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서 - 책별로 시간순서를 따라 배경(context)을 이해하며 성경읽기
1. 배경 (Context)
“요엘이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으로 신약 성경에서 자주 표현되는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고백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요엘서의 저자인 요엘이 누구인지 어떤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였는지는 그의 아버지의 이름이 브두엘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학자들의 견해가 다양하지만, 많은 학자들이 그가 남 유다의 선지자 였으며, 포로기 이전에 활동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요엘은 남쪽 유다 왕국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고, 북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요엘서에는 다른 왕이나 선지자 등의 구체적 이름을 언급이 없기 때문에 정확한 시간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지만, 많은 학자들이 요엘서를 기원전 835년경에 쓰여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열왕기 상 하의 특정 사건과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단서는 요엘서에는 제사장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왕에 대한 언급은 없다는 사실 일 수 있습니다. 열왕기서에는 유일하게 왕이 없고, 왕비 아달랴가 남유다를 통치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BC 841-835 년)
그런 면에서 요엘의 시대는 아달랴 여왕의 통치가 끝나갈 무렵, 혹은 그녀의 통치가 끝나고 어린 요아스 왕의 통치가 시작된 유다의 혼란과 전환의 시기였을 것입니다. 유다 여왕으로 있던 6 년 동안, 아달랴는 남유다를 죄악과 공포로 통치했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사악한 왕 오므리의 손녀였으며, 이스라엘의 최악의 왕 중 하나인 아합과 그의 왕비 이세벨의 딸이었습니다. 아달랴는 그녀의 아들 아하시야를 악한 왕 아합을 본을 삼아 다스릴 수 있도록 키웠으며, 심지어 아합의 조언자들을 데려와 그에게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아달랴는 1년 밖에 통치하지 못한 아들 아하시야가 전투에서 죽자 모든 다윗 왕가의 후손들을 죽이고 자신 스스로 여왕이 되어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왕하 8:26, 11:1). 단 한 살짜리 요아스 (왕하 11:3)만이 유모에 의해 몰래 성전에 숨겨져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아달랴를 무너뜨리고 일곱 살 된 요시야를 왕으로 세우므로 (왕하 11:4-21) 그녀의 6 년간의 공포정치는 끝났습니다. (BC 835) 요엘이 주전 835 년경에 예언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확하다면, 그때 그가 묘사 한 메뚜기 재앙의 심판은 아달랴 여왕 아래서 6 년간의 경건하지 않은 그녀의 통치가 끝나갈 무렵에 실현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요엘 선지자는 오바댜 선지자(BC 845)가 사역을 한 직후에 활동한 초기의 선지자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요엘이 오바댜의 사역 직후에 활동했을 것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는 오바댜가 이야기 했던 ‘여호와의 날’이라는 구절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바댜는 ‘여호와의 날’ (the Day of the Lord)이 에돔 및 이방의 나라를 심판하는 것으로만 언급했지만, 요엘은 그 날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도 해당되는 빛이 아니며 어둠의 날인 것을 선포했습니다.
2. KEY 노트
1장. 메뚜기의 재앙
메뚜기 떼로 황폐화된 이스라엘 (1:1-12)
요엘서는 자연재해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메뚜기 떼가 온 이스라엘 땅을 뒤덮는 자연재해가 일어났습니다. 요엘은 1장에서 다가오는 주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현재 상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통 메뚜기 떼는 600만 마리 이상이 함께 이동하며, 사방 500km에 해당하는 지역을 구름같이 뒤덮을 수 있습니다. 8만 톤에 해당하는 음식을 하루에 먹기 때문에 그들이 지나간 곳에 채소와 풀들은 모두 사라지고 맙니다. 그들은 하루에 3km에서 15km까지 이동하며, 약 한 달에 총 2,500km 되는 거리까지 이동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메뚜기 떼가 연속적으로 출현하여 모든 것을 씹어 먹어 땅은 황폐화되고, 사람들이 먹을 양식이 사라지고, 성전에 바칠 제물이 없어 성전 제사가 중단되었습니다. 유다는 이러한 재앙으로 인해서 극심한 기근과 재정적 파멸의 시기를 경험하게 될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메뚜기 떼의 자연재해를 통한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있을 때 일어났던 성경의 선례를 찾아볼 수 있으며, 신명기 28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불순종하게 되면 메뚜기 떼의 재앙이 일어날 것을 경고한 바가 있습니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기쁨은 사라지고, 제사장들과 농부들뿐만 아니라 땅도 애도하고 있음을 요엘은 아주 생생하고 시적인 이미지로 메뚜기가 가져온 이 거대한 파괴를 어떻게 슬퍼하고 있는지 묘사하고 있습니다. 곡식과 전제로 드릴 제물이 모두 끊어졌습니다. 아달랴 여왕의 통치는 사악했지만 그녀는 성전 의식을 계속하도록 허용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드릴 곡식과 제물이 모두 사라지자 성전의 제사는 중단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단이 종교의식 자체에는 신경을 쓰지 않으며, 참 종교를 제거하는 것보다 그것을 내부로부터 부패시키는 데 더 관심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회개로의 부르심 (1:13-20)
1 장 후반부에서 요엘은 장로들에게 국가적인 회개의 행동을 촉구하라고 말하면서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끔찍하게 반복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요엘은 또한 그들에게 회개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 금식: 먹는 것조차 잊을 만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일에 모든 것을 집중하십시오.
