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2-21 08:55
(3)권위있는 목회자(As one with Authority)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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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343  

권위의 이해


직책의권위

인격적인 권위

신성불가침의 대변자

A

성례전적 /제사장적

B

인격적인 경건

전문성

C

법적으로 공인된 자격

D

인격적으로 인정받은 자격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의 권위는 성례직전 또는 예전적인 교단들에서와 같이, 제 1차적으로 직책에 근거할 수 있다. (A)또는 그것은 중생과 내면적은 부르심에 가장 큰 강조를 두는 전통에서와 같이 그것은 목사의 인격적인 경건을 인정받는 것에 일차적으로 근거할 수 있다(B). 데이비드 슐러와 그의 동료들(1980:45-46.50-55)은 미국의 교역자라는 제목의 연구에서, 신성불가침의 대변자로서 권위에 대해서 이 두가지 형태 모두를 발견하였다. 남침례교단의 교회들과 다른 복음주의적 교회들은 저자들이 "영성적 강조"라고 부르는 교역모델을 선택하여, 여기에는 개인의 영성, 윤리적 생활, 그리고 유능한 목사의 표지로서 전도의 능력을 포함시켰다.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두 번째 교역 모델은 저자들이 "성례전적-예전적 강조"라고 명명한 모델로서 이것은 성직자의 제 1차적인 기능을 성례전 집례로 여기며, 신성의 대변자로서의 성직자를 강조한다. 그리고 영국성공회 - 이 모델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한다.

우리는 또한 전문성에 관해서도 이렇게 두가지 형태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성직자가 직책의 권위를 가진다는 것은 전문적인 설교 능력, 교육, 또는 목회지도력의 다른 요소들을 필수적으로 훈련받았다는 공적인 인정을 받는 것이다, 사실 그들이 실체로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와는 상관없다(C) 예를 들면 장로교목사들은 "가르치는 장로"로 안수를 받으며 그들이 실제로 가르친다는 능력에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목사의 직책을 가르치는 직으로 여긴다,. 다른 한편으로, 성직자는 제도적으로 합법적으로 인정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전문성을 개인적으로 증명해 보임으로서 인격적인 권위를 얻을 수 있다(D). 예를 들면 예수님은 그의 서기관들과 같이 아니함일러라"(마7:29)가르치는 직책의 권위를 자기고 있던 서기관들은 전통과 다른 권위자들을 인용하면서 가르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분명히 나타났던 인격적인 전문성과 진정성을 결여했다. 예수님은 인간생할에 중심에 하나님을 현존하게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 다른 실예는 폴 해리슨 (Paul Harrisoon)의 미국 침례교인들의 중생연구에서 볼 수 있다. 침례교회 교단지도자들은 교단에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직책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C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율적인 침례교회들의 공통목적을 성취할 수 있게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설득함으로 개인적인 전문성에 근거한 (D)힘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들은 권위는 인격적인 권위였다, 이것은 직책상의 권위나 "합리적-법적인"권위라기 보다는 해리슨이 명명한 "합리적 - 실증" 권위이다, 이렇게 4가지로 권위의 형태를 나누는 것은 제 1차적으로 여러 다른 교단들에게 권위에 대하 강조하는 차이점들을 발견해 내기 위한 것이다, 이 네가지 형태들이 순수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서로 다는 권위의 형태들이 교회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긴장과 갈등에서 어떻게 작용하는 지를 이해하는데 유익하다.

일장에서 언급한대로 모든 교단들은 정치형태가 감독 정치나 장로정치로 남아있는 경우에도 점차적으로 개교회주의 또는 자유지원제로 움직여 가는 것 같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에서도 사실이다, 로마카톨릭 교구들의 지도력의 형태를 언급하면서, 데이비드 리즈(Darid Leege,1986:1)는 로마천주교회 교구들에 대한 주요 연구조사에서 발견한 것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

현대 미국의 교구들에서 볼 수 있는 지도력이 단순히 하나의 신분이 아니라 일을 수행하는 방법에 있다는 점이다, 권위는 직위에 있을 수도 있으나 그 직위를 맡고 있는 사람이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눈에 적법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면 그는 지도자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인격적인 권위가 그 중요성에서 상승되고 있으며, 계속해 상승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직자들과 다른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다음의 두 가지 방식으로 점차 취약하게 만들고 있다 : 헌금하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거나 교인들이 표현하는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방식으로 어떤 대가를 지불하든지 교인들을 기쁘게 하려는 유혹을 받을 것이요, 그들이 자기들이 이해하는 대로 기독교적 정체성에 충실하려고 할 때에 발생할 논쟁과 갈등과 쫓겨 날지도 모르는 가능성들 때문에 나약해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미국과 같은 사회에선 정교분리가 뚜렷한 상황에서 성직자가 교회 밖으로 어떤 적법성을 가지려고 한 그것은 직책의 권위가 아니라 인격적이 권위 때문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교회에서 지도력을 발휘할때에 우리의 인격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을 수 있는 해석자라고 인정을 받는 방식으로 지도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것은 심지어 우리가 개인들을 가르치면서 그들 자신의 잘못된 욕망과 관심을 초월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때에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이 책의 나마지 부분에서 논술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내가 인격적 권위의 중요성이 계속 상승하고 있으며, 다음 장들에서 특별히 이점을 강조하려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직자의 취약성에 대해서 내가 언급한대로 이런 경향에도 위험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인격적인 권위가 직책으로 권위를 압도해 버릴때에 엘리아데가 "진정한 죄"라고 이야기한대로 신화를 잊어버리고 (파괴시킬)위험성이 있다. 권위의 두가지 형태는 모두 필요하며 서로가 서로를 서로 보완하는 작용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제 3장 권위의 관계적 차원

[평신도는.. 그들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너무 지나치게 과대평가 되어서는 안된다... 의지의 성격과 죄와의 관계에 대한 뛰어난 철학자들의 총명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교리적 결정을 내리기 위하여 기술자나 농부를 초청해서도 안된다. -에드워드 a. 팍-

모든 전문인들은 평민들에게 음모를 꾸미고 있다.

