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예배를 논할 때 사람들은 예배의 신학(神學)보다도 예배 형태(形態)에 관심을 둔다. 즉 “예배가 전통적인가 아니며 현대적인가?”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우리가 지금 드리고 있는 예배가 성경적인가?”를 생각하기보다 큰 교회들이 하니까 그렇게 따라한다. 이는 매우 무책임한 생각이다. 만일 다른 교회가 성경과 다른 예배를 드리는데도 그것을 그냥 모방한다면 목사가 성도들을 속이는 것이 되고 그보다도 비성경적인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므로 이는 성도들로 결국 죄를 짓게 하는 결과가 된다.
예배신학이 현대교회에서 아주 자취를 감추어 버린 지 오래고 마치 옛날 사사시대처럼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예배드리는 경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에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 하시고 예배드리는 법을 성경에 분명히 가르쳐 주셨다. 그러므로 성경에 충실한 교회 일수록 예배에 각별한 신경을 쓰게 된다. 성경에 충실하지 못할수록 예배에 무감각하다. 오늘 교계가 혼탁하고 성도가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은 모두 성경대로 하나님께 예배를 바로 드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여러 교회를 방문해 보면 신앙고백에 따른 정통적인 예배형태는 거의 없고 대개 성경의 가르침은 무시한 채 오로지 사람들 기분에 맞게 예배를 드리기 좋아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목사가 성경적인 예배를 드리려 해도 그 교회에서 힘 있는(?) 제직들이 반기를 들고 이웃 교회처럼 예배하자고 하면 목사가 양보하여 성경에 어긋나는 줄 알면서도 사람들의 의견을 따라가는 교회도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 1:10에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에게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일꾼이 아니 니라!”라고 참다운 목회자로서의 목회철학을 가르쳐 준다. 개인의 신앙생활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그리스도의 양 무리를 주님으로부터 위임받아 책임지고 이끌어가는 목회자가 사람들의 인기에 연연하여 목회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사람의 종으로 전락한 사람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파기한 사람이다. 목사가 목사 안수 받을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목양할 것을 서약했는데 이를 스스로 파기했으니 하나님께 책임질 문제이다. 바울의 목회철학을 진지하게 배워야 한다.
‘예배신학’을 논하기 위해 우선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이 예배를 어떻게 드렸는지 보도록 하자. 옛날 에덴동산으로부터 성경의 마지막 부분인 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는 모습을 살펴보면 자연히 성경적인 예배의 윤곽이 들어난다. 오늘의 예배와 비교해 보면서 오늘이 예배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깨닫게 된다. 옛날부터 개혁주의 신앙가들은 예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오늘날 지금은 은혜시대이니 구약시대처럼 철저하게 의식적인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적당히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면 될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아주 잘못 된 신앙이다.
1. 구약시대에는 어떻게 예배드렸는가?
에덴동산에서의 예배는 간단했다. 타락전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과 순종으로 화답했다. 그러나 타락한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고 뱀의 말을 들어 선악을 알게 하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었다. 전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은 이렇듯 자기에게 편리하도록 제멋대로 하나님을 떠나 살았다. 그 결과는 아담이 가지고 있던 지정의(知情意)가 모두 타락했다.
지(知, intellect)란 진리(眞理)를 바로 알고 바로 전하는 선지자의 직분을 말함이고, 정(情, emotion)이란 본인과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는 제사장의 직분이고, 의(意, volition)란 그리스도의 의(義)를 덧입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며 하나님의 피조물을 다스리는 왕의 직분을 말한다. 이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타락해 버려서 가치관의 기준이 아주 무너지게 되어 일대 혼란이 야기되었다. 그래도 아벨은 하나님에게 바른 예배를 드렸는데 이는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구약시대에 처음으로 이스라엘백성이 집회로 모여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드린 것은 시내 산에서였다. 출애급기 19장-23장에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언약을 맺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출애급기 24장에는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에게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예배 형식은 매우 간단했다.
