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11-14장): 책별로 시간순서를 따라 배경(context)을 이해하며 성경읽기
끊임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 (11장)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을지라도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저희가 알지 못하였도다 (11:3)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속박에서 구원해주셨습니다. 마치 어린 아이를 돌보시는 부모처럼 그들을 보살펴 주셨습니다. 걸음을 가르치시고, 팔로 안으시고 품으시며 사랑으로 돌보아주셨지만 이스라엘은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다른 우상에게 바쳤습니다. 강압이나 억지가 아닌 사랑의 줄로 이스라엘을 붙들어주며 아이의 걸음걸이를 이끄시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여 옳고 유일한 안전한 길로 걸어가도록 그들을 가르치고 보살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싫어했고 회개를 거부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기에 그가 하나님을 그들의 왕으로 모시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곧 사악하고 잔인한 앗수르의 왕이 그들의 왕이 될 것입니다. (11:5)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원문의미: 아무도 그들의 삶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자가 없도다) (호 11:7)
이런 의미에서 그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근본적인 문제는 이스라엘의 죄라기 보다는 죄를 지은 후에 회개하기를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뒤로 물러나서 벗어나고 있으며, 종종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그분을 높이는 사람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뒤로 미끄러져가고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한때는 하나님과 가깝게 실제적으로 동행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낱 과거에 불과한 일이며, 이제는 그분으로부터 더욱 멀어져서 돌아오라는 회개의 요청을 듣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한 회개를 고집스럽게 거부함으로 인해서 그들은 멸망과 포로생활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애타는 사랑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내가 이스라엘 너를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느냐? (11:8) 심판의 어두운 구름이 지평선에 보이고 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임할 징계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불붙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죄 속에 있으며 그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내가 너를 포기할 수 있겠느냐며 멸망의 길에서 돌아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공의는 심판을 요구하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죄로 인해 멸망할 그들을 위한 구원의 길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먼 훗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공의의 심판에 내어주셔서 이스라엘에게 멸망에서 생명으로 나올 수 있는 길을 주실 것입니다.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 근처에 있는 두 도시로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신 29:23) 하나님은 아드마와 스보임이 소돔과 고모라와 함께 멸망한 것처럼 자신의 백성을 열방의 나라에게 닥칠 심판과 함께 멸망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 (11:9)
하나님은 에브라임을 완전히 파멸시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죄로 인해 합당한 심판을 받게 될지라도 완전히 멸해지지는 않을 것이며, 그들 중에 남은 자들을 인도하셔서 결국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그의 백성을 향한 오래 참음과 용서와 긍휼은 사람과는 다릅니다. '저희가 사자처럼 소리를 발하시는 여호와를 좇을 것이라' (11:10) 하나님이 사자와 같이 포효 할 때, 그의 백성 이스라엘은 그를 경외함으로 떨게 될 것이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들의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한 그의 자비와 긍휼의 마음 가운데 그들에게 궁극적인 회복이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임할 심판과 회복으로의 초대 (12장-14장)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 가서 날마다 거짓과 포학을 더하며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 도다 (12:1)
이스라엘이 신뢰하는 우상과 주변의 강대국과의 동맹은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동풍은 공허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고 파괴적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사막에서 불어오는 동풍은 지금도 모든 것을 말려버리고 삶을 파괴하는 해로운 바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신뢰하는 대신 주변 초강대국을 더 신뢰하며 그들에 대한 거래와 보상을 통해서 그들에게 보호를 의뢰했습니다. 앗수르나 애굽이 애굽이 여호와보다 더 강력하고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호세아는 야곱의 이야기를 상기시키며 이스라엘에게 호소합니다. 야곱은 눈물을 흘리며 은혜를 구하였고, 결국 천사와 힘을 겨루어 승리했습니다. (창32:24-30) 그와 같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그에게 눈물로 도움을 요청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하나님께 매달리고 축복을 간구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렇게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그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께로 돌아 가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무릇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만한 불의를 발견 할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 (12:8)…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하게 하기를 명절일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 (9)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이 큰 번영의 시기에 있을 때 선지자로서 그들의 영적 도덕적 타락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했습니다. 재정적으로 풍요로운 가운데 있으면 자신들의 사회가 곤경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믿기가 어렵습니다. 자신들의 모습 속에 죄를 발견하기가 더욱 어렵고, 그로 인한 심판이 있을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재정적으로 번영하고 좋은 집을 짓고 풍요를 누렸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겸손하게 하시며 다시 광야에서 천막 생활을 하던 때와 같이 이끌 것입니다. 이 심판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말씀 하셨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하게 임할 것입니다. 그들의 이방 신을 숭배하는 제단은 들판의 고랑에 무더기로 쌓일 것입니다. 그 당시에 이방 신을 섬기는 제단은 그들의 신에게 존엄성을 더하기 위해 높이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오면 그 모든 제단이 낮아질 것이기 때문에 유일한 제단은 밭의 고랑으로 만든 언덕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선지자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선지자로 저를 보호하셨거늘 에브라임이 격노케 함이 극심하였으니 그 주께서 그 피로 그 위에 머물러 있게 하시며 저의 수치를 저에게 돌리시리라… (12:13-14)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이스라엘로 보내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의 말씀을 거절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매우 화나게 만들었으므로 이전에 애굽에서의 종살이와 같은 비참한 삶을 그들에게 돌려 주실 것입니다.
