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11-28 09:51
[1]성령의 은사에 대한 바른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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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4,308  

성령의 은사에 대한 바른 이해

 

Ⅰ. 서론

 

1. 연구 동기 및 문제 제기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역사로 교회라는 공동체를 세우시고, 이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한 일을 이루시고 계획하시고, 그 일을 성취하신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 공동체에 속한 모든 자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셔서 하나님의 선한 일을 성취해 나가신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의 은사를 받은 교회 공동체의 일원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의 목적을 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그 은사를 개인의 유익과 목적을 달성하는데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교회 안에 있는 공동체 일원간에 갈등과 분쟁을 가져오게 된다. 또한 성령의 은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자신은 거룩하고 대단한 영적 소유자인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하찮게 여기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이런 자들로 교회 공동체에 속한 자들이 영적 비교와 경쟁에 사로잡혀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고, 자신이 받은 성령의 은사는 깨닫지 못하고, 받은 그 은사를 사장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공동체에 속한 자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신 목적과 이유가 다 있다. 그것을 발견해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고 만드신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을 섬기고 봉사는 일을 해야 한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전서를 통해서 성령의 은사는 여러 가지인데, 이 성령의 은사들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 각각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교회 공동체의 덕과 일원들의 유익을 위해서 서로 섬기고 봉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에서 성령의 은사를 주신 목적은 교회 공동체의 덕과 유익을 위한 것이다' 라고 말한다.

 

2. 연구 방법과 범위

 

필자는 교회에서의 성령은사에 대한 바른 이해 연구를 주제로 삼았다. 이 논문에서는 교회 공동체에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가 잘못된 성령 은사의 이해로 인해 생기는 것과 그것으로 교회 공동체에 갈등을 고린도 교회에서 살펴보고 난 후, 성령의 은사에 대한 바른 이해와 그 은사가 교회 공동체에서 어떤 기능들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은사를 어떻게 계발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제 1 장 서론에서는 논문을 쓰게 된 동기와 문제 제기와 논문 연구 방법과 범위를 다루고자 한다.

제 2 장에서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잘 못된 이해로 인해 교회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성령의 은사에 대한 열등의식, 분파성, 귀족성, 거룩성에 대한 것을 다루고자 한다.

제 3 장에서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인해서 교회 공동체의 갈등과 분쟁이 생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예를 고린도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다루고자 한다.

제 4 장에서는 어떤 것이 성령의 은사에 대한 바른 이해인지를 다룬다. 이 장에서는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교회 공동체를 위해 교회 공동체 일원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라는 것을 다루고자 한다.

제 5 장에서는 성령의 은사와 교회 공동체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아본다. 여기서는 은사와 직임, 공동체성, 교회의 성장, 선교, 섬김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다루고자 한다.

제 6 장에서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자가 성령의 은사를 어떻게 발견하고 계발해야 하는지를 다루고자 한다.

제 7 장 마지막 결론에서는 위에서 살펴본 교회에서의 성령의 은사에 대한 이해를 정리해 보면서 논의에서 얻어진 결과를 평가하고, 이러한 내용들이 오늘의 교회 공동체에 안에 있는 문제점들을 어떻게 해결하고 은사 받은 자가 교회 공동체에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Ⅱ장. 교회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

 

1. 우월성

 

성령의 은사는 한 개인의 노력이나 의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혜다.1)라 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를 소유한 모든 자들은 자부심과 우월감을 가질 수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다양한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기능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진다. 방언의 은사나, 병 고치는 은사나, 섬기는 은사나, 기적의 은사 등과 같은 모든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위해 기능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는 서로 비교되거나, 어느 하나의 특정 은사를 소유한 자가 다른 어떤 은사를 소유한 자보다 더 나은 영적 소유자다라고 말할 수 없다.

성령의 은사는 결코 우월성을 나타낼 수 없고 용납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카리스마는 다양성과 일치성을 다 함께 지니고 있기 때이다. 또 카리스마는 하나님 앞에 "작은 일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우월감보다는 겸손이, 열등감보다는 충성이 요청된다.2)

모든 은사의 수여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는 선물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는 은사로 말미암아 누구도 자랑할 수 없고, 누구도 열등의식에 고통받아서도 안 된다.3)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은사를 이용하여 자기를 과시하거나, 물질적인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있다. 성령의 은사는 신비스러움에 그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하고 공동체를 위한 겸손한 섬김에 그 의미가 있다. 타자를 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축복의 도구다.4)

