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린도 교회의 성령의 은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고린도 교회에는 이교도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서로 다른 언어로 예배를 드리거나, 서로 다른 언어로 기도함으로 교회에 질서를 파괴하여 혼란을 가져오기도 했고, 이교도에 대한 마술적이고 열광적 신앙의 영향을 받아 교회내부에 영적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에 있어서는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고린도 교회는 '육에 속한 자'라고 말한다. 고린도 교회에는 신령한 은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육에 속한 자라고 한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한 몸인 교회와 공동체를 깨뜨리고 서로 시기하고 분쟁하면서, 서로 아볼로 파, 바울 파하면서 싸웠다는 데 있다.40)
(1) 신령한 것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있었다.
"신령한"(Spiritual)이란 말은 사람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신령한"이란 말의 의미는 세속적인 것과 정 반대되는 성스러운 것이나 교회적인 것일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체험하는 것보다는 그 단계가 높은 차원을 묘사해주는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적인 그 어떤 것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볼 때 고린도 시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런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초기 고린도 교인들은 삶의 신령한 면에는 무엇인가 사모할 만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41)
(2) 방언이 가장 나은 은사로 여겼다.
고린도 교회에는 여러 은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여러 은사들 중에 어떤 은사가 더 크고 중요한 은사인가 하는 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여러 은사들 중에 특히 방언의 은사가 가장 신령하고 좋은 은사로 생각했다. 이로 인해 고린도 교회는 이 방언을 구하려고 애를 썼고, 공식예배에서 자랑하는 마음으로 방언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 은사를 소유 여부에 따라 고린도 교회교인들은 우월의식과 열등의식에 빠지게 되었다.
로저 엘스워즈는 그의 고린도 전서 강해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일반적으로 신령한 은사들, 그리고 특별하게는 보다 놀라운 은사들에 몰두해 있었다. 그들은 영성을 은사의 관점에서 정의 내리고, 보다 놀라운 은사들을 지닌 사람들은 영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기고 다른 모든 사람들을 제쳐 버렸다."42) 이렇게 고린도 교회는 영적 비교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그는 또 고린도 교회가 다른 은사에 비해서 방언의 은사를 더 중요히 여기고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다른 은사에 비해서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은 고린도 교회가 방언을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43) 이런 내용을 통해서 고린도 교회는 9가지 은사들 중에 방언의 은사에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또 중요한 것처럼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Ⅳ장. 성령의 은사에 대한 바른 이해
1. 은사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선물이다.
은사란 단어는 신약성경의 카리스마 ( )를 번역한 것이다. 이는 원래 인간에게 어떠한 공적도 요구하지 않고 총애, 재질, 은사, 사명 등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모든 것을 말한다.44) 이 성령의 은사에 대한 어원적 의미에서 찾아보면, '신령한 것'( )과 '은사들'( ) 이라고 부르고 있다. "카리스마타"( )라는 단어는 은사의 근원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의 "카리스"( )가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45) 이 뜻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구속이나 구원을 의미하고 (롬5:16, 6:23), 또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교회에서 특별한 사역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 특별한 은사를 의미한다. 카리스마는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선물이다.
성령의 은사는 사람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 하에 주시는 것이다. 로마서 12:3에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은사를 주실 때 성령을 통해서 주심을 거듭 강조하였다.
2. 성령의 은사는 성령이 그 뜻대로 주관하신다.
성령은 주권적으로 그의 은사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신다. 성경은 이것을 성령의 주권적 행사라고 말하고 있다. 성령은 바람이 원하는 곳에 가는 것처럼 성령도 자기가 원하는 때에 자기의 뜻대로 활동하시는 분이다. 성령은 자기가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각기 그 나름대로의 은사를 주어 각각 한 지체가 되어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섬겨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이루신다.46)
어떤 성도들은 성령의 은사를 받아 행할 때 자신의 뜻대로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느니라"(고전12:11) 성령의 은사는 믿으며 받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또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의 주관 하에 있으며 전적으로 성령으로 주어진다.47)
그러나 성령은 성령의 은사를 주관하여 행사하실 때 절대로 우리를 기계처럼 사용하지 않는다. 성령은 우리 인간의 경험이나 선천적인 문학 소질, 역사적 상황에 일어났던 모든 사건까지도 이용한다.
3. 성령의 은사는 각각 다르며 비중의 차이도 있다.