이스라엘백성은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드린다.(출 24:4-6, 특히 5절)
모세가 언약서 즉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백성에게 읽는다.(출 24:7 상)
백성은 믿음과 순종으로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 하리이다.”라고 화답한다.(24:7하,8)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70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라고 했으니 이스라엘백성은 그의 대표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화목제를 드린다.(출 24:9-11)
성경에 나오는 예배는 모두 이런 형식에 맞추어져 있다. 예배를 가장 상세하게 기록한 부분은 아마도 구약 역대하 5장-7장에 나오는 솔로몬의 성전 봉헌예배일 것이다. 이 기록을 보면 그때의 예배는 방금 위에서 말한 출애급기 24장의 예배의 형태를 그대로 적용시킨 것을 알 수 있다. 구약 역대하 5장-7장을 보자:
솔로몬이 예배드리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각 지파의 두령들 즉 백성들을 회집했다.(대하 5:2-5)
제사장이 양과 소로 번제를 드려 죄 문제를 해결했다.(대하 5:6)
이스라엘백성은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 존전에 나갔다.(대하 5:7-10)
찬양의 시편을 노래했다.(대하 5:11-14)
솔로몬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대하 6:1-11)
솔로몬이 중보기도를 했다.(대하 6:12-42)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 번제물과 제물을 불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을 가득히 채웠다.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여 제사장이 그 전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다.(대하 7:1,2)
백성이 감사하며 시편을 노래하였다.(대하 7:3)
이스라엘백성이 화목제를 드렸다.(대하 7:4-9)
이스라엘 백성이 기쁨으로 은혜 받고 돌아갔다.(대하 7:10)
구약성경에 나타난 예배신학을 보면 그 신학이 아주 분명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반드시 죄 문제를 먼저 해결한 후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하나님이 그의 백성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하신 일을 백성들로 하여금 기억하도록 하며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도록 촉구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 설교 말씀에 믿음과 순종으로 화답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대로 백성들을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구약의 이런 예배형식은 진정한 예배의 개념을 잊은 오늘의 성도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보여준 양식과 명령대로 성막을 지었다.(히 8:5, 출 25:40) 이 성막의 모양은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다.(히 7장-10장) 그러므로 오늘 성도들의 예배는 모세가 보고 따른 영광스럽고 거룩한 예배형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그런 거룩한 예배를 어디서 찾아 볼 수 있는가?
2. 신약에서는 어떻게 예배드렸는가?
일반적으로 목사들이 알고 있는 것은 신약의 예배양식은 유대인들의 회당의 예배를 모방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유대인들의 회당의 목적을 오해한 사람들이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되기 전에는 아무도 회당이 예배하는 곳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이유는 예배란 반드시 희생의 제물을 드리는 것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번제물이 항상 따라다녔다.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예배에서도 죄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는 일이 매우 중요한데도 어느 대형교회 목사는 교회에서 죄 문제를 다루지 말라고 강조한다. 그 목사는 지난 2007년 부활절 예배 중 세례받기 원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하여 200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근착 Christianity Today 잡지가 알려준다. 속사람이 중생하지 않고 받는 세례는 아무 의미가 없다. 주님이 세우신 성례식 두 가지 중의 하나가 세례이다. 이는 마땅히 교회 당회에서 문답을 거치면서 본인의 신앙을 점검하고 베풀어야 할 일이다.
유대인의 회당(synagogue)이라고 하는 곳은 교회 학교였는데 그 목적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성전에서 예배하는 법을 가르치며 준비시키며 훈련시키는 곳이었다. 성경은 예수님과 사도들이 성전과 회당에 자주 드나들었다고 기록하지만 그곳에서 예배들 드렸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방 수가 성을 지나실 때 물 길러 나온 여인을 만났는데 여인이 예수님에게 “그리심 산과 예루살렘 중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라고 물을 때 예수님께서는 아무 회당이나 편한 데 가서 예배하라고 하시지 않고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는 오직 한 군데 즉 예루살렘이었으나 그가 오신 다음에는 예배하는 장소가 변했다고 말씀 하신다.(요 4:21-23) 그 예배는 성삼위 하나님에게 드리는 경배이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릴 것을 강조하여 말씀하셨다.
