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서 - 책별로 시간순서를 따라 배경(context)을 이해하며 성경읽기
1. 배경 (Context)
성경의 역사는 일반 역사와 달리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역사를 쓸 때는 선택과 연계성이라는 원칙을 따라서 하게 됩니다. 짧은 기간에 관한 역사를 쓰더라도 모든 내용을 포함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역사는 매우 선택적이어서 한 국가 이스라엘에 집중되어 있고, 그 국가의 삶에서 일어나는 특정한 사건들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성경의 역사서는 기록된 하나님의 언약 안에 약속과 명령과 관련된 사건들 만을 선택하여 기록되었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여호수아 서를 비롯한 성경의 역사의 기록들은 일반적인 역사가 아니라 예언적인 역사의 기록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저자들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중요한 사건이거나 하나님의 말씀과 그에 따라 행하시는 역사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선택하여 기록하였습니다. 그래서 오직 선지적인 통찰력을 가진 선지자들이 이런 성경의 예언적 역사들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이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설명합니다. 율법은 사람들에게 표현된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지자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출애굽기는 이집트에서 출애굽 하는 백성의 구속을 묘사합니다. 선지자들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어떻게 삶에 반응해서 살아야 했는지를 설명합니다. (레위기, 민수기) 율법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순종을 축복하고 불 순종을 징벌하실 것인지 보여줍니다. (신명기) 여호수아서에서 우리는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여리고 전투에서처럼 우리가 승리를 얻게 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반대로, 우리는 또한 아이성에서의 패배를 통해서 율법에 대한 불 순종의 결과를 보게 됩니다. 계속되는 불순종의 삶은 '여호수아서'에서 정복된 땅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대 하'의 기록을 통해서 보듯 모두 잃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선지자들은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사람들이 어떻게 약속의 땅을 얻게 되었고, 곧 불순종으로 인해서 비극적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되었는지를 들려줍니다. 다시 말하자면, 처음 다섯 권의 모세의 오경의 율법은 그 후에 있는 여호수아서로부터 역대 상하까지 일어난 이스라엘의 역사의 원인이 됩니다.
성경은 단지 하나님에 관한 것이 이야기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호수아서를 포함하여 구약의 모든 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역사이며, 그들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는 마치 남녀의 결혼 관계와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약속의 땅으로 여행할 때 약 3개월 동안 신혼여행 같은 것이었지만, 신부인 이스라엘이 남편 되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고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 땅에 들어가는 데 40 년이 걸렸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슬프게도 결혼 생활은 잘되지 않았고, 일시적인 이혼도 있었습니다. 전적으로 잘못은 아내인 이스라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며, 이혼을 싫어하기 때문에 결코 그들을 완전히 떠나지는 않으셨습니다.
2. ‘KEY’ 노트
여호수아의 전체 구조는 명확합니다. 1장과 23-24장은 각각 여호수아의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의 임명과 유언의 설교입니다. 2장에서 5장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는 것. 6장에서 12장은 가나안 땅의 정복에 대해서, 그리고 13장에서 22장까지는 땅을 분배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각 단계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리더십의 여러 자질들을 보게 됩니다.
1. 요단강을 건너다 (1장 - 5장)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우시며 격려하시는 하나님 (1장)
여호수아는 하나님에 직접적인 임명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의 지도력을 받아 드림으로써 이미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인정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이미 그 위에 임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중대한 사명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확증의 말씀을 필요로 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자신에게 말씀을 주실 때 진정한 확신과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야곱과 모세는 모두 개인적으로 주신 말씀을 가지고 있었고, 이제 하나님은 그 말씀을 여호수아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종 모세가 죽었으니'라며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쓰신 위대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사명은 끝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행하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또 다른 모세가 되도록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새로운 시대의 리더십으로 세우시고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가 형통하여 하나님의 성취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성공 (Success)과 번영 (prosperity)의 의미는 부자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부유함을 주셨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성공과 부유의 의미는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네가 밟는 모든 땅을 너에게 주리라."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신감과 담대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실패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열매를 맺게 되며 절대 실패하지 않습니다. 물론 여호수아는 이제 곧 정복하게 될 땅이 하나님이 이미 약속하신 땅이라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추측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을 따라 행동했습니다. 이러한 원칙은 오늘날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신 것처럼 여호수아와 함께 할 것이며, 두려워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찬가지로 담대함은 그리스도인들의 리더십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이 담대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 함께 하시는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며 그분이 함께 하시는 것을 확신할 때 담대하게 됩니다. (사도 행전 4.13, 딤후 1.6-8).