• 성회: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회개하도록 요청하십시오.
• 장로들을 모으십시오: 특별히 지도자들을 책망하여 회개하도록 해야 합니다.
• 하나님 여호와의 집으로: 하나님과 함께 만날 곳으로 오십시오.
• 부르짖으라: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할 때 그분이 자비로 응답하실 것이라고 믿으십시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습니다. ‘여호와의 날’이라는 문구의 배후에 있는 생각은 지금이 하나님의 때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실행하시는 그의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주님의 날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그의 공의로 이 땅을 심판하시며 자신의 영광을 나타나실 그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의미에서 유다가 메뚜기 재앙과 가뭄으로 경험하게 되는 하나님의 심판의 시기도 ‘여호와의 날’의 한 예입니다. 이러한 극심한 기근의 시기에 유다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 자비를 베풀어주시도록 부르짖는 것뿐이었습니다. (1:19) 그들은 메뚜기 재앙으로 인한 기근의 문제를 해결할 힘이 없었습니다.
2장. 주님의 날 (the Day of the Lord)
반복되는 재앙 (2:1-11)
요엘 1 장에서 선지자는 유다에 이미 일어난 심판 (메뚜기와 기근의 재앙)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죄를 지었으므로 2 장의 시작 부분에서 요엘은 메뚜기 재앙이 반복되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번에는 메뚜기의 떼가 아닌 메뚜기처럼 떼를 지어 땅으로 행진하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수천 명의 군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요엘 2 장에서 그는 이제 곧 다가올 심판, 즉 유다를 대적하여 일어날 강력한 군대를 설명합니다. 요엘이 어떤 전쟁과 침략을 예측하고 말하고 있는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아마도 요엘 선지자는 유다가 회개하라는 초대에 응답했고, 회개에 대한 약속대로 하나님이 이 군대를 막아주셨기 때문에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침략을 예측했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아달랴가 폐위된 후 요아스 왕의 40 년간의 경건한 통치는 요엘의 예언 직후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사람들이 정복 전쟁을 일으켜 행했던 파괴적인 행위를 감안할 때, 요엘은 바벨론 군대를 묘사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정복 전쟁을 할 때 모든 사람과 아이들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나무, 양, 소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를 파괴했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지나간 곳에는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는 남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요엘은 바벨론 군대의 모습이 메뚜기 떼가 모든 식물을 먹어 치우는 재앙과 매우 유사한 했기에 그와 같은 모습으로 묘사했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군대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십니다. 요엘이 본 장차 올 군대가 강력하고 두려운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내시는 것이며 그 모든 것을 주관하고 다스리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것을 촉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회개하면 그들을 통한 심판을 거두시지만,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 군대를 유다에 대한 심판의 도구로 사용할 것입니다. 메뚜기의 전염병과 가뭄이 유다를 황폐화 시켰을 때, 사람들은 격려와 위로의 하나님의 말씀을 선지자로부터 듣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신 요엘은 ‘더 고통스러운 일이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오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로의 부르심 (2:12–17)
‘그러므로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2:12)
요엘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참된 회개라는 메시지를 반복합니다. 그가 회개를 촉구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그냥 나가서 술에 취해서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다가오는 재난에 대해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준비하고 회개하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행위를 고치지 않고 그냥 일상과 세상에 취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요엘은 여기서 다시 한번 참된 회개를 할 것을 요청합니다.
