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同性愛)에 대한 신학적 고찰/ 이상원 교수
親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의 단체와 활동에 대한 상징으로 무지개를 내세웠는데, 이들이 내세우는 무지개 색상은 여섯 개입니다. 일곱 개를 내세웠다면 더 큰 혼란에 생겼을 텐데, 동성애자들이 어떤 의도와 과정을 통해서 여섯 색상을 내세웠든지 간에 여섯 색상 무지개는 동성애자들의 의도 여부와는 무관하게 동성애의 영적인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중요한 숫자들은 모두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일곱(7)이라는 숫자는 완전함을 뜻하는 숫자입니다. 그리고 육(6)은 일곱(7)에서 하나가 모자란 숫자입니다. 따라서 육(6)은 영적으로 교만하여 하나님에게만 있는 완전함의 경지에 이르려고 시도했다가 타락하여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 땅으로 내쫓겼던 마귀 · 사단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그래서 666은 사탄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계 13:18)
따라서 동성애자들이 여섯 색상 무지개를 상징으로 내세우는 것은 동성애가 사탄의 이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원래 무지개는 노아의 홍수가 끝난 다음 이 세상을 다시는 물로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을 약속하신 하나님 은혜의 복음을 담은 아름다운 영적인 상징이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영적인 상징은 일곱 색상 무지개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아름다운 상징이 동성애자들에 의해서 살짝 변형된 모습으로 사탄 활동의 상징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지금은 무지개라는 말을 하면 동성애가 떠오르는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무지개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회피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소중한 상징들 가운데 하나를 영영 잃어버리게 되고 기독교의 아름다운 유산을 소실하게 됩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무지개의 진정한 의미를 지속적으로 말을 하면서 이 용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해서 우리의 것으로 되찾아 와야 합니다.
동성애에 관련된 세 가지 주제를 다루게 되는데, 첫째는 창세기 1장과 2장의 차이 문제, 둘째는 노아의 가나안 저주 문제, 셋째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근동 문명에 나타난 동성애 실상을 같이 생각해보겠습니다.
1. 창세기 1장과 2장의 차이 문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는 바로 그 시점에 종말의 날까지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성(性) 질서를 정해놓으셨습니다. 창세기 1장 27~28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명령은 문화대명령(文化大命令)으로 알려진 것입니다.
문화대명령은 뒷부분부터 거꾸로 차례대로 내용을 살펴보면 이해가 잘 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땅을 정복하는 임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바다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임무를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인류를 대표하는 처지에서 이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 명령은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명령입니다.
둘째로 인간이 바다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 둘만의 힘만으로는 하늘과 바다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생물을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손을 낳아야 하고 계속해서 많은 후손이 태어나서 생육하고 번성해서 땅을 채워야 합니다.
셋째로 문화대명령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류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잠시 숨을 고르면서 창세기 1장 27절에서 사용된 남자와 여자라는 용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말로 남자 혹은 여자로 번역되는 대표적인 히브리어 단어에는 두 유형이 있습니다. 하나의 유형은 “잇쉬”, 남자이고 하나는 “잇샤”, 여자입니다. 우리말로는 잇쉬는 남자, 잇샤는 여자로 번역하였습니다. 잇쉬와 잇샤는 몸과 영혼을 모두 포함하는 전인(全人)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창세기 1장 22~24절까지 우리말로 남자와 여자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잇쉬와 잇샤입니다. 창세기 2장의 맥락에서는 전인적인 삶 속에서 영위되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집니다. 그러면 잇쉬와 잇샤는 어떤 관계 있을까요? 잇쉬와 잇샤는 존재론적 의미에서는 동등합니다.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능에서는 여자, 곧 잇샤가 남자를 돕는 배필로 창조되었음을 말함으로써 잇쉬와 잇샤의 두 관계가 동등한 관계가 아님을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언어학적으로도 뒷받침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존재에 있어서는 평등하지만, 기능에서는 평등하지 않습니다. 언어학적으로 보면 남자를 의미하는 잇쉬를 어간으로 해서 모음 하나가 붙어서 여자를 의미하는 잇샤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언어학적으로 볼 때 잇쉬라는 어간이 없으면 잇샤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 점은 잇샤가 지음 받은 과정에서도 확인됩니다. 잇샤는 잇쉬의 갈비뼈를 재료로 해서 지음 받았습니다. 잇쉬의 갈비뼈를 빼고는 잇샤의 지음 받은 것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관계를 바탕으로 창세기 2장 24절은 아담과 하와 이후에 잇쉬와 잇샤의 관계를 이렇게 설정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육신의 부모가 존재하지 않으나 아담과 하와 이후에 태어나는 사람들에게는 육신의 부모가 존재합니다. 육신의 부모 밑에서 자라는 잇쉬는 일정한 나이에 도달하면 부모의 보호를 벗어나서 여자와 합해야 합니다. “합하다”는 잇쉬와 잇샤의 두 몸이 하나로 융합되어서 신체적으로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가진 하나의 몸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합하다”로 번역된 동사 “다바크”는 “밀착하다”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며, 친밀하고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다, 가깝게 접근해 있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다바크”는 서로 독립된 두 개체가 근접해서 가까이 있는 것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잇쉬와 잇샤가 가까이 근접해서 지낼 때 무엇을 목표로 생활해야 하느냐? 한 몸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생활해야 합니다.
