대로 설교에 대해 달관(達觀)했다는 인상을 깊이 받았다.

물론, 오늘의 한국 교회 설교 사역은 아직도 건제(健在)한 면이 많다. 선진국의 교회에서 볼 수 없는 목사의 뜨거운 기도가 있고 생사를 걸고 뛰는 목회의 열심히 있다. 그리고 아직도 순교의 피가 우리의 바닥을 흐르고 선교의 뜨거운 열기가 쉬지 않은 교회가 우리 교회다. 어떤 땅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심취성(深醉性)이 강한 성도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아직도 앞에서 열거한 설교의 위기 요소에 물들지 않은 맑고 귀한 목사들이 우리의 한국 교회를 지탱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만족해서는 안된다. 세상에서는 생존 경쟁이 살아남기 위해 새벽부터 저녁까지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 목사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뛰고 설교하는데 이 작업이 얼마나 많은 정성과 노력을 요구하는지 알아야 한다. 안일과 자만은 목사 자신과 가족과 교회와 이 사회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동시에 파괴시키는 무서운 사단의 병기다.

 

1.1.11. 현실성이 없는 설교.

 

이런 설교는 설교하는 목사가 성도의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생긴다.

내가 잠시 몸담아 있던 노회에서는 이상한 풍속이 있었다. 노회 때나 매월 모이는 교직자 월례회에 예배를 드리는데 설교하는 목사가 언제나 고정되어 있었다. 고정된 설교자는 회기(會期)의 노회 장이다. 그런데 그 해 노회 장은 나이도 40이 넘었고 목회도 상당히 오래 한 목사인데도 설교가 전혀 은혜가 되지 않았다. 목사가 노회 목사들을 앞에 두고 설교를 할 때에는 자기 나름대로 자신이 있는 말씀을 전하겠는데 늘 핵심이 빠진 뜻한 설교를 했다. 우선 그 설교가 상당히 어려웠다. 어려운 문제를 다루고 있을 뿐 아니라, 어렵게 표현하고 목사들의 현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를 주제로 했다. 또 한가지는 그 설교가 자기의 설교가 아니라는 점이다. 누군가 유명 목사의 설교를 노트에 기록해 와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설교의 주제와 내용이 듣는 목사들의 요구와는 너무 많이 빗나가고 있는 것이다. 아마 지난 주일에 교회에서 설교한 설교를 그대로 가져 와 설교하는 것 같았다. 노회 목사들이 모였으면 목회를 어떻게 잘 할 수 있는지를 말해야 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목회하고 있으니 위로와 격려가 있는 설교를 해야 하는데, 그 목사는 으레 어디서 그런 주제를 가져오는지 ‘성도들의 애국심’ ‘우리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주제로 장황한 설교를 했다.

현실감이 떨어지는 설교는 목사에게 참으로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다. 설교가 듣는 사람들이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고, 관심도 없는 주제를 다루고 있거나 전혀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를 한다면 그 설교는 따분하고 지루하기 그지없는 연설이 되고 만다. 나는 그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언젠가 목사의 설교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연구가 노회 적으로 있었으면 생각했지만 아깝게도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다.

가정의 달 5월에 목사들은 가정 문제, 자녀와 교육 문제들을 설교의 주제로 해서 설교한다. 그런 설교들은 성도들 모두에게 아주 교훈이 되는 설교들이다. 그것은 모든 성도들이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Reuel L. Howe는 수백 개의 설교 테이프를 듣고 평신도들과의 토의를 거친 뒤에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회중 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이의 없이 너무 많은 사상을 설교에 포함시키고 있다고 불평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많은 사상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질 때에 그것들은 너무나 복잡해서 자신들의 삶과 의미 있는 연결을 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현실감 있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그 자료를 심방 하면서 찾거나 부 교역자들과 이야기하면서 얻든지 아니면 장로나 성도들과의 대화에서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수많은 정보들을 얻을 줄 알아야 하고 그것을 가장 적절히 사용하여 설교에 반영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성도들이 그 짧은 25분 동안의 시간에 무엇을 듣기 위해 교회를 나오는지, 그리고 그 짧은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말씀을 성도들에게 하시고 싶어하시는지를 알고 설교하는 중책이 목사에게 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고 성도들도 듣고 싶어하지 않는 설교를 매 주일 하고 있다면 그 목사를 틀림없이 목회 생명이 단축될 것이다. 사람들이 그런 목사를 배척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그를 강단에서 몰아 내실 것이 뻔하다. 아니면 성도 모두를 다른 곳으로 이주시킬 것이다. 이런 설교는 풍요 가운데 말씀의 기근을 가져 와 성도를 영적 아사지경(餓死地境)으로 내몬다.

 

1.1.12. 연설 같은 설교

 

우리가 신학교를 다니면서 소위 설교학이라는 것을 배운다. 그런데 그 설교학이라는 과목이 얼마나 엉성하고 배울게 없는지------ 그것을 배웠다고 해서 설교에 대하여 달인이 되었다든지 아니면 설교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가졌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병아리 목사들은 대게 설교를 연설하는 것처럼 한다. 연설 같은 설교는 우리가 교회에 가서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설교를 말한다. 평소에 쓰지 않는 이상한 목소리, 평소의 대화와 다른 높은 말소리, 일상 생활에서 쓰지 않는 언어들과 표현 방법, 얼굴 표정, 몸놀림이 동원되는 그런 설교를 말한다. 그야 말로 사람이 이상하게 변해서 소리를 지르고 평소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한 모습으로 줄줄이 연설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선거 철에 유세(遊說)하는 후보자들이 연설하듯 하는 설교를 말한다.