바울은 고린도 전서 12:21절 이하에서 만일 눈이 손에 대한 우월감에서, 머리가 발에 대한 우월감에서 상대방을 무용지물로 낙인을 찍는다면 이것도 큰 오산이라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부족한 지체일수록 존귀하게 여겨 몸의 조화를 꾀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월감은 몸의 조화를 깨뜨리는 무서운 유혹이다. 한 몸에는 많은 지체가 각기 자기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나 계급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차별 대우도 용납될 수 없다. 이것이 성령의 은사의 소유자가 지녀야 할 평등의 의무감의 의식인 것이다.5)

 

2. 열등감

 

열등감도 우월감처럼 성령의 은사에 있어서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카리스마는 다양성을 다 함께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열등감보다는 충성이 요청된다.6) 이 열등감도 은사에 대한 비교의식으로 인한 부정적 생각이다. 자기의 영적 은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다른 사람이 지닌 은사에만 지나게 관심을 가져 자기의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열등감에 빠질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12장 12절 이하에서, 이 두 점에 대하여 재치 있게 설명하고 있다. 만일 발이 손에 대한 열등감에서, 귀가 눈에 대한 열등감에서 자기를 몸에서 절단해 내려고 한다면 이는 곧 오판이 되고 만다. 왜냐 하면 다 같이 죽고 말기 때문이다. 몸은 하나이다. 결코 두 개나 세 개로 만들 수 없다. 모든 지체는 자기 위치에 대하여 보람과 만족을 느껴야 한다. 여기에 은사의 소유자가 지녀야 할 만족의 의무감이 있는 것이다.7)

 

3. 분파성

 

바울은 고린도 전서 1장 12, 13절에서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라고 경고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12장 13절과 27절에서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한 부분이다."라고 말하면서 분화작용을 중지하라고 강력하게 권하였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는 독선에서 벗어나 분파작용의 과오를 범할 수 있다고 한다. 카리스마에 대한 그릇된 이해와 사용은 분파작용을 일으킨다. 고린도 교인들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독선으로 흘렀기 때문에 교회를 사분오열 찢어 놓고 말았던 것이다. 모름지기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말씀 아래에 서서 겸손히 순종해야 한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3절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권면하였다.8)

 

4. 귀족성

 

성령의 은사는 과대 망상의 늪에 빠지지 않는다. 성령의 은사의 가장 큰 위험은 과대망상이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의 카리스마를 절대시하는 유혹에 빠진다.9)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자기가 가장 신령한 사람으로 생각하여 교회공동체에서 귀족에 속한 계층의 부류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 신령한 은사를 소유한 자가 영적으로 상류계급에 속하여 공동체의 일원을 자기보다 하류계층으로 취급하거나,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하수인처럼 부리려는 무의식적 행동을 하는 경향이 있다. 성령의 은사는 그 소유한 자가 공동체와 일원을 섬김으로 그 가치를 드러낼 수 있다.

 

5. 거룩성

 

많은 성도들은 병 고치는 은사나 능력 행사하는 은사와 같이 신령한 은사를 소유한 자가 더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신자의 거룩성이나 경건함은 은사의 소유에 있지 않고 공동체를 섬기고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과부와 고아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10)

교회에서 한 개인이 받은 놀라운 성령의 은사는 귀한 것이지만 그와 동일한 은사나 혹은 어느 특정한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을 자기보다 신령한 은사라고 생각하거나 스스로 자기를 높이는 것은 본래 은사들을 나누어주시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은사는 자기의 신령함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겸손히 섬기기 위한 것이다.11)

 

 

 

Ⅲ장. 고린도 교회의 성령 은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인한 분쟁

 

1. 고린도 교회의 현황

 

고린도 교회의 설립은 사도행전(18:1-18)에 기록되어 있는데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덴을 거쳐서 다녔던 제 2차 전도여행길에서 그는 복음을 전파하면서 고린도에 도착했다.12)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와서 얼마의 시일이 경과한 후인지 모르나 유대인 부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남으로써 새로운 선교의 장이 열렸다. 고린도 선교는 처음부터 바울과 이 부부를 중심으로 가정 집회로 시작되었다.13) 이렇게 하여 고린도 교회는 점차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줄리어스 씨이저에 의해서 이주한 식민 이민단들의 후손, 고린도에 매혹되어 몰려든 헬라인들, 유대인들, 그리고 로마 제국의 모든 지역으로부터 이방인들이 고린도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의 대부분이 이방인이었고, 일부 부유층과 지식층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서민층 부류였으며,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 대부분은 유대인이 아닌 그리스도인이다.14)