“한 몸”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논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로, 본문은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룰 지로다”라는 히브리어 문장은 미완료 문장으로 보통 명령형으로 번역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한 몸”이라는 표현은 아주 이상적인 상태를 묘사하는 표현으로서 모든 부부가 지향해야 하는 푯대, 목표를 말합니다. 현실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한 몸에 도달하는 부부는 거의 없습니다. 이쉬와 이쉬아가 부모를 떠나 부부가 되면 바로 한 몸이 된 것이 아닙니다. 부부가 된 시간은 이쉬와 이쉬아는 한 몸이 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목표입니다.
둘째로 “합해서”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이보다 훨씬 더 강한 표현인 “한 몸”도 신체적으로 융합이 되어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지닌 자웅동체(雌雄同體) 또는 양성적 존재가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잇쉬와 잇샤는 서로 독립된 두 개체로서 하나로 융합될 수 없고 대체될 수 없습니다.
셋째로 “한 몸”은 상호보완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섞일 수 없는 독립된 두 개체가 서로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기능의 관점에서 상호보완적으로 가까이 접근하거나 밀착해서 온전하게 작동되는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능에 있어서 불완전하다는 말은 잇쉬와 잇샤는 존재에 있어서는 그 자체로 완전하고 아름다운 존재라는 존재임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존재에 있어서 남자, 존재에 있어서 여자는 그 자체로 완전하고 아름다우나 기능에서는 상호보완적인 존재입니다.
넷째로 성경에서 “몸”은 히브리어는 “바싸르”, 헬라어는 “소마(σŵμα)”로 이는 단지 신체만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는 일이 없고 몸과 영혼이 어우러져 몸을 가지고 현세 안에서 영위하는 삶 전체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바싸르”는 관계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말하는 “한 몸”은 잇쉬와 잇샤가 생각 · 행동 · 생활에 있어서 서로의 독특성을 가지고 서로 보완해 가면서 조화를 이루고 살아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말로 남자와 여자로 번역되는 또 하나의 그룹이 있는데, 그것은 “자카르”와 “네케바”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는 바로 “자카르”와 “네케바”가 사용되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서는 자녀를 낳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자카르”와 “네케바” 사이에서 성관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관계를 전제할 때는 “자카르”와 “네케바”가 사용되었습니다. 영혼을 포함한 인간의 삶 전체를 묘사할 때 잇쉬와 잇샤를 사용한 모세는 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묘사할 때는 “자카르와 네케바”를 사용하였습니다. “자카르와 네케바”는 인간과 영혼이 없는 다른 동물에게 공통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자카르는 수컷”, “네케바는 암컷”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이 단어들은 영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신체 구조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묘사할 때 “자카르와 네케바”를 사용했다는 것은 인간도 다른 동물처럼 성 정체성이나 성별을 결정할 때 영혼을 고려하지 않고 순전히 생물학적 신체구조만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과 2장은 “젠더 이론(Gender theory)”을 거부합니다.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성 정체성과 성별은 염색체와 생식기 구조에 의해서 결정이 됩니다. 염색체가 XY이고 염색체가 주는 정보에 따라 남성 생식기 구조가 형성되면 남자이고, 염색체가 XX이고 염색체가 주는 정도에 따라서 여성생식기 구조가 형성되면 여자입니다. 