성령의 은사가 각각 다른 것은 마치 선물과 같은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받는 그 대상이 개인이나 단체일 수도 있고, 주어지는 은사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는 은사를 받지 아니한 자의 신앙을 과소 평가하거나 교만할 수도 없다. 또는 다른 사람이 받은 것을 내가 받지 못했다고 실망하거나 부러워할 필요도 없다. 성령은 이 성령의 은사에 대한 비중의 차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도 하나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 그가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4:6,11), "한 성령으로 각 다른 은사를 주셨음을 지적하고, 이는 마치 한 몸에 붙은 지혜로서 비교하고 있다." (고전12:27-30) 그러므로 은사들은 그 몸을 위하여 다 필수적인 것이다.
4. 성령의 은사는 반드시 목적이 있으므로 주어진다.
고린도 전서는 은사의 목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48)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뜻인 복음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주되심을 믿게 하고 이 일을 개인이나 교회를 통하여 계속 이루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떤 신령한 은사도 사적인 목적을 위해서 주어진 것은 없다. 은사가 사적인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는 정도가 어느 정도냐에 따라서 받은 능력을 얼마나 잘못 사용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런 원리가 지배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몸은 공동의 유익이나 덕을 세우는 일을 실현할 수 없다.49)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목적은 그의 은사를 그냥 버려 두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은사들의 전시효과를 위한 것도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샌더슨도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것은 사람들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유익하게 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에베소서 4:12에서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성령의 은사는 반드시 그 주신 목적이 있다. 나 자신의 신앙과 교회에 유익은 물론, 나아가서 사회에 크게 공헌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성령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 서로 협력하고 조화를 이루어야만 그 의미가 존속되고 그 목적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2절에서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목적은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서로 봉사해야 한다. 은사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50)
Ⅴ장. 은사와 교회 공동체
교회는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믿는 자들의 모임이다. 새 계약 공동체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따름으로써 행동할 수 있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중심에는 인간의 구체적인 모임이 있다. 또 이런 모임 없이는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내의 모든 것은 비록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만 인간들의 모임에 집중되어 있다.51)
성령은 한 개인에게 임하여 그를 거듭나게 하고 성화의 삶을 살게 하며 때로는 놀라운 이적과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사람들은 그 이상을 보지 못하고 개인주의적이고 심지어는 이기주의적인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52) 이것은 지나지게 성령의 역사의 개인에게만 맞추어 해석할 때 생기는 부정적인 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한 개인에게 임하지만 한 개인을 위해서만 역사하지 않는다.
신비현상이나 기적을 체험해보고 싶은 호기심 때문에 성령을 간구 하거나 신령한 능력으로 타인들 위해 군림하기 위해서 또는 개인적인 성공의 능력을 얻기 위해서 성령을 간구 하는 것은 결국 공동체에 부정적인 악영향을 미친다. 성령의 은사는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서 그 본질적인 가치를 드러낸다
성령은 한 개인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강림하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 그리하여 성령은 교회 안에서 임하시고 교회를 통해서 다른 이들에게 일하시게 한다. 그리고 성령은 교회 안에서 유무 상통하게 하며 공동 생활을 영위하게 한다. 이들은 서로 돕고 사랑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룬다.53)
1.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이다.
'에클레시아'라는 말의 용어는 헬라어 구약 성경에서 히브리어 '카알'(qahal)을 번역한 말로서, 모여 있는 무리를 묘사한다. '에클레이시아'와 '카할'은 모두 '회중'(congregation: '회집 되어'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보다는 실제로 모여 있는 무리를 표현한다. 바울은 이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모임을 묘사하는 데 이 용어를 사용했지만(고전14:19, 28, 34), 누가는 에베소의 관리가 이 말을 사용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교회'라는 말을 사용하실 때 구약적인 의미로 사용했다.54)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소유요, 아끼는 대상이다. 교회는 레위기 26장 12절에서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정의된다. "나는…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 이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서 성경은 여러 가지 비유를 사용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배우자요, 포도나무요, 양떼이다. 신약에서는 교회는 그의 양떼요, 참 포도나무의 가지요, 그의 신부요, 그의 몸이요, 그의 성전이요. 성령이 거하는 전이요. 하나님의 집이다.55)
교회는 온 하나님의 백성이요. 온 에클레시아며, 온 신앙인 공동체다. 모두가 선택된 민족이요, 왕다운 사제단이며, 거룩한 백성이다. 이 하나님 백성의 구성원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화되었으며 성령에 의하여 성화된 백성이다.56)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있는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다. 이들은 교회에서 개인 혼자로서는 소속의미가 없다. 이들은 한 교회라는 공동체 내에서 함께 존재한다.