넷째로, 하나님은 성공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기 위해 모세의 율법의 말씀을 주야로 읽고 묵상하며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순종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동일한 의무가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주어졌으며 (신 17.18-20), 같은 이유로 매일 성경 읽고 묵상하며 그에 따라 사는 삶은 성공적인 그리스도들 인의 지도력을 위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백성들은 주저 없이 여호수아에게 온전히 충성할 것을 다짐합니다. 이것은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대한 확증을 주면서 더 큰 확신을 갖게 했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이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교회를 통해서 주변의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확증 받게 될 때 우리는 더 큰 믿음의 확신을 갖게 되며, 그러한 서로 간의 신뢰와 존중으로 하나된 공동체는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는 데 있어 강력한 힘이 됩니다.
정탐꾼을 여리고 보내다 (2장)
여리고로 들어가기 전에, 여호수아는 2 명의 정탐꾼을 보낸다. 40 년 전에 12 명의 정탐꾼이 보내졌을 때, 그들 중 10 명의 부정적인 보고로 이스라엘의 1세대가 약속의 땅에 들어오는 것이 허락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2명이 긍정적인 보고를 가져왔던 것을 기억하며, 2명 만을 정탐꾼으로 보냈습니다. 정탐은 믿음의 행위가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예수님도 전투에 가기 전에 앉아서 비용을 계산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씀하셨듯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때로는 정보를 가지고 계획과 전략을 세우는 것 또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방법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먼저 직면하게 될 일에 대해 아무런 정보 없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두 정탐꾼은 기생 라합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라합과의 대화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애굽과 그 주변 국가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 소식은 그 지역의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떨게 했습니다. 실제로 라합은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이 정복하여 차지하기를 원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라합은 놀랍게도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에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라합이 구원받게 되는 수단은 마치 죽음의 천사가 애굽에 올 때 유대인의 장자들이 구원을 얻게 된 이야기를 연상하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유월절 양의 피를 그들의 집 문틀에 칠했듯이, 라합은 주홍빛 털실을 창문 밖으로 걸어서 놓으면, 라합의 가족들이 여리고 성에서 임하는 심판 속에서 용서를 받게 받을 것을 약속 받았습니다. 주홍빛 털실은 라합의 집의 창에 피가 묻어 있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죽음이 임하지 않게 될 것을 의미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그녀의 가족이 라합의 믿음으로 구원받게 된 것을 증거하며 그의 믿음을 높일 뿐 아니라, 마태복음에서는 이방인이며 기생 신분에 불과한 그녀가 메시야 예수의 조상들의 족보에 포함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3장 – 4장)
요단강은 가나안 동부 가장자리에 위치하며, 홍수 시에 수심이 6m까지 깊어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여호수아는 언약궤를 지닌 제사장을 앞장세워 진행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 언약궤 안에는 언약의 증서인 십계명 돌판이 들어있었습니다.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로서 대장 되신 하나님 자신이 앞장서시며 싸우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뜻에 순종하여 그분 편에 서기만 하면 언제나 하나님이 승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궤로부터 약 200규빗 (약 900m) 뒤에 거리를 두고 군대가 따라오도록 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하나님의 임재를 표현하는 언약궤의 거룩함을 보여주며, 또한 모든 사람이 언약궤를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임재 하심에 눈을 맞추고 그분을 따라갈 때, 언제나 불가능을 가능케하는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스스로를 성결 하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영적 전쟁이 될 것이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사람들에게 영적 준비를 하도록 합니다. 거룩하게 하는 것은 그들이 주님께 집중하기 위해 일반적인 일들을 벗어나서 온전히 주님께 집중하며 그를 따를 것을 의미합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에 잠기자 기적적인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요단강이 흐르지 않게 하셨고, 요르단 강의 마른 땅으로 건너 갈 수 있었습니다. 이 기적은 분명히 40 년 전에 홍해를 통과하는 기적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집트의 억압에서 홍해 바다를 가르시며 기적적으로 구원하셨으며, 또 한 번이 이적으로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기적의 열쇠는 하나님의 언약궤에 있습니다. 이 언약궤는 3장에서 14 번이나 언급된다. 