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6-17 20:52
[2] 듣기 싫어하는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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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7,698  

1.1.3. 왜곡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의의가 있을 수 없는 정설이다. 그러나 오늘 날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상황에 맞추어 해석되는 일이 많다. 즉 자기를 선전하거나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며 어떤 경우에는 생계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농담거리로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돌려 치려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땅에 글을 쓰신 일이 있으셨는데 그 글을 보고 살기 등등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그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묻기를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한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와 재미를 본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했기 때문에 자기 이름을 본 사람들이 놀라 도망을 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함께 낄낄거리며 웃는다.

우리들의 도덕적인 양식으로는 자기 아버지를 농담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그런데 강단에서 목사들이 성도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하나님과 주님을 농담거리로 삼는 일이 있다. 목사의 농담은 주님을 비하하거나 놀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절대 이런 짓을 해서는 안된다. 주님의 심각한 말씀과 행동이 이런 식으로 격하되어 농담의 소재가 된다면 성도들은 분노할 것이다.

지져스 크라이스트라는 뮤지컬이 이화 대학의 강단에서 공연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공연을 보며 극찬을 했다. 그리고 그 후에도 몇 번인가 그 뮤지컬이 어디선가 공연되었다. 그런데 그 뮤지컬의 내용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연인으로 사랑했는데 그 사랑이 열매 맺지 못했다는 슬픈 내용이다. 주님의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베푸신 더 찾아 볼 수 없는 사랑이 한 여자의 사랑을 받아 주지 아니한 비정하고 매몰찬 사랑으로 묘사가 되고 그 사랑을 얻지 못한 타락한 여인의 슬픔으로 묘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 공연에 대하여 우리 기독교에서는 어느 누구도 의의를 제기하거나 그 잘못된 짓을 꼬집어 항의하고 말하지 않았다.

우리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여름 성경 학교를 하게 되었는데 우리 전도사가 강사를 한 사람 초청해 왔다. 그는 우리 나라에서 뿐 아니라 동남아 일대를 다니면서 어린이 집회를 전문적으로 인도하는 유명 강사라고 했다. 그는 주로 인형극을 공연했다. 나도 전도사의 그런 소개를 듣고 상당히 기대를 하며 그의 공연을 보았는데 그 내용이 주님의 이름으로 사단을 물리치는 것이었다. 처음에 그 공연을 보면서 약간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으나 내일은 내용이 달라지겠거니 하고 두고 보기로 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다음 날도 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 쫓아내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물론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아이들은 분위기를 한껏 잡고 음산한 목소리로 인형극을 진행하는 그 전도사의 이야기에 함빡 빠져들었다. 3일 동안 진행된 여름 성경 학교의 중요한 집회 시간이 이렇게 귀신 쫓아낸 이야기로 50%나 사용되고 말았다. 나는 그를 더 이상 집회를 못하게 돌려보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그 인형극을 보고 난 뒤 얼마나 그 인형극이 충격적이었는지 다른 배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단아 물러가라”라는 말만 외쳐 대고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 장사하는 사람들은 장사 속으로, 정치하는 사람들은 정치 속으로, 지식을 가졌다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자기들의 종교적인 척도(尺度)로, 각각의 사람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현상이 정말 두드러지게 만연되고 있다. 기독교 안에서도 이단에 속한 무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자기들을 합리화하기에 급급하다.

성도들은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무엇을 얻고자 하는 설교를 극도로 싫어한다. 목사의 이런 설교를 듣고 함께 웃고 즐기는 것 같지만 되돌아서서 ‘오늘도 쓸데없는 잡소리만 들었다’라고 입을 삐죽인다. 하나님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말씀이 전해지지 않고 왜곡된 말만 계속 전한다면 그는 목회 생명이 단축될 것이다.

이것을 우리들은 정말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고 그 말씀을 그 말씀으로 받아들여 그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고자 자기를 성찰하고 개선해서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없도록 설교해야 한다. 성도들은 그런 설교를 원한다. 흥미 위주의 설교를 하지 말라. 호기심을 만족시키거나 새롭고 충격적인 무엇을 주려는 유혹을 여지없이 떨어 버리라.

 

1.1.4. 잘못된 성경 해석.

 

목사가 설교나 성경을 가르치면서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왜냐하면 성경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다 알다 싶이 신학교에서 배운 성경은 성경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것으로서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과 몇 가지 사례를 배웠을 뿐이다. 즉 신학교에서 성경 전체를 알 수 있도록 배운 것도 아니고, 부분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완전한 지식을 배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신학교를 나온 목사들이나 성도들은 신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성경을 아주 잘 알 것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인정해 준다.

