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6-17 20:53
[3] 듣기 싫어하는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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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8,483  

1.1.6. 목사의 착각적 과신(過信)

 

인간이란 자신이 행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일의 효율을 극대화 할 수 있다. 그리고 일정한 일을 오랫동안 계속하면 그 분야에 전문인이 되어 스스로 진전시킬 수 있는 요령과 기술이 터득된다 그렇게 되면 누구의 추종도 불허하는 자신의 고유한 영역의 가진 도사(道士)의 경지에 이른다. 설교 사역도 같은 맥락에서 설교에 도사가 된 목사가 있다. 이렇게 설교 도사가 되었다고 자부하는 목사는 강단에 설 때 넘치는 자신감을 가지고 유창한 설교를 펼쳐 나아간다. 그 자연스러운 몸놀림과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달변에서 성도들은 목사의 전문성과 그 성스러운 직책에 대해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아멘을 연발하면서 그 설교에 심취된다. 실제로 나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전국에 부흥회를 다니는 어떤 목사가 설교에 넘치는 자신감을 보인 일을 보았다. 그는 우리 교회에 부흥 목사로 초청을 받았을 때에 “김 목사 이번 부흥회에 어떤 점을 강조했으면 좋을 것 같아.”라고 질문했고 “하나님의 말씀만 전해서 성도들이 은혜 받게만 해 주세요”라는 주문 대로 그렇게 설교를 했다. 물론 원고는 한 장도 없었다. 그 목사는 건축이면 건축, 전도면 전도, 기도면 기도, 헌신이면 헌신, 모든 우리 기독교의 전문 설교에 대단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현상 앞에서 어떤 설교가도 자신의 부족에 대한 무엇을 알지 못하며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설교에 자신이 넘치는 목사도 자기 설교를 비디오에 담아 스스로 볼 필요가 있다. 나도 남 못지 않게 설교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내 설교에 아주 실망한 일이 있었다. 친구 교회에서 장로, 집사, 권사의 임직식에서 설교를 맡아 하게 되었는데 모든 예식을 비디오로 찍었다. 며칠 후 찍은 비디오 테이프를 보내 왔다. 나는 무척 반가워하며 그 테이프를 보게 되었는데 얼마 후 크게 실망해서 끄고 말았다. 내가 설교한 장면 대문이다. 25년도 더 넘게 설교한 내 모습이 겨우 저 정도인가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우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신경을 건드리는 놓은 목소리였다. 밀을 할 때마다 너무 많이 노출되는 아랫 이(耳)도 그랬다. 잘 한다고 며칠씩 준비한 설교 내용도 혼란스러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한가지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아내는 잘하고 있다고 했다. 100% 마음에 들지 않는 목사의 설교를 잘하는 설교로 듣고 있는 아내와 성도들은 그 동안 어떤 은혜를 받았을까? 정말 나 자신에 대한 감정이 참담했다.

자신의 설교가 나처럼 만족스럽지 못한 목사가 많을 것이다. 반대로 만족한 목사도 있을 것이다. 그런 목사는 얼마나 좋을까? 이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내 설교의 모습을 다시 보기 싫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히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설교 모습을 보고 자기가 만족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끌어올리는 노력이 있어야 발전한다. 이런 자각과 개선을 위한 노력이 없는 목사들은 착각적 과신의 늪에 빠져서 스스로 만족하며 설교를 한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설교의 교조적(敎條的)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도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교만의 자리에 둥우리를 틀고 안주해 버린다. 평생을 설교학 교수로 살았던 일리온 죤스(Ilion Jones)는 조각가 도발드슨 (Thorvaldsen)의 말을 연상하면서 "목사가 자신의 설교에 만족할 때 그는 스스로 내리막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목사가 자신은 초보 단계를 벗어난 완벽한 설교자라고 자랑할 수 있는 시간은 결코 오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완벽한 설교를 추구하는 설교자는 있으나 완벽한 설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설교학에서 반복하여 가르치는 말이다.