-죠지 버나드 쇼-

이러한 진술들은 본장의 주제의 핵심을 묘사하고 있다 : 성직자와 평신도간의 권위 관계는 어떻게 구조화 되는가? 더 구체적으로 목사와 교회지도자들은 챺의 오만이나 쇼의 냉소가 없이 교회가 요구하는 권위를 어떻게 행사할 수 있을까? 더 적극적으로, 교회 전체의 교역, 즉 안수교역과 평신도 교역 모두의 능력을 향상시켜 주고 능력 향상을 받게 하기 위하여 권위는 교회에서 어떻게 사용되어 질 수 있을까? 이런 잇슈들은 권위의 관계적 차원을 반영하고 있다. 본장에서 나는 전문교역 모델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교역들에 특별한 관심을 집중하면서 오랜 동안 시도되어온 목사와 평신도 관계를 모형화 시키는 여러 가지 변수들을 고찰하고자 한다.

권위 관계들을 모델화하기

앞서 언급한 대로 권위는 사회 관계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우리의 힘의 사용을 인정하거나 합법화해주는 사회 집단이나 공동체를 떠나서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그러한 집단에서 부모와 자녀, 지도자와 따르는자, 전문인과 고객, 교사와 학생, 목사와 평신도와 같은 관계는 권위를 내포하는 역할에 따라서 구조화 된다. 이런 역할에 따른 모형화 - 즉 그들이 참여하는 관계의 종류-가 권위의 관계적 차원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뜻이다. 그러한 모형화는 하나의 연속선을 따라 여러 가지로 변형되어 나타날 수 있다. 그 연속선의 한쪽 겉은 불균형 권위 관계로 힘에 대한 접근이 불균형하기 때문에, 역할 파트너의 한 족이 다른 편을 지배한다.

그 연속선의 또 다른 쪽 길은 고도의 균형적 권위로 거기에는 어느 편의 지배 없이 역할 파트너 서로가 힘을 동등하게 나누어 가지거나 또는 힘의 균형이 유지된다. 교회의 역사가운데서 어느 특정한 시대의 권위관계의 모형은 대체로 시대의 사회 안에서 보는 더 광범위한 권위 모형을 반영한다. 신학자 에버리 델레스가 주장한대로 (1978,168)기독교 교역 발달의 역사적 연구는 아마도 각 시대의 교회가 교회의 구조들과 직제들을 조정하여 그가 처한 사회환경 가운데서 더 효과적으로 작용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불균형적 관계

일반적으로 권위관계 그리고, 특별히 목사-평신도 관계에 대한 비판의 대부분은 불균형적 성격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여러 작품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nd)는 권위 관계를 일종의 대중의 유아기 회귀로 기술하였다. 강력한 정치적 또는 종교적 권위자들은 아동기의 종속관계로 회귀하도록 격려하고 그의 정신분석의 목적은 - 지나치게 단순화 시켜 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 자율적인 인간, 즉 자아(ego)를 강화시켜 원본은(id)의 불합리한 충동을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이 되도록 환자들을 도와 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초자아(superego)-외적인 권위자들이든지, 양심이든지, 또는 또 다른 형태의 권위의 표현이든지 간에 -에 굴복하기 보다는 이성을 사용함으로서 그렇게 하였다. 여러 가지 형태의 인본주의 심리학을 자율적 인간에 대한 프로이트의 엄격한 비전을 조절하여, 자율적인 인간 대신에 자기실현 또는 자기 완성이라는 목표로 대치하였다. 필립 리프(Philip Rieff,1966)는 이것을 "치료법의 승리"라고 불렀으며, 이것은 1장에서 언급한 바 있는 "표현주의적 개인주의"또는 "신자유지원제"의 문화를 비평하는 한가지 흐름이 되고 있다.

교회의 불균형 권위에 대한 최근의 비판의 중심은 전문적인 교역 모델의 입장에 근거하고 있다. 교회에 대한 이런 비판의 대부분은 이유있는 비판이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성직자-평신도 한계의 모형에서의 불균형은 현대 전문직업문화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으며, 성직자-평신도의 차이 변화에 대한 또 다른 기초들이 거기에 개입 되었다.

