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11-28 12:47
[1]성령충만에 대한 바른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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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209  

 

성령충만에 대한 바른 이해

 

성령의 본질에 대한 서론적 고찰

 

A. 성령의 어의

 

구약성서에서 성령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은 "루아gm"이다. 이 말의 뜻은 공기의 움직임을 말한다.

그러나 문맥에 따라서 이 말은 바람, 폭풍, 호흡, 생명력(vitality)등의 뜻을 가진다.

볼프는 구약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루아흐"의 뜻을 여섯 가지로 구분하였다.

즉 바람, 숨, 생명력, 영, 정서, 의지력등이다.

그런데 389회 중에 113회 이상이 바람을 가르킨다고 한다. 그리고 "루아흐"가 전체 사용된 것은 136회나 된다고 한다. "루아흐"의 전체 사용 횟수 중에서 35% 정도가 하나님과 관련되어 쓰이고 있다.

 

"루아흐"가 바람의 뜻으로 사용될 때도 공기 자체가 단순한 자연현상으로만 쓰여지지 않고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활동의 한 도구로서 쓰인다는 것이구약의 일반적인 특성이다. 즉 바람으로 홍수가 마르게 하시고, 바람으로 메뚜기를 몰아오게 하시고, 바람으로 홍해를 갈라지게 하시고, 바람으로 메추라기를 몰아 오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바람을 일종의 사역자로 쓰셨다. 이 "루아흐"는 신적이요, 전능한 것으로 여호와께서 사용하는 군세요, 강력한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바람으로서 "루아흐"의 움직임은 하나님의 자기 임의성을 암시하며 하나님의 신비한 뜻과, 목적에 의해서 움직이는 변혁하는 힘 또는 권세를 의미한다.

 

"루아흐"가 생명의 자원인 호흡, 생기, 숨으로 사용될 때도, 일반적인 생명체의 기운으로도 사용되지만 의인법적으로 하나님에게 적용되기도 했다. 이때의 "루아흐"는 생명의 자원으로 이것이 있는 한 사람은 '산 존재'인 생명체가 되고 그것이 없으면 비생명체인 흙이 되어버리고 생명인 "루아흐"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즉 생명과 죽음은 "루아흐"에 달려있다. 어디까지나 "루아흐"는 하나님의 것이요, 결코 인간 본질에 내주하는 어떤 인간 구성요소는 아니라는 것이다. 즉 "사람은 그것을 받을 뿐이고 루아흐의 본질은 오직 하나님께속한다는 것이다."

 

때로 "루아흐"는 생명력(pathos)을 가지고 있는 '마음'으로 표현되기도했다. 이때에도 인간이나 동물이나 우상에게는 129회 그리고 하나님께 관련되어 사용된 횟수는 136회라고 한다. 이 "루아흐"는 아픔을 느끼기도하고, 의심과 질투도 일으키며, 근심에 잠기기도 하고 겸손해 하기도, 성급해 하기도, 분노와 불만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 "루아흐"가 선한 영, 악한 영이라는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를 가르킬 때도 쓰인다. 여기서는 악신도 역시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하나님은 뛰어나게(pre-eminently) "루아흐"를 가지고 계신다. 그는 숨을 쉬며, 살아계시며, 행동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역사하는 곳에는 바람이 일어나며 "루아흐"가 운동한다."

 

신약성서에서도 성령에 대한 어원은 근본적으로 구약성서와 동일하다. 신약성서에서 성령으로 번역된 말은 대체로 '푸뉴마'이다. 이단어의 본래의 뜻은 바람이 불어 공기가 흐르는 것과 같이 숨을 흡입하고 내뿜는 생명력(Vital force)을 의미한다.