성별과 성 정체성을 결정할 때는 어떤 인간의 사상이나 주관적인 정서가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성적 존재로서의 “자카르와 네케바”도 상호보완적으로 역시 이해해야 합니다. “자카르와 자카르”가 성관계하거나 “네케바와 네케바”가 성관계를 하면 성관계를 통해서 자녀를 출산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고 문화대명령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신체는 심혈관계 · 호흡기계· 신경계 · 생식계라는 4대 핵심 계통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 가운데 심혈관계 · 호흡기계· 신경계는 다른 신체의 도움이 없이 한 몸 안에서 자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식계만은 다른 성(性)을 가진 배우자와 관계하지 않으면 작동될 수 없습니다. 예컨대, 남성 생식기는 정자만을 생산하고 여성 생식기는 난자를 생산하는데, 정자 혼자로는 자녀 생산과 관련해서 아무 기능을 할 수 없고 난자 역시 출산과 관련해서 아무 기능도 할 수 없습니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야 생명이 탄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카르와 네케바”는 성(性)과 출산에 관한 한 그 특성이 정반대이기 때문에 서로 교환하거나 대체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남성에게는 자궁이 없기에 아이를 잉태하고 낳을 수 없고 이는 여성 고유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여성은 산 자의 어미가 되는 것입니다. (창 3:20) 그뿐 아니라 남자는 태어난 아이에게 젖을 먹여 키울 수가 없습니다. 호르몬 분비에서도 “자카르와 네케바”는 현격한 차이를 보여주는데, 어떤 조사에 의하면 자카르의 경우는 네케바보다 평균 약 일천 배 더 많은 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이 흐르고 있는 것으로 조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2. 노아의 가나안 저주 문제
두 번째는 노아의 가나안 저주사건, 창세기 9장 20절에서 27절에 기록된 사건입니다. 인류의 첫 시조인 아담과 하와 이후에 등장한 인류는 노아의 홍수 때 노아의 여덟 식구를 – 노아, 노아 아내, 세 아들 셈, 함, 야벳과 아들의 세 아내 - 제외하고는 모두 죽었기 때문에 현대의 인류 문명과 연속성을 가진 문명은 사실상 노아 홍수 이후 노아의 여덟 식구로부터 시작됐다고 보아야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좁혀서 말한다면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집단 문명권인 수메르 문명, 즉 메소포타미아 문명 그리고 이집트 문명은 노아의 여덟 식구에게서 시작된 것입니다.
이 사실은 창세기 9장 18~19절 말씀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19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라는 말씀을 통해서 확인됩니다. 홍수 이후, 노아 가족들의 활동에 관한 특별한 기사가 처음 등장한 것은 창세기 9장 20~27절까지입니다. 이 사건은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성경에 이 사건이 특별히 들어있다는 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사건이기 때문에 노아의 홍수가 끝난 이후에 인류문명이 시작되는 시초를 알리면서 이 사건을 하나님께서 집어넣으신 것입니다.
본문에는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서 장막에 누웠을 때 세 아들이 아버지 노아에게 한 행동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단순하게 보면 함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지만,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기를 피하고 뒷걸음질로 들어가서 아버지의 벗은 몸을 가려 주었고 동시에 술에 취한 상태에서 깨어난 노아가 함이 자기 몸을 보았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이렇게 단순하게 해석하는 것은 여러 가지 무리가 뒤따릅니다.
첫째로 누군가의 벌거벗은 몸을 우연히 본 우발적인 행위가 무서운 저주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면 이 행위가 얼마나 큰 죄인가를 보여주는 관행, 즉 우발적으로 어떤 사람의 벗은 몸을 스쳐 지나가듯이 봤다면 이 행위가 굉장히 저주를 받을 만큼 무서운 행위가 되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런 관행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없습니다.