차별화 지도력에 대한 필요성은 오히려 교회역사 초기에 아마도 1세기 말에 개발되었다. 연륜이 적은 교회가 내적인 갈등에 직면하고, 그 크기와 복잡성이 더 해가고, 그레코-로만 상황에서 여러 다양한 종교운동들의 도전에 직면했을 때에, 어떤 특수한 지도력 기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것들이 조직화 되기 시작했다 지도자들의 힘과 권위에 대한 다툼이 일찍부터 일어났지만 불균형적인 관계는 4세기에 생겨났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아래 계층구조적 교역 이해가 개발되었을 때, 성직자들에게 기대되었던 모범적 신성은 중대한 의미를 가졌다. 목회신학자들은 상대적인 영성에 따라서 교회의 사람들에 순서를 정하기 시작했다: 첫째는 감독이요, 둘째는 다른 성직자들이요, 셋째는 수도사(평신도)들이요, 마지막은 평신도-일반 성도들- 들이었다. 버나드 욚(Bernard Cookes 1975:265이하)은 이런 발전을 기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여러 가지로 볼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성직자들이 점차적으로 기독교 사회에서 분리된 계급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 이 아니었다.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행하는 기능의 위엄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의 그들의 회원권의 성격자체에서까지 평신도 위에 있었다. 이것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교회의 "머리"라고 칭하기 시작했을 때에 그 정점에 이르렀다.

중세기에 와서 계층구조적인 교역 모델은 완전히 꽃피웠다. 이것은 모든 것이 "존재의 고리"가운데서 자기의 자리를 가졌다는 중세기의 봉건 사회의 계층 구조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덜레스가 "교회의 제도적 모델"에 그리고 약간 낮은 정도이기는 하지만 "성례전 모델"이라고 부르는 것 안에 숨겨져 잇는 것이기도 하다. 제도적인 모델에서 제사장의 권위는 교황과 주교들 그리고 그들의 권위를 나눠가지는 제사장들에게 집중되었으며, 근본적으로 그들에게 직책의 권위가 있으며, 가르치고, 성화시키고, 통치하는 권한이 주어진다. 덜레스(1978:163)는 제도적 모델의 불균형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제사장]이 가르칠 때 사람들은 그의 교리를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있다. 그 이유는 가르치는 제사장의 지식이나 그 개인이 받은 은사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직책 때문이다. 그가 성찬을 집례할때에 그 제사장은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신성한 힘(예: 열쇠를 맡은 자의 힘)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제사장이 명할때에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권위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장의 명에 항거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거역하는 것이다.

성례전적 모델은 주교나 제사장의 법적인 권한을 적게 강조하고,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의 중보자로서 주교나 제사장의 특별한 신성성을 더 강조한다. 그러나 이 모델도 역시 불균형 관계를 만들어 낸다. 즉 제사장은 "하나님과 가까이 머무는 자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받아 특별히 경건한자가 되었기 때문에 세상적인 평신도는 제사장의 중보기도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 덜레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1978:174), 성례전 모델도 의도하는 것과 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제 2 바티칸 공의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를 강조하고 있다. 이 모델은 우리가 뒤에 보게 되겠지만, 좀더 균형적인 권위를 암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적 모델과 성례적 모델의 법적 영적 불균형이 로마 카톨릭 교회와 제사장직의 예전적 측면을 강조하는 성공회 교회에 아직도 남아있다. 그것은 개신 교회들 가운데도 남아있는 곳이 있는데, 이런 교회들은 목사가 하나님께 이르는 특별한 통로요 이것은 일반 평신도는 가질 수 없는 능력이라고 보고 목사와 평신도들간의 불평등의 권한 관계를 인식하는 교회들이다. 그러므로 신성 불가침의 대변자로서의 모범적 신성성은 성직자와 평신도간의 권위 관계에서 불균형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것은 전문가 모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모델은 권위의 기초를 특별한 전문성에서 찾고 있다. 덜레스가 이야기하는 교회의 모델에 따르면, 교역의 전문가 모델은 성례전 보다 말씀을 우위에 두고, 이 말씀의 해석과 선포를 중시하는 "말씀의사자"모델과 특별한 동질 관계를 가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평민들에게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쇼의 이야기는 전문적인 권위가 불균형 관계를 만들어 내며, 고객들-성직자의 경우에는 평신도들-을 종속 관계로 묶어두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 시켜준다. 평민들이 접근할 수 없는 자원들에 대한 전문가의 접근은 그들의 힘의 한가지 근원이며, 전문가 지배의 불균형 관계의 하나의 요인이다. 전문가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희귀한 자원들은 평민 대중이 자기들의 건강을 위하여 필요한 전문적인 의학 지식, 고객들이 갈등 소송이나 정의 구현에 필요한 법률 상담, 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를 원하는 평신도들을 위한 성경 해석의 전문성 등을 들 수 있다. 평신도들이 이러한 전문적인 자원에 직접적으로 접근하지 않거나 할 수 없는 동안에, 평신도들은 그 자원들을 접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지하며, 이것은 가끔 평신도와 전문가들간의 사회적 거리감을 더하게 만든다. 만약 내가 건강이나 법률이나 구원에 대한 전문가라면 나는 네게 필요한 자원들을 가졌을 뿐 아니라 네가 가지고 있지 않은 자원들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들 사이의 거리를 멀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 거리감을 더하게 만드는 것은 전문가의 권위를 더해 주는 특별한 복장 또는 다른 상징에서 보여주는 전문가의 비법이다: 의사의 하얀 복장과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기계들, 판사의 가발(영국)과 특별한 법정 의식, 예배 경험에서의 목사의 까운, 향기, 그리고 종의 사용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마찬가지로, 전문인들은 기준을 세우고 특별한 규범을 만들어 그 직업에 들어오는 것을 통제하는 등 자기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며, 그래서 돌팔이들에게서부터 대중들을 보호하려고 한다. 그러한 보호는 가끔 필요한 것이라고 인정 한다고 해도, 좀더 냉소적인 비평가들은 전문인들의 단체를 전문가들의 힘의 근원에 대한 전문가의 독점 유지 기능으로 보고 있다. 교단들이 규정하는 안수를 위한 요구 상황들도 어떤 점에서 같은 효과를 가지고 있다. 요구되는 전문성에서의 어떤 차이들은 다른 특별한 요인 없이도 피할 수 없이 불균형을 만들어 낸다. 이런 필요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얻던 편의 사람에게 전체의 유익을 위하여 다른 편의 사람보다 더 큰 힘을 부여하는 일종의 기능적인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 모델의 비평가들이 지적하는 것은 전문가들이 이런 차이를 이용하여 이득을 얻으려하고 자신들의 신분을 높이려고 하는 분명하게 계획적인 시도이다. 나는 그러한 시도를 전문가주의(Professionalism)라는 항목으로 보고 싶다: 즉 그것은 특별한 전문성에 기초하여 전문가에게 특권적 신분을 부여하려는 이데올로기로 전문가 모델을 전향시키는 것이다. 본장의 서두에 인용한 에드워드 챺의 분명한 평신도에 대한 경멸은 이런 점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논평은 19세기 중엽 소위 현대적인 전문직이 등장할 때에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문가주의의 이데올로기가 미국 성직자들 사이에 처음으로 출현한 것은 아니다. 나는 현대 전문가주의가 출현한 바로 이전의 역사를 예를 들어 약간 더 이야기하고 싶다. 이런 사건들이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관계 변화를 가져온 실례들을 제공할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전염되고 있는 논쟁점들에 대한 통찰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종교사에 대한 부기(附記)