이제도 저희가 더욱 범죄하여 그 은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되 제사를 드리는 자는 송아지의 입을 맞출 것이라 하도다… (13:2)
이제 그들은 점점 더 죄악을 더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바알을 숭배 할 때 이스라엘을 축복하지 않으셨지만, 그들은 우상숭배를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은 점점 더 우상을 섬겼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우상에게 제물을 바칠 때 많은 경우 희생 제물은 거의 항상 어린 아이들이었습니다. 호세아는 이미 9:13과 5:2에서 이 끔찍한 행위에 대해 이야기를 한적이 있습니다. 생명이 없는 형태의 금속 물체인 우상의 형상에 자신들의 어린 자녀들을 제물로 바치며 도움을 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침 구름과 같이 이른 새벽의 이슬과 같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한 이후로 줄곧 그들을 구원하고 인도하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변했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여전히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유일한 구세주 입니다.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떠날 때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멸망의 길로 가게 된 것은 그들의 부유함으로 인해서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고, 결국 그 은혜를 주신 그분을 잊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참으로 이상하여 하나님의 축복으로 우리의 삶이 부유함에 절정에 이를 때 대부분 우리를 축복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우리의 삶이 힘들고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 종종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킬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사자같고 길가에서 기다리는 표범 같으니라 (13:7)
언급 된 맹수들은 모두 고대 이스라엘지역에 살고 있었으며, 가차없이 자기들의 먹이를 죽이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들이 죄악에서 돌이키지 않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사자처럼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무시하고 멸시할 때,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을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고난에 처할 때만 그분께로 향하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 이는 너를 도와주는 나를 대적함이니라… 전에 네가 이르기를 내게 왕과 방백들을 주소서 하느니라 네 모든 성읍에서 너를 구원할 자 네 왕이 이제 어디 있으며 네 재판장들이 어디있느냐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13:9-11)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징계하는 손을 느낄 때에도, 그들이 오직 하나님께로 향한다면 그들은 여전히 주님의 도움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왕좌에 앉은 사람이 누구든지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왕으로 거절했을 때, 그분은 그들의 마음이 원하는 패역한 마음에 마땅한 왕을 주셨고, 그 왕들을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저에게 임하리라…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 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 (13:13-14)
출산중인 여성에게 오는 고통이 그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진통의 고통은 종종 예기치 않게 오고, 강렬하며, 고통과 지속 시간이 점점 증가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게 그와 같은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우리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승리를 묘사하면서 호13:14를 인용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15:55) 하나님은 무덤의 권세에서 그들을 속량할 것입니다. 그들을 죽음에서 구속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은 크지만 그 죄에서 구속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보다 크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죽음과 무덤으로 조롱 받게 되는 것은 자신의 하나님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을 보게 될 것입니다.
회개의 호소와 회복의 약속 (14장)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 (14:1-2)
호세아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호소하며 그분께 드릴 말씀을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주님께로 돌아갈 때 그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조건에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적절한 회개와 그분을 신뢰하는 고백을 가지고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모든 죄악을 제거하고 자비롭게 우리를 받아들이실 것입니다. 그분께 드릴 고백과 함께 여호와께 돌아갈 때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전적으로 의존해야 합니다.
