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6:14부터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세부 항목들은 열거하고 있다. 이를 열거하는 방식은 대체로 각각의 장구를 착용하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분사형 동사들이 주동사인 ‘서라’에 연결되는 방식이다. 이를테면, ‘진리의 허리띠를 두르고서, 의의 흉배를 입고서, 복음의 예비 상태로 신을 신고서, 믿음의 방패를 취하고서, (그렇게) 서라’는 방식이다. 나머지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은 함께 ‘취하라’는 별도의 명령형 동사에 연결되고 있다.
바울이 가장 먼저 언급하는 것은 ‘진리의 허리띠’이다. 이 허리띠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형태의 작고 편리한 벨트가 아니다. 로마 군인들의 경우 일반적으로 그들이 허리에 차는 거들은 탄탄히 허리를 받쳐주면서 아랫배를 보호해주는 장구이다. 집중된 힘을 발휘해야 하는 군인들이나 역사(力士)들에게 있어서 허리를 받쳐주는 큼직한 벨트는 가장 필수적인 장비일 것이다. 허리가 받쳐주지 못할 때 우리는 집중된 힘을 쏟을 수 없다. 진리의 역할도 그와 같다. 진리가 우리의 허리를 받쳐줄 때 우리는 안정된 자세를 얻고 또 필요한 힘을 쓸 수 있게 된다. 진리가 없이는 우리의 지성도 우리의 의지도 맥 풀린 것이 되고 만다. 진리의 허리띠로 든든히 뒷받침을 받는 사람만이 뜨거운 열정과 요동치 않는 의지로 오류와 거짓을 무기 삼는 마귀의 궤계를 잘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바울은 ‘의의 흉배’를 언급한다.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로마 군인들의 흉배(thorax)는 금속으로 된 가슴판을 말한다. 물론 등도 감싸게 되어 있다. 앞서 번연이 제시하고 있는 이야기는 우리가 적에게 등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전달하는 데는 좋은 예가 되지만, 흉배를 실제로 묘사하는 데는 정확한 예는 아니다. 바울이 ‘의의 흉배’라고 하였을 때 여기에서 말하는 의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다시 말해서 성도들에게 전가된 의(義)인지 아니면 성도들이 스스로 행하는 의(義)인지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거널의 경우는 여기에 언급된 의가 ‘전가된’(imputed) 의가 아니라 ‘분급된’(imparted) 의라고 본다. 성도들은 음악가의 손에 들린 악기 같은 피동적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의 손에 이끌린 살아 있는 자녀와 같은 존재로서, 그 의를 이루는 데 있어서 성령과 동역하는 적극적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적극적인 의의 열매들이 성도들에게 나타날 때 마귀는 그 공격할 무기를 쓸 수 없게 된다.
세 번째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군사가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은 상태임을 말하고 있다. 이것 역시 우리가 흔들림 없이 서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조건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신발을 명사형으로 표현하지 않고 신이 신겨진 상태를 동사형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 발이 갖추고 있는 무장의 상태는 곧 평안의 복음으로 ‘예비된 상태’(en hetoimasia)와 같음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에서 사52:7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서 강조되고 있는 평화의 기쁜 소식의 ‘선포’보다는 이를 위한 ‘예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바울이 전신갑주 무장의 목적을 ‘서기 위함’으로 말하는 것과 연관된다. 온 세상을 향한 평화의 복음은 우리가 세상을 향해 서서 말할 수 있게 하는 가장 기초적인 준비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준비를 하고 세상의 거친 전장을 자유롭게 누빌 수 있다.