고린도 교회에서 문제가 된 것은 신앙에 의한 윤리적 자유주의였다. 이것이 크게 끼친 것은 그리스도인이 이방 사회와 접촉하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열광주의적 황홀경, 육체성의 경멸, 성욕과 식욕과 같은 것이 거기에 속하고, 방언, 계시, 병 고치는 기적 등도 연관된다.15)

고린도 교인들은 본래 이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로 포세이돈 신전, 아폴로 신전, 아프로다이프 신전에 드나들면서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었다. 이 같은 영향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마술적이면서 하늘에 있는 신들과 영들이 사용하는 신비적이고 독특한 음성을 방언과 혼돈하여 사용했다.16) 이렇게 하여 고린도 교회는 은사에 의해 내부적 갈등과 시험에 빠져 있었다.17) 고린도 교회는 자기가 받은 은사로 인해서 자기 교만에 빠져 있었고 자기 확신에 차 있었다. 이들은 다른 사람보다 신앙적으로 높다고 생각했고, 이로 인해 고린도 교회는 은사들로 인해 내적인 분열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18)

 

2.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은사의 종류

 

이런 상황에 있는 고린도 교회에는 여러 은사 있었는데, 특히 방언과 예언의 은사가 성하였다(고린도 12:1-14:30).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서에서 방언과 예언의 은사들에 대해서 바른 가르침을 베풀어 외적으로 현란한 표를 내는 방언만을 추구하지 말며 자랑하지 말라. 사랑으로 모든 은사들을 중히 여기고 서로 유익을 보도록 절제하고 조화하며 평화하도록 하였다.19) 여기서는 고전12:8-10에 나타난 은사를 9가지로 구분해서 알아본다. 특히 예언과 방언과의 은사를 좀더 자세하게 살펴본다.

 

(1) 지혜의 말씀

 

이 은사는 고전 1:17에 나오는 헬라인들이 제일로 간주하는 지혜와는 판이하게 다르게 성령이 선물로 주시는 은사다. 즉 지혜의 말씀은 선천적인 지혜가 아니라 특수한 상황에서 어떤 지체에게 주어지는 지혜의 말이다. 지혜는 많은 인간의 경험에서 온다. 그러나 성령의 나타남으로 오는 지혜의 은사를 받으면 진퇴양난의 어려운 상황을 은혜롭게 극복한다.

고린도 전서의 서두에서부터 바울은 자신을 아볼로나 게바와 같은 사도들이나 선생들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대변자로,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 즉 감추었던 지혜"에 대해 가르쳤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의미했다. 이것을 다른 세대에도 전해주기 위해서 말로 변경했다.20)

 

(2) 지식의 말씀

 

언더우드의(Underwood)저서에서 도날드 기(Donald Gee)씨는 지식의 말씀이 기독교의 설교와 가르침에 각각 관련되고 주장한다.21) 그리고 이 지식의 말씀의 기능을 성령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특별한 기회에 신적인 지식이나 사실을 알게 하는 것으로 보았다.22) 와그너는 이 지식의 은사를 정의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성장과 번영에 관한 정보와 사상을 발견하고 쌓고 분석하고 명료하게 하는 능력이라고 한다.23) 이 은사를 가진 사람은 사람들과 더불어서 보다는 학문과 더불어 더 많은 즐거움을 가진다. 이 은사를 가진 사람에게는 잡담이나 험담이 하나의 유혹이 될 수 없다. 실상은 그런 잡담이나 험담은 이 은사를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는 몹시 싫증나는 일이다.24)

 

(3) 믿 음

 

믿음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놀라운 확신을 가지고 미래의 하나님의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분간한다. 믿음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일반적으로 미래의 일에 보다 더 큰 관심을 가진다. 이 믿음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목표에 집중하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서 환경이나 고난이나 장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25) 그러나 이 믿음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흔히 비평으로 말미암아 크게 분격하는 일이 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자기들을 비평한다 할지라도 그 이유를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왜냐 하면 이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고 있다고 하는 철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기들에 대한 비평을 하나님에 대한 비평으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흔히 자기들과 동행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친구들을 묵인하지 못하게 된다.26)

 

(4) 신 유

 

신유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은사로서, 자연적인 인간의 방법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건강을 회복케 하시는 중개자로 봉사하는 역량이다.27) 이 은사는 고린도 전서 12장 27절의 말씀에서 "신유(healings)의 은사들(gifts)"라는 복수형의 말로 되어 있다. 이 복수형의 말은 각종 질병들에 대한 많은 종류의 은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28) 신유의 은사는 어떤 사람에게 병을 물리치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신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통로에 불과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고치시기를 원하실 때에 그 사람을 통해서 역사를 나타내시는 것이다. 신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을 통해서 어떤 병을 고치시기로 결정하지 않으시면 병을 고칠 수 없다.29) 이 신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하나님을 조종할 수 없다. 신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통로에 불과하다.

