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7-09 07:13
성경 속 식(食)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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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6,269  

성경 속 식(食) 문화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세 가지 요소가 ‘의(衣), 식(食), 주(住)’이다. 의식주는  지리와 기후, 민족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이며,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 자료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우리의 의식주는 성경 속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식주와 큰 차이가 있다. 때문에 성경이 기록된 시대의 상황을 올바로 알려면 시대와 공간의 다리를 건너 당시의 의식주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식’ (食) 은 모든 인간에게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욕구이다. 같은 나라라도 지방마다 뚜렷한 차이를 보이며 다채롭게 펼쳐지는 문화이기도 하다. 성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식문화를 사용한 다양한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이스라엘의 ‘식’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누룩 넣은 빵, ‘유교병’은 왜 성전에서 금지됐나?

인류의 식문화는 ‘쌀 문화권’과 ‘밀 문화권’으로 나뉜다. 벼 농사는 관개시설로 물을 공급하고 피를 뽑는 등의 작업에 밀 농사에 비해 2배 이상의 노동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쌀 문화권의 문명은 가족주의, 공동체주의를 발전시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형성했다. 반면 밀 농사는 자연강우만으로 가능하며 소요되는 노동력이 적다. 지력을 크게 소비하므로 반드시 휴경이 필요하다. 따라서 밀 농사권의 문명은 개인주의와 대규모 밀을 사고 파는 상업 발전으로 이어졌다.

가나안과 메소포타미아 등이 있는 고대 근동 지역은 모두 밀 농사권에 해당한다. 우리가 읽는 개역 성경이 번역되던 당시, 선교사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빵을 주식으로 먹는다는 말이 이해가 안되는 것을 고려하여 ‘빵’을 ‘떡’으로 번역하였다. 이 번역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지만, 성경에 기록된 모든 ‘떡’이라는 단어는 빵에 해당한다.

곡물은 날것 상태로는 소화가 어렵고 몸에 많은 에너지를 주지 못한다. 그러나 곡물을 구우면 소화가 훨씬 쉬워지고 에너지 전달이 용이해지며, 더구나 누룩을 넣어 빵으로 발효시키면 훨씬 부드러워지며 맛도 더 좋아진다. 고대에는 포도주 찌꺼기나 물로 반죽해서 발효시킨 보리, 빵 반죽에서 일부를 떼어내 발효시킨 것을 누룩으로 사용하였다. 이 누룩을 사용한 빵을 ‘유교병’이라고 한다. 오늘날 ‘페타 빵’이라고 부르는 근동 지역의 쫄깃한 빵을 가리킨다. 누룩을 넣은 빵은 훨씬 맛있고 부드럽지만 쉽게 부패된다. 그래서 성전에서는 누룩을 넣은 빵은 엄격히 금지됐다(출 23:18, 34:25, 레 10:12), 긴급한 상황이나 음식 보관이 용이치 못한 경우에도 누룩 없는 빵을 먹었다(출 12:34, 신 16:3). 

 

고기 요리

구약 시대에는 레위기에 기록된 정결법에 따라서 정한 것만을 먹을 수 있었다. 가장 흔히 먹는 육류는 메추라기나 닭 등의 조류였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를 먹고 싶다는 불평을 듣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추라기는 우리나라의 메추라기와 동일한 종으로, 본래 무리를 짓는 철새이다. 20cm 남짓의 작은 몸집으로 대륙 사이를 오가는 메추라기는 맞바람을 만나면 더 날지 못하고 땅에 빽빽하게 착륙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이 진을 친 광야로 수만 마리의 메추라기가 내려오는 장관이 떠오른다. 닭은 가축화가 쉽고 달걀을 제공해줄 뿐 아니라 고대 사회에서 새벽을 알리는 시계의 역할을 했기에 고기 이상의 가치를 가졌다.

조류 이외의 대표적 육류는 소, 양, 염소였다. 돼지는 굽은 있으나 새김질을 하지 못하는 부정한 짐승이라 먹지 않았다(신 14:8). 잡식성이라 버려진 것을 먹어치우는 개와 돼지는 지저분하고 혐오스러운 짐승으로 여겨졌다(마 7:6, 벧후 2:22, 참고-눅 15:15-16). 반면, 대부분의 이방인들은 음식물 찌꺼기를 처리하고 많은 단백질을 공급해주는 돼지를 귀히 여기고 우상에 제물로 바쳤다(사 65:4, 66:17).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돼지고기를 더욱 혐오하게 만들었고, 훗날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지성소에 돼지피를 뿌린 사건은 마카비 혁명을 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결한 짐승인 소나 양, 염소는 고급 식재료로 여겨졌고, 그 중 송아지 고기는 최고로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 사용되었다(창 18:8, 눅 15:23). 치즈나 버터 역시 일찍이 보급되었다(삼상 17:18, 삼하 17:29). 양과 염소 고기 중 양 꼬리는 최고의 부위로 여겨졌다. 이스라엘의 양은 꼬리가 매우 굵었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책에서는 ‘가나안 지역의 양은 꼬리가 엄청나게 굵어 목자들이 작은 수레를 만들어 달아놓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기름진 양 꼬리는 당시 사람들에게 양의 힘과 능력이 모여있는 곳으로 생각되어 가장 귀한 부위로 여겼다(출 29:22, 레 3:9).