 

그것은 바람(요 3:8. 히 1:7), 호흡(살후 2:8. 계 11:11. 13:15. 눅 8:55), 생명의 동인 및 상태 그리고 영(Soul)(막 2:8. 14:38. 눅 1:80. 요 11:33. 13:21), 또한 정신(Spirit)으로 쓰인다. '푸뉴마' 역시 "삶의 다이나믹한 원리, 그리고 생명력과 활동의 중심으로서 인간의 역동적인 원리"를 표현하는 단어이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자기 피조물에게 생명력을 수여하시는 생명의 하나님"(a vital God) 이며 "인간의 루아흐나 푸뉴마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the vivifying gift of God)이므로 인간은 오로지 여기에 의존해 있는 것이다. 성령은 "창조물과 재창조물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불어넣는 하나님의 숨(God's inpiring breath)"이다. F.W.Dillistone은 성령을 정의 하기를 "인간의 삶 속에 역사하는 하나님(God in action in human life)" 이라고 했다. Alan Richardson도 성령에 대해 설명하기를 "인간의 영(pneuma)은 그의 능력(Dynamis)이며 활동하는 그의 인격이다. 하나님의 영도 마찬가지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이다.(God's Spirit in God acting)"라고 했다.

 

B. 성령의 속성

 

1. 성령의 인격성

 

1) 성령님은 인격적 특성인 지. 정. 의를 가지신다.

 

인격의 본질적 요소들을 성령이 가지신 것을 성경이 보여준다. 성령님은 지혜의 영이며,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으로서의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며(고전 2:1) 마음을 감찰하시며 생각하는 지각을 소유하고 계신다.

 

성경은 또한 성령께서 풍부한 감정을 소유하고 계신 것을 증명해 준다. 곧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심정 속에 부어 주시며 근심하시고, 탄식하시며, 시기하시며, 위로하시고, 동정하신다.

 

성령은 또한 의지를 가지신 분이다. 그는 뜻과 계획을 가지시고 그대로 시행하신다. 은사를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는가 하면(고전 12:11)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고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비두니아로 가시는 것을 막으시기로 하셨다.(행 15:6-7)

 

성령님은 예수그리스도와 같이 사랑이 많으시고 지혜로우시며 온유하시고 굳세시며 신실하셔서 우리가 참으로 신뢰하고 사랑할 만한 참 인격자이시다.

 

2) 성경에서 성령님을 말할 때 지시대명사(it)를 사용하지 않고 인칭대명사를 썼다. 요 16:7,8, 13-15의 구절에서는 희랍어로 12번이나 성령을 남성 단수 3인칭 대명사로 사용한다.

 

챨스 핫지(Charles Hodge)는 "성령은 시적이거나 황홀한 대화 속에서가 아니라 단순한 일상담화 가운데서 교훈적으로 자주자주 인격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인격성은 다른 많은 부차적인 증거들에 의해서 확실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의인화의 원리를 적용시켜 인칭 대명사가 성령께 사용된 사실을 설명하려는 것은 성령해석의 모든 원리를 범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3) 성령님은 인격을 가지신 분만이 할 수 있는 활동을 하셨다.

 

즉 성령님은 말씀하시고(마 10:19-20, 행 7:29, 10:19, 11:12, 28, 13:2, 21:11 딤전 4:1, 히 3:7, 계 2:7, 11, 29, 3:6, 13, 22, 14:13) 증거, 책망, 교육, 부르심, 권면, 명령, 인도(요 16:13, 롬 8:14, 마 4:1, 고전 2:10)하시며 기도를 도우시고(롬 8:26, 엡 6:18, 고전 2:10-11) 위로하시고(행 4:31, 요 14:16, 고후 1:3-4, 요 9:35) 일꾼을 선택하시고 창조사역을 하셨다.(행 1:2, 시 104:35)

 

4) 성령을 다른 말로 표현할 때 인격의 칭호를 붙여 "보혜사"(Paraclete), 즉 돕기 위해 옆에 있는 자란 뜻으로 표현하였다.

 

(요 14:16, 15:26) 성령님을 인격으로 알고 믿어야 할 중요한 이유를 살펴보면, 첫째 예배에 있어서 중요하다. 둘째 성령의 바른 능력을 알기 위해서다. 성령님을 감화력이나 능력이라고 생각할 때는 어떻게 하면 성령을 붙잡아서 이용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성령을 이용하려는 시몬의 경우처럼 될수 있다. 반대로 성령님을 인격자라고 믿는다면 어떻게 하면 성령께서 나를 붙잡아 주실까 하는 입장에 서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될 때에 자기의 욕망과 자만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셋째 인격자만이 인간의 사정을 알고 도와줄 수 있다.