심판의 경고를 들었을 때 하나님의 백성은 회개해야 합니다. 그들이 심판의 경고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두려워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진심으로 주님께로 돌아가는 회개의 행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먼저, 진심으로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께 향하여 돌아가는 것입니다.
둘째로, 진심으로 회개하는 것은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순복하여 모든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진지한 회개는 행동(금식)과 감정(울음, 애통함)으로 표현됩니다. 모든 회개의 행위에 금식과 울음이 포함되는 것은 아니지만, 행동과 감정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으십시오. 유대 문화에서 애통해하는 표현 중 하나는 옷을 찢는 것입니다. 그것은 옷이 찢어져서 흉하게 보여도 상관없는 슬픔에 완전히 압도 당한다는 표현입니다. 요엘은 마음을 찢지 않고 옷을 찢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마음의 회개에 대해 설명합니다.
회개하는 자들을 향한 보호와 회복의 약속 (2:18–27)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한 열정을 가지고 긍휼히 여기 실 것입니다. 유다는 그들이 회개하면 하늘로부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열정과 연민이 그의 백성을 향하여 부어지기 시작하며, 비, 곡식, 새 포도주와 기름이 공급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회개하면, 하나님은 유다를 심판하기 위해서 보내겠다고 한 북쪽의 강력한 군대를 제거할 것이며, 유다에게 다시 물질적 번영을 회복하여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외칩니다. ‘기뻐하고 기뻐하십시오! 여호와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요엘은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약속하신 회복을 이루실 것을 열망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믿음으로 기대하고, 회복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메뚜기 떼가 먹어버린 너희들의 잃어버린 세월을 너희에게 되돌려 주겠다.’라고 약속하십니다. 메뚜기가 모든 것을 먹어버렸을 때,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메뚜기가 먹어버린 세월들을 회복시킬 수 있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비가 내리며 목초지가 다시 살아나고, 나무가 열매를 맺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요엘은 이미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예언적으로 그의 주변에 메뚜기 재앙으로 황폐해진 이후 하나님께서 회복하신 무성하고 풍성한 목초지와 나무를 보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에게 이른 비를 충실히 주셨습니다. 그리고 추수를 위한 늦은 비를 주십니다. 요엘은 1장 말에 유다에 임한 기근이 가져온 황폐함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믿음의 눈으로 이스라엘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충만하게 내려주시며 그들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는 수로시설이 없었으며, 그 시대 작물에 물을 주기 위해서는 오직 하늘에서 내리는 비만을 의존했습니다. 가뭄의 시기에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른 비 (가을에 내림)와 늦은 비 (봄에 내려 추수를 준비하게 함)를 모두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비를 회복시키실 때 유다는 곡식과 포도주가 가득 차고 넘치게 될 것입니다.
완전한 회복과 궁극적인 주님의 날 (2: 28–32)
요엘은 이제 하나님의 영이 모든 육체에 부어질 영광스러운 새 언약의 시대를 고대하며 바라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영이 특정한 일부의 사람들에게 주어졌고, 모든 사람에게 부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시대에 모든 아들, 딸, 노인들, 그리고 젊은이들도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순절에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의 부으심을 기다리며 예루살렘에 모여 기도할 때 이루어졌습니다. (행 1:4-5) 약속하신 성령이 부어 지자 120 명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여 각기 다른 방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은 오순절의 절기로 인해서 각 지역에 흩어져있던 유대 디아스포라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선포하는 복음과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보며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이며, 여호와의 모든 종들은 그분의 영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의 인격을 알고 따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성품에 대해 더 많이 알수록, 즉 그분의 이름을 더 잘 알수록 더 그분의 이름을 부를 것입니다. 그의 능력을 안다면 그를 찾게 되고, 그분의 능력으로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당신이 그의 자비를 안다면, 당신은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 그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그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의 지혜를 안다면 그가 당신의 어려움을 알고 있고 그분의 지혜로 당신을 도울 수 있다고 믿기에 그의 이름을 부를 것입니다. 이것은 확실한 약속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은 구원받을 것입니다. 성경에 말하는 오직 남은 자는 바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입니다. 남은 자(the remnant)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며, 누구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한 구원을 받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는 특정한 일부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새 언약 아래 모든 사람들이 특별하고 놀라운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요엘의 이 예언의 말씀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시작으로 우리에게 성취되었습니다.