더욱 더 웃기는 것은 목사가 정통적인 보수 개혁 신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성경 해석에 엄청난 오류가 있어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목사가 이단적인 요소가 있는 신학교를 나왔다면 그가 바른 성경 해석을 했더라도 무조건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것이다. 즉 목사가 어느 신학교 출신인가에 따라 잘못된 성경 해석도 바른 것이 되고, 이상한 신학교 출신이기 때문에 바른 것도 그릇된 해석으로 매도되는 것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일들이 우리 한국 교회에 비일비재(非一非再)하여 가장 보수적이라는 교단의 강단에서 가장 들어 줄 수 없는 성경 해석이 난무하는 경향이 있다.

150여명이 모이는 교회의 목사가 가정 주간에 설교를 했다. 나는 특별한 기회가 있어 그 설교를 들을 수가 있었다. 목사는 요셉이 애굽에서 고생하다가 성공한 이야기를 본문으로 설교를 했는데 아주 큰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그 목사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온갖 손짓 몸짓을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가 낮추었다 하면서 듣는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정말 열정적인 설교요 혼신의 힘을 다한 설교를 했다. 목사의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목사의 유도에 따라 연신 아멘을 외쳤다.

그러나 그 설교는 크게 잘못된 설교였다. 목사는

“요셉이 애굽에 팔려 가 그렇게 견딜 수 없는 고생을 했어도 꿈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고생을 견딜 수 있었고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우리도 꿈을 가지고 노력하고 우리 아이들에게도 꿈을 가지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게 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그럼으로 지금 현실이 답답하고 어렵다고 해도 낙심하지 말고 꿈, 즉 희망을 가지고 살아서 요셉처럼 크게 인생을 성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축원 소리에 성도들은 화다닥 놀라 큰 소리로 “아-멘”을 외쳤다. 더욱 더 가관인 것은 설교 후에 하는 목사의 기도였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든 성도들이 요셉처럼 큰 희망을 가지고 인생을 크게 성공하게 해 주시옵소서. 아멘” “아 멘” 언 듯 보기에는 그럴듯한 설교요 기도지만 이런 설교는 하나님의 복음이 아니며 그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기도가 아니다. 사람이 역경 중에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하는 말이다. 희망과 성공 사이에 꼭 있어야 할 하나님 없어 복음이 아닌 ‘적극적 사고 방식의 강연’인 것이다. 이것은 인본주의적인 값싼 연설에 불과하다.

요셉이 꿈을 꾼 것은 하나님이 꿈꾸게 해 주신 꿈이지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생각하는 이상과 꿈이 아니며 희망 사항이 아니다. 그리고 요셉이 노력을 해서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이 아니다. 사람의 노력과 인내심에 의해 성공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약속을 이루기 위해 미리 애굽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명철에 의해 성공하게 된 사람이니 곧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요셉의 일생에 가장 중요한 단어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와 늘 함께 하셨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셨으며 요셉은 그런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이 본문의 설교는 ‘사람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축복하심과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니 믿음의 생활을 잘해서 요셉과 같은 축복을 받고 살아야 한다’고 설교해야 한다. 그런데 그 목사의 설교에 이런 하나님과 요셉의 관계가 한가지도 언급이 되지 않았다. 오직 사람이 이상과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면 요셉과 같이 성공할 수 있으니 낙심하지 말라고 강변했다. 이것은 설교가 아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니다. ‘인생이 성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을 붙일 만한 연설인 것이다.

어떤 목사가 주님이 오시기 전에 어린아이를 밴 여자에게 화가 있으리라는 말씀을 가지고 “어린아이를 잉태했다는 것은 죄가 많다는 말씀이다”라고 해석했다. 이 해석은 60년대에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것을 강조하며 다닌 부흥 목사들이 단골로 쓰던 공갈 협박용 성경 해석이었다. 어린아이 잉태한 것을 죄가 많다는 것으로 해석해 버리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많은 문제가 생기는지 아는가?

이런 목사가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말씀 해석의 오류는 결국 그 목사의 목회 생명을 단축하게 한다. 성도들이 목사의 말씀 실력 없음을 알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을 지라고 하나님께서 그대로만 두고 보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나에게는 지난 30여년 동안의 설교 노트가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그 설교 노트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기가 겁이 난다. 그 설교 가운데 얼마나 성경을 잘못 해석한 설교들이 있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목사들이 언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던가? 몇 번이나 성경을 통독하였으며 그 말씀에서 은혜를 받고 감격 감사하여 눈물을 흘린 일이 있던가? 진실로 ‘달고 오묘한 그 말씀’이라는 찬송가가 마음에 와 닫는 신앙 고백을 해 본 일이 있는가? 사단은 목사의 성경 무식을 틈타고 들어 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신령한 강단을 자기 말을 전하게 하는 무대로 사용하고 있다. 목사들은 그런 사단의 장난에 놀아 난 일은 없는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자.