둘째로 노아가 저주를 내렸다는 말은 함이 한 행동이 단순히 우발적으로 노아의 벗은 몸을 본 것이 아니고 인륜상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심각한 도덕적 악행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심각한 죄가 아니고 함이 악의가 없이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가 우연히 노아의 벗은 몸을 본 것인데 이런 행동에 대해서 노아가 후손을 축복하는 자리에서 무서운 저주까지 내렸다고 하면 노아는 아주 편협하고 고약한 노인이 됩니다. 경건한 노아가 저주를 내린 것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술에서 깨어나서 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저주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경건한 노아가 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편협하고 고약한 노인의 행동을 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셋째로 노아의 벌거벗은 몸을 본 것은 함인데, 왜 엉뚱하게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을까요? 이상과 같은 사실을 고려할 때 이 사건은 함이 노아의 벌거벗은 몸을 우연히 본 행동을 다룬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합니다. 실제로 원문으로 본문을 분석해보고 그 당시 상황을 추정해보면 함의 행동이 근친 간의 동성 강간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홍수 후에 노아는 농사꾼이 되었고 포도원을 만들고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창세기 9장 20절에 포도 수확을 한 다음에 노아는 포도주를 만들었고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벌거벗었다”라는 동사에 주목해야 합니다. “벌거벗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갈라”인데, 본문에서는 태(態)가 히트파엘 형이라는 태(態)로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일곱 개의 태(態)가 있는데, 그중에서 히트파엘형은 제일 나중에 나오는 태(態)입니다. (칼형, 니팔형, 피엘형, 푸알형, 히필형, 호팔형, 히트파엘형) 히트파엘 형은 일종의 수동재귀동사로서 “자기 스스로 옷을 벗다”라고 해석할 수 있고, “누군가에 의해서 벗겨지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수동적인 의미가 강하게 들어 있는 동사입니다. 제 판단에는 두 번째 해석이 맞는 것 같습니다.
통상적으로 술에 취한 사람이 스스로 옷을 벗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냥 옷을 입은 대로 잠들고 옷을 벗어야 하겠다, 옷을 갈아입어야 하겠다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술 취한 사람은 인사불성이 되어서 옷 벗을 생각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서 잠자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입니다. 주사 습관은 옛날이랑 오늘날과 거의 똑같습니다. 술에 취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옷을 벗겨 주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노아의 옷을 벗겼다고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술에 취해서 잠든 노아의 옷을 누가 왜 벗겼느냐? 라는 것입니다. 술에 취했다고 해서 하체를 가린 옷을 평범한 상황에서 벗게 될 이유가 없습니다. 왜 벗깁니까? 그냥 내버려 두면 되지 않습니까? 옷을 벗길 이유가 없고 본인 자신도 벗을 능력도 없습니다. 게다가 누군가 노아의 옷을 벗겼다면 당연히 벗긴 부분을 담요 등으로 가려 주거나 다른 옷을 입혀 주는 것이 상식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은 노아의 옷이 벗겨진 상태로 방치되었습니다. 벗긴 다음에 그대로 내버려 둔 것입니다. 이것은 평범한 행위가 아닙니다. 더욱이 구약성경에서 “벌거벗다”라는 단어가 “스스로 드러낸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든 아니면 “다른 사람에 의해서 벗겨짐을 당한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든 사람의 신체와 관련되어 사용될 때는 성행위를 뜻하는 용어로 대부분 사용되었습니다.
예컨대 성경은 아들이 아버지의 아내와 근친적인 성관계를 가지는 경우를 표현할 때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낸다”라고 표현합니다. 신명기 27장 20절 ‘계모와 구합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명기 22장 30절 ‘사람이 그 아비의 후실을 취하여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지 말지니라’ 에스겔 22장 10절 ‘네 가운데 자기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는 자도 있었으며 네 가운데 월경하는 부정한 여인에게 구합하는 자도 있었으며’ 이 말씀은 모두 성관계를 표현하는 구절들입니다.
또한, 강간당하는 장면을 묘사할 때 “벗은 몸을 드러낸다”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47장 3절 ‘네 살이 드러나고 네 부끄러운 것이 보일 것이라 내가 보수하되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리라’ 에스겔 16장 37절 ‘~ 또 네 벗은 몸을 그 앞에 드러내어 그들로 그것을 다 보게 할 것이며’, 23장 10절 ‘그들이 그 하체를 드러내고 그 자녀를 빼앗으며 칼로 그를 죽여 그 누명을 여자에게 드러내었나니 이는 그들이 그에게 심문을 행함이니라’, 23장 29절 ‘~ 너를 벌거벗겨 적신으로 두어서 네 음행의 벗은 몸 곧 네 음란하며 음행하던 것을 드러낼 것이라’ 이 구절들은 모두 강간을 의미합니다.