그런데도 자신의 설교가 최상의 단계에 이른 것 마냥 믿고 더 이상의 발전을 추구하지 않은 착각적 과신의 주인들이 우리의 한국 교회에 강단에 너무 많이 서 있음을 본다. 진정 설교의 자만과 교만에 빠져 있는 목사에게는 성령의 도움이 떠나고 다음의 말씀만 그 귀에 들려줄 것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성도들은 이런 교만한 자의 거만한 설교를 극도로 싫어한다.

 

1.1.7. 외식하는 목사의 설교

 

우리 한국적 상황과 인식에서 성도와 세상 사람들은 아직까지 목사에 대한 어떤 기대감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진실한 양심이며, 정(正)의 척도며, 죄인이 찾아 갈 마지막 구원의 길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목사에 대하여 그런 기대를 가졌다고 해서 그들의 기대대로 목사가 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최근 들어 이런 의문과 회의(懷疑)는 더욱 더 깊어져서 과연 우리 사회가 목사에 대하여 무엇을 기대하고 잇는가를 의심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어떤 목사가 한국 교회의 평신도를 대상으로 연구 조사한바 있는 「설교 사역자에 대한 평신도의 의식구조 분석」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답을 얻었다. "귀하가 아는 설교자들에 대하여 생각할 때 그들의 설교와 삶의 연관성이 어떠하다고 보십니까?" 여기에 대한 응답자의 80.2%가 "완전치는 못하지만 설교대로 살려고 노력한다."고 하였고, 10.3%는 "설교자는 설교하는 대로 생활한다."라고 대답했다. 이러한 응답의 비율은 서구 교회와 비교해서 월등하게 높은 비율이다. 그런데 이 조사를 한 목사는 이런 현상은 “이 땅이 유교 문화의 영향권에서 오랫동안 정착해 온 결과로서 도덕성의 강조와 선비의 고결한 인격성에 대한 높은 기대가 그대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즉 우리 민족의 전통적 사고 방식에 의한 답이지 설교하는 목사가 실제로 말씀대로 살고 있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한 대답은 아니라는 말이다.

설교하는 목사에 대한 기대가 이처럼 너그럽고 관대한 사람들의 대답을 그렇다고 해도 목사 스스로가 하나님 앞과 자기 양심 앞에서 이 질문에 대한 솔직한 대답을 해 보아야 한다. 정말 가장 고결한 성직자인 목사가 자신이 전달한 메시지를 먼저 실천하는 본을 보이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대단히 부정적으로 대답이 나왔다. 최근 들어 이런 자책(自責) 섞인 대답이 나오는 것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목사들이 각종 바람직하지 못한 행태에서 기인된다. 성전에서의 살인 사건, 밀수에 가담한 목사들의 이름, 그리고 외화 낭비에 선두 주자로서의 목사의 생활, 외국 신학교의 분교를 설치하고 박사 학위를 남발하는 주범들, 출처를 알 수 없는 박사들,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간음과 모략 중상들의 사건들이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현상은 오늘의 설교 사역을 가장 멍들게 하는 치욕적인 사건들이다.

설교자가 가져야 할 아름다운 모습은 주님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과거 우리 한국 교회가 인구 비례 3%의 성도들이 나머지 97%의 국민을 선도했던 대의 목사 상은 남다른 것이었다.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헌신적이고 검소한 생활의 주인이었으며, 원수를 용서하고, 밤을 세워 나라와 민족의 죄 짐을 지고 통곡하며, 생명을 바쳐 애국 애족을 실천했다. 풍기는 인격에 있어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고결한 품성과 지식을 소유한 것이 한국의 목사들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목사는 물질의 풍요를 앞서서 누리는 상류 사회의 생활인들로 변화되고 그러치 못한 몇몇의 목사들은 그 계층에 들어가기 위해 온갖 작태를 벌이고 있다. 그리고 어떤 목사는 자기는 죄인이지만 주님의 말씀은 바로 전한다 하면서 자기가 선포한 설교와 자기의 생활의 이질 현상(異質 現狀)을 아주 당연한 것처럼 미화(美化)하고 있다. 어떤 부흥 목사의 부인이 하루는 부흥회를 인도하는 남편에게 찾아 와 모든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집에 가면 마귀가 되고, 교회에 오면 천사가 되니 나는 천사와 같이 살고 싶다’면서 강단에 이불을 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늘 설교는 천사처럼 하면서 살기는 마귀처럼 사는 목사가 없는지 생각해 보자. 그리고 이로 인해 생기는 우리 한국 교회의 비극이 얼마나 클지도 헤아려 보자. 주님의 경고처럼 우리는 모두 망하고 말 것이다.