언약궤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의 증거이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한다는 증표였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러한 불가능한 문제에 직면하여 그것을 돌파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호수아의 성취이신 예수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는 항상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약궤의 완성이며 성취입니다. 그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즉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며 (마 1 : 23), 예수님께서는 모든 일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사단과 모든 흑암의 권세를 무너 뜨리시고 그는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습니다 (골 2:15). 우리가 계속 그 승리하신 예수님을 보고 따라가면, 불가능한 강물은 말라 버리듯 삶의 모든 문제를 돌파하게 하실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여호수아의 군대
요단강을 건너 길갈에서 행한 4가지 (4장 – 5장)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길갈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다음 네 가지를 행했습니다. 하나님은 요단강에서 12지파를 상징하는 12개의 돌을 요단강에서 가져와 기념비를 세우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기적으로 요단강을 마르게 하여 건너게 하셨음을 미래의 다음 세대가 기억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념하며 기억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경건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게 합니다. 새로운 세대의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에게 명령한 언약의 표식인 할례 예식을 아직 거치지 않았습니다. 요단강의 기적은 두 가지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즉시 공격받지 않도록 그들을 향한 두려움이 가나안 사람들에게 퍼졌습니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은 안전하게 텐트를 치고 거주할 수 있었고, 할례를 행하므로 구별된 주님의 언약 백성임을 확실하게 하였다.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 처음 머물게 된 그 지역을 굴러가다는 의미에 '길갈'이라 지명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제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수치가 모두 굴러가게 하셨다 라는 의미였습니다. 유월절을 약속의 땅에서 처음으로 지킬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날 40년간 광야 여정에서 내린 만나가 멈추었으며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에서 처음으로 그 땅의 소산물을 먹게 됩니다. 이 또한 하나님이 공급하심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그것은 그들의 순종 여부에 따라 증가되거나 보류될 수 있었습니다 (신 28.38-42).
길갈에서 12개의 돌을 기념비로 세우는 이스라엘
2. 가나안 정복 전쟁 (6-12장)
여리고 성 전투 (6장)
여리고를 먼저 정복하고자 했던 것은 군사 전략적으로 그들은 이스라엘을 남과 북으로 가로질러서 먼저 정복함으로써 남북의 가나안 군대를 분열시켜 연합 공격을 저지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차례대로 북쪽과 남쪽을 나누어 정복해 가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가나안 땅의 중앙을 정복해가는 첫 관문인 여리고와 아이는 가장 중요한 전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여리고는 BC 8000 년에 지어졌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인 내부에 나선형 계단이 있는 둥근 탑이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였습니다. 여리고성은 언덕 위에 세워져 있었고, 성벽은 2중으로 두껍게 싸여져 있던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여호수아는 그들이 공격할 첫 번째 도시인 여리고로 나가기 전에 특별한 경험을 합니다. 그는 밤에 여리고에 접근하여 요새화된 성을 보며 전쟁의 전략을 구상하고 있을 때, 거기서 한 군대장관을 만나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그가 아군인지 적인지를 물었으나 그의 대답은 아군도 적군 편도 아닌 자신은 하나님의 군대 장관이라는 것과 이 땅이 거룩한 곳이니 신을 벗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잠시 인간의 모습을 나타난 천사들의 군대 대장인 미가엘 천사일 것입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전쟁이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편에 서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가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이스라엘의 대장도 아니라 그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종'일 뿐임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모든 군사는 하루에 한 번씩 성주위를 돌고 마지막 일곱째 날에 일곱 번 돌며 마지막에 제사장의 나팔과 함께 큰 소리로 외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군사 전략적으로 논리적으로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어리석은 전략이었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마지막 날 함성 소리와 함께 여리고는 무너지게 됩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순종은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서 승리하게 되는 비결이 됩니다.