사도들은 교회가 성령이 머무시는 성도가 ‘새로운 성전’이라고 가르쳐 준다.(고전 3:16,17, 벧전 2:5) 그리고 구약의 화목제의 의미를 성찬식에서 찾는다.(고전 10:18) 회당에서의 설교와 기도는 사도들의 예배의식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 같다. 그러나 예배에 대해서 가장 많이 언급하는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배형식이 성전에서의 예배 형태를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본다. 사도 요한이 계시록에서 말하는 환상을 보면 모세와 솔로몬이 예배드리던 모습 그대로이다.
(1) 예배드리려고 회집한다.(계 4:1-11)
거룩한 백성들이 모여 하나님을 창송하며 예배드린다. 역대하 5:2-5의 말씀과 같은 형태이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있고 보좌에 둘려 24장로가 앉아 있다. 이들은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기 위함이다.
(2) 죄 문제를 거론하고 해결한다.(계 5:1-7)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는데 아무도 그 책을 펼 수 없으므로 사도 요한은 운다. 그 책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길래 요한이 우는가? 그 책에는 역사에 관한 하나님의 목적이 적혀 있다.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즉 구속사(救贖史, Redemptive History)는 희생을 통해서만 계속할 수 있다. 오직 죽임당한 하나님의 어린양만이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위해 행하신 목적을 선포하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3) 하나님 전에 나아가며 기도한다.(계 5:8)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제 그의 대표자인 24장로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4) 찬송시를 노래한다.(들계 5:9-14)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룩하신 구속을 찬송하는 찬송시를 노래한다.
그리고 다음에 열거하는 네 가지는 계시록에서 5번이나 반복한다. 계시록에 보면 ‘일곱’이라는 숫자를 이용하여 일곱 나팔, 진노의 일곱 대접 등을 말하는데 다음과 같은 사건의 순서대로 매번 반복됨을 본다. 그 공통으로 반복되는 네 가지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설교하는 일
기도하는 일
하늘이 제단을 태우고 영광이 성전을 채우는 일
찬송시를 노래하는 일
이런 여러 가지가 요한계시록에서 어떻게 반복되어 기록되었는지 살펴보면 앞서 언급했듯이 계시록의 ‘일곱’이라는 숫자가 들어가는 재앙에 모두 들어있다는 것이다. 가령:
계시록 6:1-8:5에 나타난 구절에서 일곱 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데 성도의 찬송과 기도로 이어지고 끝에는 하늘에서 천사가 단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위에 쏟으니 뇌성과 지진이 난다는 말로 끝난다. 즉 제단으로부터 불이 내려오는 것으로 끝난다.
계시록 8:6-11:19에 나타나는 일곱 나팔은 하나님의 말씀 여기서는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고 성도의 기도와 하늘의 성전으로부터 오는 빛과 우레 소리로 끝난다.
계시록 12:1-15:8에 기록된 일곱 이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 그리고 주의 영광이 성전을 채우는 것으로 끝난다.(15:8)
계시록 16:1-21에 기록된 일곱 대접을 보라.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불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사람들은 아무도 거룩한 성전에 들어갈 수 없으니 잠잠한 것으로 끝난다.
계시록 17:1-19:5 에 나타난 바벨론의 멸망을 그리는 장면도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성도들의 찬송으로 끝난다.
화목제가 계시록 19:6-10,17-21절에 기록되었는데 두 잔치에 초대함을 본다. 첫 잔치는 성도들만을 위한 어린양의 혼인잔치이고 둘째 초대는 하나님의 큰 잔치인데 이는 공중의 새들을 위한 것이다.(19:17)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축복의 잔치이고 하나님의 큰 잔치는 저주와 심판의 잔치이다.
