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1-05-03 07:23
예배학 바른예배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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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7,298  

츠빙글리의 예배

츠빙글리는 예배 계획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종교 개혁의 파문을 확산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그는 예배 가운데 있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서 성경 봉독과 기도, 죄의 고백 그리고 설교만을 강조한 의식을 내세웠다.

그리고 루터와는 달리 미사를 예배의 규범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주님의 만찬은 1년에 4회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며,주님의 만찬은 원래 상징적이라고 믿었다.

츠빙글리는 중세 교회의 교리와 의식에 대해 매우 자유로운 관계에 서 있었고, 그의 신학은 루터보다 폭 넓고 충실했다.면죄부에 대한 그의 위치와 그것에 대항한 그의 태도는 루터보다 급진적이었다.

그러므로 츠빙글리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루터만큼 동정하지 않았다.

예배와 성례

개혁 교회의 전통은 기독교 예배에서 중요한 네 가지 요소를 강조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와 기도와 친교의 삶에 대의식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말씀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나 성례는 그렇지 않으며, 말씀은 신앙을 일으키고 강화하나 성례는 신앙을 강화하는 데 유용하며,말씀은 곧 세계로 전달되나 성례는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베풀어진다.

하이델베르크 신앙문답은 성례는 복음의 약속을 더 잘 이해하도록 하는 보이는 표시(Signs)요,보증(Seals)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성례는 교회를 위한 것으로서 칼빈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표싱요 보증이 된다.

실로 세례는 우리가 씻음받음과 깨끗하게 되었음을 증명해 주고, 성찬은 구속되었음을 증거해 주므로 성례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례를 어거스틴은 ‘보이는 말씀’이라고 하였다.

성례의 중요성

세례와 성찬의 성례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다.

성례는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의 복음을 구체화하고 설명한다.

따라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해위이지 결코 예배자들의 경험이 아니다.

세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봉헌이나 믿음이 아니라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이다.

그리고 성찬서 가장 중요한 것은 떡을 떼는 것과 포도주를 붓는 수단을 통하여 예배자들에게 자신을 떼어주시는 그리스도이다.

인간의 구원사역에 있어서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하심이 제일이요 인간의 행위는 부차적인 것과 같이 성례에도 그러하다는 의미이다.

성례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의식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연합되어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사랑의 관계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성찬을 통하여 우리의 심령을 양육하고 신앙을 강화하며 교회 안에서 사랑의 관계를 지속 할 수 있게 된다.

성례의 어원과 신학적 의미

성례란 무엇인가?

‘성례’는 ‘신비’ 또는 ‘비밀’이란 뜻의 헬라어 뮈스테리온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교회의 역사에서 이 단어를 맨 처음 사용한 사람은 3세기경 로마 교회의 교부인 터툴리안(Tertulliian)으로 알려져 있다.

성례는 세례와 성찬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것이다.

세례는 신자가 기독교 신앙에 입문할 때 단 한 번 받는 반면에,성찬은 평생토록 계속한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로도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일 즉 칭의와 부응하는 의식이며, 성찬은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성결한 생활을 하며 새롭게 되는 성화에 부응하는 의식이다.

우리는 세례와 성찬이라는 두 의식을 성화에 부응하는 의식이다.

우리는 세례와 성찬이라는 두 의식을 통해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하여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다.

상례전은 순수한 세례와 성찬은 예전 속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경험과 함께 하나님을 만나는 엄숙한 예전으로 이해되었다.

성례의 신학적 의미

종교 개혁자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행하도록 멍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제정된 성례로서 세례와 성찬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즉 성례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현재적인 역사를 묘사하는 은혜의 수단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례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활동에 있다고 하겠다.

성례전은 다음과 같은 신학적 의미를 가진다.

첫째, 성례전은 모든 예배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보이는 말씀’이다.

둘째, 성례전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포와 예배자들의 진지한 응답이 나타나는 현장이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성례전을 통하여 사랑의 실체로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냇째, 성례전은 성도들의 공동체 의식을 재확인하는 예전이다.