강남의 어떤 교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는 아주 맹랑한 교육을 한 일이 있었다. 부흥사가 되기 위한 교육이다. 교육 과목 가운데 부흥사 목소리 만들기가 있었는데 그게 좋은 목소리를 쇳소리가 나게 만들어 듣기 거북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목사의 목소리가 쇳소리가 나는 것은 기도를 많이 하고 설교를 힘있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인데 여기서는 아에 그렇게 목소리를 망가뜨리고 새롭게 만들어 성도들을 기만하는 짓을 했다. 그곳에서 교육을 받은 목사들이 변질된 듣기 싫은 목소리를 얻어 얼마나 부흥사로 태여 났는지 모르지만 그런 모조품 부흥사가 우리 한국 교회에 활개를 친다면 우리 목사들은 점점 설 땅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런 일상 생활과 다른 목소리와 표현들과 몸놀림은 듣는 성도들에게 설교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없게 하고 지루하게 만들어 설교가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조바심을 일으킨다.

주님의 설교를 자세히 연구해 보라. 그야말로 주님은 연설이 아닌 설교를 하시지 않는가? 늘 하는 일상 대화를 연구해 보라. 우리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성도들과 일대일의 대화를 하는 것처럼 설교를 하라. 대화 식 설교는 배워야 한다. 한경직, 곽선희, 옥한흠, 김삼환 목사님들의 설교를 참고하라. 그 분들의 설교를 모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분들의 설교와 여러분의 설교 차이를 모르겠거든 여러분의 설교를 녹음하거나 녹화해서 비교 해 보라. 그러면 확연히 구별이 될 것이다. 무엇이 대화 설교 인줄 모르겠거든 텔레비전 드라마 가운데 목사가 나와 설교하는 장면을 탤런트가 연기하는데 그 때 그들의 말하는 것을 자세히 보고 들으면 대화식 설교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글은 잘하는 설교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1.1.13. 긴 설교.

 

설교를 길게 하지 말라. 20분 내지 25분 정도면 족하다. 그런데 이 짧은 시간에 어떻게 성도들의 마음을 움직여 은혜를 받게 할 것인가?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시간은 20분 정도라고 한다. 20분이 지나면 말이 청취되지 못하고 귓전을 때리며 흘러 버린다고 한다. 60-70년대는 설교를 길게 했다. 친구 목사는 부흥회를 가서 10시부터 시작한 낮 성경 공부를 오후 4시까지 계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이미 옛 날 이야기다.

문제는 이렇게 인색하고 짧은 시간에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가 되도록 설교하는가 이다.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점에 대한 설명을 이곳에서 다 할 수 없어 따로 설교 잘하기에서 말하겠다. 좋은 설교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즉 감동과 감화력을 가진 설교를 말한다. 나는 일반 대중 가요를 부르는 사람들의 노래에서 설교에 대한 많은 것을 배운다. 그들은 3-5분 동안 노래를 부르는데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는지 얼굴과 온 몸에 땀이 난다. 그렇다고 그들이 땀이 날 정도로 큰 소리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감동하게 한다. 그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청소년들은 혼절하기도 하고 어른들은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한번만 들은 노래가 아니고 수 없이 많이 들어 알고 있는 노래지만 가수들이 부를 때는 감동되어 울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노래를 다른 사람이 부르면 장난이 되고 만다. 왜 그런 차이가 생길까? 목소리가 좋아서인가? 물론 그런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노래를 부르는 그들이 그 노래를 부르기 위해 수 천번 노래 연습을 하고 거기에 자기들의 모든 인격과 영혼의 힘을 불어넣어 부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노력으로 감동을 주지 못하면 유명한 가수가 될 수 없고 성공할 수가 없다. 3-5분 동안 사람이 듣고 즐거워하는 노래를 부르는데도 이토록 노력하고 심혈을 기울이는데, 하물며 죄인을 살린다는 목사들이 20-25분 동안 죽은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분명 이는 이사야가 말한 ‘개는 개로되 짖지 아니하는 개’와 같을 것이다.(사 56:10)

이 글은 읽는 목사들이 설교를 아주 잘해서 사람들을 변화하게 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기를 바란다. 성도들은 목사의 설교에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으면 그 교회가 이층이던 지하실이던, 임대 교회든 성전을 가진 교회든, 크던 작던 가리지 않고 그 교회를 찾아가게 될 것이다. 암사동에 있는 어떤 아파트 단지에서 아주 잘 생긴 목사가 상가를 분양 받아 교회를 개척하고 5,000만원이라는 큰돈을 들여 인테리어를 잘했다. 누구든지 그 교회를 처음 나왔을 때는 놀라면서 마음 들어 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린 후에는 다시 그 교회를 찾지 않았다. 그래서 그 교회는 개척한 후 2년이 넘었는데도 의자가 텅텅 비어 있다. 이유가 무엇인가? 목사가 성도들이 듣기 싫은 설교만 골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처럼 하루 종일 설교해도 들을 만한 설교를 할 수 없거든 설교를 길게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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