18세기로 들어서 미국 사회는 여러 가지 변화를 겪고 있었다. 그중의 하나는 17세기 뉴 잉글랜드의 특성이 되어왔던 교회와 사회의 유기적 관계가 뒤집어진 것이다. 뉴 잉글랜드 개척 초기에 목사들은 사회의 엘리트로서 상당한 존중과 인정을 받고 있었다. 18세기가 진행 되면서, 사회는 더욱 세상적이 되었고 그런 변화의 결과로 더욱 단편화 되었을 뿐 아니라, 목사의 위치도 중심에서 밀려나고 덜 안전하게 되어갔다. 여러 사회 역사학자들(Schmotter, 1973; Youngs, 1976; Harlan, 1980)이 이런 변화들에 대한 응답들을 분석하였다. 성직자 주에는 자신들을 평신도 민주주의 위에 군림하는 일종의 교회 귀족으로, 평신도들과 구별되는 전문인 집단을 만들어 자기들의 신분을 상승시키려고 노력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중부 식민지의 반 부흥운동의 성직자들과 그들과 동조하는 뉴 잉글랜드의 성직자들 모두 자기들의 전문직에 필요한 장기간의 힘든 준비 과정에 기초한 특별한 기술적인 지식을 상당히 강조했다. 챨스 초운시(Charles Chauncey)의 평가에 따르면, 그러한 전문성은 단순히 하나님의 인도로 올 수 있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목사들은 "그들이 성취해야할 어려운 사역을 담당하기 위하여 최고의 배웅과 교육을 받아야" 했다(Harlan, 1980:34). 역시 구별된 전문직으로서의 자기들의 권위를 주장하려는 시도로, 어떤 마사츄세츠의 목사들은 성직자의 선택과 안수의 권한을 교회와 평신도들이 참여하는 교회 회의로부터 빼앗아 그 기능을 목사 협의회의에서 장악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어떤이들이 치리 장로의 직(교회와 목사사이에 서서 교회 치리에 목사를 협력하는 평신도 직원)을 회복하려고 했으나 많은 목사들은 자기들의 권위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이런 노력들을 반대하였다. 데이비드 할란(David Harlan, 1980:45)은 특별히 1698∼1752년까지 마사츄세츠 주 렉싱톤에 있는 제일교회의 목사로 시무했던 죤 행칵(John Hancock)의 목사의 흥미로운 응답을 인용했다. 그의 교회 교인들이 2명의 치리 장로를 세우자고 그에게 요구했을 때에, 그는 그들의 요구에 동의하고 그 새로운 직원이 해야할 것이 무엇임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교인들에게 이야기했다:

나는 장로들 중 한 사람을 주일 예배 전에 나의 집으로 불러서 마굿간에서 내말을 끌어내어 안장을 얹고 내 문앞에까지 끌고 와서 내가 말을 타는 동안에 말이 움직이지 않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장로는 교회앞에서 기다리다가 내가 내리는 동안에 그 말을 붙들게 할 것이고, 예배가 끝나면 그는 다시 말을 끌고 와서 계단 앞에 세우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치리 장로를 세웠을 때 나를 도와주기 위하여 그에게 시킬 모든 것입니다.