 

성령을 받는다고 하든지 또는 신비적으로 탈선하는 경우는 대개 성령과의 인격적인 정상단계가 아닌 자기감정에 도취된 무속행위라고 지적 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을 인격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개인의 신앙생활이나 교회의 정상적 성장을 위하여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성령님을 인격으로 인식하는 것은 성령충만한 삶의 근원이 된다.

 

2. 성령님의 신성

 

성경은 성령께서 인격적인 특성뿐 아니라 신성도 겸비했음을 보여준다.

 

1) 하나님의 영은 창조(창 1:2)와 섭리(시 104:30)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잉태(눅 1:35)와 부활과 각 그리스도인에게 영적 선물을 베푸는 일들을 감당하신다.

 

2) 성령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다양한 호칭이 그의 신성을 증거 하는바 그는 하나님의 신(창 1:2, 마 3:16), 주의 성령(눅 4:18), 우리 하나님의 성령(고전 6:11), 그의 신(민 11:29), 여호와의 신(삿 3:10), 주의 신(시 139:7), 주 여호와의 신(사 61:1), 너희 아버지의 성령(마 10:20)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고후 3:3), 나의 신(창 6:3), 그의 영(롬 8:11), 그리스도의 영(롬 8:9, 벧전 1:11), 예수그리스도의 성령(빌 1:19), 예수의 영(행 16:7), 그 아들의 영(갈 4:6), 주의 영(행 5:9, 8:39)등으로 불리워졌다.

 

3) 위의 명칭들은 삼위일체와의 관계를 계시하고 있으며 성령은 하나님의 한위시다.(삼하 23:2-3, 창 1:2, 고전 3:16, 마 12:31-33, 롬 8:9-10)

 

4) 성령님의 속성 - 전지성(고전 2:10, 11), 편재(시 139:7, 요 14:17), 전능(슥 4:6), 진리성(요일 5:7)이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 성령님의 신성에 대해 핫지는 "제 4세기 이래 성령의 참된 신성은 그의 인격성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의해 부정된 일이 결코 없었다" 고 말했다.

 

 

성령충만의 성경적 근거

 

A. 구약성경에 나타난 구절들

 

구약성경에는 성령이 충만하였다는 직접적인 표현이 별로 없다. 하나님의 신, 혹은 하나님의 영이란 말이 성령과 같은 의미로 표현되었다.

출애굽기 31장 3절에 성막을 짓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신이 브사렐에게 충만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성막을 짓게했다는 구절이 있으며 신명기 34장 9절에는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지도권을 인계할 때에 여호수아에게 안수하매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였다고 했고 이사야서 6장 3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온땅에 충만하였다는 구절이 있다. 특수한 사역을 수행키 위해서 성령충만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B. 신약성경에 나타난 구절들

 

신약성경에는 성령충만하다는 구절이 여러 군데 있다. 눅 1:15절에 세례요한이 잉태되었을 때 성령이 충만했다는 표현이 있고 41절에서 요한의 어머니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했으며 6절에는 요한의 아버지 샤갸라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했다. 또한 눅 4:1절에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물세례를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광야에서 40일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다는 구절이 있다.

 

사도행전에는 2장 4절, 4장 8절, 31절 등에 성령충만이 언급되어 있고 7장 55절에는 스데반이 성령충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엡 5장 18절에는 성령충만 받으라는 명령의 구절도 있다. 성령충만에 관한 구절들의 주석을 살펴보면 눅 1장 15절 주석에서 칼빈은 단지 위대한 약속를 드러내는 특성이 요한에게서 나타날 것이라는 뜻이라 했고 이상근 박사는 육적으로 취하지 말고 영적으로 취하라는 뜻이라 했으며 박윤선 박사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것은 그가 자기의 사명을 잘 실행하기에 족한 능력을 받았다는 의미다 고 주석했다.

 

또 구로사끼씨는 육적 인간과 영적 인간과의 대조라고 했고 류형기 주석에는 구약에 있어서 성령은 하나님의 잠정적인 은혜로 특별한 인물에게만 주어졌으나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 고 했다.