예수님의 제자들 대다수는 어부였지만 사실 생선은 이스라엘 민족에 친숙한 식재료가 아니었다. 굽고 소금과 레몬즙을 뿌려 빵과 함께 먹기는 했지만 주식은 아니었다(눅 24:42, 요 21:9-13).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에는, 생선을 잡자마자 염장이나 훈제, 혹은 젓갈을 만들어 유통했다. 생선을 주로 잡는 갈릴리 바다의 어부들은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했지만, 보존 처리된 생선의 상품성은 내륙지방으로 갈수록 급증하였다. 주후 1세기 로마의 역사가 플루타크는 ‘로마에서의 훈제 생선 한 수레는 양 백 마리의 가치와도 같다’라고 표현하였다.

 

과실

버릴 것이 없는 올리브

올리브는 그야말로 버릴 것이 없는 필수적인 식물(食物)이었다. 올리브 나무는 생명력이 매우 강해 적은 강우량에도 잘 자라며, 수명이 200~1,000년에 달하고, 수명이 다해도 그 나무 줄기에서 새로운 줄기를 내며 삶을 이어간다. 보통 올리브 밭 인근에는 대규모의 기름 짜는 틀을 만들어 온 마을이 공용으로 사용했다. 이 틀은 큰 바퀴 모양의 연자맷돌로, 수확한 올리브를 수 차례 으깨며 기름을 짜냈다.

이스라엘에서는 일반적으로 네 차례 거듭하여 올리브 기름을 짜냈다. 가장 가벼운 돌을 올려 처음 짜낸 기름은 최상급의 기름으로 성전 금촛대를 밝히거나 왕과 제사장에게 기름을 부을 때 사용하였다. 이 기름은 맑고 순수하여 등잔에 불을 밝혀도 그을음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처음 짜낸 찌꺼기에 더 무거운 돌을 올려서 두 번째로 짜내는 기름은 식용으로 사용하였으며, 세 번째로 짜내는 기름은 가정의 등잔을 밝히거나 화장품, 약품의 용도로 사용했다(참고-전 9:8, 마 25:8, 막 6:13). 마지막으로 가장 무거운 무게추로 짜낸 기름은 비누를 만들었다. 그리고 남은 찌꺼기는 가축의 사료나 땔감으로 사용하여 최후의 한 방울까지 버리지 않고 사용하였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던 감람산의 ‘겟세마네’(Γεθσημανεί) 동산도 ‘기름 짜는 틀’을 의미하는 아람어 ‘가트 셰마네’(גַּת שְׁמָנֵי)에서 유래하였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이나 피와 땀을 쏟으시는 세 번의 기도를 하셨고, 마치 다 짜낸 올리브 찌꺼기처럼 탈진하신 몸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며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무화과


무화과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과실로 이스라엘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추위에 약해 우기 동안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다가, 건기가 시작되고 날씨가 따뜻해지면 여러 차례에 걸쳐 열매를 맺는다. 첫 번째 맺힌 무화과와 그 뒤에 열리는 무화과는 그 맛이 완전히 다르고 이름조차 다르다. 첫 번째 맺히는 무화과는 ‘파게’(פַגֶה)라고 하며, 두 번째 이후로 맺히는 무화과는 ‘테에나’(תְּאֵנָה)라고 한다. 처음 열리는 ‘파게’는 퍽퍽하고 맛이 없을뿐더러, 일일이 따주지 않으면 훨씬 달고 맛있는 ‘테에나’가 잘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무화과 나무 주인은 ‘파게’는 행인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마음껏 따갈 수 있도록 허용해준다. ‘파게’는 유월절 경에 열리는데, 이때는 다른 여름 과실들이 맺히기 전이라 먹을거리가 가장 부족한 보릿고개였다. 그래서 ‘파게’는 맛이 없기는 하지만, 긴 겨울을 견딘 빈민들에게 가장 사모할만한 열매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사야 28:4, 미가 7:1. 호세아 9:1에서는 ‘파게’를 간절히 사모할만한 대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무화과에 대한 이해는 예수님의 무화과나무 저주사건(마 21:18-19, 막 11:12-14)을 해석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파게’와 ‘테에나’를 모두 
‘무화과’라고 번역해버리면, 예수님께서 아직 때가 되지 않아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를 무자비하게 저주하신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여기 예수님께서 찾으셨던 무화과는 ‘파게’이며, 당시는 ‘테에나’의 때가 아니었다. 잎은 무성하지만 처음 열리는 무화과 ‘파게’조차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는 뿌리로부터 마르는 저주를 받고 말았다(마 21:20-22, 막 11:20-21).