2절에 우리가 송아지를 제물로 드리는 대신 입술의 고백을 드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의 찬양, 예배, 고백, 간구 또는 중보기도의 말이 희생제물과 같이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앗수르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우리의 손으로 만든 우상에 절하지 않을 것이며 여호와가 우리의 진정한 하나님입니다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이러한 고백의 말을 가지고 돌아올 때 하나님은 그들의 패역을 고치고 기쁨으로 사랑하실 것이며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14:4)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에게서 돌아서서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셨지만 (11:7), 그는 타락의 길로 미끄러져가고 있는 이스라엘을 고치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이스라엘이 지금 그러한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백성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것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범죄하고 타락의 길로 돌아서는 그들의 본성을 질병과 같이 보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수많은 유혹을 받고 타락하기 쉬운 존재이며 곧 길을 잃고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반역자인 것처럼 대하지 않고 치유가 필요한 연약한 환자와 같이 바라 볼 것이며, 의사와 같이 그들의 질병을 고쳐주실 것입니다.
14:6-8까지 우리가 주님께 돌아올 때 회복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성장할 것입니다, 그는 백합처럼 자라며 아름다움이 회복됩니다.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그의 뿌리가 길어지며 힘이 회복됩니다. 감람나무와 같이 그들의 가치가 회복되며, 레바논의 포도주의 향기와 같이 기쁨이 회복될 것입니다. 잣나무 열매를 얻으며 삶의 풍요로움이 회복되며, 이스라엘이 회복 될 때 가지가 넓게 퍼져가며 자신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축복이 될 것입니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 (14:9)
누가 현명한 사람입니까? 호세아서 전체에 걸쳐서 나타나는 메시지의 패턴은 하나님은 그의 자비로 회개와 회복을 위한 놀라운 기회를 주시고, 그 회개를 통한 축복의 초대를 무시하는 것은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길은 항상 옳으며, 주어진 심판의 메시지 가운데서도 회개하여 그 멸망에서 피하는 길을 택할 것입니다. 호세아의 마지막 메시지에서 폭풍우 뒤에 보여지는 무지개처럼 이스라엘에게 소망을 주시는 회복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그의 은혜의 승리, 그의 치유의 확신이 가득합니다.
3. KEY 포인트
북 이스라엘을 위해서 마지막 선지자로 보내진 호세아도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돌이키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무시되었고, 멸망의 길에서 그들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결국 기원전 721년에 앗수르는 북 이스라엘 멸망시켰고, 모두 포로로 끌고가 제국의 전역에 흩어버렸으며, 그들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소망과 회복에 대한 약속이 있음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완전히 멸하지는 않으실 것이며 남은자들을 데려와 다시 그 땅에 거하게 하시며 그들을 회복하여 열방의 축복이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시며 그 약속대로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의 상황과 아모스와 호세아가 말하고 예언한 상황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국가제도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체계가 하나인 신정국가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와 국가가 분명히 분리되어 있는 오늘날의 시대에는 그대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두 나라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국적으로는 대한민국 시민이지만, 또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의 예언을 현대 상황에 적용 할 때 주의해야 합니다. 서기 4세기에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유럽은 교회와 국가를 결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콘스탄틴은 하나님의 왕국과 인간의 왕국이 하나인 기독교 국가를 만들려고 노력했으며 그 유산은 많은 유럽 국가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교회와 국가는 분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의 예언을 적용 할 수 있지만, 두 상황이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모스나 호세아로부터 주어진 그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바라신 대로 우리 나라가 순종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말씀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에게 새 언약의 관점에서 재 조명하여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 나라들을 향한 메시지는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일반 나라의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아모스 호세아 등등의 선지서에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이방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하나님의 율법이 아니라 양심의 법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오늘날의 세속 국가들을 향한 모든 인류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옳다고 알고 있는 인류 보편의 가치인 생명존중, 인권 등에 따라 살았는지에 대한 것이어야 합니다. 아모스와 호세아가 이스라엘 주변의 열방의 나라들을 정죄한 몇가지 죄들과 동일한 원리가 적용될 것입니다. 비인도적이고 인간의 생명의 가치와 인권에 대한 무자비하고 잔인한 행동, 부자는 더 부유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하게 만드는 법안 등등이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예언과 메시지는 새 언약의 백성인 교회에게 강력한 메시지가 됩니다. 새 언약의 백성인 교회가 하나님을 떠나 있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그분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에 이방의 나라에 대한 메시지는 오늘날 세속 국가와 불신자들을 향한 메시지로 옛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을 향한 메시지는 새 언약의 관점 안에서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이 시대의 사회와 국가를 향해 말씀하시는 것을 세상에 전할 수 있는 바른 위치에 서게 됩니다.
신조셉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