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신학과 신앙
1장ㅣ왜 청교도인가?
2장ㅣ청교도 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특성
3장ㅣ청교도의 목회신학과 원리
4장ㅣ청교도의 교회론과 목회신학
5장ㅣ청교도 목회와 설교
6장ㅣ청교도의 설교관
7장ㅣ청교도의 성경 해석
8장ㅣ청교도의 예배관
9장ㅣ공예배의 중요성
10장ㅣ청교도의 신학관
11장ㅣ청교도의 인간론
12장ㅣ청교도의 성령에 대한 이해
13장ㅣ청교도의 주일 성수
14장ㅣ청교도의 경건생활
15장ㅣ교회 절기, 성경적인가?
16장ㅣ청교도의 가정관
17장ㅣ청교도의 가정생활
18장ㅣ청교도의 나눔과 섬김
19장ㅣ개혁교회 역사적 측면에서 본 시편찬송가
1장 왜 청교도인가?
“왜 청교도인가? 21세기에도 청교도가 필요한가?”
새 시대에 새로운 변화를 요구한 현 시점에서 약 400년 전의 사람들을 연구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는가? 21세기의 국가와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급변하고 있다. 교회 또한 사회의 변화에 뒤질세라 그 변화 욕구에 발맞추려 하고 있다. 사실 목회의 주변 환경의 변화가 뚜렷하기 때문에 목회의 패러다임도 변해야 한다는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다. 그리고 기존의 목회 패러다임들은 급격한 사회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도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시대의 문화적 조류에 맞추어 외양적인 부분만 바꾸고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오랫동안 성장의 둔화를 맛보고 있는 교회, 맥없이 그저 형식에 치우쳐 있는 교회, 병들어 교회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교회를 치유하는 길이 과연 무엇인가? 필자는 교회가 신약성경에 기초하고 있는 초대 교회의 원리에 충실하고, 오직 성경을 근거로 하는 종교개혁자들의 교훈을 토대로 개혁교회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것만이 21세기의 한국 교회를 살리는 길이라고 확신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17세기 영국의 청교도들은 우리에게 필요하고도 적절한 가르침을 전해준다.
한국 교회는 진리를 믿고 아는 일에 하나가 되지 못하는 언행불일치의 오류에 빠져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영적 신앙의 성숙도가 극히 낮다. 너도나도 교회의 양적 성장에 치중하고, 목회의 성공을 사람의 수와 헌금 액수를 잣대로 판단하다 보니, 그야말로 알곡 신자들을 만드는 일을 등한히 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기독교는 좋지만 크리스천은 싫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퍼져 있다. 말은 그럴듯하면서도 생활은 전혀 성결하지 못한 이중적인 삶의 자세가 빚어낸 결과이다. 삶의 현장에 경건의 능력을 여실히 보여 주었던 청교도들의 삶은 추락할 대로 추락해 버린 한국 교회의 영적 능력을 회복시키는 강력한 도화선이 될 것이 틀림없다.
왜 청교도인가?
첫째,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 안디옥교회의 성도들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을 배양하는 일은 지금 대부분의 교회들이 추구하는 패러다임의 변화로는 결코 달성할 수 없다. 청교도들은 성경에 충실한 자들이다. 그리고 인간의 심령이 변화하는 것,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믿은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생을 탁월한 설교자로 종사했다. 정말로 교회에 필요한 것은 신실한 말씀 선포자들이다.