 

눅 1장 41절에 요한의 어머니도 마찬가지로 잉태 되었을 때 보통 잉태보다 하나님의 특별한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눅 1장 67절의 사가랴는 당시의 제사장으로서 성역을 수행하던 분이다. 그가 성령충만하였다는 것은 누가의 기록에 있어서 성령은 대개 예언과 계시의 방편이되어있다 고 말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보통 때에도 성령의 은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경우에 더 풍성한 성령의 은혜를 받고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고했으며, 이상근 박사도 누가복음에서의 성령은 예언의 경로라고 말한다.

 

눅 4장 1절의 예수님의 성령충만은 예수께서 성령을 소유하시지 못하다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성령충만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분명한사역을 말한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보다 더 풍성한 은혜와 능력의 띠를 띠게 되어서 자기 앞에 놓여진 전우를 맞이하는데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어 놓으셨다고 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는 성령의 힘이 마치 외적으로 실재하여 예수를 몰아낸 것 같이 묘사되어 있으나 누가는 전혀 외적 작용과는 다른 것으로 말한다.

 

사도행전에 성령충만을 입은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사도들과 제자들이었다. 행 7장 55절에서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란 말은 그가 일찌기 성령충만한 은혜를 받았는데(6:5-8)이 장면에 와서는 더욱 충만하였다는 뜻이라고 박윤선 박사는 말한다.

 

행 9장에 사도바울의 눈먼 것이 아나니아의 안수로 나았다는 사실은 성령충만한 역사로 이루어진 것이다. 성령의 신령한 은사가 그에게 임하여서 성령충만케 한 것은 특별한 주님의 사역을 이루게 하기 위함이다.

 

행 11장 24절의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고 했다.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그의 마음을 주장했고 튼튼하고 강건한 믿음으로 그의 마음을 채웠다. 믿음이 온전한 자라면 성령이 충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성령충만한 자라면 선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바나바는 육신의 욕망을 물리치고 성령의 지도를 받는 가운데 온 마음을 다해 경건을 개발하는데 힘쓴 사람이었다.

 

엡 5:18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을 주신 성령의 충만함을 언제나 누리도록 권면하고 있는 말씀이다. 이상에서 살펴볼 때 성령충만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그분의 특별한 사역을 위하여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는것임과 사역과 봉사에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성령충만을 받으셨다고 하는 것은 공생애의 시작을 의미하며 특별한 주님의 사역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고 일할 때 성령을 충만케해서 주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임을 더욱 분명히 알게 한다.

 

또한 사도행전의 성령충만에서는 성령충만은 특별한 주님의 사역을 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성도 자신들의 건덕을 풍성케 하는 것임도 알 수 있다. 특히 스데반의 성령충만은 하나님의 사역과 나아가 개인의 건덕뿐만 아니라 성도가 성령충만을 받음으로 인해 초자연적인 삶을 살게 됨을 알게 한다. 행 11장 24절의 표현은 성령충만이란 말씀과 믿음으로 충만한 것임을 말해준다.

 

성령세례에 관한 고찰

 

근래에는 오순절 사건에 대한 해석문제, 성령세례와 중생과의 관계, 성령 세례와 성령충만의 문제가 성령론에서 주된 논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서로 극단적인 논리를 전개하고 있어서 성령론은 심한 혼란과 혼동의 와중에 빠져있다. 그러므로 다양한 학설을 성경에 조명하여 옳고 그름을 밝히고 바른 이해를 정립함이 신학적으로나 목회적 측면에서 절실하다고하겠다. 이러한 문제들은 오순절 성령세례의 의미와 성령세례의 단어의 어의를 고찰함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다.

 

A. 성령세례의 의미

 

여러 학자들이 성령세례의 의미를 다양하게 말하고 있다. 가핀은 "성령세례는 한마디로 말하면 오순절 성령강림이다. 오순절 사건은 약칭 성령세례, 성령강림, 혹은 성령선물 등으로 불려지며, 또한 성령에 의한 세례라는 뜻이있는 동시에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어느 쪽을 택해도 큰 차이가 없으나 이 말의 요점은 신자가 성령에 의해서 영적으로 세례를 받는다라는 뜻이다" 고 말했다.