할란은 바로 그 시점에서 그 문제를 철회되었고 더 이상 치리 장로를 세우는 일이 없었다고 주석하고 있다. 이러한 실례들은 평신도들에게 지위를 주지 않으려는 뉴 잉글랜드의 다수의 목사들의 노력을 시사하고 있다. 영스(1976:91)가 지적한 바와 같이 어떤 사람들은 안수 교역과 함께 교회는 진정한 정체성울 가진다고 믿었다. "산위에 세운 동네"라는 구절을 죤 윈드鶼(John Winthrop)은 전 뉴 잉글랜드를 지칭하여 사용하였는데, 토마스 폭스 크로프트(Thomas Foxcroft)는 1726년 안수식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목사들은 (가정의 부모와 같이) 다소간의 고상하고 눈에 잘 띄는 기도처입니다. 그들은 산위에 세운 동네로 숨기우지 못할 것입니다." 변화에 직면하여 목사의 신분을 상승시키려고 시도한 이와같은 노력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들은 수 많은 목사들 자신들의 반대를 주장하면서 보스톤의 벤자민 콜만(Benjamin Colman)은 이렇게 말했다."[목사들은]사람들을 위하여 그리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 그들이 교회를 구성하거나 목사들을 위하여 교회가 만들어지지 않았다."(Harlan,1980:41), 더나아가서 평신도들은 목사들의 신분 열망의 직면하여 힘없는 존재로 머물지 않는다. 많은 평신도들이 우쭐거리는 목사들을 깊이있게 비판했으며, 자기들의 손에 권력을 장악하려는 목사들의 노력에 반대했다. 영스(1976:102)는 보스톤의 천연두 전염에 목사들이 개입을 선언한 뉴 잉글랜드 코란트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인용했다. 편집자 제임스 프랭클린(James Franklin)은 목사들의 행동과 선언을 무모한 목사의 인격에 기초한 것을 비판했다 :"종교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의 권위를 도출하여야 한다. 종교는 어떤 인간의 힘에 의거하여 인간의 양심안에서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평신도들도 지교회에 목사를 초청하는 과정과 목사의 신수비를 책정하는 데서 자기들의 힘을 행사하였다. 그리고 모든 것이 실패했을 때 그들은 목사를 내어보내는 힘을 행사했다. 대부분의 목사가 한 교회에서 평생동안 목회하는 것이 관행화 되었던 이 당시에, 이것은 목사들의 경력에 심각한 타격이었다.

평신도의 영향력은 대각성운동의 결과로 상당히 향상되었다. 대각성운동은 평신도들이 자신의 영적인 능력에 새로운 의식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동시에 목사들도 적법성의 갱신을 경험하였다. 그것은 엘리트 직책의 신분회복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목회와 지도력에 대한 새로운 강조에서 기인되었다. 대각성 운동은 목사들에게 이런 것들의 필수적임을 일깨워 주었다. 영스(1976:136)는 논평과 같이 대각성 운동은,

교회 목사들에게 더 세상적이면서도 더 안전한 힘의 근원으로 평신도와 함께 일하는 능력을 새로이 강조하도록 만들었다. 신앙부흥사들(죠지힛필드와 같은 순례 부흥사)의 활동이 부흥 운동기의 가장 극적인 사건들을 일으켰지만 교회 교인들을 부흥회로 인도하고 신앙 각성을 체험한 사람들을 상담한 것은 일반적으로 그지역 목사들이었다. 맹렬한 부흥운동의 열정이 가라앉았을 때, 그 목사들은 자기 백성들과 함께 남아서 세속세계 가운데서 종교적 깨달음을 양육하는 일을 계속 하였다.

앞장에서 제시한 범주들 가운데서, 목사들은 영향력 있는 목회에 기초한 인격적인 권위가 직책의 권위보다도 자기들의 적법성에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할란(Harlan)도 성직자협회에 대해서 비슷한 지적을 했다. 많은 목사들은 평신도를 배제한 그러한 협회가 여러가지 교인들에게서 목사에게 힘을 실어 줄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의 실체 결과는 오늘날 우리가 "지원 그룹"이라고 부르는 것에 불과하였다. 즉 그것은 목사들이 고립을 극복하게 해주고, 신학적인 논쟁점들에 대한 합의를 만들어 내고, 목회와 치리등의 심각한 문제들을 다루는 전략들을 개발 하는데에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한 유의들이 목사의 직책의 권위도 향상되었다.

불행스럽게도 대각성운동이 불러일으킨 좀 더 균형적인 관계에로의 이런 추진운동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도날드 스코트(Donald Scott)는 1750년에서부터 1850까지를 분석하였는데, 이 기간은 제 1차각성과 곧 이은 새 국가의 탄생 그리고 제 2차 대각성운동이 이어지는 시기였다. 나는 그의 논점을 여기서 요약하지 않고 다만 18세기 초반이 지나가면서 뉴잉글랜드 목사들이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위치가 서서히 훼손되어간 그 변화들만 언급하고자 한다. 교회의 역할-특히 목사들의 역할-에 관하여 공공생활에서 긴장들이 유발되었다. 제 1차 각성운동에 의하여 일어나고 제2차 각성운동에 의하여 다시 불붙은 복음주의적 경건은 어떤 이들이 "대 반전"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끌어서, "공적"개신교와 "사적"개신교(Marty,1970 과 Moberg ,1972를 보라)사이에 분열을 가져왔다. 목사의 역할에 대한 평신도의 기대들은 점차적으로 개인의 회심과 심방과 여러 가지 교회 프로그램을 통하여 평신도의 필요들에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에 초점이 모아져갔다. 교회와 목사들이 공적인 논쟁점들, 특히 노예제도폐지등에의 개입은 강력한 방해를 받았으며, 여러 가지 갈등요인들이 되었다. 더 나아가서 급격한 교회성장의 욕구와 새로운 목회 지원자들에 대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은 농촌지역에서 왔다. 그들은 과거의 목사들의 탄생하면서부터 가지고 있던 신분이 없었다.