자기 스스로 옷을 벗는 행위도 간음행위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에스겔 16장 36절 ‘~네 정든 자와 행음함으로 벗은 몸을 드러내며 또 가증한 우상을 위하여 네 자녀의 피를 그 우상에게 드렸은즉’ 70인역(LXX)에서는 이 단어를 성적인 수치스러움을 뜻하는 헬라어 “아스케모쉬네(부끄러운 일)”으로 번역했는데, 바울도 로마서 1장 27절에서 “성교”를 가리키는 데 바로 이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몸을 드러내서 벌거벗은 몸이 되든 다른 사람에 의해서 벗김을 당하든 이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압도적으로 신체와 관련되어 사용될 때는 성관계를 뜻하는 용어입니다. 22절 전반절은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았다”라고 기록합니다. 22절 첫 절이 “함이 장막 안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다”라고 시작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함은 아버지의 장막 안에 이미 머물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함이 장막 밖에 있다가 장막 안으로 들어와 아버지의 하체를 흘낏 본 것이 아닙니다.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본 다음에 장막으로부터 나갔다는 말은 있는데,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는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함은 장막 안에 이미 들어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옷을 벗겼든지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았든지 했던 것입니다. “벌거 벗다와 벌거 벗기다”라는 표현이 모두 성관계를 의미하고 노아가 술에 취해서 항거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함의 행동은 아버지에게 근친적인 동성 간의 강간을 범했다는 추론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추론을 강화해주는 것은 함은 “아버지 노아의 하체를 보았다”라는 구절입니다. 레위기 20장 17절 ‘누구든지 그 자매 곧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을 취하여 그 여자의 하체를 보고 여자는 그 남자의 하체를 보면 부끄러운 일이라 그 민족 앞에서 그들이 끊어질지니 그가 그 자매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그 죄를 당하리라’ 이 구절은 형제와 자매간의 근친 성관계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같은 모세가 레위기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면, 노아의 경우에도 같은 용법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해석입니다.
22절의 하반절은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도 함이 우연히 아버지 노아의 벗은 몸을 본 것이라면 납득이 안됩니다. 아버지 노아가 벌거 벗은 것이 민망했다면 옷을 입혀 주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함은 옷을 입히지 않았습니다. 입혀주었다는 기록이 없고 그냥 벗은 채로 내버려 두고 나와서 두 형제에게 의도적으로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 행위는 단순하게 아버지 노아가 벌거 벗은 채로 장막 안에 있다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으로만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아버지 노아가 깨어난 후에 바로 세 아들에 대해서 축복과 저주를 담은 미래 예고를 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함도 상속과 관련된 운명을 결정하는 미래 예고가 곧 오리라는 것을 예상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함은 막내이기 때문에 상속과 관련하여 매우 불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아마도 함은 어떤 형태로든 상속권을 빼앗아 오려는 마음을 품었을 것입니다. 이미 마음이 삐뚤어져서 노아에 대하여 근친적인 동성간의 간음을 범하도록 이끌었다고 추정이 가능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삽입하는 입장에서 남성 동성애를 행하는 것은 상대방을 지배하고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표로 해석되었습니다. 아마도 함은 아버지와 형들의 권세를 박탈하고 족장인 아버지를 계승하는 권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아버지를 겁탈하고 그 사실을 일부러 형들에게 알려서 형들에게 도전한 것 아닌가? 라는 추정을 할 수 있습니다.
함의 말을 들은 셈과 야벳은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질을 치고 들어가서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고 얼굴을 돌이켜서 하체를 보지 않았습니다. (23절) 셈과 함께 야벳이 가지고 들어 온 옷은 외투를 가리키는데, 이 단어 앞에 정관사를 붙여서 “그 옷”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옷이 노아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옷이 장막 밖에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노아는 술을 마시고 취하고 장막에 들어갈 때까지는 외투를 입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노아의 외투가 밖에 나와 있는 것으로 되어 있기에 누군가가 외투를 밖으로 가지고 나왔음이 분명합니다. 장막 안에 있던 함이 노아와 성관계를 가진 후에 성관계를 가진 증거로써 외투를 가지고 나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입니다.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면 외투를 가지고 덮어주었어야 할 것입니다. 셈과 야벳은 노아의 외투를 가지고 들어가서 하체를 덮어줄 때 노아의 하체를 보지 않으려고 굉장히 조심스럽게 행동하였습니다. 이들은 뒷걸음으로 들어갔고 아버지의 하체를 덮을 때에도 얼굴을 돌려서 보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행동하였습니다. 셈과 야벳이 조심스럽게 행동한 것은 아버지의 하체를 본다는 것이 부도덕한 성적 일탈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정이 가능합니다.
마침내 노아가 술에서 깨어나 함이 자기에게 한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24절) 노아는 가나안에 무서운 저주를 내립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이 저주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두 가지 저주의 내용도 함이 아버지 노아에 대하여 성행위를 했다는 추정을 뒷받침합니다.