 

핀녹은 성령세례의 용어에 대하여 특수한 용어가 아니라 융통성 있는 은유적 용어라 말하고 있다. 즉 성령의 임함을 말하는 통칭적인 의미로 받아들여 때로는 성령충만의 동의어로 볼수 있으며 회심의 경우를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안영복 교수는 오순절날에 각 사람위에 '성령이 임한 것'을 가리켜 '성령의 세례'라고 말함이 타당하다고 했고 박영선 목사는 "성령의 부어주심"이라고 표현하면서 예수님께서 베푸실 성령세례와 성령님께서 베푸실 성령세례를 구분했다.

 

또한 우희영 목사는 "성령세례란 성령 속에 잠기며 성령 자신으로 말미암아 기름 붓듯, 혹은 물 붓듯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로이드 죤스는 "성령의 보증" 혹은 "성령의 인침"과 성령세례를 동일시했고 부루너(Fredick Bruner)는 세례 받는 것이 곧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이며 성령의 세례가 따로 있을 수 없다고 했는데 스위스 개혁신학자 파디(Ren'e Pache)도 "성령의 인격과 사역"이라는 책에서 동일한 견해를 표현하였다 고 하겠다. 칼빈 또한 물 세례와 성령세례를 동일시 했다.

 

이러한 모든 견해는 대체로 두 가지 주장으로 분류 될 수 있다.

즉 오순절파와 웨슬레안 및 케직파의 견해와 개혁주의(칼빈주의)의 학설이 그것이다. 전자는 중생 후에 받는 이차적 경험으로서의 체험을 성령세례라 해석하며 후자는 중생시에 받는 어떤 것으로서의 성령세례를 말한다. 이렇듯 성령세례의 의미는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주의깊게 고찰되지 않으면 그 실체를 분간하기 어렵다.

 

신 구약 전체를 통하여 성령세례라는 말이 7회 나타나고 있다.(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행 1:5, 행 11:16, 고전 12:13) 여기에 인용된 성구들을 살펴보면 복음서의 성구는 세례요한이 자신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을 비교하면서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막 1:8)고 말한 예언적 내용이다. 그리고 행 1:5의 말씀은 예수께서 부활 후에 승천하시기 전 사도와 같이 모인 무리에게 하신 예수님 자신의 예언이며 행 11:16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쓴것이고 고전 12:31절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었던 교훈에 포함되어 있다.

 

먼저 성령세례가 직접 언급된 복음서와 사도행전 1:5을 살펴보면 성령세례는 예언과 약속의 성취로서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오순절 사건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세례요한에 의해 예언되고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약속된(행1:5) 성령세례가 오순절날에 성취된 것이다. 베드로는 구약을 인용하여 이 사건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성취되었음을 명백히 한다.

 

Sanders도 “성령세례는 오순절에 내린 성령의 은혜를 가르쳤던 것이다” 고 말했다. 또한 문법적으로 약속된 세례의 태가 수동태인 것은 성령세례가 받은 자의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동시에 예언과 약속의 성취임을 말해준다 오순절 사건의 특성과 의의를 살펴보자.

 

첫째, 오순절 사건은 역사적 사건이다.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이는 전혀 없었던 성령이 강림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령은 오순절 이전에도 이미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계셨고 사역하셨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 강림은 인간을 위한 성령의 주된 사역이 시작됨을 의미한다고 봐야 한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시대가 끝나고 성령의 주도적 사역이 시작됨을 알리는 사건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은 역사성을 가진다.

 

렌스키도 마태복음 3장 11절을 주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순절 전에는 성령이 없었고, 오순절 후에 성령이 임했다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순절 전에는 한 영혼도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차이는 구속 사역이 실제로 완성되기 전에는 성령의 사역이 제한된 예비적이였으나, 그후에 이르러 성령의 충만이 있었다는 차이다."

 

렌스키 역시 오순절 사건이 성령의 주도적 사역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입장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오순절 사건은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것의 시작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 성령의 시대의 시작이다. 고든(Gordon) 또한 오순절 사건을 성령시대의 도태의 축으로 해석했다.

