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 책별로 시간순서를 따라 배경(context)을 이해하며 성경읽기
1. 배경 (Context)
요나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비둘기'를 의미합니다. 일반적인 히브리인들의 이름이며, 요나의 성격이나 특성을 상징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나는 아밋대라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만, 그 이름이 열왕기하 14:25에 한 번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여로보암 2세 (기원전 793~753년)의 통치에서 이스라엘 북부에 스불론의 작은 도시인 가드헤벨 (나사렛 북동쪽으로 약 3 마일에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오늘날의 키루베테즈즈라로 추정) 출신이라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지자 요나는 기원전 750 년경에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리고 나훔은 기원전 620 년 경에 그들에게 갔기 때문에, 약 130년의 시간의 간격이 있었습니다. 요나와 나훔은 모두 이스라엘 북부의 사람들이며, 국제적인 상인들이 오가는 길의 교차로였던 이스라엘 북부의 사람들은 국제 정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앗수르로 보내졌습니다. 성경의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은 항상 서부와 동부의 두 권력의 블록 사이에서 끊임없이 압박을 받아왔습니다. 요나와 나훔의 시대에는 이스라엘의 북동부의 앗수르가 그들에 큰 위협이 되고 있었습니다. 앗수르 제국은 기원전 1354년경에 작은 나라로 시작해서 점차 그 힘을 확대해 갔습니다. 그들은 잔혹한 민족이었고, 공포와 잔인한 정복 전쟁을 통해서 영토를 확대해 갔습니다. 그들은 적군 날카로운 나무 위에 찍어서 죽을 때까지 박아 두는 잔인한 처형 방법을 사용했으며, 그런 방식으로 수천 명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처형하기도 했습니다. 앗수르 인들은 그들의 제국을 공포에 의해 지배했기 때문에 나훔은 수도 니느웨를 '피 묻은 도시'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앗수르의 주변 나라들은 그들의 침략에 대해서 항상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나는 그시대 이스라엘의 적국이었던 앗수르에게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실 가능성을 생각하여,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자기의 길을 가기로 결정합니다. 요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떠나 도망치려 하는 그의 시도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곳에 임재해 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배에서 내버려져 죽음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위해 큰 물고기를 보내서 그를 구원하시고, 다시 사명의 길로 가게 하십니다. 요나는 감사의 시편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니느웨에 도착한 후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고, 니느웨의 모든 사람들은 회개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합니다. 요나서의 마지막 장은 니느웨가 죄로 인해 멸망하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요나의 모습과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로 인해 그들이 멸망하지 않은 것에 대한 그의 실망감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나 자신에게 그늘을 제공한 식물에 대한 그의 관심과 사람과 동물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비교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생명을 가진 사람과 동물 모두가 하나님께는 소중합니다.
2. KEY 노트
하나님 부르심을 떠나 도망가는 요나 (1장)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 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2)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요나의 불순종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의 사람들에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악독'의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는 '악'1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문제', '고통'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문장의 최선의 번역은 '그들의 문제, 고통이 나에게 상달되었다.' 즉 하나님은 그들의 문제와 고통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3)
요나는 왜 다시스 도망하려 했을까요? 다시스는 그 당시에 지구 끝부분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고 지중해 끝인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오늘날 스페인의 해안 서쪽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의 동쪽에 있었고 다시스로 향할 때 요나는 니느웨로부터 가능한 멀리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것은 헛된 시도였습니다. 다시스를 향해 가는 동안 요나는 하나님을 잊었지만 하나님의 눈을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요나가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그 때 막 다시스로 떠나는 배를 발견했습니다. 요나는 분명 이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인도해 주셨다고 여겼을지 모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자 할 때 우리의 삶에 그와 관련하여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증으로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착각일 수 있다는 것을 요나의 예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길을 가고 있던 요나에게 폭풍우를 보내십니다. 여호와께서 큰 폭풍이 몰아치게 하셔서 요나의 배가 파선될 상황이 되었지만,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깊이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고대 이교도들이 그랬듯이 하나님의 영향력이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었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나서는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고, 전능하시며, 심지어 날씨와 동식물까지도 통제하고 움직이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폭풍 속에서 요나는 어떻게 잠을 잘 수 있었을까요? 외부의 폭풍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할 때 자신의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갈등에 비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을 지 모릅니다. 놀라운 것은 이교도인들인 선원들조차도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여 풍랑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누가 이 모든 일에 근본적인 책임자인지 매우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물고기 배 속에서 회개하는 요나 (2장)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삼킬 만한 큰 물고기를 준비하셨습니다. 요나는 사흘 밤낮으로 물고기의 뱃속에 있으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내가 고난을 당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대답하셨습니다. 스올의 뱃속에서 나는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2:2)
요나는 물고기의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요나는 아직 물고기 뱃속에 있지만 여호와께서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기 때문에 믿음으로 요나는 자신이 구출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드려지는 요나의 기도에는 시편의 많은 구절과 비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고기의 뱃속에 성경도 없고 촛불도 없었기 때문에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었고, 마음 속에 그 말씀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시 18 : 6)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시 42:7)
내가 경겁한 중에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시 31:22)
우리는 이 모든 일이 요나의 불순종으로 인한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심판이나 형벌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자비 안에서 행하시는 구원의 손길입니다. 요나서 2:2-9에 요나가 고백하는 감사의 시를 통해서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는 자신의 믿음을 분명히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분에게서 도망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우상숭배자가 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도망친 것을 회개하여 다시 한번 헌신과 감사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라는 명령을 따를 것이라는 서원을 드립니다. 이에 여호와께서 물고기에게 말씀하시자, 물고기는 그 말씀대로 요나를 육지에 토해냅니다.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을 때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움직였던 것처럼, 그를 놓아 줄 때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물고기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면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요나의 시대에 이스라엘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거나 듣고도 불순종하고 있지만, 물고기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따라 순종하고 있습니다.
