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2-07 20:13
기도에 대한 통념을 완전히 바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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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웹섬김이
조회 : 2,619  

(창18:16-25) 기도에 대한 통념을 완전히 바꾸어라./ 박진호 목사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18:20-25)

 

기도에 관한 성경최초의 가르침

 

아브라함의 기도를 살펴보고 있는 중인데 오늘의 본문은 지금껏 다섯 번 살펴본 말씀들과는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그동안에는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진술이 있거나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는 본문들을 알아봤습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이 무슨 내용을 어떻게 기도했는지 구체적인 설명이 없었고 기도했다는 사실조차 언급하지 않았어도 문맥상에 드러난 행간의 의미를 통해 기도를 추적해본 것입니다.

 

반면에 본문에서 시작해 18장 마지막 33절까지는 아브라함이 무엇에 관해서 어떻게 기도했는지 구체적인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기도하게 된 계기와 그 내용과 결말까지 자세히 설명된 것으로는 성경 최초의 기록입니다. 그래서 기도에 대해서 가장 정확히 배울 수 있는 교본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웠으면 당연히 기도의 조상도 되므로 신자라면 반드시 이런 기도를 해야만 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이는 아브라함이 여호와와 나눈 대화였지 그가 제사를 드리는 중에 혹은 따로 시간을 내어서 기도드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할 계획을 그에게 통보하자 아브라함이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할 수 없지 않느냐고 여러 차례 따지듯이 간청했고 하나님은 그의 항의 아닌 항의를 수용해주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이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고 하나님도 곧바로 대답해주셨기에 기도로서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그래서 기도에 대해 이만큼 풍성한 내용을 가르치는 말씀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문제는 지금껏 너무나 피상적으로 가르쳐져 왔지 정작 알아야 할 핵심 내용은 거의 건드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무슨 문제든 아브라함처럼 끝까지 끈질기게 기도하면 응답해주신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그쳤습니다.

 

무엇보다 끈질긴 기도로 응답받았다는 것도 사실상 틀린 해석입니다. 아브라함이 시종일관 간구한 제목이 무엇입니까? 가장먼저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라고 하면서 의인 50명이라도 있으면 용서해달라고 했습니다.(24절) 하나님은 곧바로 그렇게 해주겠다고 대답해 주셨는데 아브라함은 소돔에 그만한 의인이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점점 그 숫자를 줄여서 마지막에는 열 명이라도 있으면 심판을 중지해달라고 했습니다.(32절) 그런데 소돔은 결국 멸망당했으니까 그의 간구는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럼 소돔과 고모라 두 성읍을 합쳐도 의인이 열 명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열 명은 간단히 말해 한 가구에 해당되는데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가정이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의인의 숫자를 마지막에 열 명까지 낮춘 것은 분명히 소돔에 살고 있는 롯과 그 가족을 구출해야겠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럼 롯의 가정도 의인의 가정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그의 아내는 그 위급한 순간에도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지 않습니까?

 

롯은 과연 의인이었는가?

 

롯과 두 딸이 살았다고 해서 아브라함의 끈질긴 기도가 어쨌든 응답이 되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열 명에서 더 이상 숫자를 낮추지 않았습니다. 그럼 아브라함은 롯의 가정만큼은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할 정도의 의인의 가정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그것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이 기도가 아브라함이 소돔에 있는 의인의 숫자를 알아맞히는 게임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고 롯의 처와 두 딸과 약혼한 사위만 합쳐도 여섯 명인데 조카만 염려해서 의인 한 명이라도 있다면 구원해달라고 간구할 수는 없습니다.

 

열 명까지 숫자를 낮춘 후에 그는 여호와여 노하지 마옵소서라고 전제했습니다. 처음에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셔야만 한다고(25절) 따지듯이 요구한 모습과는 사뭇 달라졌습니다. 계속해서 요구를 바꾼 잘못을 너그러이 이해해달라는 뜻도 있지만 겨우 열 명의 의인으로 심판을 중지해달라는 것이 너무 염치가 없는 부끄러운 요청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아무 조건 달지 않고 용서해주겠다고 바로 대답했습니다.