아이성 전투 (7 – 8:29)
번성했던 도시였던 '아이'는 여리고 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이성 전투에서 두 가지 오류를 범하며, 전투에서 대패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지나친 자신감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와 비교했을 때 예 도시를 정복하는 것이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여 적은 수의 군대를 보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전투를 위해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이 여리고 전투에서 축복하셨기 때문에 같은 방법으로 다시 그것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실수를 통해서 중요한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여리고에서 가나안에 물건의 일부를 가져간 아간으로 인해 두 번째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여호수아의 군대가 처음으로 아이를 공격했을 때, 그들은 대패하여 길을 잃고 도망칩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승리의 명성이 알려져 가는 가운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하나님께 묻습니다. 문제의 가족을 찾기 위해 제비를 뽑았습니다. 이상한 방법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는 것을 믿었으며 제비를 뽑아 냄으로써 하나님이 그 사람을 드러나게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비슷한 방법이 되었는데, 제사장은 우림과 둠밈이라고 불리는 그의 가슴 판 안의 검은 돌과 흰 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했다. 흰돌의 의미하는 대답은 긍정적이었고, 검은 돌은 부정적이었다. 이 관습은 오순절에 성령이 올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는 때부터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임하시는 성령으로 그의 백성을 인도하십니다. 성령강림 이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데 제비를 뽑는 방법은 결코 다시 사용되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간은 자신이 범죄한 것을 알았지만, 일찍이 죄를 회개하고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용서받았을 지 모르지만 그는 죄를 버리고 깨끗함으로 오기를 거절했습니다. 그의 가족은 또한 그의 죄를 노출시키지 않고 덮어주는 죄에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두 돌로 죽임을 당하고 말게 됩니다. 한 사람의 죄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수치와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며 이제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공동체를 이루어 갈 이스라엘에게 엄중한 경고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간을 심판하신 사건은 신약의 사도 행전 5 장에 있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형벌과 거의 정확하게 비교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을 위한 첫 발판을 만들어가는 중요한 시점에서 아간과 사람이 하나님의 군대에 머물러서는 안 되었습니다. 죄가 다루어지고 해결되고 나자 다시 한번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세겜 땅에서 언약을 새롭게 갱신하다 (8: 30-35)
여리고와 아이를 정복한 후 북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세겜 (Shechem)에 가서 머물면서, 여호수아는 에발산과 그리심산 사이에서 모세의 지시에 따라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에 대한 그들의 헌신을 새롭게 합니다. (신 27 장) 세겜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세겜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머물렀던 곳이며, 이곳에서 하나님은 "네 자손에게 내가 이 땅을 주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창 12.7). 그 후에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 세겜 땅에 처음으로 머물렀습니다 (창 33.18). 그리고 그와 동일한 장소에서 여호수아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 언약이 이루어짐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땅을 그들에게 약속해 주신 하나님이 볼 때 그들이 다시 한번 그 언약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데 있어서 세겜 땅보다 더 적절한 곳이 없었을 것입니다. 후에, 그의 생애가 끝날 무렵에 온 땅을 정복하고 각 지파들에게 분배한 후에, 여호수아는 그들을 다시 세겜으로 데려와서 언약을 새롭게 하는 의식을 다시한번 행하게 됩니다 (24 장). 한편 아브라함과 야곱의 발자취를 따라 그는 그곳에 제단을 세우고 희생 제물을 드리며, 이스라엘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의미하는 제사를 드립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이 지금 요구하고 계신 율법에 따른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게 하면서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를 상기시켜야 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거짓으로 조약을 맺음 (9)
기브온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이스라엘을 두려워했고, 그들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멀리서 온 것처럼 위장하여 이스라엘과 조약을 맺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의 이야기를 확인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하나님께 묻고 그분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합리적인 판단을 따라 결정함으로써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화친하여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9:14)
남부 팔레스타인 정복(10)
여리고와 아이의 정복과 기브온과의 조약으로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의 중심지역을 장악함으로서 가나안 정복의 강력한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하나님이 태양을 멈추신 이야기는 믿음의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큰일을 행하실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10:14)
북부지역을 정복함 (11-12)
남부와 마찬가지로 북부의 정복도 여호수아가 계획해야 했던 것이 아닙니. 하나님은 하솔의 왕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이스라엘을 반대하는 연합을 이끌어 공격해 옴에 따라 그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모든 북부 지역을 한 번에 정복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민족들로 저주받은 자가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마침내 온 땅을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성공 비결은 절대적인 믿음의 순종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시고,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명한대로, 여호수아는 모든 명령을 성공적으로 이루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하나도 행치 않은 것이 없었고, 온 땅을 정복하고 지파를 따라 분배하였을 때 마침내 그 땅에 전쟁이 그쳤습니다.
3. 땅의 분배 (13장 - 22장)
세월이 지나 여호수아도 이제 나이가 많아 늙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의 많은 부분을 정복했지만, 여전히 많은 저항을 받고 있는 정복하지 못한 땅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지파들 사이에서 정복해야 할 땅들을 믿음으로 분할해 주었습니다.
