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11-28 12:49
[2]성령충만에 대한 바른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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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079  

렌스키와 칼빈도 요 1:33과 행 1:5을 주해하면서 세례라는 개념을 구속적인 의미로 해석했다. 이상근 박사 또한 성령의 세례는 위에서 오는 선물로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같이 살아 그의 몫이 되는 것이라 하여 성령세례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연합으로 해석했다. 또한 그러므로 성령세례는 역사적이든 개인적이든 단회적 사건이다.

 

막 1:18, 마 3:11에서 "세례를 주실 것이리라"는 뜻이 단어(배티세이)는 미래 능동채 3인칭 단수 동사로서 한번 이루어질 것이 예언되었기에 성령세례는 단회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고전 12:3절 마찬가지로 그 동사는 과거의 행동을 가리키는 과거시제이며 단 한번만의 행동을 가리키는 부정과거이다. 이와같이 성령세례에 관한 주석가들의 해석과 언어적인 의미를 고찰해 보았을 때 성령세례는 죄씻음과 부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표식으로서의 역할과 생명이 임하는 단일성의 사건으로 이해된다.

 

성령충만의 실제성

 

A. 성령충만의 정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능력과 생기와 기쁨이 넘치는 삶이다. 그리고 이삶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을 때 가능하다. 이것을 우리는 성령충만한 삶이라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충만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란이 있다. 성령충만을 성령세례와 동일시하여 오순절때 제자들이 체험한 것과 같은 동일한 체험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고 이러한 체험을 성령충만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성령세례를 성령충만과 구별하면서 성령세례는 단회적 작용이지만 성령충만을 계속적인 과정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성령충만을 성령세례와 동일시하는 학자중에는 토레이(R.A. Torrey)와 디기(D. Gee) 그리고 윌리암스(E.S. Williams)등의 오순절 계통학자와 브루스(F.F. Bruce)와 옥켄가(H.Ockenga)등이 있다. 이들은 성령의 세례와 충만은 동일한 사역임을 주장하면서 성령의 충만은 성령세례의 경우와 같이 불같은 세례를 부으면서 충만케 된다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있어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은(엡 5:8) 성령의 세례을 받은 것을 전제로 한 말이다. 즉 처음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은 것을 성령의 세례로 보았기에(행 1:4-5, 2:1-4)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을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는 말씀과 동일시하였다.

 

따라서 브루스는 "성령세례의 결과가 성령충만이며, 성령충만은 그후 여러번 계속된 것" 이라고 하였고, 옥켄가도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경험이 성령충만이고 성령충만 이후에 비로소 능력을 행사 할수 있었다" 고 하였다. 토레이 역시 "성령의 세례를 성령충만과 동일한 비상한 은혜로 보았다.

 

그러나 성령충만을 성령세례와 동일시 하는 데는 많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라는 표현은 성령이 믿는 자의 마음과 정신을 점유하고 있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충만"이라는 단어는 이 단어가 성령이 아닌 다른 단어와 함께 사용된 실례가 "심히 두려워하여"(눅 5:26)라는 문귀에 나타나 있다. 데어는 그의 헬라어 사전에서 여기에 사용된 동사를 "전체 마음을 점유하고 있는 상태"라고 표현하였다.

 

이 점유는 그 마음을 성령이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그 동사도 조격을 받고 있는데, 그 조격은 그 수단에 의해서 동사의 행동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동사의 행동은 신자에게 미치는 어떤 지배를 가르키는 것으로 이 말은 "성령에 의해 지배를 받으라"로 해석 할 수 있다. 따라서 성령충만은 성령세례와 구분되어 지는 성령의 인격적 지배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이와같은 견해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다. 박형룡박사는 성령세례가 오순절에 임한 것은 부인하지 않았지만 그는 "성령의 충만은 성령세례와 다르다" 고 하였다. 스토트(J.S. Stott)는 말하기를 "성령의 충만함은 성령세례의 결과이며, 세례는 독특하게 처음으로 얻는 경험이고 충만함은 영적생활을 계속하는 도중에 반복하여 받은 성령의 비상한 은혜" 라고 하였다.