피터 루이스(Peter Lewis)가 지적한 대로, 동일한 하나님을 믿고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 있으며 그 어느 때보다 성경 연구에 많은 진전을 이루고 있다고 자부하는 현대 교회는 왜 청교도들과 같은 인물들을 배출하지 못하는가? 그에 대한 답을 청교도들이 추구했던 삶과 신학적 확신과 실천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악하면 악할수록 선하고 거룩한 자들을 그리워하는 본능이 있다. 어둡기 때문에 빛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주의 백성들을 주의 자녀답게 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 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모범을 보여 준 청교도들의 설교 사역을 살피는 일은 이 시대에도 매우 유익하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충실했던 청교도들의 가르침을 바르게 익히기만 한다면, 한국 교회의 새로운 도약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둘째,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 역사 속에서 이어져 가는 그리스도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이 믿었던 성경적인 교리와 영적 체험과 삶의 실천은 오늘날 성도들에게 매우 강렬한 메시지를 던진다. 특히 청교도들의 개혁 정신은 오늘날 교회의 개혁과 갱신이 마치 사명인 양 떠드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교회의 개혁이 무엇인지를 강하게 각인시킬 것이다. 청교도들이 몸부림치며 세우고자 애썼던, 신약성경에 충실한 교회가 바로 한국 교회가 추구해야 할 이상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갱신은 생소한 언어였지만, 개혁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정신은 그들의 모든 활동에 깊이 배어 있었다. 우리는 청교도들을 통해 우리가 고민하는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며 참다운 목회가 무엇인지, 그리고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명백히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가졌던 진리에 대한 거룩한 열정과 헌신은 진리의 부재 현상이 심각한 한국 교회에 영적 각성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들이었다. 청교도들이 붙들었던 진리 자체가 절대적인 가치나 진리를 부인하는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물리치는 강력한 무기이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패러다임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의 본질과 목회의 본질적 회복이 문제이다. 그 일을 위해 청교도들은 분명히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셋째, 현대 사회의 병폐 중 하나는 가정 파괴이다. 가정은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단위이다. 그러므로 가정의 붕괴는 사회의 붕괴와 국가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윌리엄 가우지(William Gouge)의 말대로, 청교도들은 가정을 ‘꿀이 저장되는 교회요 국가의 신학교’로 간주했다. 가정교육의 부재가 심각한 오늘날 성경을 기초로 한 청교도들의 가정교육관은 건실한 교회와 사회를 이루는 기초석이 되리라 의심하지 않는다. 청교도들은 가정을 교회 개혁을 위한 가장 큰 지름길로 여기고는 가정에서 신학과 삶의 균형을 이루어 갔다.
넷째, 그들에게서 개혁교회의 뿌리를 보기 때문이다. 개혁파 장로교회는 ‘칼빈주의 신학과 청교도 사상을 이어받은 정통 보수주의 교단’임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칼빈에 대한 연구도 부족할 뿐 아니라 청교도들에 대한 연구조차도 거의 없는 상황이다. 작금의 교회는 오로지 성장 신화만을 추구하다 보니 뿌리는 깊지 못한 채 잎만 무성한 나무를 키우고 있다. 신학적 기준과 판단보다는 오직 성장이 표준이 될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로지 교회의 개혁과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던 청교도들, 그들을 공부하는 것은 훌륭한 가문을 이어가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다섯째,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목회 현장에 신학 부재 현상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 교회의 목회 현장은 위험한 수위를 넘나들고 있다. 마치 사사 시대처럼 뚜렷한 기준이 없어서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삿21:25 참고) 잡탕 신학이 난무하고 있다. 여기에 소위 번영 신학의 확산과 기복 신앙이 어우러져 교회들이 세속적인 성공 신화에 몰입하고 있다.
신학이 없는 목회는 공중누각과 같다. 실제로 신학이 분명하지 못한 목사들은 목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세속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점점 주님의 진리에서 멀어져 가는 슬픈 현상을 낳고 있다. 더 슬픈 것은, 진리에서 상당히 멀리 벗어났는데도 이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교회만이 참교회요 살아 있는 주님의 교회라고 착각하고 있는 현실이다.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데도 성경의 가르침인 양 오해하고 오로지 번영에만 몰두하는 사역자들에게, 청교도는 자기 성찰과 바른 교회의 회복, 건전한 삶을 낳는 힘을 제공할 것이다.
청교도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믿고 따라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선언했다. 따라서 청교도는 단지 하나의 역사로서가 아니라 오늘도 여전히 살아서 죽어 가고 있는 교회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는 영적 거장들이다. 목회의 갱신과 영적 부흥, 기독교인으로서의 세계관의 확립과 거룩한 삶의 목적이 어떠해야 할지를 분명하게 제시하는 청교도들을 깊이 사랑하고 본받는 그리스도인 지도자와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2장 청교도 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특성
1. 청교도 운동의 역사적 배경
일반적으로 청교도 운동은 1558년 피의 여왕 메리(Mary)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1세가 종교 통일령을 발포하면서 시작되었다. 1625년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6세) 때에는 왕성하게 번창했으며, 1651년 최초로 공화정을 실시한 올리버 크롬웰(1599-1658) 시대에는 정치적인 주도권까지 쥐며 황금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1661년 왕정복고에 따라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성공회 감독들의 탄압과 함께 1662년의 대추방령에 의하여 역사적인 청교도 운동이 막을 내리게 된다.
1517년 10월 31일에 일어나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의 여파는 잉글랜드에 있는 교회에게까지 밀려왔다. 대륙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이 잉글랜드에서도 일어나야 한다는 움직임이 싹틀 즈음, 당시 잉글랜드의 왕이었던 헨리 8세가 가톨릭과 단절하고(1529년) 독자적인 영국 교회를 세웠다. 1532-1536년까지 열린 영국의 의회는 헨리 8세에 대해 영국 교회의 최고 권위를 지닌 수장권을 인정하는 결의문을 반포한다. 이는 종교개혁을 흠모하고 잉글랜드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선각자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그의 종교 정책 자체가 로마 가톨릭의 정책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 에드워드 6세는 개혁 사상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개혁가들이 종교개혁을 더욱 추진할 수 있도록 발판이 마련되었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인 존 녹스를 왕실 목사로 임명하여 교회 개혁에 앞장서게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16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헨리 8세의 부인인 캐더린에게서 태어난, 메리(Mary)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1553년).