2. 교회는 코이노니아가 본질이다
신학적으로 교회의 본질을 언급할 때는 이 '성도의 교통'이란 용어를 쓴다. 이것은 초대 교회 교부들이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고백했던 용어이다. 종교 개혁가들이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자 했을 때 그들도 역시 "교회란 성도의 교통이다"라고 고백했다. '성도의 교통'에서 '교통은 '공동체'를 의미하는데 그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란 뜻이다. '교통'이란 말인 'Communion'은 헬라어 'koinonia'에서 나온 것이며 'koinonia'는 '공동체 (community)'의 어원이다. 교회의 본질로서 성도의 교통은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이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수평적으로는 성도들이 서로 하나 되어 교제하는 모임을 말한다.57)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 은사, 재물, 시간, 정성, 사랑 등을 함께 나누고, 삶의 슬픔과 고난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삶이다.58)
3. 교회는 성령의 전이다59)
성령의 역사의 공동체적 차원을 잘 드러내 주면서도 많이 오해되어 온 성경 본문들 중의 하나는 고린도 전서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 하느냐"이다 여기서 성전은 흔히 신자 개인의 몸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교회를 말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문자의 앞뒤 문맥은 교회를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여기서 '너희는 ...이다'는 ' '로 복수 표현인데 반하여 '성전'은 ' '로 (문자적으로는 '보좌') 단수표현이다. 즉, 공동체요, 교회인 '너희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본문은 "너희들은 성전이다."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이와는 다른 맥락에서 개인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물론 있다.
우리 각자에게 성령의 은사들이 주어진 것은 그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서로 섬기라고 하는 것이다. (롬12:3-13, 고전12:4-31), 로마서 12장에 나오는 은사들의 목록은 우리가 다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들을 가지고 그 분수에 맞게 봉사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고린도 전서12장에 나오는 성령의 은사들의 목록(고전12:4-11)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몸과 각 지체들의 유기적 관계와 공동체적 통일성에 대해 강조해서 말해주고 있다. (고전12:12-31). 거기서 바울은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고전12:27). 이 몸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은사들과 직임을 가지고 다양한 성경의 지체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그들이 그 다양성 속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돕고 섬김으로써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어떤 직임이 주어진 것은 그것을 통해 다른 지체를 섬기고 그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
은사는 신비스러움에 그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하고 공동체를 위한 겸손한 섬김에 그 의미가 있다. 한 개인이 받은 영적인 복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타자를 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는 축복의 도구이다. 한 개인의 구원은 그것 자체가 목적인 동시에 또한 하나님 나라와 타자를 위한 도구요. 수단이기도 하다.
성령의 역사는 성령의 자신의 직접적 임재와 더불어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매개체, 즉 공동체 안의 다른 지체들과 그들에게 주어진 직책이나 은사들을 동반한다. 성령의 역사의 이러한 특징은 필연적으로 공동체의 존재를 요구한다.
성령의 은사들이나 직임을 자기의 신령함을 과시하거나 물질적 이득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참된 성령의 역사가 공동체적 섬김을 통해 나타나는 근본적인 사실을 모르거나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성령의 역사가 철저히 공동체적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고린도 후서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지어다."에 나오는 '성령의 교통'이라는 말은 헬라어 ' '이다. 이 말은 공동체, 사귐, 교제, 참여, 나눔 등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령의 교통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가 되게 하고, 또한 우리 서로 서로가 교제하여 하나가 되게 한다.