이러한 것들과 또 다른 변화들의 결과는 목사의 권위를 직책의 권위보다도 인격의 권위로 만들었으며, 인격적인 권위는 항상 스스로 획득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더 취약하고 불확실한 것이 되어 갔다. 목사는 자기의 위치를 보존하기 위하여 정식으로 자신들을 증명해 보여야 했다. 그들이 평신도와의 관계는 힘의 균형을 장악한 평신도와 함께 반대방향에서 불균형이 되어갔다. 평신도는 이제 목사의 고객이 되었고, 목사들은 자주 자기들이 단순한 고용인으로 전략하고 있다고 불평하였다. 실제로 어떤 평신도들은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제 1장에서 언급한 목사는 고용된 일손이라고 했던 프랑스 철학자Crevecoeur에게 보냔 농부의 비평을 회상해 보라

전문인으로서 목사의 현대적 이미지가 개발된 것은 바로 이러한 풍조 아래서이다. 새롭고 자각적인 방법에서 그리고 자기들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복음주의적인 목사들은 자신들을 전문인(의사와 변호사와 상응하는)으로 자처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스코트91978:128)지적한대로 이 시기에 특별히 설립된 새로운 신학교에서 특수하고 종교적인 공식적 훈련을

요하는 특정분야의 전문성을 소유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스코트에 따르면 이것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는 "덕을 세우는 일(edification)이 목사의 근본적인 업무요, 목사와 자기 교인간의 연결고리로서 고객중심의 아이디어를 목사와 평신도가 동시에 받아들였다는 것이다."(128). 사회참여, 영감을 받지 않는자의 신학교육자격문제, 옛신학교와 새로운 신학교 사이에 일어난 교리논쟁으로 인한 분열등은 더 이상 목회책임의 범위안에서 고려하지 않게 되었다. 만약 목사가 사회적 논쟁에 참여했다면 그것은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개인적으로 한것이지, 목사직책의 권위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그가 설교했을 때, 그는 평신도들의 실제적인 행위 실천을 위해 그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 그는 "종교에대해서 설교한 것이 아니다 종교를 설교한 것이다."(scot, 1978 : 129). 그리고 목사들은 교리적인 논쟁들을 새로이 설립된 신학교의 교수들에게 떠 넘겨 버렸다.

이러한 변화는 목사들을 그들의 전임자들로부터 상당한 거리감이 있게 만들었지만, 목회자의 역할의 새로운 개념은 어느정도의 목회적 권위를 회복시켜 주었다. 그것은 두가지 차원을 가졌다. : 특정한 삶의 영역에서의 전문성과 분명한 기독교적 경건 및 예의가 그것이다. 다시한번 스코트를 인용하고자 한다.(131): "어떠한 평신도도 할 수 없는 (어떤 방식으로 배우든간에) 방법으로 여러 가지 다양한 신학적 성서적 과학들을 공식적으로 교육받은 자들로서, 법조인들과 의사들이 보통사람들과 구별되는 자기들의 전문적인 필수적인 과학을 소유하는 꼭 같은 방식으로, 목사들도 평신도들과 구별되는 소유지식을 소유하고 있다." 평신도와 비교해서 분명히 구별되는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본장의 서두에서 인용한 에드워드 챺의 인용문에서 분명하다. 더구나 새로운 성직자 전문인들은 진정한 목사로서 품질보증의 도장을 찍은 사람으로 행동하였다. 이것은 "성직자에게 기대되는 도덕과 그리스도의 가슴에 있는 삶을 소유한 자의 평안을 가진 자로"자처했다는 것이다.(131) 스코트는 다음과 같이 결론 짓는다(1978 : 132):

새로운 목사의 개념은 전문인의 전문성과 기독교적 성품의 광채를 가진 교역자라는 데에 모아졌다. 이것은 주의 깊게 규정된 전문 영역에 관한한 목사들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것 이다. 이것은 목사의 입지를 위태하게 할 지역공동체의 일상적인 일에 연루되어 목사의 이미지를 손상시키는데서부터 목사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으며, 그리고 한 때 단순히 목 사의 직책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제공해주던 일종의 권위를 회복시켜 주었다.