피의 여왕 메리(Mary)는 철저한 가톨릭 신자로 개혁가들에게 무서운 핍박을 가했다. 그리하여 많은 개혁가들이 유럽 대륙으로 피난을 갔다. 그녀는 300여 명의 개신교 신자들을 죽였으며, 그녀의 학정 때문에 800여 명이 망명했다. 이 때 존 녹스도 망명하여 존 칼빈과 교제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망명한 개혁가들은 대륙의 개혁 사상을 더욱더 견고히 흡수하면서 훗날 조국의 종교개혁을 꿈꾸게 되었다.
메리 여왕은 즉위한 지 5년 만에 죽고 엘리자베스 1세가 왕위에 올랐다(1558년). 그녀는 개신교 사상을 가진 스승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헨리 8세가 발포한 수장령을 다시 반포하면서 교회와 국가를 동시에 다스리는 강력한 군주가 되고자 했다. 그로 인해 그녀는 개혁가들과 정면 대결을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엘리자베스 1세는 잉글랜드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을 청교도(Puritan)라고 불렀다. 원래 이 말은 ‘precisian’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는데, ‘매우 까다로운 사람’ 또는 ‘아주 꼼꼼한 형식주의자들’이라는 의미이며, 그들을 비아냥거리는 욕설이었다.
1603년에 독신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스코틀랜드의 왕인 제임스 6세(잉글랜드에서는 제임스 1세)가 왕권을 이어받게 된다. 그는 이미 존 녹스에 의하여 장로교를 국교로 삼음으로써 종교개혁이 완성된 장로교 나라의 왕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감독주의제도를 선호했다. 청교도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들이 목회에 전념하든지 조국을 떠나 망명길에 오르든지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이 1620년에 종교와 시민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떠나 청교도들이 오늘날의 미국을 건설하게 된 모체가 되었다.
1625년에 제임스 6세가 죽고 그의 아들 찰스 1세가 왕위에 오르자 청교도들의 고난은 더욱 커져 갔다. 그는 고향인 스코틀랜드의 국교인 장로교를 없애고 감독교회를 세우고자 했다. 이로 말미암아 폭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일종의 ‘국가 언약’을 발표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스코틀랜드의 개혁파들을 ‘계약파’ 또는 ‘언약도’라고 부른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왕권과 수장권 및 성경의 절대 권위와 장로 정치를 끝까지 수호하기로 다짐하고, 일부는 혈서까지 쓰면서 언약 문서에 서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찰스 1세는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고자 군대를 파견했으며, 장로교도들이 찰스 1세와 전쟁을 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의회는 종교 문제로 도무지 평온을 찾지 못하는 사태가 지속되자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이 문제를 매듭짓고자 했다. 그래서 1643년 6월 12일에 웨스트민스터에서 종교회의 열렸으며, 이것이 1649년 2월까지 계속되면서 역사상 가장 성경적이고 개혁신학적인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 문답, 예배 모범 및 권징 조례 등의 문서를 남겼다.
그런 와중에 강력한 통솔과 전쟁에 능했던 크롬웰은 찰스 1세를 체포하여 반역자로 처형했고, 청교도들에게 우호적인 그는 짧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청교도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면서 번성하는 기회가 되었다. 찰스 1세가 처형된 후 그의 아들인 찰스 2세가 스코틀랜드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찰스 1세보다 더 강력한 종교 통일 정책을 발포했다. 그는 재세례파와 퀘이커교도들과 비국교도들의 모임을 금지하는 법령을 발포했고, 이때 4000명의 퀘이커교도들이 감옥에 갇혀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추방령을 발포하여 청교도들을 대거 추방했다(약2004명). 이리하여 1662년 이후 청교도 운동이 급속히 하락하여 끝나 버리게 되었다.
2. 청교도 신앙 운동의 특성
청교도주의가 그렇듯이 청교도 신앙이 무엇인지를 간단히 말하기란 쉽지 않다. 청교도 운동은 종교적인 요소뿐 아니라 국가적, 정치적, 사회적인 요소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다양하게 변천해 왔다. 여기서는 청교도들의 영적이고도 실천적인 신앙 운동의 특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피터 루이스가 지적한 청교도 신앙의 세 가지 특성을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