다음으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믿음의 방패’이다. 바울이 사용하는 방패(thyreos)라는 말은 문을 뜻하는 thyra에서 유래한 말이다. 로마 군인들이 쓰는 방패 중에는 작고 둥근 방패가 있지만, 바울은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문짝같이 생긴 큰 방패(라틴어로 scutum)를 가리킨다. 이는 여러 겹의 가죽을 대어서 만든 것으로, 전투 전에 물에 흠뻑 적셔두면 역청 기름을 흠뻑 먹인 불화살이 거기에 꽂히더라도 금방 불이 꺼지고 만다. 성도들을 공격하는 악한 자는 여러 가지 불화살들을 사용한다. 의심, 두려움, 죄책감, 자조감, 분노, 낙심, 염려 등의 불화살들을 날린다. 이런 것들에 맞아서 한번 마음에 불이 붙기 시작하면 우리 삶 전체에 걷잡을 수 없이 불길이 번져간다. 이런 불화살들이 쉼 없이 날아오는 현실을 우리가 바꿀 수 없다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그 불길이 번지지 아니하도록 조기에 불을 끄는 일이다. 바로 이런 역할을 하는 최상의 방어용 무기가 믿음이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만이 염려에 대한 최상의 치료제이다(Faith is the best cure for care).
다음으로 바울은 ‘구원의 투구’를 말한다. 살전5:8에서는 ‘구원의 소망의 투구’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투구는 일차적으로 머리를 보호하는 방어용 목적을 가진다. 그뿐만 아니라 투구는 사 59:17의 배경에서 볼 때 승리의 상징 역할을 하기도 한다. 성도들이 그 원수 앞에서 자랑스럽게 구원의 투구를 쓰고 나설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대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원수를 이기셨기 때문이다. 이 투구는 우리가 어떤 분의 구원의 능력 안에 속하는 자들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표시의 역할을 한다.
마지막으로 바울이 언급하는 무기는 ‘성령의 검’이다. 로마 군인들이 흔히 사용했던 짧고 곧은 칼(machaira)을 말하는데, 이 칼은 매우 다루기 쉽고 효율성을 가진 칼이었다. 공격용으로만 쓰인 것은 아니고 훌륭한 방어용 역할도 한다. 바울은 이 칼을 생각하면서 ‘성령의 칼’을 말하고 있다. ‘성령의’(tou pneumatos)라는 소유격은 기원의 소유격으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성령을 수단화하여 성령이 곧 칼이라거나 그 성령을 칼처럼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성령의 검을 말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성령이 주체와 기원이 되어 우리에게 주어진 칼, 그것은 곧 성령이 동일한 기원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히4:12). 이 말씀의 칼로 무장할 때 우리는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할 수 있게 된다(고후10:5). 말씀은 가장 강력한 공격용 무기일 뿐만 아니라 또한 가장 확실한 방어용 무기이기도 하다. 말씀으로 잘 무장한 사람은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엡4:14)하는 일을 피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말씀의 칼은 ‘사람의 궤술’(methodeia) 배후에서 작용하는 ‘마귀의 궤계’(methodeia tou diabolou)를 능히 물리칠 수 있도록 마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3. 기도의 중요성
바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다 말한 후에 이어서 기도를 언급하고 있다. 물론 기도 자체를 전신갑주의 하나로 다루지는 않는다. 그러나 전신갑주가 온전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기도이다. 전신갑주를 취하는 목적이 서기 위함인데, 우리가 서기 위해서는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이 놀라운 아이러니이다. 우리가 영적 전투에 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한 채 굳건히 설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기도의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길이다.
바울은 우리가 기도할 때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며 또한 “무시로 성령 안에서”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리고 그 기도의 제목에는 여러 성도를 위한 것과 바울 자신을 위한 것이 포함된다. 이 부분에서 바울은 우리의 기도와 나아가서 우리의 영적 투쟁이 공동체적 성격을 가진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는 홀로 서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서서 싸운다. 우리 자신이 서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함께 서는 것이 중요하다. 빌 1:27에서도 비슷한 용어들을 통해 우리가 복음의 대적자들과 맞서서 서야 할 것과 또한 성도들이 함께 어깨를 겨루고 서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마치 럭비 선수들이 스크럼을 짜듯이 한쪽이 쏠리지 않도록 함께 힘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바울은 자신을 위해서는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기도해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이는 바울이 실제로 하는 일이기도 하다. 또한, 이 일 때문에 그가 현재도 “쇠사슬에 매인 사신”의 처지가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 처지가 그의 사역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지는 못한다. 그 자신이 끊임없이 말씀 안에 거하느냐 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그러할 때 그는 담대함과 자유함을 가지고(en parresia) 복음을 말할 수 있게 된다. 복음 전도에 있어서 바울의 말의 담대함은 자신 속에 있지 않다. 그 자신의 수사학적 기술이나 설득의 능력 등이 자신감의 원천이 되지 못한다. 오직 그에게 맡기어진바 복음의 비밀과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자신감과 담대함의 원천이다. 이 일을 행함이 바울 자신의 유익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공동의 관심임을 알기에 그는 자기 일을 성도들의 기도 제목으로 내어놓고 있다.