목사와 평신도의 변화된 관계에 대한 이러한 약간장황한 실예는 일차적으로 어떻게 함의 균형이 앞뒤로 움직이면서 양쪽방향에서 모두 불균형을 창조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실예이다. 그러한 추이는, 여기서 더 이상 반복하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일어났다. 일장에서 기록한 목사의 권위에 대한 수많은 긴장들이 여기서 인용한 실예들 가운데서도 꼭 같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더구나 오늘 이 시대에 긴장을 일으키는 많은 씨앗들이 19세기 중엽에 일어난 변화에서 심겨졌다. ⑤

나는 지금까지 내가 논술해온 전문인 주의가 , 초기의 변형이든지 아니면 최근의 변형이든지간에 , 목사들이 변화에 대응하고 자기들의 입지를 높이려고 시도했던 아주 중요한 전략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였기를 희망한다. 독자들은 19세기 목사들이 자기들의 권위의 기초로 택했던 두가지 전략들이 즉 전문성과 경건이 제 2장에서 논술한 권위의 부차적 기초와 같은 이야기 임을 분명하게 알았을 것이다. 여기에서 제시한 실예들중 다수가 전문가 모델의 부정적인 면에 중점을 두고 다루고 있다면, 실제로 이것은 전문가 모델의 전반적인 부정을 의미하는 것인가? 전문가 모델은 19세기 목사들이 강조하였던 권위의 두가지 기초들을 합당하게 재규정할 때, 권장할 만한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우리는 권위의 중요한 기초로서 전문성과 모범적 경건에 대한 19세기 목사들이 강조하였던 권위의 두가지 기초들을 합당하게 재규정할 때, 권장할 만한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우리는 권위의 중요한 기초로서 전문성과 모범적 경건에 대한 19세기 해석에 동의해서는 안된다. 여기에서 부정적인 것은 평신도를 희생양으로 삼아 목사의 위상을 높이는 무기로 이런 기초들 중 한가지나 두가지 모두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논술은 뒤에 할 것이다. 우선 균형적인 권위관계를 먼저 고찰해 보기로 하자.

균형적 관계들

균형적 권위 관계에서 교회와 같은 하나의 기관이 가지고 있는 힘은 원리상 모든 회원이 가질 수 있다. 극단의 경우에는 어느 한 회원도 다른 회원위에 권위를 행사할 수 없다. 모든 회원은 힘에서 동등하며 그것을 행사할 권리를 갖는다. 거기에는 지도자 따르는자 또는 성직자- 평신도의 구별이 없다. 그렇게 완전히 균형적 관계불균형적 관계보다도 조직상으로는 훨씬 드물게 존재하며,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공식적 지도자역할이 발달함에 따라 필요에 의해서 균형적인 관계의 극단에서 멀어지게 만들때가 많이 있다. 그러나 상대적이긴 하지만 균형적 관계를 가진 교회기관들과 구조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때로 이러한 균형적 관계는 단순히 지도자와 따르는자 또는 목사와 평신도 간의 힘의 교착상태를 의미하는 힘의 균형일수 있다. 그러나, 더 적극적으로, 목사와 평신도간의 구별이 실질적인 힘의 불평등이라기 보다는 기능적인 구별에 불과한 교회기관들도 있다. 각자는 기관안에서 다른 이를 보완하며 보조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으며, 쌍방은 전체의 유익을 위하여 권위를 행사한다. 어느 편도 프로이트가 우려했듯이 다른 편을 종속시키는 데에 권위를 사용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균형적인 관계들을 포함해서 균형적인 관계들은 특히 덜레스(1978)가 교회의 공동체 모델 -"신비적인 교제"로서 교회-이라고 부른 교회들 가운데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교회는 제도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생겨나는 남자들과 여자들의 교제로서 관심과 협조의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창출한다.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의 이미지들은 상대적으로 균형적인 공동체모델을 포착하고 있다. 레티 러셀(Letty Russell)이 그녀의 저서 Household of Freedom에서 개발하고 있는 하나님의 권속으로서의 교회는 또 다른 각도에서 교회의 공동체 모델과 파트너쉽 및 균형적 관계의 상호의존적 특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1987) ⑥러셀과 같은 여성학자의 해석은 덜레스의 다섯 번째 모델인 종의 모델과 유사성이 있다. 이 모델 역시 균형적 관계들을 강조하고 있으며, 교회안에서 뿐 아니라 교회밖에서의 상호성, 특히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는 가난한 자들과 눌린자들과 교회의 동일시를 강조한다.

많은 경우에 자기가 설립한 공동체 안에서 유지하려고 애쓰는 바울의 교회의 비전은 지도력에 관한 한에서는 균형적인 강조를 반영하고 있다. 남성과 여성, 주인과 노예관계등에서 계층적 견해가 지배되고 있던 그 시대의 가부장적 문화에 잡혀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갈라디아서 3: 27-28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교회이해와 지도력이해에서 균형적 관계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거기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여자나 남자나 없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선언한다.