3장. 결단의 계곡
열방에 대한 복수 (3:1-16a)
마지막 장은 요엘 선지지가 이상(vision) 중에 본 결단의 계곡(the valley of decision)에 대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기드론 계곡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곳은 오늘날까지 ‘심판의 계곡’이라고 불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결정을 내리실 때, 기드론 계곡에서 사람들이 부활한다고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그곳에는 유대인들의 무덤이 가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설교자를 통해 결단의 계곡에 대해서 듣고 우리가 무엇인가 결단해야 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불신자에게 전도 설교를 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마음을 결정하도록 이 구절을 인용하며 격려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결정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며, 그분이 누가 영원한 천국과 멸망의 지옥에 가는지를 결정하시는 계곡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을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결단의 계곡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결정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결정은 사람들이 그의 백성을 어떻게 대했는지, 그리고 그의 목적이 무엇이며 세상에서 무엇을 했는지에 따라 달려 있습니다. 시돈, 블레셋 등의 이방 나라는 특히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결정될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다는 것이며, 반면에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옹호하시고 그들을 그들의 땅을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열방이 와서 싸워야 한다고 부르심을 받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를 비꼬듯 이야기합니다. 누가 하나님과 싸울 수 있습니까? 이방 나라들은 쟁기를 칼로 바꾸고, 갈고리를 창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쳐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사야 2:4와 미가 4:3의 정반대에 주목하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이방 나라를 결국 그들의 그 침략 행위의 결과로 심판하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날 곧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사로잡힌 자들을 돌아오게 할 그때에 (3:1)’
여기서 요엘이 말하고 있는 그날은 바로 전 구절인 요엘서 2:28에 언급된 마지막 때에 관련된 기간들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의 승천과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며 교회가 탄생하면서 시작된 약 2천 년 교회 시대 전체를 포함하는 기간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마지막 때 (the last day)’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영광스럽게 돌아 오기 직전의 마지막 몇 년 또는 몇 달에 일어날 것과 관련된 일과 교회의 휴거에 대해서만 생각합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이미 마지막 때는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며 교회가 탄생하면서 시작된 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여기서 언급된 ‘유다와 예루살렘의 사로잡힌 자들을 돌아오게 할 때’는 먼저는 바벨론 포로로부터 돌아오게 되는 때에 성취되었고, 또한 마지막 때에 예수님의 재림 전에 있을 일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만국을 모아 데리고 여호사밧 골짜기에 내려가서 내 백성 곧 내 기업 된 이스라엘을 위하여 거기서 국문하리니’ (3:2)
요엘 선지자는 여기서 열방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으킬 아마겟돈 전쟁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계 16:12-16) 여호사밧의 의미는 ‘여호와는 심판하신다’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심판의 장소를 말하고 있으며, 모든 열방의 나라들에 대한 심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엘은 메뚜기의 끔찍한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신 때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가혹하게 대하고 있는데 우리보다도 더 불의하고 경건하지 못한 이방 나라들은 가만히 두시나요?’라며 불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엘 3 장을 통하여 하나님은 열방의 나라들 또한 그의 공의의 법을 따라 심판한 하실 것을 보증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 나라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은 그들이 자기 자신의 백성을 학대했기 때문입니다. 주로 이것은 열방의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대했는가 따르는 것이지만, 그들이 새 아래 하나님의 백성으로 포함된 교회를 대하는 방식에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학대를 당하면 하나님은 그것이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것으로 여기시며 동일하게 그들에게 되갚아 주십니다. (마 25:31-46)
’너희는 전쟁을 준비하고 용사를 격려하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들지어다 약한 자도 이르기를 나는 강하다 할지어다.’ (3:9)