V. 오늘날의 상황과의 접맥
이상에서 우리는 영적 전쟁과 관련된 바울의 생생한 가르침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영적 전쟁의 현실이 과거의 것으로 그치지 않음을 잘 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우리 앞에 놓인 삶의 상황들 가운데서도 우리가 수행해 가야 할 영적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의 주변에서 펼쳐지는 많은 현상 배후에서 우리는 혈과 육의 차원을 뛰어넘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의 움직임을 감지한다. 현상들의 배후에서, 사람들의 배후에서, 심지어는 베드로와 같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는 이 어두움의 세력들에 맞서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물리치는 일이 오늘 우리 자신들의 과업이 되고 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도 여전히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필요하다.
우리의 영적 전쟁은 결코 애매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각종 물리적 전쟁의 성격이 더 애매하다. 한쪽에서는 포탄이 터지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또 다른 쪽에서는 이 전쟁의 성격이 무엇이냐를 두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 앞에 놓인 영적 전쟁의 경우는 그 성격이 분명하다. 우리가 왜 싸워야 하며, 무엇을 위해서 누구와 맞서 싸워야 하는지가 분명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들과 맞서 싸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 머리를 깨트리신 세력과 맞서 싸운다. 이는 질 수 없는 싸움이며 또한 타협이 있을 수 없는 싸움이다. 다만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이 싸움의 현실을 자각하고 깨어서 싸움에 임하는 자세이다.
특히 이 시대 가운데서 마귀의 세력이 그 활약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 가운데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잘 목격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여러 가지 것들에 중독되는 현실을 발견한다. 약물이나 알코올에 중독되기도 하고, 폭력이나 섹스에 중독되기도 하며, 인터넷 게임이나 사행성 오락 등에 중독되기도 한다. 자신을 방어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사람들에게 마귀는 사람이 가장 쉽게 유혹될 수 있는 것들을 통해 다가가고, 사람들이 그 속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동안 그들 위에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려 드는 것이다. 그 지배하에 놓인 사람들을 통해 인간성 파괴의 끔찍한 일들이 심심치 않게 벌어지기도 한다. 변심한 애인의 남자 친구를 닮았다는 이유 하나로 아무 관계도 없는 한 남자를 납치해서 살해하고 시체를 토막 내는 마귀적 행위가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다. 도박에 빠져 빚을 지고 이를 꾸짖는 아내를 목 졸라 죽이고 시체를 유기한 사람의 모습도 본다.
그러나 마귀는 그들만을 노리지 않는다. 우리가 사용하는 공공의 도구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많은 청소년이 오늘날의 사회 속에서 각종 매스 미디어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자아상의 혼란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다. 청소년기의 자녀들을 두고 있는 그리스도인 부모들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TV 광고에서 찰랑거리는 곧은 머리가 아름다운 머리의 표상처럼 항상 선전되다 보니, 곱슬머리를 가진 중학생 딸이 한두 번도 아니고 빈번히 비싼 돈 들여서 스트레이트 파마를 해야겠다고 우기는 것을 두고 고민하는 부모들도 있다. 왜 찰랑거리는 곧은 머리만이 아름다운 머리인가? 왜 곱슬머리의 아름다움은 보여주지 않는가? 보다 근본적으로 왜 곱슬머리인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줄 모르는가? 결국, 문제는 자아관의 충돌로 귀결된다. 오늘 현대인들이 너무 쉽게 대중의 시각, 대중의 기준에 따라 자신을 바라보고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너무 쉽게 빠져들고 요동치는 모습을 노출하고 있다.