 

바꿔 말해 아브라함이 롯만 의인이라고 여기고 한 명이라도 있다면 멸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어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기도는 결국 하나님의 무한하고 풍성한 긍휼에 비해서 인간은 도무지 그 은혜를 받을 자격이 안 된다는 진리를 드러낸 것입니다. 기독교의 기도가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로 끝내야 하는 첫째 이유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의 끈질긴 기도로 롯이라도 구원 받았다는 해석이 옳으려면 그가 기도한 내용대로 롯은 의인이어야만 합니다. 지금 알아보고 있는 기도와는 무관한 문제이므로 자세히 따져볼 여유는 없고 성경이 롯에 관해 어떻게 말하는지만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베드로 사도는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벧후2:7)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문맥상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어쨌든 구원했다는 단어 대신에 건지셨다고 말합니다. 건진다는 헬라 원어 ‘흐뤼오마이’는 영어로 ‘delivered’라고 번역되었듯이 단순히 ‘끌어내다’, ‘구출하다’의 의미입니다.

 

창세기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창19:29)고 마찬가지로 구원과 무관하게 내보냈다고 말합니다. ‘내보내다’라는 히브리 원어는 흥미롭게도 소돔을 엎었다는 동사와 같은 의미인데 영어로도 overthrow라는 같은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성안에서 평안했던 롯의 인생을 밖으로 내몰아서 완전히 뒤엎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그는 나중에 산속 깊이 피신해서 생을 마쳤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아브라함이 기도한 것과는 무관하게 의인 열 명이 없어서 심판받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롯을 살려준 이유를 단순하게 “아브라함을 생각하사”라고만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롯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은 그가 조카와 그 가정을 심히 안타까이 여기는 심정을 아시고 그들의 목숨만 건져주신 것입니다.

 

출발부터 차원이 다른 기도

 

이를 두고 하나님은 신자의 마음의 소원까지 다 들어주신다고 간단히 이해하고 치울 문제가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이 응답되지도 않은 기도를 가장 먼저 기도의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신자들로부터 반드시 받고 싶고 받아야만 하는 기도가 지금껏 대부분의 신자들이 갖고 있는 개념과는 차원이 완전히 다르다는 뜻입니다.

 

우선 기도 제목부터 비록 믿음이 많이 성숙되었어도 아브라함이 평소에 전혀 생각지도 못했고 깨달을 수도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가 소돔과 고모라가 지극히 타락했다는 소문을 들었을지라도 하나님이 유황불로 진멸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상수리나무 수풀에 계속 거하고 있었는데(창18:1) 우상의 중심지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기에도 정신없어서 기도도 당장 당면한 문제에 집중했을 것입니다.

본문의 기도는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평생을 두고 아브라함 스스로 기도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닙니다. 바꿔 말해 기도할 내용을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스스로 소망하고 계획하거나 지금 겪고 있는 괴로운 일만 주로 기도하는 우리와는 그 출발부터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17절)하면서 당신의 계획을 직통으로 계시해주었고 아브라함도 그에 맞추어서 기도했습니다. 물론 신구약성경이 완비된 신약시대에는 직통 계시가 아주 드물기에 아무리 성령님이 내주하셔도 하나님의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계획을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시키신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받은 소명의 실현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하나님이 시키신 기도인 셈입니다. 때로는 평소에 전혀 생각지도 않던 일이나 사람을 위해서 불현 듯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 성령이 시키는 기도입니다. 그만큼 기도에 능숙하지 못한 자라면 최소한 성경의 진리에 비추어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하도록 노력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돔의 심판계획은 이미 확정되었고 인간이 개입하여 간섭하거나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세우신 믿음의 종이라도 계획의 변경이나 취소를 요구할 수는 없고 기도해도 바뀔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스스로 소돔을 심판해야 할 이유를 무엇이라고 밝혔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20절)라고 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성의 죄악상에 대한 부르짖음을 듣고서야 심판 계획을 세웠을 리는 없고 소돔의 타락상을 소상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이 땅의 죄인들과 그 타락상을 애끓는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부르짖음의 원어가 핍박을 받아서 나오는 고통의 소리라는 뜻입니다. 만약 소돔과 고모라의 성읍 주민들이 자기들 왕이나 동족에게 핍박받아서 하나님께 아우성쳤다면 그들부터 의인이 되므로 본문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따르면 그들로 인해서 멸망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의인 열 명도 없어서 심판했으니까 롯을 포함해 아무도 아우성을 지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롯이 소돔 백성의 죄악에 참여까지는 모르지만 수수방관한 것은 확실합니다. 만약 롯이 정말로 의인이었고 또 그래서 소돔 성에서 그 죄악상을 붙들고 여호와께 기도했다면 천사들이 아브라함에게 먼저 찾아올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소돔이 아니라 다른 지역의 주민들이 그들로부터 핍박을 받고서 고통의 신음 소리를 낸 것입니다. 똑같이 우상숭배를 하는 가나안 족속들 중에서도 유독 그들만 심판 받았다면 음란하게 타락한 위에 가장 폭력적이고 잔인한 족속이었던 것입니다. 죄악은 항상 사람을 파괴하여 죽음으로 내모는 성향이 있기에 가만두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됩니다. 가나안 족속들 모두가 소돔처럼 되기 전에 중심환부를 하나님이 도려내려는 것입니다.