하나님은 열방의 나라들에게 자기 자신과의 전쟁을 준비하도록 도전합니다. 그들은 분명히 일을 할 것이지만, (계 16:12-16) 하나님은 열방의 헛된 준비를 보시며 비웃으실 것입니다. (시편 2장) 하나님은 그들에게 낫을 쳐서 창을 만들고 모든 무기를 동원하면서 약한 자도 강하다고 하면서 한번 모든 힘을 다 합쳐서 덤벼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을 향한 조롱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열방의 나라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대에 세우실 것이며, 그들은 잘 익은 수확물을 뽑아내듯이 모두 뽑혀지고 그분의 심판 앞에 모두 뭉개질 것입니다. (3:12-13) 아마겟돈 전쟁에서 열방에 대한 예수님의 심판을 묘사하기 위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짓밟는 이미지를 사용한 것처럼 (계 14:14-20), 하나님은 그대로 열방을 향한 심판을 행하실 것입니다.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의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3:14)’
요엘 선지자는 아마겟돈 전투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지는 여호사밧 골짜기에 그들의 영원한 운명에 직면한 무리들을 봅니다. 메시아와 싸우는 그들은 그 결정의 골짜기에서 형벌의 심판을 받을 위치에 서서 영원한 멸망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궁극적으로 아마겟돈 전투에서 그가 본 이상은 성취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 (3:16b-21)
나 여호와가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발하리니 하늘과 땅이 진동되리로다 (3:16)
하나님의 목소리와 함께 하늘과 땅이 흔들릴 것입니다. 요엘은 2:30-31에 언급된 우주 대격변에 대한 설명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러한 대 혼란과 격변 가운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위한 피난처와 힘이 되실 것이며, 당신의 백성과 그의 도시를 영광으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후의 승리 이후에는 풍요 로움이 계속되고 기근과 가뭄의 날은 잊혀진 먼 추억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이집트는 여호와와 그의 백성의 다른 적들과 함께 황폐해질 것입니다. 여호와의 전에서 생수가 흘러나와 그 생수가 닿는 곳마다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에스겔 47장에서는 예수님의 재림 이후 천년 동안 성도들과 다스릴 시기에 여호와의 집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묘사합니다. 스가랴 14:8은 또한 예루살렘에서 큰 물이 흘러나와 사해와 지중해로 흘러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집에서 나온 물이 싯딤 골짜기[1]로 흘러내릴 때 하나님의 은혜와 공급이 과거의 모든 죄를 덮고, 오직 승리만이 기억될 것입니다.
유다는 영원히 거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거하시니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죄를 사해 주실 것입니다. 메뚜기의 재앙으로 시작된 요엘의 예언은 회복과 구속의 약속으로 끝이 납니다. 에스겔서와 유사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는 요엘서는 에스겔이 ‘여호와 삼마’ 여호와께서 그분의 백성들과 함께 거하신다고 말했듯이, 여호와께서 시온[2] 가운데 거하실 것을 이야기합니다.
3. KEY 포인트
재난과 하나님의 심판
누가복음 13:1-5에서 예수님은 18 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 사고를 사람들을 회개하도록 영적으로 깨우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왜 이 재난이 그들에게 일어났습니까?”라고 질문하기보다는 “이 타락한 세상에서 언제 일어날지 모를 재난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고 스스로 질문해야 할 것을 도전합니다.
요엘서를 통해서 하나님은 재난을 사용하실 수 있으며, 그 재난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분별해 볼 수 있는 지침을 제공합니다. 먼저 그것은 그의 백성을 회개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미리 선지자들에 의해서 예언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규모나 세부 사건들이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재난은 우리에게 직접적, 혹은 간접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상기시킵니다. 누가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실로암 탑이 무너 졌을 때 왜 그런 사고가 일어나 일부 일꾼들이 그런 비극적인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다른 누구보다 더 큰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 사고를 당한 것이 아니며, 그런 재난을 본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도 어떤 사건 사고를 당하여 멸망하게 될지 모르니 지금 회개해야 한다고 도전합니다. 모든 지진, 태풍, 홍수 등의 재난은 우리에게 인생의 연약함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즉시 바로 가져야 할 필요성을 상기시켜줍니다.
여호와의 날 (The Day of the Lord)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며 살고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의 날을 원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분이 그분의 통치와 능력을 나타내기를 갈망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의 날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통치와 힘을 강하게 나타내실 때 그분의 힘이 우리를 대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엘 시대에 유다는 하나님을 떠나 대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날은 그들에게 어두움의 날이었습니다.