4.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60)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와의 공간성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개념은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교회의 두 가지 의미로 파악된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한 것은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 중심의 본질성과 그리스도와 성도의 불가분의 연합성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개념은 교회의 유기체적 특성을 잘 나타내 준다. 그리스도의 몸의 개념이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안에서의 연합이다. 성도는 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력 있는 연합을 이룬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로서 서로 유기체적인 관계와 연결을 갖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보이지 않는 신령한 몸이 늘 임재한다고 주장하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인간의 집합으로 생긴 인간의 단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자기 피로 값 주고 산 단체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성육신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몸이 신자들의 구원을 위한 사역으로써의 모임이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자들의 관계성에서 비롯된다. 그 관계성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는 데살로니가 전서 1:1에 나타난다. '그리스도와 함께' 이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리스도인들의 고난과 죽음, 부활과 삶에 관해 말하는 구절 속에서 흔히 언급된다. 로마서 전체를 통해서 바울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몸에 붙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 몸 안에서 신자는 "죄에 대하여 죽었고(6:2)",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았고(6:3), 그와 함께 장사되었고(6:4)"고 하였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그의 몸에 붙어 있게 되었다(고전6:15). '그리스도와 연합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다(고전6:15).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상은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관계보다 오히려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신자들 상호간의 관계를 전반적으로 더욱 강조하고 있다. 고린도 전서 12:27은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고 말함으로써 '너희' 즉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몸'임을 말해 준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2장에서 서로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신자 개개인의 상호 연결성과 신자들의 '상호 의존 관계'의 개념을 말해준다. 그는 "비록 몸의 지체는 많으나 한 몸"임을 강조한다. 모든 지체들은 다양한 은사를 부여받았는데, 은사는 개인의 만족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몸 전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14:4-5. 12). 한 사람이 모든 은사를 다 소유하지 않는다. 어떤 은사가 다른 은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니며(12:14-25) 모두가 동일한 은사를 소유하지 않았다. 즉 각 지체는 다른 지체들을 필요로 하며 또한 각 지체는 다른 지체들의 필요가 된다.
공동체는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의 가시적인 형태이다. 그리스도의 몸이란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체 혹은 공동체적인 삶을 살아감으로써 실제적인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됨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몸은 실존적이며 가시적으로 현존한다. 즉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교회에서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지만 온전히 하나 된 그리스도인들의 몸을 통해서 그 몸이 나타나 보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Ⅵ. 성령의 은사를 통한 교회 사역
1. 은사와 직무
고린도 전서 12장 5절은 성령의 은사를 "직임( )라고 부르고 있다. 이 뜻은 "남을 섬긴다"는 것인데, 집사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예수님은 이 봉사에 대한 말의 뜻을 마태복음 20:28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칼빈은 은사에 대한 해석을 성직, 다시 말하면 목사, 교사, 장로, 집사 등 성직과 관련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은사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공동봉사"를 전제하고 있다.61)
교회 공동체 안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은사들과 직임을 가진 다양한 성격의 지체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그들이 그 다양성 속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돕고 섬김으로써 하나의 공동체, 곧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너희 그리스도의 모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고전12:27) 교회의 공동체에 있는 자들에게 각각 은사와 함께 어떤 직임이 주어질 때 그것을 자랑하거나 개인의 유익을 사용할 수 없다. 단지 그것을 통해서 서로 다른 지체를 섬기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를 말할 때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서로 유기적 교통을 설명한다.62)
교회 공동체에는 많은 지체들 있다. 이 지체들이 서로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간다.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의 은사를 받아 교회라는 공동체를 섬기고 성도를 유익하게 한다. 먼저 교회내 공동체에 있는 각 직무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아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알아본다.
(1) 사도
사도의 어원은 "아포스톨로스"( )이다. "아포스톨로스"란 동사에서 왔는데 "보냄을 받은 자"란 뜻이다. 이 사도에는 세 가지 근본적인 특성이 있다. 첫째, 그들은 예수님과 같은 시대에 예수님과 함께 일하였다는 것이다. 둘째는 사도들이 말씀을 문서화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셋째는 그들에게는 교회를 설립하는 사명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사도의 예수와의 동시성과 동역성을 생각한다면 사도의 은사에 대한 오늘 교회에서 지속성 문제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다.63) 사도적 은사는 사도들이 사라질 때 없어질 하나의 직분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은사의 목록에서 사도적 은사를 제외시키고 있다. 유명한 성공회에 목사이고 성경 교사인 존 스토트 박사는 사도적 은사가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은사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많은 사람들은 사도적 은사는 없어지지 않았다고 믿고 있다.