노아는 가나안을 저주했습니다. 함이 성행위를 한 것인데, 왜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을까요?
함이 노아와 더불어 성관계를 가진 것은 자녀 출산과 관련 있는 정액을 가지고 나쁜 짓을 한 것이기 때문에 함의 자녀인 가나안에 벌을 내린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저주는 가나안이 형제들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저주는 야벳의 미래 예고를 할 때 한 번 나옵니다. “가나안은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창세기 9장 27절 함이 셈과 야벳을 누르고 상속권을 빼앗으려고 한 행동에 대해서 “너 혼 좀 나봐라”하고 노아는 거꾸로 함이 셈과 야벳의 종이 되는 벌을 내린 것입니다. 이 사건은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것입니다.
3. 고대 메소포타미아 근동 문명에 나타난 동성애 실상
이처럼 가나안의 아비 함은 홍수 이후에 새롭게 시작된 삶의 시초부터 근친 간에 남성 동성 간의 강간행위를 하는 것으로 출발했고 이후 강한 부족은 근친상간 동성애와 수간(獸姦)에 깊이 빠져들었고 이런 관행이 고대 근동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권 그리고 이집트 문명권에 동성 간의 성관계, 특히 남성 간의 성관계를 퍼뜨리는 실마리가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후 가나안 부족은 성적인 일탈 행위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가나안 지역의 남자 간의 성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은 열왕기상 14장 24절에 “그 땅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라는 표현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레위기 18장 3절은 “너희가 거주하던 땅 애급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로 행하지 말고” 가나안과 애급 땅에 동성애가 편만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메소포타미아뿐만 아니라 애급에도 편만하다는 뜻인데, 그러면서 레위기 18장 6절~23일까지 애급 땅과 가나안 땅에서 성행하는 풍속의 중요한 사례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전부 일탈한 성생활과 관련된 것입니다. 또 레위기 20장 23절에서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은 가나안 부족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풍속은 가나안 부족의 풍속입니다. 그런데 레위기 20장 전(前)장이 부족의 왜곡된 다양한 풍속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그중 레위기 20장 10~21절에 성생활에 관한 것들이 나옵니다. 애급과 가나안의 왜곡된 성생활의 풍속은 세 가지입니다.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것은 근친 간의 성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남자들 사이의 성관계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동물과의 성관계입니다.
여기서 이제 세 번째 고대 근동에 나타난 동성애를 검토하겠습니다. 함으로부터 시작된 남성 동성 간의 타락한 성교 관행은 고대 근동 문명권인 메소포타미아 문명권과 이집트 문명권에 급속하게 퍼져 나갔습니다.
주전 2000년경에 등장한 메소포타미아의 법전인 “중기 앗시리아제국법”에 보면 남성 간의 성관계 때문에 발생한 법정소송 사건을 다룬 두 개의 판례가 있습니다.
하나의 판례는 어떤 귀족 남자가 같은 귀족 계급의 남자 동료가 많은 남자와 지속해서 성관계를 했다는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이 남자가 이 소문이 진실임을 입증하지 못하면 명예훼손죄로 곤장 50대, 일 년 동안 왕을 위해서 일하는 것, 거세당함, 납 1달란트를 지불하는 벌을 받는다는 판례가 있습니다. 이 판례는 동성애 그 자체를 다루지 않고 명예훼손죄를 다루는 판례입니다. 그러나 이 판례는 동성애에 대해서 두 가지 중요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첫째로 당시 아시리아 안에서 동성애가 성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어떤 남자가 동성 간의 성관계를 했다는 소문을 퍼트린 것이 명예훼손 사유가 되고 있다는 말은 동성 간의 성행위가 잘못된 행위로 인식되고 있음을 뜻합니다.
두 번째 판례는 어떤 귀족 남자가 남자 동료와 성관계를 했는데, 그의 행동이 사실로 확인되면 사람들이 그 남자와 동성 간의 성관계를 하고 거세시키는 벌을 받는다는 판례가 있습니다. 이는 남성 동성 간의 성관계가 사회적 범죄로 인식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다음에 주전 7세기 이전 어느 시점의 문서로 알려진 바벨론의 예언 문서인 “숨마 알루(Sum-ma Alu)”라는 문서에 38개의 예언이 나오는데. 이 예언들 가운데 다섯 개가 남자 동성 간의 성관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