 

이미 확정된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있는 방도는 인간 신자에겐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조카 롯의 생사가 걸려있기에 아브라함은 손을 놓고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그분의 긍휼에 간절히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아무리 소돔이 죄로 타락했어도 억울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게 해달라고 매달린 것입니다.

 

소돔 왕은 가나안 연합전쟁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둔 아브라함에게 자기 백성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먼저 영악하게 선심 공세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성령님이 주신 지혜로 전후 사정을 잘 분별하고서 그들과 한통속이 되기 싫어서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만약 그 때 소돔 왕의 제안대로 재물을 다 차지했더라면 지금 하나님께 이런 담대한 간청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자가 가장 먼저 그리고 항상 지켜야 할 것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그분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어야 그분께 무엇이든 담대하게 간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을 미리부터 이런 기도를 할 수 있게끔 인도하신 성령님의 은혜가 너무나 놀랍고 대단하지 않습니까?

 

응답되지 않은 기도를 하게 하신 이유

 

아브라함이 이렇게 간절히 기도했건만 롯은 소돔에서 맨몸만 구출 받아 빈털터리가 되었는데도 삼촌을 찾아오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심판을 직접 목격한 그로선 아마도 소돔에서 지은 죄가 많았던지 너무 두려운 나머지 두 딸과 함께 산속으로 피신해버렸습니다. 두 딸이 자식을 갖고 싶어도 남자가 없어서 아비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에 근친상간의 죄를 범했습니다. 롯의 자의는 아니었지만 그 결과로 하나님이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계속해서 괴롭히는 원수 대적이 된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될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한마디로 롯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면제될 수 있는 의인이 결코 아니었던 것입니다. 단지 그가 소돔 성 사람들이 천사들에게 동성애를 시도하려는 사악한 움직임을 막으려고 노력한 점을 가상히 여기고 그에게 도피 방안을 미리 알려주어 생명이라도 건지도록 해준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기도하지 않았어도 모든 사태는 똑같이 진행되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여호와는 소돔의 심판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미리 알려줌으로써 응답도 되지 않을 기도를 하게 했습니다. 그럼 아브라함에게 헛수고만 실컷 시키며 죄송하지만 갖고 놀았던 것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이 절대로 그럴 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롯을 위해선 당연히 그래야하지만 자신과 아무 관계없는 소돔을 위해서도 기도하게 하려는 것이며 아브라함도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정확히 말해 아브라함이 그 동안에 소돔의 타락상은 물론 조카 롯의 영적상태에 대해서 기도도 하지 않고 무관심했었던 잘못을 깨우쳐주려는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웠기에 지금 그에 합당한 기도의 조상도 되게끔 교육 훈련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열방 앞에 복의 근원으로 서야하는 종이라면 평소에 반드시 해야 하는 기도가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려는 뜻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나중에 율법에 문자적으로 규정될 고엘 제도의 조상으로도 세우려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가장 가깝고 유일한 혈육입니다. 롯의 손해나 고난을 대신해서 최소한 함께 짊어져야 할 책임이 있는 자입니다. 고엘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뜻이 단순히 현실적 손해만 책임져 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믿음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전해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믿음이 룻에게 영향을 미쳤고 나중에는 고엘인 보아스를 통해서 더욱 아름답게 성숙되었듯이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초지와 우물이 부족해 조카 일행과 헤어지고난 후에는 롯의 삶과 특별히 믿음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고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수시로 롯을 찾아가 소돔에서 빠져 나오라고 권했을 가능성도 거의 없습니다. 소돔 왕은 아브라함이 아주 강직하고 군대가 많음을 익히 알고 있었고 아브라함도 소돔 왕이 롯이 자기 조카라는 것을 안다면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로선 소돔의 실상에 대해 굳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고 그러니 롯도 잘 지내겠거니 여기고 치웠을 것입니다.