우리 노회에 수 십년 동안 중으로 있던 분이 개종하여 목사가 된 사람이 있었다. 나이가 50이 넘어 개종한 그 분은 어떤 중소 신학교를 나왔고 목사가 되어 우리 노회에 가입했다. 하도 귀한 목사라고 생각되어 어떤 여 전도사가 결혼을 자원해서 오붓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런데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그 분이 고생하는 것을 보다 못한 노회 목사들은 그 목사를 초청해 사경회를 하고 생활비를 도와주기로 묵시적인 약속을 했다. 그래서 나도 순서대로 그 목사를 초청해 집회를 하기로 했다. 특별한 목사가 집회를 인도한다 하니 성도들이 많이 모였다.

그런데----- 그 목사가 하나님의 강단을 차지하고 무슨 짓을 했는지-----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열심히 설교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설교가 아니었다. 그의 이야기는 주로 그가 승려로 어떤 생활을 하다가 목사가 되었는지를 말하는 것인데 승려로 있을 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이틀 동안 계속했다. 예를 들면 불교 승려들이 깊은 경지에 들어가면 고승이 되는데 그들은 앞으로 되어질 세상일을 모두 잘 안다는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인 육여사가 시해(弑害)를 당하기 전에 서울의 모 사찰의 주지는 이미 그 날짜를 다 알고 있었으며 죽는 모습까지도 알았지만 천기를 누설할 수 없어 말하지 못하였다고 말했다. 그는 불교의 경지가 깊어지면 천하는 움직일 수 있는 힘도 얻는다고 말했다. 그 외에도 불교의 경전인 팔만 대장경이 어떻고, 목사 되기는 쉽지만 정식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수련과 고행을 겪어야 하는 가라는 등 도무지 그가 목사인지 고승인지 구별을 알 수 없는 말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수 십년 동안 불교의 승려로 살았다. 그러나 목사 된지는 겨우 일년밖에 되지 않았고 그의 개종은 3년을 넘지 못했다. 그러니 아는 것은 불경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한 것뿐이다.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석가의 말인 것이다. 그는 아직도 석가의 제자로서의 탈을 벗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목사의 이야기를 들은 우리 성도들은 머리가 아파했다. 강단에서 보는 우리 성도들의 모습은 사단에게 직격탄을 맞고 정신을 잃어버린 졸병들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집회를 도중에 중단하고 그만 두게 했으며 노회의 여러 교회에 집회를 취소하도록 했다. 나중에 그 분이 부천 어디에선가 교회를 개척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아직 소식을 모른다.

성도들은 이런 엉터리 성경 해석과 다른 이야기들을 듣고자 하여 교회를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해야 말씀의 능력이 살아 성도들에게 은혜가 되는 것이지 잘못 해석된 말씀을 전해서는 영적으로 혼란스럽고 시험을 당하게 된다.

 

1.1.5. 목사 자신을 말하는 설교.

 

설교를 듣기 원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역동적인 복음을 듣기 원한다. 그런데 어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착각한다. 성도들은 이런 목사의 자기 이야기를 싫어한다. 목사의 자기 자랑이나 자기 선전을 하지 말라.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전하는 '말씀의 사자'다. 이러한 관점에서 칼빈은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은 대사’라고 했다. 그리고 칼 발트도 설교를 정의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선택한 설교자를 통하여 인간들에게 들려주신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라고 했다. 그래서 설교는 언제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해석하고, 삶의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힘을 주어야 한다. 한국의 신학 교육의 초창기부터 설교학을 가르쳤던 곽안련 교수는 "목사는 성도에게 마치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아는 바를 너의 말하겠다.'와 같은 태도“는 절대 금물이라고 했다. 그러나 오늘의 어떤 목사들은 이런 설교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자기 이야기를 마치 하나님의 복음 인양 전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의 이야기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설교의 주어는 성삼위(하나님, 예수님, 성령님)로 분명하게 구성되고 그 뜻을 밝혀 주고 적용을 해주는 것이 올바른 설교의 본질이다. 이럴 때만이 메시지의 주인이 주님이 되시고 설교자는 말씀을 전하는 단순 도구의 역할을 하게 된다. 만일 어느 누구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설교의 주체로 한다면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대게 자기 이야기를 복음처럼 말하는 목사들을 보면 사실상 별 볼일이 없는 일들을 대단한 일인 것처럼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말하고 그것을 본 받으라고 강요한다. 그들은 자기가 빈곤한 가정의 출신이라든지 아니면 청년 떼에 엄청난 고생을 많이 했는데 오늘 이렇게 여러분에게 설교를 하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든지 하는 따위의 유치하고 보잘 것 없는 자기 성공담을 말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어느 누가 그런 설교 아닌 이야기를 듣고 있겠는가?

우리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말을 수 없이 거듭 반복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선지자들의 말씀 선포를 예로 들어 설교를 하자면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말의 뜻은 바로 이런 말씀입니다.". 또는, “우리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그 뜻은 이러한 의미를 가집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를 말합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착각 잘하는 목사는 이 말씀을 “제가 길을 가는데 어떤 노인이 짐을 지고 가셔서 그 짐을 대신 져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노인이 대단히 기뻐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해서 복음이 아닌 자기 이야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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