계시록 20장, 21장, 22장에 나타난 축도를 보라. 마귀와 마귀를 따르던 자들은 모두 저주를 받는데 반하여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축복을 받는다. 한마디로 말하면 계시록은 우리가 거룩한 예배를 드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나타내 주고 있다.
거룩한 예배가 언제 시작되었는가 하면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가 지성소에 들어간 때부터 시작되었고 그의 마지막 심판이 올 때 끝이 난다. 그 때는 믿는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의 축복에 들어가게 된다. 다른 말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설교를 들으면서 살아가는데 하나님은 그의 설교를 통해서 역사를 향한 그의 목적을 지금도 주의 종들을 통해서 선포하고 계신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선포되어지는 것이 바로 예배이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3. 오늘날의 예배 형태는 어떤가?
우리는 지금까지 구약의 예배와 사도들의 예배의 개념 그리고 계시록에 기록된 예배가 어떠한가를 보았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이러한 성경 말씀에 조명해 보자. 오늘 우리가 매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는 이런 거룩한 예배에 참여하는 것인데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그러므로 예수 없는 예배는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에게 나아갈 길이 없는 것이다. 요한복음 14:6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나갈 자가 없다.”고 하셨다. 디모데전서 2:5에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하고 설교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언약의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지키심을 알아야 하며 우리는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을 지켜야 할 것을 깨달아야한다. 우리가 충성하면서 하나님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풀며 그의 언약으로 우리를 감싸달라고 기도할 때 그 기도는 마치 아름다운 향기처럼 하늘의 보좌에 상달된다. 구약에서 번제를 드릴 때 불이 내려와서 제단을 태웠던 일을 본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불을 내려 보내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의 불이 아니라 성령을 말하는데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복을 주시고 하나님의 원수들에게는 심판을 내리신다.
우리는 성찬식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여하게 되는데 물론 성찬식은 우리의 죄를 없이해주는 의식이 아니지만 그 예식에 참여함으로 주님의 십자가와 함께 나도 죽어 죄를 멀리하게 된다. 성찬식은 구약의 유월절의 상징이지만 구약의 모든 화목제를 완성하는 잔치이기도하다. 예배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끝나며 우리로 하여금 위로부터 내리는 주님의 은혜와 성부의 사랑하심과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의 예배하는 언약의 백성으로 힘 있게 살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다시 한 주간을 세상에서 지내고 다시 교회에 나와서 예배들 드린다. 비록 잘못되어가고 퇴폐적인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지만 우리의 정체는 거룩한 예루살렘에 살고 있다는 진리를 다시금 새삼스레 상기하면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삶 전부가 예배이다. 인류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배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결론
기원 2세기부터 17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모든 정통적인 교회들은 이런 형태로 이런 의미로 예배를 드렸고 그들의 예배에 관한 인식도 이와 같았다. 종교개혁 시기에 들어와서는 예배에 대해서 특별한 경외감을 가지고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인식으로 예배를 존중하며 엄숙한 예배를 드렸다. 하나님에게 나아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경에서 명령하신대로 예배를 드렸다. 악기도 사용하지 않았다. 원래 예배 시에 악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칼빈도 악기를 사용하지 않았고 성경의 시편만 노래했다.
우리가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도 제21장 ‘예배와 안식일에 관하여’에서 예배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시편만 노래하도록 지시 한다. 무반주(a capella)로 불렀다. RTS의 Orlando 분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John Frame 교수는 그의 책 ‘Music in Worship’이라는 책에서 장로교가 원래의 예배는 악기를 쓰지 않고 시편 을 반주 없이 무반주(a capella)로 불렀던 일을 인정하고 있다. 더 분명한 자료는 서부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교회사 교수인 Scott Clark가 쓴 ‘Recovering Reformed Confession’(P&R, 2008)이라는 명저일 것이다. 이 책에는 ‘예배와 음악’에 대해 어느 신학자보다 연구를 많이 한 흔적이 보인다.(*) 글쓴 이 / (고) 김명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