이 은사는 가장 남용하고, 가장 많이 요구되는 은사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병 고치는 은사를 다른 어떤 은사들보다도 더 많이 원하는 까닭은 이 은사가 그토록 구경거리가 될만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은사는 선동적이고 독선적인 치료가 될 위험성도 있다.30)

 

(5) 능 력

 

이 은사는 병 고치는 것 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은사를 포함한다. 이 은사는 이적을 요구하는 온갖 상황에 두루 적용된다. 이 능력의 은사는 대체로 어떤 위험한 상황이 있고 나서 그 다음에 이적이 일어나며 그 결과 그 위험했던 상황에서 벗어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위험이 보통 몸과 생명에 대해서 물리적이고 위험을 수반한다.31)

 

(6) 예 언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하나님의 즉각적인 메시지를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성별된 말로 전달하는 역량이다.

예언을 가리키는 희랍어의 의미는 그 기본적인 의미에 있어서 "말을 토하여 내다" 혹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말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구체적인 상황 속에 있는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거기에 대한 개인적인 영감을 받는다.

그러나 이 예언의 은사를 가진 자들도 과오를 저지를 수 있다. 그러므로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몸의 다른 지체들에 의한 시정(是正)을 받을 수도 있다는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7) 영분별

 

"영분별하는 일"은 또 하나의 특유한 은사이다. 이것은 사람을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영들을 분별하는 것이다. 이 은사는 교회가 거짓 예언자들에게 속아넘어가는 것에 대비하여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려고 주시는 것이다.32)

영분별의 은사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영의 출처를 분별하는 것이다. 영을 분별하는 은사가 임하면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지 않아도 그 사람을 보기만 해도 그 영의 출처를 아는 것이다.33)

 

(8) 방언

 

방언은 정상적인 발성기관이 사용되기는 하되 의식은 전혀 활동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에 이해 영감을 받은 언어이다. 피터 와그너는 이 방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신들이 배우지 않은 언어로 하나님께 말하는 역량이고, 하나님의 즉각적인 하나님의 즉각적인 메시지를 받아서, 자신들이 배우지 않은 언어를 하나님의 성별된 말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역량이다".34)

고린도 교회에 나타난 방언은 그것이 외적으로 잘 드러나므로 자기 과시를 위해 방언을 사용했던 것 같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방언을 했고, 서로 방언을 하려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고린도 교회의 예배는 아수라장이 되어서 예배를 제대로 드릴 수가 없었다.35)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에 대해 통역 없이는 방언이 활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은사가 공동체에 유익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방언에 대해서 고전14:5에서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라고 하면서 방언의 은사를 받기를 원하고 있다.

B.E 언더우드는 "바울은 통역이 없이 예언자적 직무를 침해하는 방언은 그 어느 것도 금했다. 비록 영적인 절차에는 맞는다 할지라도 설교 중간에 어떤 사람이 해석 없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한다.36)라고 말한다.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의 활용은 공동체의 유익을 가져올 때만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9) 방언 통역

 

이 방언 통역의 은사는 방언이 공동체에 활용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보조적 역할을 하는 은사다. 방언은 통역의 은사가 있을 때에 공동체의 유익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방언통역의 은사는 반드시 방언의 은사와 결합된 은사로 나타난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방언보다는 방언통역이 더 나은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방언통역을 받은 사람은 많지가 않았다.37) 고린도 교회에서는 방언통역이 더욱 필요로 했다. 특히 방언통역 없이는 방언을 할 수 없고, 권면과 예언의 말씀을 들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이 방언 통역은 방언의 가치를 드러내 준다.

피터 와그너는 이 방언통역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한다. "방언 통역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의 어떤 지체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의 메시지를 일상어로 알려주는 역량이다."38) 아놀드 비틀링거는 방언의 통역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방언의 통역의 은사는 예배를 드릴 때 방언기도를 할 수 있게 하고, 또한 그 기도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보충적인 은사다. 여기서 방언을 통역한다고 하는 것은 방언기도를 정확히 해석한다거나 거기에 주석을 붙인다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 내용을 모국어로 제시해 준다는 것이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통역하는 사람은 그 해석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다. 통역의 은사가 실제적인 의미를 갖게 다는 것은 교회 내에서이다. 방언의 기도는 통역의 은사를 통해서만 교회 내에서 의미를 갖게 된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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