 

그가 의인의 숫자를 처음에는 호기롭게 50명이라고 했다가 45명, 40명, 30명, 20명으로 낮추다가 마지막에는 10명까지 내려간 것은 소돔 사정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는 반증입니다. 하나님이 의인이 50명만 있어도 너무 쉽게 용서해주신다고 하니까 잘못 추측했나보다 짐작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조심스레 45명으로 줄여도 여전히 곧바로 용서해준다니까 점점 자신이 없어진 것입니다. 수시로 롯을 찾아가 소돔의 실상을 파악했다면 처음부터 열 명으로 제안했다가 점차 한두 명으로 줄여나갔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계획을 미리 알려준 뜻을 실감나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네가 믿음의 조상으로 열방 앞에 복의 근원으로 세워졌는데 가나안 땅에서 가장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를 조금이라도 안타까이 여긴 적이 있는가? 그들을 위해서 한 번이라도 기도한 적이 있는가? 네 조카 롯을 위해서 삼촌 즉, 고엘로서 책임을 다했는가? 그에게 내가 너와 맺은 언약에 대해 가르치고 믿음을 키워주려고 시도해본 적이 있는가? 애굽에서 있었던 일은 물론 소돔과의 연합 전쟁에서 체험한 은혜를 간증이라도 했는가? 아무리 네 일행들을 먹여 살리기에 바빠도 최소한 조카를 위해서 기도는 해주었어야 하지 않는가?”

 

엎드려 절 받기라는 속담처럼 하나님이 먼저 그를 찾아와서 기도제목부터 주고 매우 뒤늦은 감이 있지만 기도할 마음이 생기게 하고 여러 번 끈질기게 기도하게 만든 것입니다. 만약 이런 절차도 없이 소돔으로 바로 찾아가 심판했다면 비록 똑같은 결과가 되었다 할지라도 아브라함이 어떤 처지에 빠지게 됩니까? 조카가 아내도 잃고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어서 두 딸과 함께 유랑하게 될 때까지 삼촌으로서 전혀 몰랐고 나아가 도움을 준 일이 전혀 없으며, 기도마저 하지 않았다는 후회가 평생토록 그를 괴롭혔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이렇게라도 기도하게 해서 그에게 평생 따라다닐 롯에 대한 자책감과 죄책감을 없애 주려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종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는 이처럼 세밀한 배려와 풍성한 은혜가 반드시 따라옵니다. 애굽에서도 아내 사래의 정결을 보존하며 더 선하게 해결해주심으로써 지금보다 더 심했을 죄책감을 없애주셨듯이 말입니다.

 

기도의 교과서가 정말로 가르치려는 것은?

 

하나님이 훈련시키는 기도인지라 지금껏 다섯 번에 걸쳐 살펴본 기도의 핵심이 다 적용되어졌습니다. 우선 하나님을 만난 자로서 개인적으로 그분과 친밀한 관계에서 기도했고, 그분의 계획을 붙들고 그분의 뜻에 맞게 기도했습니다. 비록 한 자리에서 이뤄진 기도지만 여섯 번이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그 내용을 수정해 나갔습니다. 그러는 중에 자신의 죄도 회개했을 것이며 앞으로도 주변 사람을 더 섬기고 또 그들을 위해서 더 기도해주어야겠다는 결단도 했을 것입니다.

 

나아가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께 완전히 맡겼습니다.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32절)는 하나님의 뜻만 확인하고 기도를 마쳤습니다. 롯과 가족까지 합쳐서 과연 의인이 열 명이 될지 모르지만 기도의 결과는 그의 손에서 완전히 떠났습니다. 그 응답이 심판으로 끝나고 롯 가족이 포함되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보면 지금껏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들어와 단을 쌓을 때마다 드렸던 모든 기도를 다시 복습하게 하고 마지막에 종합적으로 정리해서 가르쳐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도 제목을 주셨고 하나님이 기도를 시켰고 나아가 여러 번 수정하며 기도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그의 기도의 내용과 자세는 다시 또 크게 업그레이드되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롯과 헤어질 때부터 하나님이 어느 땅이든 다 준다고 하셨는데도 적극적으로 우상의 도성을 택해서 지금까지 살고 있었듯이 앞으로도 기도한 대로 반드시 실천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르치신 이 기도의 교과서에서 오늘날의 신자들이 가장 먼저 배워야 할 사항이 무엇이겠습니까?