 

1.1.8. 자기를 주님과 선지자로 말하는 설교.

 

내가 만난 다른 목사는 엄청난 비교를 했다. 그날의 설교는 본문이 엘리야가 아합에게 쫓겨 로뎀 나무 아래서 죽기를 소원하는 말씀(왕상 19:4)이었다. 목사는 이 말씀을 본문으로 성도들이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말을 바꾸었다. 자기가 엘리야와 같은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겼으며 낙심된 일을 당했다고 하면서 엘리야가 죽을 고통에서 하나님을 믿고 승리한 것처럼 자기도 그렇게 승리했다고 했다. 물론 목사와 성도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엘리야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승리하자는 말은 정말 잘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목사는 자기도 몇 번씩이나 엘리야와 같은 낙심을 했다고 몇 번씩 강조해서 말했다. 그 목사는 인제 겨우 40대 중반이 이었는데 어떻게 자기가 엘리야와 같은 고통을 당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금 어느 누가 엘리야와 같은 고통을 당한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그런 고통을 당하자고 해도 그런 고통을 주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는 없다. 그런데 그는 자꾸 자기가 엘리야와 같은 고통을 당했다고 하면서 성도들에게 자기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승리하라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우리들을 주님과 비교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하나님과도 비교하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망령된 이야기를 아주 거리낌없이 설교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설교하는 목사가 스스로 하나님만큼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겨지는 무의식적인 망말인 것이다.

이런 설교는 듣는 사람들, 특히 인생의 경험이 풍부한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정말 듣기 싫은 정도가 아니라 역겨울 정도다. 나이가 40인 사람이 60인 사람에게 자기를 본 받아 세상을 살라고 해서는 좀 이상하다. 가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목사는 자기를 낮추고 드러내서는 안된다. 어디 설교가 목사를 본 받아 살라고 가르치는 것인가? 하나님을 본받고 그리스도를 본받고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본 받아 살아야 한다고만 말해야 한다. 혹 성도들이 목사를 본받자고 해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과 주님과 엘리야는 모두 우리와 비교될 수 없는 분들이다. 목사가 강단에 선다고 하나님이 되고 그리스도가 되고 사도가 되고 선지자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1.1.9. 목회의 수단과 방편으로 이용되는 설교

 

