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
이경섭 목사 (개혁신학포럼 대표)
◈ 계시이며 심판자인 율법
태초부터 ‘스스로 계신 하나님(I am that I am, 출 3:14)’은 ‘말씀’이신 성자(요 1:1)를 통해 자신을 피조물들에게 계시하셨다. 무죄했던 아담은 하나님에 대해 누구로부터 어떤 가르침을 받지 않았어도 ‘삼위일체의 자기 계시(self-revelation of Trinity)’로 그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속성(공유적 속성, the Communicability’ of God’s Attributes)은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창 1:27)’에게도 그대로 투영돼 나타났다. 그야말로 그는 ‘하나님 형상의 반영(the reflecting of the Divine Image)’이었다.
지금의 인간 모습과는 비교불가한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었다. 당시 누가 그를 보았다면, 마치 하나님을 본 듯 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이 범죄 후 하나님에 대해 무지해졌고(엡 4:18), 자력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게 됐다. 그리고 더 이상 그 자신이 ‘하나님 형상의 반영’이 되지도 못했다.
이후 인간은 죄로 상실한 ‘하나님 지식’을 ‘율법’으로부터 얻었다. 율법이 계시하는 바 ‘하나님의 의, 거룩, 사랑’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율법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많은 경우 율법에서 하나님의 지엄하신 공의(公儀)의 지식만을 습득하고(그로 인해 율법의 정죄를 받았고), 그것들 안에 감추인 비밀한 사랑인 그리스도(골 2:2)에 대한 지식까지는 확장하지 못했다. 그것은 오직 그의 택자들에게만 허락됐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마 11:25).”
이는 율법 전문가들이었던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들이 율법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39-40).”
그런 그들을 향해 예수님이 소경이라고 책망하셨지만, 사실은 그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 지식이 허락되지 않은 때문이었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 13:14-15).”
이렇게 율법에서 그리스도를 취하지 못한 이들은 하나님을 알 수 없을 뿐더러, 율법의 정죄 아래 떨어진다.
◈ 정죄의 율법, 사랑의 율법
율법에 대한 그들의 무지는 그것이 죄인에 대한 ‘의(義)의 요구’만 담은 것이 아니고, 그 요구(가 인간의 역량 밖에 있으며) 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만이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보내 쉬지 않고 가르친 것이 그 내용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행 3:18).”
실제 구약 성도들 중 이런 ‘율법의 의미’를 정확하게 꿰뚫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모세, 다윗, 욥, 이사야, 하박국 등 이 그랬다. 그것을 아는 그들은 자력으로 율법의 의를 이루겠다는 만용을 부리지 않고, 그것의 성취자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의 강림을 대망(待望)했다.
사도 바울 역시 ‘율법’을 볼 때 그것의 ‘요구 사항’만을 보지 않고, 그 요구의 ‘유일한 성취자(마침, 롬 10:4)’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까지 시야를 확장시켰다. 그는 이러한 율법의 확장 기능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갈 3:2) 역할’이라고 명명(命名)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4).”
다음의 예수님과 그의 제자 빌립의 말씀 역시 ‘율법’은 그 자체가 종착지가 아닌 ‘율법의 성취자 그리스도’가 그 종착지임을 말한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눅 24:44).”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 1:45).”
이렇게 율법을 통해 그리스도께로 인도를 받는 사람은 율법이 기피할 두려운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시 119:97)”라는 고백을 하기에 이른다.
그 뜻은 ‘율법을 통해 그리스도께로 인도를 받으니, 율법을 사랑하여 그것을 종일 곱씹게 된다’ 혹은, ‘율법에서 그리스도의 피 맛을 느낄 때 까지 그것을 곱씹는다’는 뜻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 19:9-10)”는 말씀 역시 율법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에게 따르는 고백이다.
율법에서 ‘지엄한 공의’만을 본 사람들에게 율법은 피하고 싶은 부담일 뿐 율법 앞에서 이런 경쾌한 소리를 발할 수 없다.
이를 좀 더 확대 적용해 보자. ‘율법을 사랑한다’는 ‘율법의 성취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로, ‘율법을 지킨다’는 ‘율법이 지향하는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킨다’로 받아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 칭의의 율법, 성화의 율법
‘율법’은 율법이 요구하는 바 ‘죄삯 사망(롬 6:23)’을 갚지 않은 자는 심판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것을 지불한 자에게는 ‘정죄(定罪)의 법’이 아닌 ‘축복의 법’이 된다. 율법에서 ‘정죄(定罪)의 독(毒)이 빠져나가니 ‘저주의 법’이 ‘축복의 법’이 된 것이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함을 받은 자에게는 율법의 ‘칭의적(稱義的) 기능’이 정지되고, ‘성화적(聖化的) 기능’만 남게 된다는 말이다.
‘율법의 성화적 기능’이란 ‘하나님 영광’의 발분(發憤)과 ‘상선벌악에 근거한 선행’을 장려하는, 이른바 ‘율법의 제3용법(Third Use of the Law)’이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나, 사람이 ‘복어의 독(毒)’을 빼지 않고 그냥 먹으면 죽지만 그 독을 빼고 먹으면 영양식이 되는 것과 같다.
즉 율법에서 ‘칭의의 기능’이 작동하면 율법이 죄인에게 저주를 발하지만 그것(칭의의 기능)이 정지되고 ‘성화의 법’만 작동되면 율법이 복이 된다는 말이다. 곧 그가 행하는 모든 선행 예컨대,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떠다주는 보잘 것 없는 덕행까지도 반드시 상이 따른다(마 10:42).
반면 선을 ‘칭의(稱義) 용도’로 사용하는 자의 모든 선행은 다 정죄거리다. 그가 행하는 선행마다 율법이 따라다니며 그를 정죄한다. 말하자면 그는 선행을 하면서 죄를 쌓는 꼴이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는 말의 의미이다.
우리는 율법에서 ‘칭의’를 취하려는 율법주의자들(legalists)도, 율법에 독이 있으니 아예 율법을 폐기하자는, 그리하여 ‘율법의 선(善)기능’까지 배제시키는 율법폐기론자들(antinomian) 모두를 배격한다.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줄 우리는 아노라(딤전 1:8).”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