한마디로 아브라함 개인을 위한 기도가 하나도 없으며 오직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사악한 도성 소돔과 고모라의 구원을 위해서 말입니다. 아브라함도 만약 롯이 없었다면 요나처럼 화를 내고 도망갔을지 모르는 그런 기도제목이었습니다. 자신의 계획이나 소망을 크게 잡아서 끈질기게 기도만 하면 또는 사업실패나 중병이 걸려도 천일 새벽 제단을 쌓는 등 최고 열정적인 믿음을 보이면 응답 받을 수 있다는 오늘날의 크게 번창하는 가르침과 연결될만한 고리는 하나도 없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그렇게 기도하게 시켰고 아브라함도 열심히 끈질기게 여러 번 기도했는데도 정작 그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의 방식으로 모든 것을 합력해서 긍정적인 결말을 맺게 해준 것도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들은 진멸되었고 롯과 그 가족은 너무나 부끄러운 처지로 떨어졌습니다. 언뜻 보면 오직 하나님의 권능만 높아졌고 아브라함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 같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은 이미 설명 드린 대로 분명하고 간단했습니다. 아브라함더러 그 동안 그런 기도를 하지 않은 잘못을 꾸짖고 정작 기도해야 할 내용을 가르쳐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평소에 그렇게 꾸준히 기도했다면 소돔의 멸망은 몰라도 롯의 믿음과 삶이 바뀌고 최소한 그 말년의 인생이 그런 처참한 실패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신자로 부름 받은 뜻은?

 

신자는 열방 앞에 복의 근원으로 불려 나왔는데 쉽게 말해서 남을 위해서 기도해주는 자로 세워진 것입니다. 다른 이가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하나님이 그를 축복해주고 다른 이가 그를 저주하면 하나님이 그를 저주한다고 약속하였습니다.(창12:3) 아브라함에게 직접 복주고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복을 받고 저주 받는 것입니다.

 

그럼 당연히 아브라함부터 먼저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해서 여호와로부터 은혜를 받게 하든지 최소한 평소에 구제 선행을 베풀어야 그를 축복할 것입니다. 너무나 분명하고도 간단한 이치입니다. 아브라함더러 처음에 우르에서 불려 나올 때에 맺은 언약대로 살아가려면 본문 같은 기도를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 당장 이런 기도를 능숙하게 할 수 있다거나 항상 이런 기도만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살펴본 대로 기도의 내용과 자세가 점점 변화 성숙되어졌습니다. 본문에서도 당장 조카의 생사가 달린 문제라 엉겁결에 그런 기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기도를 최초로 자세히 기록하게 한 이유만은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이런 기도를 계속하지 않고 있다면 복의 근원으로 불려 나온바 소명에 충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명대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시키신 기도를 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소명에 충실하지 못하면 하나님 뜻이 아닌 자기 뜻만 기도하고 있는 셈입니다.

 

모세와 바울의 기도가 어떤 자리에까지 갔습니까?

자기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서 지워져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다른 이를 살려달라고 엎드렸지 않습니까? 모세는 금송아지 우상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 앞에서 먹고 마시며 음란하게 섬기는 용서 받지 못할 죄를 범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질 심판을 거두어 달라고, 바울은 완악하게 예수님의 그리스도 됨을 부인하며 오히려 신자를 핍박하여 마찬가지로 용서 받을 수 없는 성령 훼방 죄를 범한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지금 아브라함도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긴 해도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고 또 용서 받지 못할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지금 굉장히 심각한 내용을 말씀드리는 중입니다. 현재 세상이 너무나 타락해서 종말과 방불한 까닭이 악독한 니느웨 같은 세상의 잘못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어차피 스스로는 자기들이 무엇을 잘못하는지 모릅니다. 세상이 악독해지는 것은 신자가 소금과 빛이 안 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 전에 기도부터 하나님이 시키는 기도를 거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신분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하실 일을 알려주면서 그 거룩한 역사에 동역자로 초대해주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를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려고 택했는데 지금 그 일을 이루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19절)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그 일은 당신의 동역자로 불렀으니까 소돔의 심판 계획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며 또 그 통보를 받은 아브라함이 정말로 자신의 신분을 정확히 알고 있다면 이런 기도를 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신자가 진정으로 하나님 뜻에 맞는 기도를 하면 세상을 거룩하게 바꾸는 일은 당신께서 반드시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정말로 진지하게 되돌아보길 원합니다.

사악한 도성이 회개하게 되기를 간절한 마음을 품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혹시라도 요나처럼 왜 그런 극악무도한 니느웨 사람들을 구원하려 하느냐고 하나님께 대들고 도망만 다니는 것은 아닙니까?

불쌍한 이웃을 위한 기도라도 중점적으로 하고 있습니까?

최소한 남들이 찾아와 이런저런 기도를 해달라는 부탁이라도 자주 받습니까? 내 코가 석자라 이런 기도를 할 관심도 여유도 시간도 없습니까?

 

물론 지금의 세태를 보면 누구나 너무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신자가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고 그 도달해야할 모습이 어떠한지 정확히 알고서 실천하려고 노력은 해야 할 것입니다.

 

박진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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