설교가 목회의 수단이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젊은 목사들에게 혼란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많은 목사들이 설교를 설교의 근본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고 있고 이런 일이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설교가 목회의 한 방법으로 된 예는 수없이 많다. ‘설교를 잘해야 교회가 부흥된다.’. ‘이번 부흥회에서는 우리 성도들이 은혜를 많이 받아 성전 건축 헌금을 충분히 해야 한다’. ‘설교를 잘하는 목사’ 같은 말들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말들로 들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왜 이런 말들이 잘못된 발상과 인식에서 나온 말인가는 설교의 본질을 헤아려 보면 금방 판단된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설교자인 목사를 당신의 자녀들 앞에 세워 말씀하게 하시는 것을 말한다.」 설교에 대하여 이 이상의 무엇을 말해서는 안되며, 이 이하의 무엇을 말해서도 안된다. 그러므로 ‘설교를 잘 해야 교회가 부흥된다’는 말은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했더니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였다는 의미로 정립되어야 한다. ‘설교를 잘 하는 목사’라는 말도 마찬가지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잘하는 설교’, ‘설교 잘하는 목사’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시대적 상황에 따라 바로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작금(昨今)의 성도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씀만 있지 않다. 잘 못 믿는 자에게는 잘 믿으라 하시고, 죄인에게는 회개하라 하시며 회개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신다. 이미 받은 축복이 크니 늘 감사하고 충성하라고 하신다. 세상 무엇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하라고 하신다. 온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라 하시며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고 하신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시고 주님을 위해 생명을 바치라고 하신다. 성경 이야기에서 말하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칭찬보다는 경고가, 받는 축복보다는 헌신이, 선별된 지식보다는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지식이, 자신보다는 이웃이 그리고 하나님이, 미움과 다툼과 시기 질투보다는 사랑과 이해와 용서가 훨씬 더 강조되고 있다. 그런데 설교하는 목사가 이렇게 더 많이 강조된 죄 문제, 의무와 책임, 헌신과 희생, 자기 이익 보다 하나님을 위한 충성 등을 강조한다면 그 목사를 설교 잘하는 목사라고 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설교 잘하는 목사’의 정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는 설교자라는 정석(定石)대로 해석되지 않고, 듣는 성도들의 기분을 즐겁게 해 주는 설교자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설교를 아주 잘하는 목사라고 해서 모셔 왔는데 성경의 말씀대로 비례해서 설교를 한다면 성도들은 결단코 그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즉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설교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하루아침에 ‘설교 못하는 목사’로 매도되어 이삿짐을 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설교의 엄격한 의미에서 ‘설교 잘하는 목사’라는 말은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누가 전하던지 바르게 전하면 전하는 사람이 목사든 어린 아이던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으로 힘이 있어야 한다. 발람은 당나귀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크게 놀랬다.(민 22: )

설교는 기본적으로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설교자 개인의 불편한 심기를 표현하거나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편이 될 수 없다. 설교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발산하는 무대가 될 수 없고 회중을 선동하여 자신의 개인적인 집단으로 만들 수 없고 이익을 추구할 수도 없다. 이런 관점에서 설교자가 교회 성장을 목표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성전 건축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현대의 소수의 목사들에 의하여 설교의 본질적인 성격이 퇴색하고 있다. 어떤 목사는 자신의 무식과 개으름을 숨기기 위해 신비주의를 도입하기도 한다. 방언과 예언의 신비한 현상을 유도하여 그것이 말씀 위에 군림하도록 하는 것이다. 또 어떤 목사는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제어하고 지배하기 위한 방법으로 설교를 사용한다. 그런 목사는 자신의 권위를 절대화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상대를 저주하기도 한다. 이럴 때 그는 자기가 하나님이 된 것처럼 착각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강단이 헌금을 모금하는 금고로 변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들을 설교가 목회자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다고 말한다. 한 때 우리의 목사 사회에서는 부끄러운 이야기들이 오고 갔었다. 부흥 집회를 위하여 강사를 모실 때 특유한 방법으로 헌금을 많이 하게 하는 강사를 초빙했다. 그 때 강사는 자신과 교회가 집회 중에 거두어 드린 수입을 어떻게 분배해야 한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혹시 지금도 이런 파안무치(破顔無恥)한 일이 없는지 모르겠다. 생각하면 얼마나 한국 교회 강단이 철저하게 탈선하고 있었는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어떤 형태든 설교가 목사의 야망 달성을 위한 목회적 수단으로 이용되는 효과적인 이기(利器)로 전락된다면 거기에는 밝은 내일이 있을 수 없다. 오직 어둡고 침울한 장래만이 있을 뿐이다. 설교는 "은혜의 효율적인 방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지 결코 목사의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또는 정신적 피곤을 풀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진정한 설교는 "죄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시고 다시 살리신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생명의 선물을 전하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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