요나의 메시지와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 (요 3장)
요나는 결국 순종하여 니느웨로 향하였습니다. 그리고 니느웨에 이르렀을 때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첫 번째 부르심에는 저항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지만, 회개 한 후에 하나님이 그를 다시 부르셨을 때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감사함으로 그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3:2)
요나에게 니느웨를 향해 명하는 바를 가서 선포하라고 명령하시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구체적인 메시지를 아직 주시지는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단순히 요나에게 가서 추가 지시를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종종 모든 것을 다 말씀해 주시지 않으시고, 순종했을 때 다시 다음 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곤 합니다. 요나의 이야기는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한 번에 많은 것을 말씀하시지 않고 한 번에 한 걸음씩 이끄시는지 그 이유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순종할 그 당시에 해야 할 것만 말씀하십니다. 니느웨는 성 주변을 도는데 3일간의 여정이 걸리는 그 시대에 매우 큰 도시였습니다. '40 일이면 니느웨가 무너질 것입니다, 도시는 심판으로 무너질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하지 않으면 곧 일어나게 될 멸망의 심판을 강조하며 선포했습니다. 여기서 그가 사용한 '무너질 것'이라는 단어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창 19:25, 아모스 4:11)
그의 말씀의 선포가 있은 후에 다음 '하룻길'이라는 키워드를 포함하여 니느웨 백성의 간절한 회개(요나 3:5-10)의 스토리를 설명하는 구절이 이어집니다. 고대 시대에 방문한 외국의 고위 관료는 일반적으로 성 안에 들어오는 데 3 일이 소요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도착하여 자신의 신분과 목적을 제시하고, 두 번째는 방문한 목적과 사업을 수행합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사업의 일들에 대한 결정을 짓고 합의하는 절차를 거칩니다. 그러나 니느웨 사람들은 둘째 날과 셋째 날을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요나가 왜 그들에게 왔는지 알자마자 바로 그 첫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왕에서 동물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공식적으로 죄를 슬퍼하는 태도를 보였고, 요나의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여호와 하나님께로 개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요나의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며 진정한 회개의 행위를 보였습니다. 역사적 자료에 의하면 그들은 요나의 시대에 경제적 곤경과 사방의 적들에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 어려움의 시기에 신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절실히 깨닫고 있었고, 요나의 메시지를 듣자 그 메시지에 반응하여 회개하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도움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반응을 설명하는 내용에는 '회개'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하지만 회개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회개는 마음을 바꾸고 이전의 죄악된 행동에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개는 당신이 하나님께로 향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향하는 당신의 행위의 과정을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께로 향할 때, 우리는 그분이 싫어하는 것들로부터 돌아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로 그 행위를 고치고 그에게 돌아오는 자들이 멸망하지 않도록 자비와 용서를 베풀어 주십니다. 또한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분과 그분의 말씀을 믿을 때 우리는 그분의 뜻대로 우리 삶을 변화시킬 힘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회개의 행위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심판하려는 그의 계획을 돌이킵니다. 비록 그들의 과거의 죄가 심판을 쏟아부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회개를 존중하셨습니다. 사람은 냉혈한 살인자를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지만,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의 진정한 회개를 보시고, 그들에 대한 심판을 거두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아닌 그분의 자비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요나의 불평 (4장)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음이니이다 (2)
요나는 앗수르 사람들이 유다와 이스라엘의 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죄악으로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풀어주신 것에 대해서 화가 났습니다. 요나는 앗수르 사람들과 같이 잔인하고 악한 사람들에게 심판을 내리시기를 원했습니다. '주님, 제가 이스라엘에 있을 때 제가 한 말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요나는 하나님이 은혜와 자비로 충만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요나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비와 은총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요나 자신이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자비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동일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을 볼 때는 그것을 원망하며 분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을 공의로 대하기를 바랐던 것처럼, 요나에게 행하셨다면 그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하나님은 요나에게 분노와 연민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하나님의 자비로 용서받고 심판의 멸망을 피한 것에 대해서 너무 화가 나서 당장 그곳에서 죽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화를 낼 권리가 없습니다. (4:4) 그러나 하나님은 진노 하기를 더디 하시며 자비롭게 용서하실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나서 4:5-11이 보여 주듯이 하나님은 다시 한번 자연을 다스리십니다. 이번에는 물고기가 아니라 곤충과 식물을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은 메소포타미아의 타오르는 태양으로부터 식물을 자라게 하셔서 요나에게 그늘을 주셨고, 요나는 그 식물을 아끼고 사랑합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요나가 자신에게 그늘을 주는 이유로 식물을 사랑하고 그것을 아낀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생명을 가진 사람과 동물을 사랑하시고 소중히 여기실지를 깨우쳐 줍니다. 어떤 악한 사람일지라도 그가 회개하여 멸망 대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얻을 수만 있다면 왜 그런 사람들이 죄의 결과로 멸망하기를 바래야 할까요?