바울이 세운교회안에서는 성령의 은사와 은혜에 근거해서 역할에서 구별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것들은 공식적인 직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바울은 특별한 지도자역할을 포함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주시는 복음의 능력인 은혜를 동등하게 나누어 가졌다고 믿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설명하는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2장은 서로 다른지체들이 전체의 유익에 기여한다고 가르치므로서 이런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모든 지도력의 역할은 사랑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각 사람에게 나뉘주신 은혜의 선물이다. 에베소서 (1:1-16) 저자도 바울과 꼭 같은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더 균형적 관계는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을 받은 초대기독교회들 가운데서 볼 수 있다. 에드와드 슈바이저(Edward Schweiger ,1961) 가 보여준 바와 같이 요한은 철저하게 카리스마적인 교회관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성령으로 거듭나며 , 예수그리스도와 직접적이요 완전한 합일 가운데 살며, 그리스도의 사랑은 교회의 내적 외적 생활을 인도하는 계속적인 선물이다. 어떤 특별한 교역도 필요없으며, 각자에게 나눠 주시는 성령의 선물에도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요한복음이나 요한 서신에 나타나는 유일한 직제는 적 그리스도 또는 하나님의 대적자들의 현현이라고 기록되었다. 초대교회가 점점 복잡해져가는 상황 이단적인 운동의 위협에 직면 해서 공식적인 지도력을 세워야 했을 때, 이것은 근본적으로 그 성격상 기능적이 었으며 따라서 상대적으로 균형적이었다. 에드워드 쉴레베커(Eduare Schillebeeck,1981:46)가 처음 3세기 동안의 교회생활에서 기록한 바와 같다.:"이모든 다양한 형태에 대응하여 교회의 교역은 근본적으로 집단성, 즉 다양한 교역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의 연대성이다. " 얼마후에 , 아마도 늦게는 4세기에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차이는 존재론적 성격 또는 질적 차이로 보게 되었다. 나는 초대교회에 강력한 권위를 가진 지도자가 나타나서 다른 사람들 보다 더 큰 권위를 행사했으며 따라서 초대교회에서도 불균형적 관계를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베드로, 바울, 야고보 등은 아주 중요한 지도력을 행사하였다. 속사도시대의 지도자들은 그러하지 못했다.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등의 목회서신들은 좀더 계층구조적인 교역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들은 계속해서 교역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명으로 보았다. 아무리 불균형적으로 보이는 관계에서도 그 당시의 권위의 차이들은 근본적으로 그 성격에서 기능적인 것이었다.

이전 초대교회의 권위형태는 만인제사장직에 대한 개신교 개혁자들의 가르침에 영향을 주었다. 대부분은 목사와 평신도사이의 기능적인 차이를 주장하면서도, 개혁자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섬김의 교회교역을 위해 부름받았다고 가르쳤다. 종교개혁의 좌파, 특히 쾌이커 교도들은 목사의 직을 전반적으로 부정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똑같이 성령의 능력과 인도에로 나갈 수 있다고 믿었으며, 신약성경의 요한 복음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다. 재세레파는 권위가 전체공동체에 속한 것으로 보았다. 예언자들과 다른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적법성은 공동체의 인정에 달렸으며, 최종적인 권위는 공동체에 있었다.

이 비슷한 상황이 칠레에 있는 현대 오순절 종파들의 연구에서 나타났다.(Willems,1967). 어떤 종파들은 영적인 능력이 공동체에 속한 것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균형적 관계의 실례들을 보여준다. 지도자들은 특별한 성령의 영감을 받았다고 공동체가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언제든지 교회성도들은 그 지도자에 도전할 수 있고 새로운 영광을 받은 것이 인정되면 그 도전은 받아들여지고, 지도자의 역할은 바꾸어질 수도 있고, 새로운 분파가 생겨날수도 있게 된다. 재세례파에서와 같이, 라틴 아메리카의 종파들은 사회의 지배적인 계층질서에 반대하고 천주교인 전통적제도적인 모델에 반대하여 평등주의 원칙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교회의 권위 관계들

위에서 언급한 권위관계형태들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오늘 어느 지점에 있을까? 내가 이미지적한 바와 같이 개신교와 천주교모두는 실제에서는 그렇지 못하지만 성직자 평신도 권위관계에서 균형적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제2바티칸 공의회의에서 "하나님의 백성"강조, 여러형태의 해방신학에서의 강력한 평등주의 강조, 또는 수많은 교단에서 강조하는 상호교역 또는 공동교역을 고려할때에 사실인듯한다. 천주교 교구에 대한 연구를 반영하면서 리즈(Leege,1986:1)는 "지도력"은 복수명사라고 결론짓는다. 성직자는 아직도 지도력이해의 중심이지만 교구의 방향서의 책임을 함께 지는 또 다른 영향력있고 힘이있는 지도자들이 평신도들 가운데에도 많이 있다. 흑인 교회들도 비슷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앞서 언급한바 와 같이, 흑인교회의 권위관계는 전통적으로 불균형적인 것으로, 목사가 상당한 힘을 행사해 왔다. 이러한 권위관계는 균형적인 관계로 지금 변하고 있다. 그 이유는 교육수준 의 향상과 안정된 흑인 종류계층의 성장으로 결정과정에의 평신도의 참여를 요구하는 강력한 압력이 평신도들에게서부터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놀랄일이 아니다. 어떠한 신학적인 이유에서 떠나서, 교회가 서 있는 더 큰 문화는 평등주의적 가치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시대의 풍조는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라" 는 슬로건을 내걸도록 요구하고 있다. 목사이든 평신도이든 다 같이 우리는 교회안에서 권위를 행사하기 위하여서 이런 사실을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이런 문화적인 요구와 별도로, 우리가 믿는 신앙의 핵심적인 가르침도 균형적인 방향을 우리에게 가리키고 있다. 다음장에서 논술하겠지만 교회는 차별화된 지도력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것은 다른 것들보다도 "더 평등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섬기는 지도력의 실예(예, 요13:1-16)와 예수님의 정신을 따른 바울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고전12)의 유기적 이미지는 모두 비계층적 균형적 관점을 반영한다. 이 관점은 복음이 가르치는 지도력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문화적인 맥락이 아니라 복음이 균형적 권위 관계를 지향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전체 백성이 각자가 받은 은사로 상호보완적인 목회를 하도록 부르고 있다. 이것을 성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음의 여러 장들에서 나는 이것을 성취하는 몇가지 방법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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