끝으로, 화육적(Incarnational Respect) 관계 형성이 성례를 통해 계속적으로 다짐되어야 한다.

성례는 한 인간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 시키고 그 새로운 차원의 세계에 머물게 하는 신비한 위력을 갖고 있는 예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현장을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예전이라고 부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룩되는 현장이라고 부른다.

세례의 신학

기독교 공동체는 세례를 통하여 한 인간의 삶 속에 하나님의 통치의 시작을 실증하고, 그 통치의 미래를 향한 공통적 회개를 실증한다.

세례 의식의 역사

초대 및 중세 교회의 세례 의식

기독교에서 행하는 세례 의식은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명령(마28:19)에 근거를 두고 있다.

세례의 사상이나 사역은 일찍이 구약의 유대 민족의 종교 생활 가운데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1.원시 세례

세례의 원시적 형태는 다음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나 거룩한 예전에 참여할 때는 반드시 물로 깨끗이 씻는의식을 가졌다.

둘째로는 쿰란 공동체에서 가졌던 세례 의식이다.

이들의 세례는 세례 요한의 세례의 줄기가 되었고 이후 기독교 세례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셋째로 유대교로 개종하는 이방인들에게 주었던 세례가 있었다.

영과 육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바치는 성례전적 성격을 포함한다.

복음의 전파와 확장을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개해 갈 것을 명령하셨던 예수님께서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베푸신 것은 기독교의 입교 의식으로 자리 잡았고, 이는 기독교라는 새 공동체 형성을 위한 훌륭한 방편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신학자 머레이는 “기독교 세례의 신학과 형태는유대교의 개종자 세례의 형태와 신학에 기인한다”고 말했다.

세례 요한에게서 기독교 세례의 근원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세례는 유대교의 세례 형태에 새로운 내용과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서 곧 예수님의 사역 출발점이 되었고 그 후 기독교 공동체의 소중한 성례 의식이 되었다.

2.예수님과 사도들의 세례

먼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셔야 했던 의미를 생각해 보자.

첫째로.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는 선지자 요한을 통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선포하기 위함이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이라고 한 것

둘째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는 순간에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막1:11)는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통하여 만인에게 예수님의 신분을 확인시켰다.

그는 새롭게 다가올 미래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세례를 언급햇는데,그 내용은 십자가 수난 곧 오스카 쿨만의 말대로 메시아와 수난의 종으로서 그 자신이 행동적으로 받을 세례를 예언하셨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가 베풀어져야 되다는 사실과,복음을 받아들이는 무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인치는 예전으로 지켜나가야 할 의무임을 가르쳐준다.

3.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세례

이것이 최초로 나타난 곳은 사도행전 2장의 베드로 설교에서이다.

사도들에 의해 행해진 세례 사역의 의미는 우선 그들이 ‘주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사도들은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죄의 용서를 선언했다.

사도들을 통해 받은 세례에는 주님께 대한 헌신의 의미가 주어졌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은 무리들은 새로운 공동체 세계에 서 참 기쁨을 향유했으며 그리스도의 강력한 증인으로 살았다.

종교 개혁 이후

개혁자들 에게 세례는 하나이며, 물 세례는 사람을 내적으로 정결케 하는 성령 세례를 표상으로 하는 외적인 징표였다.

그리하여 루터로부터 독립된 세례 의식과 성찬이 개혁 교회에나타났고, 츠빙글리와 칼빈의 종료 개혁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의식 중심의 상정적인 것에서 완전히 벗어난 예전을 만들려고 했다.

세례의 본질적인 의미와 신학

개신교의 예배에서 세례를 성만찬과 함께 소중한 성례전으로 지키게 된 것은 특유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세례는 죄의 용서, 인치심, 성령의 부여,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함 등 다양한 의미를 간지다.