교회에서 이 사도의 직분은 좁은 의미로는 사라졌다고 볼 수 있으나, 넓은 의미로는 아직 남아 있다. 이 사도적 은사는 오늘날에도 선교의 은사로서 유지되고 있다64)고 본다. 신종선은 사도의 은사에 대해서 바울을 언급하면서 사도의 업무에 대해서 원초적인 은사와 이차적인 은사로 구분한다. 이 이차적인 은사는 12사도와의 업무가 같은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지속적으로 남아 있다고 본다.65)
(2) 예언자
예언자들은 예언의 은사를 받아 행하는 자들을 말한다. 예언자란 원어로 "프로페테스"( )라 하는데 이것은 구약의 예언자란 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구약의 예언자란 "사람 앞에 말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구약학자 올브라이트는 "하나님에 의하여 부름을 받아 하나님을 위하여 말하는 자"라고 정의하였다 라고 하였다.66) 그러나 신약에서는 구약과는 달리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다. 바울은 예언의 은사에 대하여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여 안위하는 것이요"라고 고린도 전서 14:3절에서 정의하였다. 예언의 은사는 고린도 전서 14장 4절에 의하면 분명히 교회의 덕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교회의 덕을 세운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복음의 비밀을 밝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권면하고" 구원의 "안위"를 얻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초대교회에서는 예언의 은사를 미래사를 점쟁이처럼 예언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예언의 은사의 주된 활동은 아니었다. 예언자의 핵심 할동은 복음의 비밀을 밝히는 것이다. 그들은 사도들과 함께 교회를 세우고 말씀을 문서화하는 과업에 동참하였다.67)
(3) 복음전도자
복음전도자는 에베소서 4장 11절에 "혹은 복음전도하는 자"로 명시되어 있다. 그 원어는 "유앙겔리스타스"( )로서 "복음을 전한다"는 동사( )에서 명사화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선포하는데 있어서 뛰어난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이 은사는 말씀의 은사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복음전도의 중요성은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적 지상 명령이란 사실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의 궁극적 소원은 인류의 구원이다. 복음전도는 사람의 재능이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성령의 은사로 되는 것이다.68)
(4) 목사
이 은사는 에베소서 4:11절에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라고 언급되어 있다. 성서를 통하여 목사란 말은 에베소서에만 나온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집사, 장로, 감독 등의 성직은 제도화되어 있었으나 목사는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과, 또 아무리 목사가 많아도 그 직책상 한 교회에 한 두 사람이상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목사란 원어는 "포이메나스"( )란 명사로서 "포이멘"( 보호한다) 이란 동사에서 나온 말이다. 영어의 목사란 Posters(보호한다), Posture(기른다)에서 유래되었다. 목사란 말은 어원상으로 볼 때 양치는 일과 깊은 관계가 있다. 목사가 양떼를 잘 보호하고 좋은 꼴과 물로 잘 길러야 하는 것처럼 목사는 사람들의 영혼을 잘 보호하고 말씀으로 잘 길러야 하는 것이다. 신구약을 통해 성서에도 적어도 82회 이상 목자란 말이 쓰이고 있는데 이 중 일곱 번이 예수에 관하여 쓰여졌다. 성서는 예수를 "양의 목자",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라고 부르고 있다.69)
성령은 교회가 조직화되고 제도를 갖춤에 따라서 그 은사를 제도와 결부시켜 나아갔다. 목사는 성령의 은사 중 조직 교회에서 가장 큰 하나의 은사이다. 그 자격에 있어서나, 하는 일에 있어서 특별히 부름을 받지 않고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성직이다.
(5) 교사
교사의 은사는 독자적인 은사보다 관련 은사, 보충 은사로 보는 성서학자들이 많다. 사도행전 13장 1절은 선지자와 교사를, 에베소서 4장 11절은 목사와 교사를, 디모데 후서 1장 11절은 사도와 교사를 묶어서 말하고 있다. 이런 본문에서 볼 때 교사의 은사는 독자적인 것보다 선지자와 목사와 사도의 직분을 보조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다. 브리지 (D. Bridge)와 파이퍼 (D. Phyper)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신약 성서학자들은 대부분 이 직무를 하나로 간주하고 있다. 그 첫째 이유는 바울이 이 두 직임을 하나로 고정된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둘째로는 이 두 직임 사이를 구분하려고 모든 시도가 실제로 불가능함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70)
교사의 어원은 "디다스칼로스"( )다. 이는 "가르치는 자"란 뜻이다. 이는 성령이 주시는 귀한 말씀의 은사이다. 이들은 초대교회에서 주로 기독교 기본 진리를 가르쳐 주는 일을 담당했다. 이들은 구원의 진리를 사람들 가슴속에 새겨주는 기술자들이다. 이런 임무가 교사들의 주요 임무다. 초대교회에서 이런 교사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