 

둘째로 오순절 사건은 구속사적인 사건이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성역초기에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분이라고 말한 다음 그는 "손에 키를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 3:17)고 말함으로 성령과 불로 세례 주는 일이 어떤 일이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의 종말론적인 사역으로 그의 죽음과 부활과 직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역사상에 구속성취를 이루시고 그 구속을 받아들이는 알곡은 곳간에 모으고, 그 구속을 배척하는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베드로는 요엘 2:28-32을 인용하여 오순절 사건을 설명하면서 요엘서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자신이 처한 입장에 비추어 인용했다.

 

베드로는 요엘서의 '그후에'를 '말세에'로 고쳤을 뿐만 아니라(행 2:17) "저희가 예언을 할것이요"(행 2:18)를 첨가하여 인용하였다. 그 이유는 오순절 사건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과 아울러 말세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있는 사실은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의 오심과 자신의 죽음을 연계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요한복음 16:7-8의 말씀 가운데 나타난 예수님의 생각의 방향은 자신이 죽음과 부활, 승천을 거쳐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에 있음을 본다. 예수님 자신이 죽으신 후 부활해야만 보혜사가 오실 것을명백히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오순절 사건은 구속적 드라마의 한 부분으로 성취된 사건이며 다른 구속 사건들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오순절 사건은 예수님의 성육신, 수난, 죽음, 부활, 승천과 함께 고려되어져야 한다.

 

스타트(Stott)와 개핀(Gattin)도 오순절의 성령강림의 의의를 구속사적인 면에서 이해하고 있다. 개핀은 오순절의 의의를 3가지 차원에서 조명하였는데, 기독론적 차원, 교회론적 차원, 그리고 경험적 차원이다.

 

기독론적 차원에서 볼 때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시는 자는 바로 성자이시다. 오순절은 약속의 성령에 대한 예언이 성취된 날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적이며 기능적이며 종말론적인 섭리사건이다. 십자가로 절정을 이룬 성자의 사역의 절정이었다.

 

셋째, 오순절 사건의 특징은 초자연적인 가시적 현상의 체험이다. 바람같은 소리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과 방언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은 먼저 상징적 의미로 설명되어져야 한다. 예언과 약속이 성취되었고 새로운 언약시대의 도래가 이루어 졌다는 확증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 가시적 현상이 나타날 수는 있겠으나 모든 경우와 간구에 의해 이러한 동일 현상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합당치 않다고 하겠다.

 

성령행전 이라고 불리워질 정도로 성령의 끊임없는 역사가 상존했던 사도행전의 나머지 부분에 방언을 비롯한 가시적 현상이 교회선교사역에 반복되었다는 제시가 없다. 오순절 사건의 가시적 현상들은 주의 깊에 언급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넷째, 성령의 충만을 모든 믿는 자들이 받았고 특별한 능력이 임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케 되고 능력의 은사가 임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부활의 예수님을 목격한 후 분명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약속하신 성령님을 간절히 사모하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성령님에 대한 간절한 사모와 전혀 기도에 힘쓴(행 1:14)의지의 순종이 막 주도적 사역을 시작하시는 성령님을 그들속에서 충만히 역사하시도록 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역사했던 능력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예정과 인정하심에 의한 것이지만 성령으로 충만함으로 은사와 능력이 나타났다고 봄이 더욱 보편적이며 일괄성이 있다고 하겠다.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고린도서에 나타난 성령세례의 언어적 의미를 고찰해보면 성령세례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먼저 세례라는 말의 헬라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상태 또는 이전의 환경이나 상태와의 관계를 바꾸기 위해서 사람이나 사물을 그 외에 어떤 것과 결합시켜 놓거나 새로운 환경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으로 정의된다.

 

성령으로 세례를 베푼다의 31절에서 "성령으로"는 수단을 말하는 성령으로서의 세례, 또는 성령의 세례가 아니라 “성령의 영역에서의 세례를 뜻하며, 성령은 세례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고 K.S 위스트는 말한다. 또한 믿는 자를 예수그리스도와의 생명적인 결합으로 이끄는 것이지 성령에 의한 세례가 능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고 말했다.

 

결국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의 헬라어 의미는 "죄인이 예수그리스도와 생명적인 결합으로 들어가는 것,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삼으신 것을 의미한다" 성령이 믿는 죄인을 주 예수께서 살아계신 머리가 되신 그 신비 체에 들여놓거나 이끌어 들이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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