사람들의 은밀한 욕망을 부추기고 추구하게 만드는 사탄의 계략을 직시해야 한다. 에베소서가 보여주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이루어지는 견고한 새 사람의 자아상을 확립해가는 것이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시급한 과제이다. 이것이 영적 싸움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 개개인뿐만 아니라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가 영적 싸움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교회는 성도들이 임해야 할 전투의 자리에 그들을 올바로 투입하지 못하고 있다. 또는 영적 무장해제 속에 편안히 앉아 있게 만드는 설교가 팽배하고 있다. 그러니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 생활의 현장 속에서 빈번히 실패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다시 위로를 찾아 교회에 모이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말씀에 근거해서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이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제대로 무장되어서 패배하고 물러설 수 없는 주의 군사로 세상 속에 나아가도록 만드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위로를 찾아서가 아니라 영적 전투를 위해 재충전하며, 이 싸움의 공동체성을 확인하고, 승리를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또 그를 힘입어 다시 나아가 싸우겠노라는 재다짐을 위해 모이고 예배하고 설교하며 기도하는 교회가 될 때 교회는 이 세상이 진정으로 갈망하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새 사회를 힘있게 제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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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참고, Andrew T. Lincoln, Ephesians, WBC 42 (Dallas: Word Books, 1990), 438-439.
2. 에베소서의 이 부분에 대해 1,000페이지가 넘는 대작을 쓴 청교도 목회자 윌리엄 거널(William Gurnall)은 성도의 영적 싸움이 은혜의 실행이라는 이 출발점을 잘 견지하고 있다. 보라, W. Gurnall, The Christian in Complete Armour (Edinburgh: Banner of Truth, 1964, two-volume edition), I, 63-65.
3.거널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The first cry of the new creature gives all the legions of hell an alarm.” Gurnall, The Christian in Complete Armour, I, 72.
4. 물론 이것은 이원론적 우주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악의 세력들이 활동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허용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다.
5. 보다 자세한 유대문헌들에 대한 소개는 참고, P. O'Brien, The Letter to the Ephesians (Grand Rapids: Eerdmans, 1999), 160.
6. 참고, Joachim Gnilka, Der Epheserbrief, Herders Theologischer Kommentar zum NT (Freiburg: Herder, 1982), 306; O'Brien, Ephesians, 142-43.
7. Christoph Blumhardt, Action in Waiting (Farmington: Plough Publishing House, 1998), xix. 이 책의 후기(Afterword)에서 칼 바르트는 “우리의 실천적 행위는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블룸하르트의 원칙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8. 참고, O'Brien, Ephesians, 141.
9. Johannes P. Louw and Eugene A. Nid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Based on Semantic Domain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88), I:680-83.
10. Harold W. Hoehner, Ephesians: An Exegetical Commentary (Grand Rapids: Baker, 2002), 269.
11. Markus Barth, Ephesians 1-3 (Anchor Bible; New York: Doubleday, 1974), I:152, n. 39.
12. Hoehner, 271.
13. Barth가 이것을 언급하고 있다. Barth, Ephesians 1-3, I:152.
14. 이렇게 보는 학자들로 Bengel, Hodge를 포함하여 Lincoln, Best, Schnackenburg, O'Brien, Fee, Hoehner 등의 학자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5. 이것이 성도를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기업을 말하는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그의 기업으로 삼으시는 것을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다. 엡1:14은 ‘우리의 기업’(tês klêronomias hêmôn)을 언급하지만 18절에서는 ‘그의 기업’(tês klêronomias autou)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것은 서로 상호보완적 짝을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에 속한 것이 우리의 기업이 되지만, 우리 성도들이 또한 하나님의 값진 기업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16. Markus Barth, Ephesians, Anchor Bible, 2 vols (Garden City: Doubleday, 1974), II, p.793.
17. Barth, Ephesians, II, p.765.
18. John Bunyan, The Pilgrim's Progress (Harmondsworth: Penguin Books, 1965), p.90.
19. Gurnall, The Christian in Complete Armour, I, p.408.
20. 이에 대한 찬반 논란을 위해서는 보라, Barth, Ephesians, II, pp.785-786.
최승락 (국제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