“세례는 우리 교회의 친교를 허락하는 입회의 표요,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랴”는 정의가 있다.

세례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취하신 절대 주권의 표시이며 인치심(seal)이라는 신 주도적 입장을 취한다.

존 맥콰리(John Macpuarrie)같은 학자는 세례를 구원론의 단계에 속한 하나의 과정으로 보면서 죄의 인정과 회개, 칭의, 성화 그리고 선택의 순간으로 해석했다.

세례를 좀더 구체적으로 우리의 실제 삶과 연관시켜 보면 몇 가지 의미를 새롭게 찾아볼 수 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둘째로, 세례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예전이다.

셋째로, 세례는 새로운 피조물의 탄생을 의미한다.

넷째로, 세례는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한다.

세례를 받지 않으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며,교회를 통한 권리와 의무 수행에 책임 부여되지 않는다.세례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섬기는 사람들의 일원이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릐 삶을 확인하는 것이어야 한다.

유아 세례와 입교 의식

기독교의 역사와 전통은 어린아이들도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입어애 할 자로 여겨 일찍이 그리스도의 세례를 베풀게 했다.

유아들의 세례는 부모의 신앙에 근거하여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알고 믿음 안에서 자라도록,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과 양육이 전제된 가운데 세례를 받도록 하는 것이다.

유아 세례는 기독교의 오랜 전통뿐 아니라 성경에서도 그 근거를 찾아볼수 있다.

특히 유아 세례는 계약의 원리에서 추론하고 있다고 하겠다.둘째로, 사도 시대에 온 가족이 함께 세례를 받은 사건(행 11:14, 16:33, 18:8고전 1:16;딤후 1:16)을 근거로 많은 학자들은 그 가족에 속한 어린아이들이 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자녀들이 성장하여 분명한 신앙 고백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유아 세례는 무엇보다 부모의 신앙과 그들의 책임 있는 서약에 깊은 관심을 두어야 한다. 로렌스 스투키 교수는 ‘계약의 새로운 갱신’이라고 부른다.

근본적으로 입교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를 유아 때에 받았던 자들이 성장 기간을 거쳐 일정한 연령에 이를 때에 교회가 기독교의 신앙 교리에 근거한 신앙 교육의 과정을 베풀고, 그 과정을 마친 자들을 교회의 일원으로 환영하는 예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성만찬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예배의 현장에서만 베풀어지는 성만찬은 세례와 함께 교회 공동체를 가장 기독교적으로 만드는 중요한 예식 가운데 하나이다.

성찬식을 통하여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과 이웃의 화해를 경험하며 신앙을 재확인하게 된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들의 삶이 가지는 의미와 세상을 향한 선교적 사명을 되새기며,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게 된다.

성만찬의 역사적 배경

성만찬 예배는 그리스도의 명령에서 출발한다.

그리스도께서 잡히시기 전 마지막 유월절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이것을 행아여 나를 기념하라”(고전11:24)는 말씀에서 성만찬 예배는 출발한다.

초대 교회때부터 성만찬은 예배의 필수적이며 중심이 되는 순서였다.

말씀으로부터 시작된 예전은 다락방 예전(성만찬)에서 절절을 이루었고 세례 교인은 성만찬에 참여할 권리와 의무를 갖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는 성만찬 중심의 예배로, 개신 교회는 성만찬이 빠진 설교 중심의 예배로 변질 되었다.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중에 성만찬의 중요성을 무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종교 개혁자들의 성만찬에 관한 통일되지 못한 견해들이 말씀을 중시하고 성만찬을 소홀히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성만찬의 유래

초기 형태의 성만찬 예식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성만찬에 관해 신약 성경이 제공하는 자료로는 마태복음 26:26-29절, 마가복음 14:22-25절,누가복음 22:15-20절과 고린도전서 11:23-26절이 있다.

예루살렘 교회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지는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것으로 예수님의 최후 만찬으로부터 유래 되었다.