 

로이드 죤스도 성령의 영향아래 있는 것, 성령께서 우리를 통제하는 것을 성령충만으로 보았다. 빌 브라잎도 "성령충만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한 것" 이라고 보았다. 이외에 R.펙손, J.월부어트, A.머레이등이 성령의 충만을 인격적인 성령의 지배로 보고 있다.

 

살펴 본 바와 같이 성령충만을 성령세례와 동일시하는 오순절 계열의 학자들은 성령의 체험적인 면을 극단적으로 강조하여 체험을 말씀보다 중시하였고 능력과 은사를 성령충만한 삶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원어에 나타난 것과 같이 성령에 의한 지배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인격적인 영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지배되는 상태를 성령충만으로 보는것이 정당하다고 본다.

 

B. 성령충만의 실제

 

1. 성령충만과 인간의 의지

 

성령이 믿는 자에게 역사하는 지배는 성령에 대하여 믿는 자가 얼마나 적극적이고 올바르게 순응하느냐에 달려있다. 즉 이말은 믿는자는 성령이 그안에 내재하시기 때문에 자동적으로성령에 의해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의 훈련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구세주로 인정하고 구원에 대해 우리가 그를 믿을 때까지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셨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을 아버지께서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하시도록 보내신 분으로 인정하고 그가 우리 안에서 임무를 수행하도록 신뢰하기까지는 우리를 지배하시지 않는다. 성령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충분히 지배하지 못하는 이유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성령께서 자기들의 마음에서 자동적으로 일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팔마의 말에 귀를 기울어 보면 성령의 더욱 풍성한 내주를 얻는데 있어서 사람의 책임한계는 백 퍼센트이다. 하나님이 주신 방도를 소홀히 한다면 그는 성령을 더 소유치 못할 것이지만 반대로 그가 하나님의 방법들을 사용한다면 그는 성령을 더욱 소유할 것이다. 이 성령의 더욱 충만한 내주를 구할 의무는 완전히 사람에게 놓여있다.

 

그러나 동시에 성령을 주시는 일은 순전히 백 퍼센트 하나님께 달렸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인간이 도와야 할 것이 전혀 있지 않다 하나님이 전부이끄신다. 사람이 백 퍼센트 책임지나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 모든 능력을 주신다. 이것이 은혜 -맨 처음부터 맨 끝까지- 은혜요 절충이 아닌- 의 복음이다.

 

2. 성령충만의 조건

 

1) 성령충만을 사모함.

 

로이드 죤스는 성령충만을 위해서는 사모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자신을 드림과 함께 충만해 지고자 하는 소원이 있을 때 성령충만을 받기에 적합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7:37,38에서 성령의 충만을 위해 두 가지 단순한 요구를 하셨는데, 그것은 성령의 지배를 갈급해 할 것이며 성령의 지배에 의해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이라는 말은 성령께서 신자 자신의 모든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지배하시는 분이 되시기를 바라는 신자의 열망을 말한다. 우리가 목마르지 않으면 물을 마시지 않는다.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바라지 않으면 우리는 그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성령이 우리들의 삶을 지배해 주기를 원하는 열망을 갖아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케 되기 위한 소원속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속에 있는 죄를 판단하시고 제하시도록 하는 원함 또한 포함되어야 한다. 이것은 세상의 끈과 악한 제도로부터 주님께로 분리되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즉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았다는 사실을 우리 삶속에서 효력을 보기 원해야 한다. 또한 우리의 삶 가운데서 성령의 열매를 맺기 원하는 소원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도 된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성령의 충만은 참으로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과 그 값을 치룰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들과 그것을 받는 것이 필요하여 다른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예수님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충만히 채워질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진정으로 성령에 의해 지배되기를 원하는 소원은 기도와 말씀의 풍성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이

다.