요단강 동편 지역의 분할과 유다와 요셉 지파에게 분배된 땅(13 - 17)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모세가 이미 배정 한 땅인 요단 동편에 있는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지파에게 땅을 분배해 주고 난 뒤에 가나안 지역에서 남부분할 지역에 유다 지파가 정착합니다. 요셉으로부터 나온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는 앞으로 북 이스라엘의 역사를 주도해가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서 계수 되었던 20 세가 넘은 군사로 모집되었던 1세대는 모세를 따라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믿음의 보고를 했었고 유일하게 약속의 땅을 들어올 수 있도록 허락되었습니다 (민 14:30).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갈렙에게 헤브론 지역을 하나님을 온전히 좇은 그 신실한 믿음에 대한 보상으로 허락해 줍니다. 이제 85 세가 된 노년의 갈렙이지만, 그는 청년 때와 같이 여전히 열정과 담대한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나아가 정복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고백합니다.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수 14:11-12)
대조적으로 에브라임 지파는 수적으로는 가장 많은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이 정복해야 할 지역은 숲이 너무 많이 우거져 있어서 차지하기가 어렵다 하며 소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비록 그 지역에 사람들이 철병거를 가졌고 지형이 험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쫓아낼 것이니, 스스로 올라가서 담대하게 개척하여 정복하라고 명령합니다.
나머지 지파 (18 – 19)
유다와 요셉 지파의 주요 지파가 정착할 땅을 분할 받고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가나안 지역에 중심에 위치한 실로에 성막을 세웁니다. 그리하여 모든 지파가 성막을 중심으로 모일 수 있도록 합니다. 언약궤가 들어있는 성막은 모든 이스라엘 지파의 집결지였습니다. 광야에 행진할 때 이스라엘 중심에 있었던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하고 계신 곳이었으며, 여전히 이스라엘의 믿음과 사회의 연합을 위한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곳이었습니다.
도피성과 레위 지파 (20-21)
모세의 지시에 따라 범인이 합법적인 재판을 받을 때까지 피할 수 있는 도피성을 지정하는 것은 누군가가 우발적인 실수에 의해서 죽게 되었을 때 정의를 유지하고, 무자비한 보복을 막기 위해서 필요했습니다. 레위지파에게는 분배된 땅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제사장들과 성전 봉사자들로서 부름 받은 사람들로서 다양한 지역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명령한 대로 전국 곳곳에 여러 마을이 분할되어 할당되었습니다.
요단 동편의 문제들 (22)
요단강으로 인해서 자연적인 지형에 의해서 동서가 나 뉘게 됨에 따라 동서로 나뉜 지파들 사이에 관계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요단강 동편의 세 지파는 큰 제단과 같은 것을 만들게 되는데, 실로에 있는 성막이 아닌 곳에 또 다른 제단을 지어 분열하고 우상을 섬기려 한다고 생각한 다른 지파들은 그들과 싸우려 합니다. 제사장 비느하스가 그 지역을 방문하게 되고, 동쪽의 지파들은 성막이 있는 실로와 거리가 멀고 지형적 장애물인 요단강도 있어서 다른 하나님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동일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도록 기념하는 제단을 그 사이에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들의 설명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들은 요단 서쪽의 부족들이 큰 제단을 세운 의도를 오해했다고 설명함으로써,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동일한 마음에 대한 그들의 비전이 하나로 연합되어 있음이 분명해지게 되면서 갈등의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3. 여호수아의 마지막 고별 설교 (23 – 24)
여호수아는 생애 마지막에 모세와 마찬가지로 지도자들의 총회를 소집하여 그들이 섬기도록 부름 받은 비전과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신실하심을 강조하며, 충성된 믿음을 계속해서 가질 것을 당부합니다.
지도자들에 대한 권면 (23).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의 과정을 회고하며, 그는 성공적인 정복이 가능했던 것은 모두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들에게 그가 지금까지 정복하여 이룬 모든 것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것을 도전합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론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수년 전에 그 자신이 위임을 받게 되었을 때 받았던 명령을 다시 되풀이합니다. 그는 진정으로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가 사라진 후에도 이스라엘 가운데 그 신실함이 지속될 수 있을까요? 그의 마지막 권면의 주된 목적은 약속의 땅에 정복되지 못한 나머지 부분을 정복해가도록 다음 단계를 위해 믿음과 비전으로 그들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가 직면했던 가장 큰 도전은 이방인 가나안 사람들에게 동화되고 하나님을 떠나 그들의 신을 섬기게 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가 만일 퇴보하여 너희 중에 빠져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친근히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피차 왕래하면 정녕히 알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필경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 (수 23:12-13).
‘비전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
지속적으로 약속의 땅을 지키고 은혜를 누리기 위한 원칙은 본질적으로 이기기 위한 원칙과 동일합니다. 믿음의 순종으로 하나님을 단단히 붙들라는 것입니다.