신약학계의 권위자인 예레미야스는 복음서의 기록 속에는 그만찬의 유월점 배경을 가리키는 열한 가지 사실들이 있다고 밝혓다.

첫째, 최후의 만찬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행되었다.

둘째,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 식사를 위한 방이 소란 없이 제공 되었다.

셋째, 밤에 거행되었다.

넷째, 소수의 남자들의 무리가 함께 모였으므로 유대 가족적만찬의 ‘가족족인’ 분위기가 유지 되었다.

다섯째, 제자들이 상에 기댔다.

여섯째, 빵을 떼기 전에 어떤 음식이 먼저 나왔다.

일곱째, 유월절위 독특한 특징인 붉은 포도주를 마셨다.

여덜째, 이 만찬은 자선 행위와 관련되었다.

아홉째, 만찬은 시 113-118편에서 발췌된 찬양으로 끝을 맺었다.

열째, 유월절에 일반적으로 있었던 성경 강해 순서에 빵과 포도주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열한째, ‘적신 빵 조각’의 사용(요 13:26이하)은 그 만찬의 특직에 대한 증거의 하나이다.

최후의 만찬이란 지금까지 키디쉬를 행해 온 것 중 ‘최후의 것’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최후의 만찬이 키디쉬에서 근거한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요한복음 기사이다.

요한복음 18장 28절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잡히신 것은 유월절 잔히를 먹기 전이라는 견해를 밝힘으로써 최후의 만찬은 다락방에서 마지막 날 밤에 빵과 잔을 나눈 것뿐이지 유월점을 기념한 것은 아니므로, 결국 최후의 만찬은 키디쉬였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어떤 형태의 식탁을 이용하셨든 새로운 성례전으로서 성만찬을 제정하셨다는 사실이다.그러므로 성만찬은 전적으로 독특한 기독교적 전통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 것으로미래 구원에의 새로운 희망을 제시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 최후의 만찬을 성례전으로 제정하신 과정 첫째, 먼저 주님께서 빵을 취하셨다.

둘째, 축하하셨다.

셋째, 그것을 쪼개셨다.

넷째, 제자들에게 나누어지면서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 아니라”고 하셨다.

다섯째, 그 후에 잔을 드셨다.

여섯째,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

일곱째, 제자들에게 드리면서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시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다.

예전의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 행하는 것은 신실한 교회의 모든 성도들의 참된 임무라 하겠다.

성만찬의 신학적 의미

예수님께 하신 말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막 14:22)라는 표현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는 말씀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기념(Remembrance)과 참여(Communion)와 드림(Offering)이다.초대 교회가 이해한 성만찬은 ‘새언약’의 표지와 구원과 새 생명의 종말론적 예표였다.

둘째, 성만찬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되는 의식이다.

바울은 성만찬을 그리스도의 몸과 교제에 관련시켜서 말하기를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한 떡에 참예함이라”(고전 10:17)고 하였다.

이 말은 성찬에서‘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일치와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그 지체들과의 일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예배에서 성찬은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되며, 예배자들은 성찬의 떡과 잔을 나누면서 다 함께 교회의 머리요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신적 몸의 지체가 되는 것을 확신하며 서로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고 피차 위로하고 권면해야 한다.셋째,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희생제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단번에 드리는 희생 제물이 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성찬은 오늘도 계속 이어져야 한다.

그리고 믿음으로 성찬의 떡과 잔을 받을 때에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릐 죽으심으로 단번에 성취하신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오늘을 의한 성만찬의 순서

성찬식은 언제나 우리가 공동체임과 그리스도의 지체 됨을 확인하는 공동체 의식이다.성찬식은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인 예식이며, 인간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예식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성만찬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현장이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의 의미에 대한 묵상과 죄의 회개로 이어지는 엄숙하고 무거운 분위기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주의 만찬에 초대받은 감사와 기쁨이 넘치며, 종말론인 하늘 나라의 만찬을 소망하는 희망이 넘치는 축제적인 분위기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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