 

기도와 말씀의 충만이 성령충만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말씀과 기도가 뒤따르지 않는 원함은 지식적이고 피상적 사모함이다.

 

2) 죄를 고백함

 

스탓트는 성령충만의 은혜가 잃어진 때에는 회개와 기도로 그것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하면서, 성령은 죄 때문에 슬퍼하시며(엡 4:30) 죄인에게 채워주시기를 그치신다고 하였다. 그런데 회개는 채우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했다. 토레이는 성령의 충만을 성령세례와 동일한 비상은혜로 보면서 성령의 세례를 받는 7가지 방법을 행 2:38에 의해 열거했는데 첫번째 단계로 회개를 들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회개는 마음의 내적 변화를 깊이 느끼게 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내적 변화는 전 인격을 결정하는 것으로 그들의 죄와 불신에서 떠나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는 인격을 의미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용납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이루어 놓으신 사역임을 절대적으로 믿고 말씀의 빛에 따라 드러난 부분들을 버리고 어둠을 몰아내는 작업들이며 이것이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과정이라 할 수있다.

 

행 2:38을 통해 볼때도 그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세례의 목적과 결과는 죄의 용서이다)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 약속되어 있다. 작은 죄라고 하는 것조차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며 이것이 성령의 충만을 막아 버리는 고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고 할 때 마다 마음에 떠오르는 그 일들을 처리해야 한다.

 

레만 스트라우스는 생활 주위에 있는 모든 시기, 위선, 거짓, 더러운 것을 버리고 진실하도록 하라고 하면서 무례하고, 불친절하고, 상냥하지 않으며, 용서할 줄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회개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죄를 회개하며 성결의 옷을 입고 사는 신자는 성령에 민감한 자이므로 성령충만한 신자라고 하였다.

 

그 외에도 성령의 인도하심따라 생각나는 모든 죄를 자백하고 성령 충만함에 따라 발견되어지는 성품중에서 우리에게 부족한 점도 모두 고백할 수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허 복구 목사도 성령 충만의 8개 조건중의 하나로 회개를 들고 있고 죄는 신자의 성령의 지배를 방해하므로 죄에서 돌아 설 때에 성령으로 충만케 된다고 말했다.

 

죄인이 내재하는 성령님의 책망을 듣고 그 죄를 스스로 버리지 않는 한 성령님은 그를 지배할 수 없다. 성령을 거역하는 자는 결코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도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3) 간구함

 

우리가 만일 성령의 충만을 받으려면 그 충만을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정도는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구하는가 않는가에 달려있다. 이것이 우리의 의무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다. 우리가 성령을 위하여 간구하고 그래서 그를 충만히 받으면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그를 간구하도록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Torrey는 성령 세례를 받는데 마땅히 밟아야 할 여섯째 단계로 눅 11:13을 말했는데 성령충만을 받는데 있어서도 적용되는 말씀이다.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아니하겠는냐?" 단지 천부께 구하는 것이다. 분명한 성령의 충만을 받게하여 줍시사고 구해야 한다.

 

박형용 박사도 "신자가 성령의 충만을 받기 위하여 사람 편에서 이행할 의무들로 지적된 것이 여러가지인데 기도에 의뢰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주장"이라고 하면서 '이 주장의 뒷받침으로 눅 11:13이 인용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오순절에 성령의 강림을 위하여 10일동안 기다린것 같이 오늘의 신자들도 성령의 충만을 위하여 간절히 기다려야 된다는 견해도 있는데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로 봄이 옳을 것이다.

 

덤. 라레이도 '자신을 살피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생각나는 모든 죄와 부족한 점을 모두 고백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완전히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 다음 눅 11:13을 따라 성령의 충만을 간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오순절 이후로는 그리스도인은 오로지 간구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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