요엘서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회복에 대한 약속은 작물, 포도주, 옥수수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관한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요엘은 이 모든 것이 여호와의 날에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그 단어 그대로 24 시간의 하루라고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날’이라는 단어는 유연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히브리어로 ‘날(yom: day)’은 한 세대 혹 시대 전체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과 뜻을 행할 그의 날을 가질 것입니다. 그가 온 세상을 그의 통치 아래 두실 주님의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요엘은 그의 예언을 통해서 주님의 날 (the Day of the Lord)을 다섯 번 언급하며 그날은 심판의 날이라는 것을 언급합니다. 이 구절은 또한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아모스, 스바냐, 말라기와 같은 후기 선지자들에 의해서도 사용됩니다. 주님의 날은 또한 신약 성경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입니다. (고린도 전서, 데살로니가 전후서, 베드로 후서 참조) 하나님께서 자신의 통치와 능력을 나타내실 그의 날이 올 것이며, 그때는 이 세대의 마지막 때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날에 심판에 순서는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그다음 하나님과 자신의 백성을 대적하는 이방 나라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영원한 회복과 멸망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요엘의 예언이 이루어지고, 오순절에 성령이 부어진 날로부터 우리는 ‘마지막 날’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에 모든 약속은 완성될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예언의 성취
오바댜, 요엘 및 다른 많은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예언을 마칩니다. 이 중 많은 부분이 아직 성취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어 이 약속들이 언제 성취될 것이지에 대한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오늘날 교회에는 네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그 예언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하는지 영적으로 해석해야 하는지에 따라 의견이 나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문자 그대로 회복할 것이라고 가정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 땅이 이제 새 이스라엘인 교회에 적용된 영적 축복의 상징으로 간주하여 문자 그대로 성취될 필요는 없다고 봐야 할까요? 후자의 관점을 흔히 ‘대체 신학 (replacement theology)’이라고 합니다. 축복에는 생명, 건강, 번영, 형통, 다산 및 보호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주는 질병, 가뭄, 죽음, 위험, 파괴, 패배, 포로, 빈곤 및 불명예 등이 있습니다. 대체 신학의 견해로는 옛 이스라엘은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땅을 잃었습니다.
이스라엘에 관한 예언이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에 적용된다고 믿는 사람들도 두 그룹으로 나뉩니다. 한 그룹은 약속이 모두 조건적이며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의해 모두 폐기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복음화할 수 있지만 다른 일반적인 나라들과 마찬가지일 뿐, 그들에게 이루어져야 할 특별한 예언과 약속은 없습니다. 그들은 이제 그저 열방 가운데 한 나라일 뿐이며,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신약의 내용과 맞지 않습니다. 27개의 신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 중 교회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또한 신약에는 여전히 다윗의 왕좌, 야곱의 집, 이스라엘의 12 지파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거부한 것이 그들에게 형벌을 가져오는 것을 의미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에 관해서는 이스라엘은 여전히 언약의 백성으로 그 약속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은 무조건적 (unconditional) 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땅을 영원히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 약속의 땅을 잃어버릴지라도 하나님은 그 땅을 그들에게 언약 가운데 맹세했기 때문에 그들을 항상 약속의 땅으로 다시 데려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는 미래가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9-11장에서 이스라엘이 자신의 하나님을 거부했지만, 그는 이스라엘을 거부하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모든 이방인이 구원받은 후에 결국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맺은 그의 백성과 이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언약 백성에게 끝까지 신실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서 다시 오실 때, 이스라엘 백성과 그리스도인들은 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아래 한 무리와 백성이 될 것이며, 마침내 이스라엘의 나라가 완전히 회복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신의 약속을 어길 수 없습니다. 요엘의 예언은 하나님의 성품과 그의 백성들과 우리 주변 세계 안에서 그가 행하시는 중요한 특성들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요엘의 예언은 현재 부분적으로 성취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의 백성을 자신에게로 인도하실 이스라엘을 향한 마지막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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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싯딤 골짜기는 실패와 승리가 모두 관련된 장소였다. 사해 북쪽의 요르단 강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모압 왕이 이스라엘 남자들을 우상 숭배와 성적 타락으로 유인하기 위해 그의 젊은 여자들을 보낸 곳이다. (민 25 : 1-3) 여호수아 시대에 이스라엘 군대가 여리고 와 가나안을 상대로 진군할 때 이곳은 이스라엘 군대의 출발지였다. (수 2:1, 수 3:1) 주님의 집에서 나온 물이 싯딤 골짜기로 흘러내릴 때 하나님의 은혜와 공급이 과거를 덮게 될 것이다. 모든 죄들은 그분에 의해 가려지고, 모든 승리는 그분에게 돌아갈 것이다.
[2]“시온”은 예루살렘 수도의 이름. 예루살렘의 기드론 계곡과 티로 포안 계곡 사이에 작은 언덕을 지칭하는 데서 유래했으며, 다윗이 이스라엘 왕좌에 오르기 전(BC 1000년경) 여부스 사람이 이곳을 통치했다. 다윗이 이곳을 정복한 후 시온/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정치권력의 중심이 되었으며,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이후 종교적 성지의 중심이 되었다.
신조셉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