3. KEY 포인트
요나가 도망친 이유?
그 대답의 열쇠는 이스라엘에서 요나가 하나님께 한 말입니다. '주님, 제가 고국에 있었을 때에 했던 말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친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자비롭고 화내기를 더디하시고 사랑이 넘치시며 사람들에게 재앙보다는 축복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임을 알았습니다.'(4:2) 우리는 요나의의 시대에 이스라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기 위해 열왕기하 14:23-25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 그는 북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 2 세에게 보내졌습니다. 그는 악명 높은 왕으로 주님 앞에 죄악을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그 악한 왕에게 가라고 하셨을 때 요나는 왕의 사악함을 다루셔서 그를 심판하실 것을 기대하면서 갔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받은 메시지는 그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요나에게 이스라엘의 국경을 넓히고 더욱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요나는 여로보암이 사악한 왕이기 때문에 그를 축복하시는 것은 공의롭지 못한 것이라고 항변했을 것입니다. 그는 마음 속으로 '주님이 잘못하시는 거야 나쁜 사람들을 축복하면 그들은 감사하고 그들의 악한 행위를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고 더욱 악하게 행할 뿐이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여로보암 2세는 더욱 악해졌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더 많이 축복하실수록 그는 더욱 사악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의 자비가 악한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며, 결국 요나는 악인들에게는 자비가 아닌 공의의 심판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나가 니느웨에서 행한 태도를 보면 그의 행동의 근원적인 마음은 주님의 성품과 명성에 대한 요나의 질투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비를 이용하고 멸시하는 누구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들의 회개가 피상적인 것이며,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너무 부드럽게 자비를 베푼다면 심판의 위협을 결코 행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그분의 자비를 우습게 여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심판의 경고를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고, 그 말씀을 조롱하며 결국은 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동정심
식물이 자라나 요나에게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그늘을 제공했기 때문에 그 식물에 대해 매우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벌레가 뿌리를 먹어 식물이 죽고 그늘이 사라졌을 때 요나는 다시 매우 화를 냈습니다. 그는 왜 그것을 죽게 했는지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식물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이 합당하냐고 반문하시며, 니느웨에 대한 그분의 자비에 대해서도 화를 낼 권리가 없음을 가르칩니다. 니느웨에는 10만 명이 넘는 아이들과 많은 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권리가 없을까요? 요나는 앗수르 사람들이 형벌을 피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 질투했지만, 형벌을 가능한 한 오래 미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동정심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때때로 하나님이 얼마나 인내심이 있고 자비가 충만하며 사람들에게 많은 기회를 주고 싶어 하는지를 잊어버립니다. 요나의 설교는 회개하여 장차 임할 심판을 피하라는 초대였습니다. 그의 심판의 말씀에는 '회개하지 않으면'이란 가정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제안인 회개의 요청을 받아들인다면,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보이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특별한 사랑은 그가 다른 나라에 대한 계획이나 관심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심판의 계획을 바꾸셨습니다. 그것이 요나가 예언한 심판에 대한 경고가 잘못된 것이며, 그러므로 그는 거짓 선지자가 된 것일까요?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과 완전히 일치하게 행동하셨습니다.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파하거나 멸하리라 한다고 하자 만일 나의 말 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예레미야 18:7-8)
하나님은 사악하고 잔인했던 앗수르 인이더라도 그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람들의 멸망에 대해 얼마나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를 요나서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을 넘어서 열방의 나라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요나서의 교훈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심을 상기시켜 줍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어떤 특정한 인종이나 민족, 계급의 사람들에게 국한되지 않습니다. (2:9) 이것은 사도행전 10:34-35에서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메시지와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편파적인 분이 아닙니다. 나라와 민족을 초월하여 그를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을 자비로 용납하시며 사랑으로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물론 하나님의 인내심이 끝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궁극적인 선지자들의 메시지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행하실 타이밍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시대는 여전히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인내의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 인내심은 우리가 나훔서의 예언을 통해서 보게 될 것처럼 그들의 회개의 행위를 버릴 때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그들의 회개의 행위를 따라 그 심판을 150년이나 더 미루어 주셨습니다.
- [(H7451) רָעָה רַע, ra‛ râ‛âh - evil (naturally or morally), adjective or noun: - adversity, affliction, bad, calamity, + displease (-ure), distress, great, grief (-vous), harm, sorrow, trouble 신조셉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