 

꿀처럼 단 대추야자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꿀’이 모두 벌꿀인 것은 아니다. 히브리어로 ‘꿀’은 ‘데바쉬’(דְּבַשׁ)인데 삼손이 찢어버린 사자의 몸에서 찾은 꿀(삿 14:8-9), 요나단이 지팡이로 찍어 먹었던 꿀(삼상 14:27) 등 아주 적은 경우만 벌꿀이다. 나머지 ‘데바쉬’는 종려나무 열매인 대추야자 과즙을 의미한다. 대추야자 과즙은 당도가 꿀만큼이나 높으며, 열매 밖으로까지 흘러 넘친다. 게다가 종려나무는 생명력이 아주 강해 약간의 강우량만 있어도 이스라엘 곳곳에서 자라났다. 그래서 종려나무는 승리와 번영, 평화를 상징하는 나무로 여겨졌으며, 종려나무의 히브리어 ‘타마르’는 오늘날도 이스라엘 전역에서 가장 인기있는 여자 이름이다(참고-창 38:6, 삼하 13:1, 14:27).

 

단순한 술 이상, 포도주

고대 이스라엘에서 포도주는 매우 특별한 음료였다. 이스라엘 지역에서 포도는 주로 태양력 8월경에 수확을 시작하는데, 건기의 막바지로 가장 덥고 건조한 시기이다. 오랜 건기 동안 저장해둔 물이 바닥난 상황이며, 새벽이 아니고는 맺힌 이슬조차 석회가 스며들어 함부로 마실 수 없게 된다. 이때 포도의 수확과 함께 포도주 틀에서 밟아서 만드는 포도주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해갈의 기쁨이었다(참고-삿 9:13, 전 10:19).

 

요리 과정과 식사

목재가 풍부한 우리나라와 달리 고대 근동에는 목재가 매우 귀했다. 따라서 목재만으로 불을 때기 쉽지 않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로 말린 짐승의 변이나, 올리브를 짜고 남은 찌꺼기 등에 불을 피웠다(참고-겔 4:12-15). 불을 피우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 상시 불이 꺼지지 않도록 관리하는 화덕을 공용으로 사용했으며, 각 집에서는 마당에서 불을 피우고 냄비를 올려 요리했다.

맷돌은 조리에 필수적이었다. 마을에는 한 개 이상의 연자 맷돌을 설치해서 대량의 밀을 갈 때 공용으로 사용하였고, 집집마다 손으로 돌리는 맷돌을 구비하였다. 연자 맷돌은 나귀나 소의 힘으로 돌려서 한 시간에 약 8~10kg의 밀을 갈 수 있었고, 가정용 맷돌은 그 1/10 정도를 갈 수 있었다. 1인당 하루 필요한 밀의 양을 약 500g 정도로 볼 때, 10명 가족이 있는 집에서는 적어도 8시간 이상 맷돌을 갈아야 했다. 그러니 맷돌 소리는 식사를 준비하며 간간이 들리는 것이 아니라,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항상 들리는 소리였다. 그래서 성경에서 ‘맷돌 소리가 끊어진다’는 것은 완전한 패망을 상징한다(렘 25:10, 계 18:22).

식사 자세는 우리 생각과 완전히 다르다. 고대 근동에서는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ㄷ’자 모양의 ‘트리클린니움’ 식탁에서 밥을 먹었다. 오른손으로 밥을 먹는 사람이 훨씬 많기 때문에, 주로 왼손을 베개에 기대고 우측을 위로 하여 비스듬히 엎드렸다. 따라서 상석에 엎드린 사람을 기준으로 등쪽에 위치한 사람이 가장 말석이 되며, 상석 바로 우편에 있는 사람은 상석에 엎드린 사람 품에 기대는 자세가 된다. 요한복음 13:23, 25이나 21:20의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다’라는 표현을 볼 때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요한이 바로 이 자리에 있었다. 따라서 요한 건너편에서 머리짓으로 신호를 보냈던 베드로의 자세는 요한의 바로 맞은편 자리임을 알 수 있으며(요 13:24), 예수님께서 빵을 찍어 건내주실 수 있는 근거리에 가룟 유다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요 13:26-30). 이러한 배경을 알고 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실제 식사 장면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근동에서 일과의 대부분은 음식 재료를 수확하고, 조리하며, 저장하는 데 사용하였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말씀하신 것은 당시 상황에서는 아주 파격적인 말씀이었다(마 6:25, 31, 눅 12:22, 29). 연평균 강우량이 턱없이 부족하고 건기의 작열하는 태양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걸맞은 음식을 준비하시고 부족함이 없는 삶을 예비하셨다.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는 결코 육의 양식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다. 영의 양식 또한 마찬가지다. 보이는 가나안 땅에서도 온전한 양식을 준비해주신 하나님께서 구속사의 모든 진행 과정 가운데에도 영육간에 우리를 배불리 먹이실 뿐 아니라, 마침내 구속사를 완성하시는 순간에 사망을 멸하시고 원수의 앞에서 오래 저장했던 포도주와 기름진 것으로 잔치를 베풀어주시는 신령한 역사가 있을 것이다(시 23:5, 사 25:6).

글_정디모데 전도사, 그림_박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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