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말
내가 매일 주로 만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다. 때로는 교회의 여러 모임에서 때로는 신학교의 교정에서 때로는 특정한 목적으로 형성된 기독교 단체들에서 늘 신자들을 만나기 때문에 내가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을 만날 기회가 별로 없다. 그러다보니 나는 기독교 신앙은 자연스레 몸에 배어있고 대부분의 화제가 신앙의 테두리에서 맴돈다.
어떻게 예배를 바로 드릴 수 있을까, 어떻게 복음을 널리 전파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 등의 아주 경건하고 신앙적 대화가 날마다 우리의 입술에 오르내린다. 그런데 내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익숙한 기독교인의 삶을 살면서도 막상 신앙생활의 바탕이 되는 믿음이 무엇인지 대부분 잘 알지 못한다. 마치 중세시대에 평범한 유럽 사람들이 융성한 기독교의 문화 속에서 살지만 믿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것과 비슷하다.
오늘날도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이 기독교문화에 익숙한 삶을 누리지만 실제로 믿음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어느 날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고 외치셨던 말씀을 기억한다면 이렇게 무덤덤하게 생각 없이 살 수는 없다. 예수님이 지상에 계셨던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믿는다고 말하는 이때 과연 우리가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먼저 나 자신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반대로 믿음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마치 흰 색을 설명하려면 흰색 그 자체의 속성을 나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동시에 흰색이 아닌 다른 색들과 비교함으로써 흰색을 설명하는 것도 방법이 되는 것처럼 믿음인 것과 믿음 아닌 것을 둘 다 설명하는 것은 조금 더 풍성한 설명이 되리라 생각한다.
1. 믿음이란 무엇인가?
성경에 믿음이란 단어만큼 많이 나오는 단어도 드물 것 같고 성경에서 믿음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빼고 나면 성경이 별로 남을 것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것이 결국 구약성경의 전체 요약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구약성경에는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신약성경도 마찬가지이다. 신약성경의 여러 부분도 그 시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믿음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면 도대체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믿음이란 무엇인가? 사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매우 막연한 질문처럼 보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경은 이런 막연한 질문에 대해 우리에게 아주 구체적인 답변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에게서 그 대답을 찾는 것이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히 12:2)이시기 때문이다.
이 말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예수님은 ‘믿음의 시작이며 종결’이라는 뜻이다. 즉 예수님은 믿음을 시작(始作)하시는 분이며 동시에 믿음을 종결(終結)하시는 분이다. 세상에 기라성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있다 해도 예수님만이 진정한 믿음의 총체라는 말이다. 그래서 믿음이 무엇인지 예수님에게서 대답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와 완벽한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셨다. 이런 온전한 인격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주 ‘내가 그 안에, 그가 내 안에’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셨다. 예수님은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하셨다. 또 어떤 때는 심지어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말씀도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죽기까지 완전히 순종하는 자세를 보여주셨다.
우리가 이 같은 예수님을 모범으로 삼을 때 믿음이란 믿는 대상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전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믿음은 태도가 아니라 관계라는 말이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보여준 것은 하나님께 딱 달라붙는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었고 오직 하나님 은혜의 테두리 안에 머물렀다. 이런 인물들 가운데 다니엘이 대표적인 사람이 아닐까 싶다.
다니엘은 다리오가 통치할 때 사자 굴에 던져지는 치명적인 위험에 빠졌던 적이 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 구원을 받았을 때 성경은 그의 모습을 이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는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단 6:23) 다니엘은 당시의 수석총리였기 때문에 사실 모든 상황이 자신에게 완전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라붙어 자신의 불리한 상황도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처신했다.(단 6:10)
도대체 이런 믿음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믿음은 강한 의지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각오하는 것과는 다르다. 또한 믿음은 수련을 통해서 생각을 견고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믿음은 사람의 속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믿음은 하나님이 은혜로 말미암아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은 사람의 밖에서부터 오는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먼저 믿음을 선물로 주시면 우리는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을 분석해보면 두 겹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믿음의 안쪽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게 있고 믿음의 바깥쪽에는 사람이 드리는 게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전에는 믿어지지 않던 것이 신기하게도 믿어지는 것이다. 믿음은 사람의 반응이기 때문에 믿는 것을 더욱 잘 믿는 데로 나아간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믿음은 받아들임이며 동시에 내어드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이다.
2. 믿음의 요소는 무엇인가?
믿음은 지식(知識)과 감정(感情)과 의지(意志) 즉 지정의(知情意)라는 세 요소가 조화롭게 잘 어우러질 때 바른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빠지거나 모자라면 믿음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믿음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 기우뚱거리게 되며 심지어는 아주 볼썽사나운 모양이 되고 만다. 지식은 믿음을 안정되게 만들고, 감정은 믿음을 강렬하게 만들고, 의지는 믿음을 움직이게 만든다.
(1) 지식(知識) 없는 믿음은 무지한 믿음이다.
믿음은 분명히 지식과 다르지만 믿음은 지식을 포함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병행할 때 견고해진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는 믿음은 아주 불안하다. 옛날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할 때 하나님의 법궤를 앞세우고 싸우면 승리할 것이라고 자신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오산이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법궤라는 물체에 대한 신앙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율법의 말씀은 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식이 없는 이런 무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홉니와 비느하스를 비롯해 많은 이스라엘 군사들이 죽임을 당하는 큰 비극을 초래했다.