언약을 새롭게 하라 (24)
마침내 여호수아는 지파들을 한데 불러 모으고, 지도자들에게 다시 한번 되풀이하며 도전합니다. 그들은 다른 신들을 모두 없애고 오직 주님만을 섬기겠다고 맹세합니다. 그 도전은 생명이 아니면 죽음을 의미하는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그의 세대는 신실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속적으로 그 명령을 기억하고 순종할 것인지가 불순종으로 여호수아를 통해서 얻은 것을 잃어버릴 지에 대한 이스라엘의 미래를 결정하게 됩니다. 비록 언약궤가 실로에 있었지만, 여호수아의 마지막 모임은 아브라함이 처음 약속의 땅에 도착하며 언약을 새롭게 받았던 세겜 땅에서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마침내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땅 그들의 고향에 안전히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4. ‘KEY’ 포인트
여호수아
여호수아는 군대 지휘관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또한 그는 모세와 마찬가지로 선지자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대언하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여호수아서의 마지막 장은 그가 처음으로 선지자로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르비딤 전투에서 아말렉과 대항하여 싸웠고 (출 17.8-13),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갈 때 그의 시종으로 동행하였습니다. (출 24:13) 그 후에는 그는 회막을 지키는 일을 하며 모세가 떠나고 나서도 그 회막에 자리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예배자의 마음과 신실한 종으로서 섬김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출 33.11). 그와 갈렙은 정탐꾼들 가운데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믿음의 관점을 가지고 긍정적인 믿음의 보고를 했던 유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민 14.6-9) 요단 동편을 정복한 후에 모세는 여호수에게 자신의 리더십을 대신할 사람으로 임명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때 그는 이미 성령에 감동된 자로써 잠재적인 지도자와 목자로 인식되고 있었는데 모세가 대중 앞에 임명함으로써 모세를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이끌 리더십의 권위가 주어졌습니다 (민 27.15-23). 그러나 그는 분명히 많은 격려와 확신이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죽기 직전에 강하고 담대한 사람이 될 것을 격려했습니다.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할 것임이라. "(신 31:6)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수아의 기름 부으심은 백성들에게 인정되었으며, 그는 ‘지혜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신 34:9).7
가나안 정복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그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가나안을 이스라엘에게 정복하게 하시면서 그 민족을 쫓아내시고 멸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집행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창 15:16) 가나안 족속의 성적 타락의 죄악상은 레위기 18장을 통해 알 수 있고, 신명기 12장을 통해서 볼 때 어린 자녀들을 희생제물로 불에 태워 제사를 드리는 몰렉 제사가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성적, 윤리적 타락은 극에 달해있었고, 사회 모든 영역에 죄악이 차고 넘치는 상황이었습니다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에게 400년에 가까운 시간을 주시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셨지만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라합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에게는 여전히 구원의 길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거할 때 그들에게 영향을 받아 동일하게 타락하기를 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죄악이 극에 달해 차고 넘치는 상황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를 통해서 그들을 공의에 법을 따라 심판하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군대 장관을 만났을 때 그가 한 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가나안 정복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편도 가나안 민족의 편도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의 편에 서는 자가 하나님의 편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지만 그들도 의와 거룩함을 버리고 죄악 가운데 거하면 그들 또한 약속의 땅에서 쫓겨 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의 스토리를 근거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일을 정당화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법을 따라 그 시대의 가나안 족속의 지속되는 죄악을 심판하셨던 그 민족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해야 하며, 인간의 타락과 죄악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한 예로 바라봐야 합니다.
약속의 땅
하나님은 400년 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지역의 땅을 여호수아와 그의 세대를 통해서 정복하게 하시고 그의 약속대로 그들이 그 땅을 소유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약속에 신실하셨습니다. 또한 새 언약의 관점에서 약속의 땅은 우리가 정복하고 이루어야 할 거룩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거룩은 죄와 구별되어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속한 소유가 되는 것이며, 거룩함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정복하라고 주신 약속의 땅과 같습니다. 믿음의 순종으로 약속의 땅인 거룩함에 이르게 될 때, 여호수아의 군대가 약속의 땅을 정복하여 그 땅에 전쟁이 끝나고 안식에 이르게 된 것처럼, 비로소 우리의 삶의 모든 싸움이 끝나고 문제들이 해결되며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이러한 안식은 이 땅에서의 삶에서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약속의 땅은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고 이르게 될 영원한 천국을 의미하기도 하며, 우리는 이곳에서 비로소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히 4:1-11)
신조셉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