(2) 감정(感情) 없는 믿음은 미지근한 믿음이다.
믿음은 감정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믿음은 감정을 유발시킨다. 믿음이 감정과 연결될 때 폭발적이며 열정적이 된다. 다윗이 하나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불같이 뜨겁게 타올랐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와 달리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의 믿음이어서 내침을 당했다.
(3) 의지(意志) 없는 믿음은 주저하는 믿음이다.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는 신자의 모습이다. 눈치만 보는 것은 바른 믿음이라고 볼 수 없다. 옛날 엘리야시대에 이스라엘백성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다가 나라의 영적상태를 곤두박질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바른 믿음은 의지로 표현된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결단력을 가지고 행동한다. 그것이 바로 엘리야의 믿음이었다.
이렇게 믿음은 지식(知識)과 감정(感情)과 의지(意志)라는 요소를 가지면서 각각의 요소를 절묘하게 표현한다. 이처럼 믿음은 지식으로 안정되고, 감정으로 강렬해지고, 의지로 활동력을 가진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세 요소가 조화롭게 결합할 때 놀라운 믿음의 열매를 맺는다.
3. 믿음의 반대는 어떤 것인가?
이제 이야기를 방향을 바꾸어보겠다. 믿음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았으니 이제는 믿음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 살펴볼 차례가 되었다. 믿음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믿음 아닌 것들이 포진(布陣) 한다. 한편으로는 믿음 아닌 것이 의심(疑心)과 불신(不信)이다. 의심은 믿음에서 조금 멀고 불신은 믿음에서 아주 멀다.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 아닌 것이 과신(過信)과 맹신(盲信)이다. 과신(過信)은 믿음에서 조금 멀고 맹신(盲信)은 믿음에서 아주 멀다.
불신 ← 의심 ← 믿음 → 과신 → 맹신
불신(不信)은 사람이 자신을 믿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것을 말한다. 이 사람은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다. 그는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이해하지도 못할뿐더러 믿음을 어리석게 생각한다.
의심(疑心)은 사람이 하나님과 연결(連結)은 되어 있으나 자신의 주관이 약해서 늘 흔들리는 것을 말한다. 야고보의 설명을 따르자면 두 마음을 품고 있어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다. 물 위를 걷다가 그만 바다에 빠져가고 말았던 베드로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과신(過信)은 사람이 하나님과 연결(連結)되어 있으나 자신의 주관이 강해서 매사에 성급하게 덤벼드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여리고 성을 함락한 후에 아이 성과 전투할 때 여호수아와 그의 백성이 저질렀던 실수를 연상시킨다.(물론 아이 성 패배의 원인에는 아간의 범죄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되지만)
맹신(盲信)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서 선지자 노릇을 하거나 귀신을 쫓아내며 권능을 보이는 행동을 하는 것은 헛수고라고 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하리라.(마 7:21-23)
그러나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는 것은 맹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라의 임신이라는 사건은 믿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에 불가능한 것도 믿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이 없는데 불가능한 것을 믿으면서 아브라함을 모범으로 삼는다고 하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길을 가는 동안 한편으로는 믿음 아닌 의심과 불신에 대하여 싸워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 아닌 과신과 맹신에 대하여 싸워야 한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의심과 불신보다는 과신과 맹신이 더 간악하고 무서운 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왜냐하면 의심과 불신은 쉽게 판가름되지만 과신과 맹신은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굉장한 믿음처럼 보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4. 참 믿음의 결과는 어떤 것인가?
이제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마치면서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지 간단히 살펴보려고 한다.
이상하게도 믿음이 좋은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작아진다. 마치 세례 요한이 주님을 가리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말한 것과 같다. 왜냐하면 믿음이 깊어질수록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갈수록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옛날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될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라고 외쳤다. 사도 바울도 주님의 일을 오래 한 후에 내린 결론이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이었다.(딤전 1:15)
이처럼 믿음의 사람은 :
- 시간이 갈수록 자기는 점점 작아지고 예수님만 높인다.
- 하나님의 거룩함을 인식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다.
- 스스로를 쓸모없는 자라고 여기며 무익한 종이라고 부른다.
- 자신이 점점 사라지고 하나님이 점점 드러나기를 소원한다.
- 자신은 정지하고 하나님이 활동하시기를 기도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약한 데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시계의 바늘은 제 힘으로 도는 것이 아니다. 태엽이(오늘날에는 배터리가) 작동해야 시계 바늘이 도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활동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서는 절대로 믿음이 시작될 수 없다. 오직 밖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은혜로 심어주실 때 그 믿음이 씨앗처럼 자라서 열매를 맺는 법이다.
맺는 말
예수님께서 어느 날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고 엄히 말씀하셨던 말씀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이렇게 무덤덤한 믿음으로 살 수는 없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우리는 진정한 신자(信者)로 믿음을 굳게 하고 지켜야 할 것이다.
우리가 다시 오실 주님을 뵈올 때 주님께서 가버나움 백부장에게 탄성을 발하시며 하셨던 말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이 말씀이 우리에게도 주어진다면 얼마나 복 되겠는가!(*) 글쓴 이 / 조병수 교수(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 신약신학, 전 합신총장, 총신대학교(B.A.),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M.Div.), 독일 Westfälische Wilhelms Universität in Munster(Dr.theol., 학위논문 Mehr als ein Prophet : Eine Studie Zum Bild Johannes des Taufers(Dr.theol. di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